깊은 고백

[스크랩] 하나님 체험과 영성수련 요약 (유해룡 저)

이아기 2007. 1. 30. 01:19
 

하나님 체험과 영성수련 (유해룡 교수 저)


제 1장  영성이란 무엇인가?


1)영성의 일반적 정의


  영성적인 삶이 추구하는 바는 역동성과 생명성이다. 창세기 2:7에 :야웨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생령이 된지라”고 했다. 여기서 생기의 원어는 ‘살아 있는 숨’이고 생령은 영혼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영성이란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의 삶의 양태이다.


2)‘영성’이라는 용어의 변천사


5세기까지는 보편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자연적인 영혼이 하나님의 영으로 변화를 격을 때 비로소 영적인 모습으로 회복된다.

이런 용법으로 “영적이다”라는 말이 12세기가지 일정하게 사용되었다.

12세기에 들어서 스콜라주의가 신학에 깊이 개입하면서 ‘영과 물질’이 날카로운 대립관계로 자리잡게 되었다. 비이성적인 피조물에 대해서는 ‘물질적’이라고 했고, 반면에 이성적인(지성적인) 피조물에 대해서는 ‘영적’이라는 말을 적용시켰다.

17세기에 이르러 프랑스에서 영성이라는 말이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는 볼테르가 마담 귀용, 페넬롱 등의 ‘신비주의’를 맹렬히 공격하는 의미로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17-18세기에는 이러한 오해를 피하면서 영적인 삶을 표현하는 다양한 표현들이 나왔다.

살레의 ‘프란시스’나 성공회 신비가 윌리엄 로우는 ‘헌신’을

웨슬레와 초대감리교주의자들은 ‘완덕’을

복음주의자들은 "경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18세기 초에는 로마 카톨릭에서는 ‘영성’이라는 말이 신앙과 신학적인 용어에서 사라진 것은 종교적인 열광주의나 정적주의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19세기에는 ‘영성’이라는 말은 제도권 교회에서보다 자유로운 신앙그룹에서 사용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 프랑스의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영성’이라는 말이 나타났다.

이것이 프랑스 저서들의 번역물을 통하여 영어권에 전해졌다.

금세기에 들어서 영성이란 말은 일상적인 생활과 신비한 신앙생활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즐거이 사용되었다.

점차적으로 넓은 의미로 ‘영성’이라는 말이 사용되자 교리적인 측면의 신학과 경험적이고 종교적인 의식을 강조하는 내면적이면서 동시에 영적인 삶을 구분하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1920년의 <수덕과 신비에 대한 잡지>와 1932년부터 계속 발간되어온 <영성사전>이라는 대작이 ‘영성’이라는 말의 독특한 지위를 세워주었다.

일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방식(수덕적인 삶)과 비상한 삶(신비적인 삶) 사이에 연속성과 비연속성에 대한 이해가 서로 상충되고 있다.

텐쿼리는 수덕적인 차원의 일상적인 삶과 관상경험을 통해서 얻은 신비적인 삶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후자의 삶은 누구에게나 열려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비신학에 관한한 특별한 경험과 비상한 현상을 연구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텐쿼리는 “영성신학이란 수덕신학과 신비신학 이상의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3)영성신학의 변증법적인 발전과정


독서보다 기도를 더 많이 하는 사람들을 수도사라고 하고

기도보다 독서를 많이 하는 사람들을 스콜라 신학자라고 한다.

수도원 신학은 성경에 기초를 둔 근본적인 영성이다.


<안셀름의 기도문>

나에게 당신을 찾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그리고 내가 당신을 찾을 때 당신을 나에게 드러내 주소서.

왜냐하면 당신이 나를 가르치지 않으면 당신을 찾을 수도 없고

당신 자신이 나에게 드러내 주시지 않으면 당신을 만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나로 하여금 사랑 속에서 당신을 찾게 하시고

당신을 찾을 때 당신을 사랑하도록 하소서.

나는 믿기 위해 이해를 추구하지 않고, 알기 위해 믿습니다.


스콜라 시대 때 파리대학의 총장이면서 영성가였던 제르송(1363-1429)은 그의 저서 <신비신학>에 대하여 라는 책에서 스콜라 신학과 신비신학에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방법의 차이점을 비교하면서 신비신학이 우선해야 된다고 했다.

구분          신학

스콜라신학

신비(영성)신학

정보 자료

외적인 효과

내적인 효과(신의 임재 경험)

접근 통로

이성을 의지, 감성 불신

감성을 의지한다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이성

사랑

대학교육

꼭 필요하다

필요하지 않다

영성과 신학이 날카롭게 대립할 때 양쪽을 조화시킴으로서 영성신학의 전통과 스콜라신학의  방법론을 유지했던 사람이 프란시스 수도자인 보나벤투라(1217-1274)이다. 그가 지은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여행>이란 책에서 영성신학의 한 방법론을 본다. 그는 스콜라신학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사변신학보다 경험신학을 중시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관상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경험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영성을 무시한 신학적인 작업은 학문적인 환상에 불과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어거스틴이나 안셀름 같은 위대한 신학자들이 하나님에 ‘관해서’ 말하기보다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말한다는 의미로 신학을 전개해 갔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것만이 참 경건에 이르는 신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제2장 영성수련의 역사적 의미와 신학적 고찰


1) 영성수련의 역사적 성찰


중세의 분위기에서 영향을 받은 한 영성가는 “영성수련이란 양심을 살피는 방법이나 묵상, 관상, 구송기도, 정신적 기도 등의 방식 및 기타 여러 영성적 행사들을 의미한다. 마치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 산책과 걷기, 뛰기 운동을 하는 것처럼 영성면에서도 부적합한 애착을 제거하고 날카로운 양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발견하기 위한 방법들을 영성수련이라고 한다.

 

2) 영성형성으로서의 영성수련


영성훈련은 기능적인 훈련이라기보다 존재적인 훈련이다.

미국의 아이버슨은 ‘1파운드의 고기는 4분의 1파운드의 소금으로 절일 수 있다.’면서 오늘날의 기독교가 참된 세상의 소금이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효과는 어디 있는가? 라고 물었다. 이 말의 의미는 기능적으로 배우는 것이 부족해서가 아니고 근본적인 내적인 변화의 겹핍을 꼬집는 말이다.


정신 의학자 스코트 펙은 <다니지 않는 길>이란 책에서 지적하기를 “내가 알기로는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발전에 대한 비전은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실현시킬 의지를 결여하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훈련 없이 성도가 되는 지름길을 발견하기를 원하며,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종종 그것을 얻기 위해 단순히 성인들의 외면적인 삶을 모방하여 광야로 들어가거나 목수가 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모방만으로 자신이 실제로 성인이나 선지자가 되었다고 착각을 하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이 아직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며, 자신이 처음부터 시작하여 여러 과정을 거처야 한다는 새로운 사실을 직시하지 못한다.”고 했다.


3) 영성수련의 신학적 고찰


개혁자가 발견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와 능동적인 영성생활과의 문제이다.

키에르케고르는 개혁신학의 오해의 측면을 비판하기를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가능한 한 고생을 하지 않고서 기독교인답게 보이기를 원하는 세속성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 그러한 세속성은 루터를 주목하여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며 훌륭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해 냈다. 모든 것은 오직 신앙으로 말미암아 임한다!

이 얼마나 멋있는 일인가!

‘우리는 모든 행위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루터 만세!’

이것이 기독교를 개혁한 하나님의 사람 루터의 삶의 의미이다.” 라고 했다.

이런 표현은 본헤퍼의 “값싼 은혜”와 같은 의미이다.

이와 같이 영성수련은 개혁교회 신앙생활에서 도외시 당했다.

‘영성’이란 말만 들으면 금욕주의적인 중세 수도원적 영성을 연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인상을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비판적인 통찰력이 없이 수용함으로서 ‘영성’이라는 말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영성수련의 방법들은 단순히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일하실 수 있도록 우리 영혼을 개방시켜 주는 매개체들에 불과하다.


 

4) 영적경험의 역사적 모델

 

모델

구성

본받음의 모델

순례자의 모델

상승(사다리) 모델

인물

프란시스

토마스 아 켐피스

어거스틴

번연

디오니시우스

보나벤투라.

그리스도를 본받아

(명상)

고백록

신의 도성

천로역정

신의 이름들, 신비신학

천상의 계층, 교회의 계층

하나님에로의 영혼의 여정.

의미

예수님의 성육신 하여

보여주신 삶을 본받아

살므로 하나님의 잃어

버린 형상을 복구해야

한다.

우리는 신의 도성에

이르기까지는

나그네의 삶이다

수도원적인 분위기에서 발달했다.

하나님과의 일치 혹은 상승을 위

하여 정화, 조명, 완성의 단계를

제시하였으며 감각적인 세계로부

터 출발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

견하도록 인도한다.

 


5) 버나드의 영성생활의 삼 단계

 

모델

구성

동물적 상태의 영성수련

이성적 상태의 영성수련

영적 상태의 영성수련

목표

정화

조명

일치

현상

육체는 감각이라는 창문을

통해서 지식을 얻고 반응

한다.

그러므로 육체는 본성적으

로 죄와 결합되어 있는 것

은 아니지만 죄가 들어올

수 있는 관문이며

죄의 세력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롬7:5)

기억에 의하여 회상하고

이성에 의하여 분별하며

의지에 의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귀의한다

영은 사람의 마음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류를 이룰 수 있는

핵심적인 자리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류가

가능하려면 하나님과 하나님

에게 속한 것들이

‘사고의 대상’으로부터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면 하나님의 의지와의

합일을 맛보게 된다.

수련

단계

감각적인 기능의 정화에

힘써야 한다.

보다 가치 있는 것을 생각

하면서

신중하고

인내하며

절제하고

순종하기를 힘쓰면서

선한 의지로

육체의 욕구를 지배해야

한다.

기억, 이해, 의지를

정화시켜야 한다고 했다.

우리의 이성이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향하도록 창조된

것을 기억함으로서

기억과 이해를 새롭게 하고

하나님을 앙망하며

위엣 것(고상한 것)에

대하여 집중시킴으로서

의지를 길들인다.

그리고 육체와 마음의

순수를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인 자아 성찰을

함으로서 선한 양심을

개발해야 한다.

명상= 지속적인 자아성찰과 

       예수님의 수난과 구원 

       을 묵상함으로서 

       마음과 기억을 정화시킴 

       으로써 주님과 동행한다. 

독서= 독서의 과정을 통하여 

       마음을 예수님께 

       순종시키고 

       이해된 것으로 

       예수님께 사로잡히게  

       한다. 

기도= 마음을 소생케 하는 

       법을 배우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자신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제물이 되게 하는 것이다 

 


 

6) 이냐시오식 영성수련법

 

 

반추적 명상

관상기도

반복기도

특징

내면적인 감성을

명상한다.

성경의 사건은 상상력을

통해서 관상한다.

영혼의 상태가 나태할 때

과거를 회상하면서

설명

기억력과 이해력 그리고

의지력을 사용하여

명상할 대상을 추리하고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알려

주고자 하는 것들을

경험하는 것이다.

기억력과 이해력은

사건을 보다

명료화할 수 있고

의지력은

그 사건과 관련하여

보다 깊은

감정을 일으키게 한다.

위의 명상법을 따르면서

상상력을 사용하는 것

관상의 특징이다.

관상은 이미 일어났던

객관적인 복음적

메시지를 명상할 때

내가 그 인물이 되어

접근함으로

개인에게는 주관적인 경험

으로 변환케 해준다.

경험했던

이전의 기도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참고

사건이나 말씀을

기억하고 이해하여

내 삶의 명령으로

적용시키는 것

이미 일어났던

객관적인 사건에

주관적으로 편입해서

경험해 보는 것.

이전에 주어진 경험을

좀더 분명히 하고

성령님께서 부여한 의미를

보다 깊이 인식하려는데

뜻이 있다.

 

예민한 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고 발견하기 위한 수련을 말한다.



7) 구조와 방법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