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고백

[스크랩] 방언 통역

이아기 2009. 7. 8. 01:17

 방언 통역

 

 

방언기도는 영적 세계의 문을 여는 주요한 도구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드믄 것 같습니다. 방언은 영의 언어라는 사실은 다 잘 알고 있지만 그 언어가 독백이 아니라 실체와의 대화라는 의식을 가지고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는 영의 호흡이며,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교회에서 배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가 실제적으로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려면 많은 노력과 요령이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성도의 기도는 일방적인 통고형(通告形) 기도에만 머무는 까닭은 기도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없고, 영으로 통하는 기도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는 목회자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이론적인 것은 배웠지만 실제적인 훈련은 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기도에 관한 한 주먹구구식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수많은 영적 주체들과 접속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이런 부분에 관한 지식이 거의 없습니다.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예수님이 직접 본을 보이신 것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바리세인들의 기도와 차별화하면서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실제로 감란산에 자주 올라서 함께 기도하면서 기도에 대한 전형을 가르쳤고 경험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변화산의 기도에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두 사람이 영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영적 존재와의 만남을 경험한 제자들은 너무도 감격해서 더 이상 좋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환상과 실제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영적 환영(trance)에 취했습니다.

주님은 기도를 통해서 영적 존재와의 만남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경험하게 한 것입니다. 이런 경험은 훗날 요한 사도가 밧모섬에서 주의 날에 놀라운 경험으로 이어집니다.

 

주의 제자들은 역사적인 순간에 천사의 방문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것이 초대 교회의 더할 나위 없는 놀라운 부흥의 원동력을 제공해 주었던 것입니다. 부흥이 있는 곳마다 놀라운 영적 경험이 있었던 사실은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영적 경험은 부흥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라고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 영적 경험 속에는 천사의 방문과 같은 신비체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천사의 방문을 비롯해서 예수의 영에 사로잡히는 경험은 수많은 시련과 역경을 이기게 하는 힘이 됩니다. 바울이 로마로의 항해를 할 때 ‘유라굴로’(Euroclydon)라는 태풍을 만나 배가 침몰 직전에 있을 때 경험한 예수의 영의 환영은 그로 하여금 담대하게 시련을 극복하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배에 함께 실려 있던 수많은 죄수들의 목숨마저 구하게 했습니다(행 27: 14).

초대교회는 예수의 승천 이후 갈피를 잡지 못하는 혼란 속에서 천사의 출현과 그에 따라서 고무된 제자들의 선교 열정이 만들어낸 결과였습니다. 제자들의 잦은 영적 접촉이 없었다면 교회의 부흥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의 부흥의 원형 속에는 영적 접촉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의 회심으로 인해서 야기된 이방인의 초대(招待) 역시 영적 경험으로 인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이런 극적인 상황을 가능하게 하는 영적 접촉은 일상에서는 쉽게 접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특별한 계기가 있을 때 특별한 사람들이 경험하는 예외적인 측면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우리가 특별하다고 취급하는 이런 예외적인 현상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엘리야에게 일어난 독특한 일들이 우리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약 5:17). 엘리야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런 독특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엘리야의 열정이라고 본 것이며, 우리들도 그런 열정이 있다면 얼마든지 그런 일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부흥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는 ‘열정’‘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열정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가능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흥은 인간과 하나님의 합작의 결과물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 놀라운 부흥의 이면에는 영적 접촉이 있었습니다. 이 영적 접촉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가지 수단들이 있는데, 열정이라는 측면에서는 ‘강력한 기도’ ‘끈질긴 기도’가 있을 것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놀라운 영적 현상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교회는 끈질긴 기도에 매달려왔습니다. 그로 인해서 많은 응답을 경험했지만 역시 효율성의 측면에서 보면 매우 낮은 응답률을 보이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효과적인 기도가 되려면 기도의 효용성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보다 더 효과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 기능들이 개발되고 있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방언인 것입니다. 효율성이 있는 기도란 대화식 기도가 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알고 기도하는 것과 모르고 기도하는 것의 차이는 큽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모르고 기도하는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이런 기도를 ‘믿음의 기도’라고 부릅니다.

“주실 줄 믿고 기도하라”(약 5:15)는 원리에 따라서 간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 원칙에 따라서 기도해도 얻지 못할 때 우리는 그 기도의 배경에 정욕이 스며있었다고 단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수정해서 기도하곤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모르고 하는 기도의 전형(典刑)입니다. 대부분이 이런 기도에만 매달려왔습니다.

방언의 기도는 이런 기도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관상기도 역시 모르고 하는 기도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 역시 우리들 대부분은 낯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방언기도가 영의 기도이며 이 영의 기도는 영 이외에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모르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이 모르는 기도가 알 수 있는 기도가 되는 길이 있는데 바로 방언의 통역입니다.

방언이 은사와 권능의 두 가지 측면이 있듯이 방언 통역 역시 두 가지 면이 있습니다. 은사로서의 방언 통역은 특별히 한정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아주 독특한 능력입니다. 이 은사를 받으면 모든 방언을 통역할 수 있는 영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성도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기도로서의 방언과 그 통역은 쉽게 그리고 보편적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영의 기도는 우리의 영 이외에는 아는 자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영은 우리의 의식에 그 아는 바를 전합니다. 이 과정이 신호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신호를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언어적인 표현으로 환치되게 하려면 경험과 지식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미 설명했습니다.

쉬운 예로 꿈과 환상이 그것인데, 다양한 이미저리(imagery)로 구성된 꿈을 해석하여 그 의미를 알려면 상징에 대한 폭넓은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방언 통역 역시 이미지와 느낌으로 우리들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방언은 예언적 기능이 있다는 점을 여러분은 알 것입니다. 이 예언은 상징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해석하는 능력이 따로 있어야 하듯이 방언 통역 역시 예언적 기능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예언의 기능을 이해할 수 있다면 능히 통역이 가능해집니다

 

방언 기도는 실제로 영의 접촉에서 일어나는 대화이기 때문에 통역이 가능해질 때 영적 주체와의 대면을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흔히 속된 표현으로 ‘영안이 열린다’는 말로 설명하는 영적 실체와의 접촉을 인식하게 되는 것 역시 넓은 의미로의 방언 통역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영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방언을 통역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고 개발되면 그 영과의 대화를 인식할 수 있게 되며, 이것은 넓은 의미의 듣는 기도의 한 수단인데, 이 과정에서 영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환상은 이미저리에 의한 것과 영의 투과작용에 의한 것이 있는데, 이미저리란 우리 인식 속에 저장된 선지식(pre-knowledge)이 방언이라는 영의 작용에 자극되어 기억 소자(素子) 속에서 나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심리학자들은 ‘집합적 사고’(collective thinking)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인데, 프로이드와 같은 학자는 ‘무의식’이라고 설명하였던 것입니다. 이미 형성된 지식과 경험은 영이 사용하는 의사소통의 도구이므로 자신이 경험한 이미지에 대한 결과적인 의미들에 대해서 자세하게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방언은 영의 작용이며, 그 주요 수단이 되는 도구는 자신이 경험하여 만들어놓은 선지식이기 때문에 방언의 통역은 우선 내 생각 같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방언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영적 주체들과의 만남(encounter) 역시 내 생각과 느낌이라는 판단이 들게 마련입니다. 천사의 방문 역시 내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판단이 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처음 영적 접촉의 경험을 하는 사람은 이를 무시하거나 내 생각으로 만들어낸 환영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해버립니다.


방언 통역이 은사로서가 아니라 권능으로 행하게 되는 경우 대부분은 내 생각이라고 접어두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읽고 그것을 해석할 때 내 생각이라고 단정해버리면 아무런 의미도 유익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성령께서 일깨워주신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많은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이것은 말장난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는 지식을 얻게 되는 것을 여러분들은 자주 경험했을 것입니다.

설교자의 설교를 들을 때 우리 마음에 감동이 일어나는 것 역시 내 기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감동을 일으키는 것이듯이 방언 통역 역시 내 생각이 우러나는 것이 아니라 영의 생각이 나의 선지식을 동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쉽게 말해서 내 속에 있는 것으로 재료를 삼아야 자신이 가장 잘 분별하고 그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영의 언어는 내 안에 있는 영 이외에는 아는 자가 없습니다. 방언은 영이 영에게 하는 언어입니다. 그 언어는 뜻을 포함하고 있고, 그 뜻을 알고자 할 때 우리 영이 우리의 의식 세계에 신호로 전달하여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세상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져 있던 비밀을 알게 해 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읽으나 알 수 없는 지식들을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알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영의 작용을 통해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영의 신호로 영의 이야기가 우리들에게 전달되어 오는 것입니다.

이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으며, 오로지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특권을 부여받은 거듭난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영의 언어를 알 수 있는 자리에 있습니다. 다만 영의 신호를 제대로 파악하여 인식할 수 있는 언어로 다시금 재해석할 수 있어야 하는 능력을 갖출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방언 통역의 능력인 것입니다. 컴퓨터의 하드웨어가 0과 1로 조합된 신호를 읽어내어 우리가 볼 수 있는 문자나 영상으로 모니터에 띄울 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영이 다른 영으로부터 오는 신호를 선지식이라는 형태로 뇌에 저장된 이미저리를 이용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내용으로 바꾸어 우리 뇌의 기억중추인 해마(hippocampus)에 반영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때로는 이미지로 때로는 느낌으로 때로는 생각으로 반영되는 것입니다. 방언 통역은 외국어를 통역하듯이 그렇게 통역되는 것이 아니라 영의 신호로 들어온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영이 보내주는 다양한 신호를 놓치지 않고 해석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이것이 바로 방언을 통역하는 것이 됩니다. 방언은 예언을 포함하기 때문에 통역은 바로 예언이 됩니다.

천사의 영이 주님으로부터 소식을 전해올 때 그것은 계시가 됩니다. 바울이 고물에서 만난 천사의 도움으로 폭풍을 이겼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천사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전달됩니다. 이 천사는 영이므로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지만 영의 신호를 통해서 볼 수 있게 됩니다. 영의 작용이 환상이라는 신호로 우리들에게 전달될 때 우리는 자신 안에 있는 정보의 이미저리를 통해서 천사를 보는 것과 같은 형상 또는 음성 또는 느낌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천사는 분명히 존재하고 우리 곁에 다가와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만 그것을 우리 영은 인식하지만 우리 의식이 이 신호를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인식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홀로그램을 이용한 영화가 있었습니다. 입체영화라고 부르는 것인데 특수한 안경을 쓰고 그 영화를 보면 영상이 입체적으로 보여 영상이 삼차원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 특수한 안경을 쓰고 봄으로써 평면 영상을 홀로그램으로 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특수 안경이 있기 때문에 영상을 볼 수 있듯이 우리는 방언 통역이라는 특수한 기능을 통해서 영의 실존을 경험하게 되며, 이른바 ‘4차원 기도’라고 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이미 성경에 언급해 놓은 것입니다. 즉 ‘성령 안에서 기도’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며, 오랫동안 ‘듣는 기도’라는 말로 설명된 것이지만 오늘날 영적 지식이 급속도로 증대되면서 이 기도가 방언의 기도이며 통역의 기도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방언 통역은 듣는 기도는 물론 보는 기도를 가능하게 하는 주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통역하기 위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고전 14:13). 이는 방언통역이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과정을 통해서 배우고 익혀야 하는 기능이 있음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방언을 통역하고 싶어서 주님께 ‘방언을 통역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날마다 기도해도 방언 통역이 되지 않습니다. 이는 방언 통역의 능력을 주님이 주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 기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처음에는 내 안에 있는 것으로 이미저리를 형성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에는 내 생각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통역은 아주 색다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아주 평범한 내 생각이 우러나오는 것으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생각을 정리하고 쓴뿌리를 제거하는 일이 가장 소중하기 때문에 영의 쓴뿌리를 다루게 됩니다. 그래서 방언통역의 내용이 별로 신기하지도 않고 특별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며, 죄가 드러나게 되어 달갑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차츰 예언적 기능이 강화되며 흔하지는 않지만 간혹 계시적인 내용을 듣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다른 은사를 받아 사역을 행하고 있는 사역자라면 방언 통역은 독특한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평범한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무척 유익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다림줄의 수단으로 방언통역이 기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통역은 꿈과 환상과 같은 기능을 하며, 예언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중복될 수 있지요. 성도라면 누구나 방언을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자녀 된 권세를 받았기 때문이며, 그 방언을 통역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권세 안에 포함된 기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와는 분명하게 구분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은사로서의 방언이나 통역은 아무나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은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장봉운 목사-

출처 : 행복한 예수님의 사람들
글쓴이 : 문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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