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스크랩] 챨스 스펄전 설교의 감각적 호소에 관한 연구

이아기 2009. 10. 13. 01:19

챨스 스펄젼 설교의 감각적 호소에 관한 연구



목                  차


서     론  ------------------------------------------------ 1


  A. 연구 동기와 목적  ------------------------------------- 1

  B. 연구의 방법과 범위  ----------------------------------- 3


I. 설교의 신학  -------------------------------------------- 5

  1. 설교 신학의 본질  ------------------------------------- 5

  2. 설교와 회중 ------------------------------------------ 11


II. 스펄젼의 생애와 설교 신학  ------------------------------ 14

  1. 스펄젼의 삶  ----------------------------------------- 14

  2. 스펄젼의 설교관  ------------------------------------- 20

III. 스펄젼의 설교 방법론  ---------------------------------- 26

  1. 감각적 호소의 구성 요소  ------------------------------ 26

  2. 감각적 호소의 개관  ----------------------------------- 29

     1) 시각적인 호소  ------------------------------------- 29

     2) 청각적인 호소  ------------------------------------- 32

     3) 촉각적인 호소  ------------------------------------- 34

     4) 미각적인 호소  ------------------------------------- 35

     5) 후각적인 호소  ------------------------------------- 36


IV. 스펄젼 설교에 대한 평가  -------------------------------- 38

  1. 스펄젼 설교의 내용 분석 -------------------------------- 38

  2. 감각적 호소의 영향  ------------------------------------ 40

  3. 감각적 호소에 나타난 장,단점  ---------------------------- 42

  4. 감각적 호소를 통한 적용  -------------------------------- 44


결       론  ---------------------------------------------- 46


참 고 문 헌  ---------------------------------------------- 48









서       론


A. 연구동기와 목적

목회의 사역 중에서 매우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설교 사역일 것이다. 목회의 성패는 '설교'에 달려 있다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목회의 대부분이 설교에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숱한 전투를 매일 매일 치루어야 하는 설교자들은 갖추어야 할 전략과 전술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채 의욕과 사명만 앞서 두려움과 당황함으로 전쟁터에 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설교를 잘 한다는 것은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성경본문을 잘 해석할 수 있을지라도 그 내용을 회중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못하면 결국 설교는 실패하고 마는 셈이다. 흔히 내용이 좋은 설교이면서도 그 전달 방법의 빈약성 때문에 회중들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설교 내용이 약간 불충실할 경우라도 전달하는 사람이 효과 있게 전달하면 청중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예를 볼 수 있다.  많은 설교가 강단에서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행해지는 설교 횟수에 비례해서 그 설교들이 효과적으로 전달되어 회중들을 감동시키며 더 나아가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는가 하는데 있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롬1:16). 그러나 그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는 사람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할 수 있기도 하며 (히4:12), 때로는 진부한 연설에 불과할 수 있다.

우리는 설교를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라는 행위'라고 전통적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설교는 전달이 되어져야만 설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퍼카이저(W. T. Purkiser)는 "설교는 아직도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의 진리를 인간의 마음에 전달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라고 지적했다. 모든 설교자들이 바라는 대로 설교가 능력있고 감동적으로 행해져 회중들에게 잘 전달되어진다면 이 세상은 참으로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설교가 참으로 성경대로 바르고 능력있게 증거 될 때는 교회가 영적으로, 질적으로 성숙을 이룰 수 있지만, 비 성서적인 설교는 교회의 혼란과 여러 문제점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게 된다. 특히 한국교회의 강단을 생각해 볼 때 설교의 능력을 상실함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침체에 빠지게 되었고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최근에 설교사역을 돕는 매체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 목회자들을 위한 전문 설교집이 주간마다 발간되고 있는가 하면, 소프트웨어의 발달로 컴퓨터 앞에 있으면 수 만개의 설교를 접할 수 있다. 더욱이 통신의 획기적인 발달로 인해 인터넷에 접속하면 외국의 저명한 설교가들의 설교를 마음껏 도용할 수 있는 무한대의 설교 창고를 지니고 있다. 쏟아지는 설교의 홍수 속에서 진정으로 회중들의 가슴속에 파고드는 참 진리는 외면된 채, 회중들을 우롱하고 있으며, 편하고 수월한 방편만 찾는 것이 현대 설교자들의 실정은 아닌지 실로 염려가 된다. 교회 비평가 피에르 베르톤 (Pierre Berton)은 "오늘날의 설교는 너무나 영향력이 없고 무관하며 지루하고 잘못 전달되고 있다" 고 했으며, 틸리케 (Helmut Thielicke)는 "오늘날의 설교는 이제 임종의 단계에 왔을 정도로 쇠하고 붕괴되었다."고 하면서 오늘의 설교 상황을 "위기의 상황"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은 진실로 회중에게 생명의 메시지를 던져주어 그들로 하여금 변화를 촉구하는 진정한 설교 구연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설교의 목표를 오직 "하나님께 영광"에 두었고, 그 영광을 돌리는 방법으로써 설교의 최우선적인 목적을 "영혼의 구원"에 두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을 선포했던 19세기 중반 빅토리아 시대의 훌륭한 설교자가 있었다. 많은 설교가들도 있지만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인물이 있었는데 근대 이후 최대의 성서적 설교가로 이름난 챨스 스펄젼(C. H. Spurgeon)이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전 삶을 불꽃처럼 바쳤다. 헬무트 틸리케는 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영원한 말씀의 선포자로서 봉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이 일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이것이 생산적인 의미를 지니는 자랑이길 바라며, 대략 이와같이 호소하고 싶다 - 당신이 갖고 있는 것 (물론 지금 유행중인 설교학 문헌 포함) 모두를 팔아버리고, 헌 책방을 뒤지며 쏘다니지 않으면 안 된다 하더라도 스펄젼을 사라"

그의 설교 특히 앞으로 다루고자 할 "감각적 호소"는 설교학에 관한 한 큰 가치로 정평이 나 있으며, 현대 강단의 위기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논문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한 시대를 사용하신 사람 스펄젼(C. H. Spurgeon)의 삶과, 그의 설교 내용, 하나님이 사용하신 도구로서의 그의 설교 전달 방법 특히 "감각적 호소(Sense Appeal)"에 관해 구체적으로 연구하고 평가하는데 있다.


B. 연구의 방법과 범위


본 논문의 범위는 스펄젼 설교에서 나타난 "감각적 호소"에 중점을 두려고 한다. 설교를 구사해 내는 표현 방법(설교예술의 극치라 볼 수 있는 다양한 언어 묘사)의 특징적인 면을 부각시키고, 그의 설교에 나타난 감각적 호소를 분석함으로 그의 설교에 있어서의 특징적인 면을 고찰하려고 한다.

그러기에 앞서 I 부에서는 설교에 관한 기본적인 이해의 장을 마련했다. 왜 설교가 필요하며, 설교란 구체적으로 어떤 사역인가에 관해 사전적 의미와 몇몇 학자들의 소견을 듣는다. 또한 워런 위어스비(W. Wiersbe)가 권면하는 설교의 원리를 살피고, 전달매체로서 설교가 어떻게 회중을 효과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것도 살펴보고자 한다. 

II 부에서는 스펄젼의 생애와 설교 신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출생과 교육, 회심, 그리고 16세부터 설교사역자로서의 명성을 갖게되는 설교사역에 대한 전반적인 모습과 그의 설교관을 들어본다.

III 부에서는 이 논문이 핵심장이라 할 수 있다. 스펄젼 설교에 나타난 "감각적 호소"에 관한 연구 부분으로서, 감각적 호소의 구성요소와, 실질적으로 그의 설교에서 나타나는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 미각적, 후각적 호소에 관해 분석해 보고 거기에 대한 평가를 내려보고자 한다. 그 기본 재료로서 스펄젼 설교전집 중에서 몇 부분을 발췌하였다. 그의 감각적 호소에 관한 장점과 단점도 아울러 찾아보려고 한다. 그의 이런 탁월하고 추종을 불허하는 설교의 능력, 그리고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교는 철저히 하나님께 헌신된 자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드러내고 있는데 마지막으로 그의 설교의 영향과 어떻게 현대 설교에 적용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과제에 본 논문의 진행방향을 잡으려 한다.



Ⅰ. 설교의 신학


  1. 설교 신학의 본질


설교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 정의는 매우 중요하다. 기본적인 설교의 개념을 인지하는 데부터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 선포 사역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겠다. 한국교회의 성장 요인 중 설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작용했는데 거기에 적지 않은 문제도 도출되었다. 성서의 메시지와 관계없는 설교로서 본문의 상황과 관계없는 내용이 선포되는 비 성서적 설교라든지, 설교신학에 관한 구체적인 정립이 없이 하나님의 언어가 아닌 사람의 언어로 전하는 설교로서 부작용도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웨인 샤우는 "만일 설교를 위한 신학을 가지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회중들을 지탱해 줄 아무것도 갖고 있지 못한 것이 된다"고 경고했는지 모른다.  여기에는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설교의 개념정리가 분명해야 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설교는 기독교의 핵심이자 중요한 특징이 된다. 그러므로 복음의 진리가 선포되는 참된 설교만이 그것을 받아들여 믿는 심령들에게 구원을 얻게 할 수 있게 하는 것이기에 설교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복음 즉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을 설교라고 할 수 있는데, 성서로부터 기록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체화되고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설교자)을 통하여 계속하여 구속행위를 일으키기 위해 회중들에게 선포되어지는 것을 말한다.

  키텔 (G. Kittel)의 신약의 신학 사전에 보면 3가지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첫째 유앙겔리조(          )이다. 이는 승리의 좋은 소식을 전한다는 뜻이다. 둘째 케루소(       )이다. 이는 전도하다. 전파하다는 뜻이며, 셋째 카탕겔로(          )이다. 이는 알리다. 선포하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럼 좀더 구체적으로 몇몇 신학자들은 설교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알아본다.

리드 (Clyde Reid)교수는 "설교는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역사 속에서 행하신 바,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역사 하심과 복음 선포에 역점을 두고 있다.

티자드 (Leslie J. Tizard)는 "설교는 인간단독의 행위가 아니고 단순히 발언하고 있는 인간의 말도 아니며 단지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라며 설교의 본질을 강조하였다. 즉 설교의 주체는 하나님, 그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칼 바르트는 (Karl Barth) "설교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다. 그것은 교회에 명해져 있는 시도이며 그 때문에 소명 받은 자에 의한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에 대한 봉사로써 하나님 자신이 선하신 뜻을 따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인간을 선택하고 성서의 말씀을 방편으로 하여 인간들에게 증거하게 하신다."고 말했다.

블랙우드 (Andrew Blackwood)는 "설교라는 것은 인간에게 필요한 어떤 것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설정된 인물이 거룩한 진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패티슨(T. Harwood Pattison)도 "설교는 설득을 목적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구두로 전달하는 것이다." 라고 정의하면서 설득을 강조하였다.

포사이드 (P.T. Forsyth)는 "기독교의 성패는 설교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설교는 복음의 선포이기 때문이다. 설교한다는 것은 살아계셔서 구속활동을 하시는 하나님이 설교자를 통하여 인간과 생동적으로 만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구속활동을 재현하시는 역동적 사건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 말하였다.

존 스토트(John Stott)는 "하나님은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서 인간들과 만나실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설교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신다." 라고 말했다.

부룩스(Phillips Brooks)는 "설교란 사람들을 향한, 사람들에 의한 진리의 전달이며, 그것은 진리와 인격이란 중요한 요소를 담고 있다."라고 정의하며 이 두 가지 중 하나라도 없으면 설교가 아니라고 언급했다.

이렇게 볼 때 설교의 정의를 종합해 보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를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설교자가 바로 증거하고, 설명하며, 가르치고 선포하는 말씀 사역으로 인해 듣는 회중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구체적인 활동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설교의 목적은 무엇일까? 설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과 생명을 공급해주는 것인데, 그 생명은 영원한 생명과 오늘을 위한 풍성한 생명을 포함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다운 설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회중들에게 영생을 부여하고, 그들의 삶의 변화를 일으키고자 하는 명백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설교는 환상의 문제나 허구적 신비를 취급하는 공허한 신학적 논의가 아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설교는 성경이 그 원천이다. 따라서 그 성경을 설교를 통하여 올바로 증거하기 위해서는 성경 신학적 설교 접근이 필요하다. 회중이 성경의 사실과 교훈을 철저하고 체계적으로 이해함으로써 하나님과 그의 진리에 대한 예리한 분별력을 갖게 하는 것이 바로 설교의 신학적 목적인 것이다. 성경의 진리와 교리에 대한 회중들의 깨우침은 설교를 통하여 생겨나기 때문인 것이다.

설교는 특히 기독교의 교육과 전도와 선교의 전반적인 부분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특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있어서 설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서의 복음과 하나님을 경외케 하는 신학적 지식과 경건의 진리를 단계적으로 이해하게 하는 데에 그 최상의 목적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단순한 본질적 신앙의 차원에서 고양된 신학적 진리라고 한다면, 설교는 이 신학적 진리를 교회와 세상과 회중들 각 개인에게 가르치고 적용시키는 기능과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이다.

설교의 신학적 목적은 곧 하나님의 구속역사와 인간의 수납과 이해와 시간을 초월하여 연결시키는 계시의 전달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진리와 신앙의 전 차원을 선포의 내용으로 하는 함축적이고 포괄적인 설교는 신앙과 진리의 일면만을 강조하는 오류를 피할 수 있다.

신앙이 단순한 종교적 감정이나 윤리적, 도덕적 의지가 아니라 기독교의 진리 위에 세워진 전 인격성을 의미한다고 볼 때 설교는 듣는 회중에게 이러한 신앙 인격을 함양케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설교가 그것을 듣는 신자들의 신앙을 하나님의 진리로써 자라게 하는 고귀한 목적을 내포하고 있음은 당연하다.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생활에 힘을 더해주고 지혜와 용기를 가져다주는 설교는 이 세상의 실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성경적 이상을 구현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회중이 설교를 들음으로써 올바른 신앙의 방향과 사명의 길을 찾아 나갈 수 있게 하고, 계속적인 신앙인격의 성숙을 이룩해 나가는 지침을 깨닫게 되도록 하는 것이 설교의 목적인 것이다. 이에 대해 특별히 바우만(J. D. Baumann)은 네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케리그마적 설교로 복음의 선포 또는 복음적 설교이다.

  둘째는 듣는 회중들에게 가르침을 목적으로 하는 교훈적 설교이다.

  셋째는 치유적 설교로 상처받은 자를 치료하는 설교이다.

  넷째는 예언자적 설교로 백성의 갈 길을 제시하는 설교이다.』

설교자는 강단에서 선포되어지는 말씀에 관한 분명한 목적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목적이 분명해야만 회중의 심중을 헤아려 그들의 필요를 채울 수 있고 실언(失言)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의 설교이든지 궁극적으로 설교는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주목적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올바른 적용과 선포였다면 말씀의 생명은 살아 역사하기 때문이다.

티자드(Leslie Tizad)는 설교자의 목적을 "하나님과 설교를 듣는 회중들의 영혼과의 개인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했다. 결국 설교는 듣는 회중들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경험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쉴로에르브(Rolland Schloerb)는 "설교는 회중들이 그 설교로 인하여 자기들의 신앙적 발전을 한 걸음 더 내딛게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는 행동하게 하는 부름이다." 라고 말하였다. 설교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와 현재와의 대화를 이루는데 최대의 목적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또한 설교의 궁극적 목적은 회중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는 것인데, 피어슨(Roy Pearson)은 설교의 3가지 근본 목적을 선포, 실증, 고취로 보았다. 설교는 그 설교가 맺는 열매로 평가되어야 한다. 만약 설교가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것이다. 

헤리 에어슨 포스딕(H. E. Fostick)은 "강의가 주로 설명되어야 하는 주제에 관심이 있는데 반해 설교는 주로 성취되어야 할 목적에 관심이 있다" 라고 말하며 설교의 '목적'에 관한 어떤 형태의 설교라도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강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설교의 궁극적 목적은 회중들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그들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고자 하는 명백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결국 설교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행동을 낳고 생활을 변화시키는 전인격의 변화를 촉구하는 경험이어야 하는데 있다.

다음으로 설교의 요소와 원칙에 관해 살펴보자.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구원사건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빛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역사에 적용시키는 일이다. 그러기에 설교자는 설교할 메시지의 내용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붙잡아야 한다. 그 내용을 두 가지 요소로 말할 수 있다.

첫째는 구원의 말씀인 케리그마이다.

둘째는 윤리적인 교훈인 디다케이다.

다드(C. H. Dodd)는 "케리그마란 사도들이 개종자들을 얻기 위하여 전파한 것이고 그 외의 말씀들은 윤리적인 디다케라고 주장했다."

설교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 와 그것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 이다. 이는 마치 상품과 포장지의 관계와 같다.

로빈손(H. W. Robinson) 박사는 "내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에 대한 것을 주요소라 하고, 내가 말하려는 바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 이야기 하려는가? 에 관한 것은 보충요소(complement)라고 했다. 여기에 대해 앞으로 다룰 스펄젼의 감각적 호소와 밀접한 관계를 제공해 주는 워런 위어스비의 5가지의 설교 원칙을 살펴보도록 한다.

첫째, 설교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기에 그 설교가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분명한 의도와 내용이 모두 있어야 한다. 설교의 목적이 단순히 어떤 주제를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설교는 주제를 설명하는 일 뿐만 아니라 적용하는 일도 한다. 설교자는 단순히 지성(Mind)을 교훈하는 것에만 만족해서는 안되고, 감정(Emotion)도 흔들어 놓아야 하며 하나님의 진리를 개인적으로 적용하려는 의지를 갖게 하는 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 설교는 조직적이며 구체적이어야 한다. 설교의 명제는 구체적이어야 한다. "이 본문에는 우리가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와 같은 종류의 설교평은 설교자라면 모두 피해야 한다. 사실 '것들(things)'이란 말은 모호하므로 주의해서 사용해야 한다.

셋째, 감명을 주기 위한 설교가 아니라 표현하기 위한 설교를 하라. 설교자는 쇠해야 하고 구세주는 흥해야 한다.(요3:30) 즉 전해지는 말씀은 예수님이고, 설교자는 그것을 전하는 목소리에 불과하다. "저런 설교는 나도 할 수 있겠다"라고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설교에는 단순성이 있어야 한다. 죠오지 모리슨 (George H. Morrison)은 "당신의 설교를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설교하라" 고 말하면서 '위대한 설교'를 위해 준비하려고 애쓰지 말고 위대하신 구세주를 드높이려고 애쓰라고 말한다. 

넷째, 개개인에게 설교하라. 효과적인 이야기는 모두 개개인을 상대로 하는 것이다. 스펄젼의 설교를 들은 어떤 소녀가 자기 어머니에게 말했다. "스펄젼 선생님이 '저'에게 말하는 거예요?"  설교를 들은 사람이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현재시제를 갖고 설교하되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하라. 말씀 속에 있는 시대를 초월한 진리의 원칙을 발견하여 이해될 수 있는 말로 옷을 입혀서 기다리는 회중의 필요에 적용시키는 것이 설교자의 할 일이다. 또한 상상력은 낡은 것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다. 창조적인 설교자는 자신의 상상력을 발전시키고 그것을 설교에 적용하는데 대가를 치러야 한다. 설교는 생활과 생각 속에서 나오는데 그 두 가지를 묶는 것이 바로 상상력인 것이다.


  2. 설교와 회중


  회중이란 소리를 내건, 조용히 있건 간에 설교에 적극 참여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설교자는 회중의 필요를 인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회중들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설교라야 바람직하다 볼 수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첫째, 회중을 구체적으로 알아야 한다. 즉 설교자는 회중을 아는 것과 그들을 대상으로 설교하는 것 사이에 중요한 연관이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또한 회중을 알 뿐 아니라, 그들이 번민하고 있는 죄, 좌절, 두려움, 증오, 슬픔, 낙담, 실망, 염려 따위의 제반 문제들을 알아야 하며 그들의 소망, 기쁨, 사랑, 승리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회중을 이해할 때 설교는 더욱 효과적일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회중을 사랑해야 한다. 성경시대의 위대한 설교가들 - 예수 ,베드로, 바울-을 생각해 볼 때 그들은 회중을 향한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가졌었다. 회중이 동의하지 않고 반대했고 이 설교자들을 죽이려고 했음에도 그들을 끝까지 사랑한 것을 볼 수 있다. 회중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최고의 선을 추구한다는 말이다. 셋째, 회중에게 먹여야 한다. 회중은 굶주리기에 생명의 떡이 필요하다. 회중은 문제, 결정, 기회, 위기 그리고 그 외의 여러 인생의 문제들에 직면해 있는 그들을 돕는 설교를 듣고자 갈망한다. 설교자는 회중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하고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설교작성에 부단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회중이 설교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은 적어도 설교의 본질에 대해서 세 가지 진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로 설교의 내용은 회중들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이다. 설교는 회중에 대한 철저한 지식과 많은 양의 정보 수집을 필요로 한다. 다른 말로 하면 회중들이 설교가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설교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청중들은 설교자가 회중들에게 말하기 이전에 벌써 설교자에게 말하고 있다.

둘째로 설교는 회중들로 하여금 설교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느끼고, 결정하고, 행하게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또 움직여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가 온 회중의 행위라고 믿는 설교자는 그 행위를 가능케하는 설교의 기법을 개발해야 하며, 또한 다른 사람의 결론에 대해서 수년간 잠자코 듣기만 했던 회중들이 그것을 극복할 때까지 인내할 줄도 알아야 한다.

셋째로, 설교란 회중을 향하여 하는 말인 동시에 회중을 위하여 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설교자가 회중들의 역할에 대해 생각한다면 전체 회중들을 위한 설교, 즉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있는 신앙과 의심, 두려움과 분노, 사랑과 기쁨, 그리고 감사를 표현하는 설교를 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가 회중들에게 삶의 변화를 주지 못하는 것은 회중들의 시급한 필요, 혹은 피부에 와 닿는 필요를 무시한데서 온다고 하겠다. 어떤 유형의 설교이든지 한 시대를 흔들고 사람들의 삶의 변화를 가져왔던 위대한 설교가들의 설교는 한결같이 회중들의 필요에 민감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회중에게 어떻게 접근할 것이냐? 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의 3가지 회중에 대한 접근법을 접목하려 한다.

첫째, 지적인 접근방식으로,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고 알아야 할 것을 소개하는 접근방식이다. 필요한 접근이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이것이 설교의 유일한 형태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감성적 접근방식으로, 인간에게 지식보다 훨씬 강렬한 것이 감정이므로 설교를 통해 서러움과 아픈 감정의 씻어냄을 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접근 방식이다.

셋째, 의지적 접근 방식으로, 삶의 변화를 창출해 내는 방식이다. 설교자는 의지적 접근을 통해 회중들의 행동방향을 분명히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순서에 있어서는 지식에서 시작해서 감정으로 그 다음에 의지로 나아갈 수 있고, 감정에서 시작해서 지식을 통하여 그 다음에 의지로 나아갈 수 있다.

결국 설교자가 회중의 심령 상태와 지적 수준과 환경을 자세히 알고 있다면 그 설교는 회중에게 더욱 공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회중은 설교자를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여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유지하도록 노력하고, 설교자는 회중의 영적인 지도자로서, 그리고 신령한 인도자로서, 그들을 바로 인도해야 할 것으로 회중과 설교자와의 관계성을 말할 수 있겠다.



Ⅱ. 스펄젼의 생애와 설교 신학


1. 스펄젼의 삶


  스펄젼(C. H. Spurgeon)은 1834년 6월19일 영국의 에섹스주의 지방도시 켈비던 (Essex, Kelvedon) 의 작고 오래된 회중교회 목사관에서 아버지 존 스펄젼 목사와 어머니 엘리자 사이의 1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은 생후 14개월때에 존 스펄젼(John Spurgeon) 목사가 사역지를 콜체스터로 옮기게 되어 외딴마을인 스템버른 교회에서 목회하였던 할아버지 제임스 스펄젼(James Spurgeon)에게 보내져 그곳에서 함께 자라게 되었다. 이때부터 스펄젼은 할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그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제임스 스펄젼은 88세의 나이로 소천할 때까지 스탬버른 교회에서 줄곧 50여년을 목회하면서 주위로부터 덕망이 높은 분으로 존경을 받아왔다. 스템본 교구의 조합교회 목사였던 그는 그 직책을 이전 25년간 충실히 수행해 왔다. 그의 설교는 신실함과 동시에 힘이 있었다. 그의 설교를 들은 어떤이는 "나는 천상의 음식을 먹고 날아 오르는 독수리와 같은 느낌을 가졌다"라고 말했다. 그는 늘 성실하였고, 침착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할아버지는 늘 엄격하면서도 교인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부드럽고 신중했다. 할아버지는 항상 긴 시간의 명상을 하면서 설교를 구상하였다. 할아버지의 서재에는 수많은 청교도 서적들, 순교자들의 전기, 경건 서적들이 말없이 쌓여 있었다. 스펄젼은 이 침침한 방을 들어갈 때마다 마치 금광에 들어가는 광부의 느낌을 가졌다. 특별히 스펄젼은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발견하고 그 책에 사로잡혀 일 백번 이상을 읽었다고 할만큼 큰 감명을 받았다. 그의 전체 문장 형태는 존 번연의 작품을 통한 이 어린 시절에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다. 7살 때에 그는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때부터 청교도 서적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청교도들의 전기에서 순교자상을 흠모하게 되었다. 특별히 그에게 많은 영향을 준 책은 백스터의 「비회심자에 대한 부르심」 제임스의 「갈급한 탐구자」 폭스의 「순교자의 책(Book of Martyrs)」 그리고 「천로역정」과 「로빈손 쿠루소」등의 책들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성경 이상 그에게 영향을 준 책은 없었다. 또한 스펄젼 일가의 모든 생활은 성경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성경은 단순히 읽히는 것 뿐만 아니라 의심할 수 없는 절대 진리의 확신으로 믿어졌다.

  스펄젼의 성장 과정에서 많은 시간을 할아버지와 보내면서 영향을 많이 받았고, 청교도 신앙을 물려주신 아버지와 경건한 어머니, 그리고 그에게 비국교도의 신앙을 물려준 메리 킹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러한 영향으로 스펄젼은 하나의 신앙적인 전인 교육을 이루게 되었고 후일에 그가 훌륭한 설교자로, 교육자로, 저술가가 된 사실은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스펄젼은 감수성이 많은 소년이었지만 결코 소심하지 않았으며 어떠한 사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완벽하리만큼 훌륭한 소년이었다. 대단히 공정했고 정직했다. 상상력 또한 풍부했고 기억력이 뛰어난 소년이었다. 1849년 여름에 그는 뉴마켓 마을 학교에 입학했는데 그해 12월 열병이 발생하여 임시로 휴교가 내려졌다.

그 이듬해 1850년 1월6일 겨울의 주일날 아침에 스펄젼은 "초기 감리 교회"에서 15살의 나이로 거듭나는 체험을 갖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이 회심의 사건은 최대의 중대사건으로 여겨진 것이다.

14살 때 그에게 극심한 영적인 고통의 형벌이 밀려왔고 갑작스런 죄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이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 고통은 거의 6개월 동안이나 난폭하게 그를 연타하였다. 스펄젼은 그때를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용서를 간구하였고, 간구하였다. 그러나 사죄의 은총은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입을 열었을 때면 실언하게 되었고 또 내가 잠자코 있었을 때는 침묵 속에도 죄가 있었다. 나는 율법 속에 감금되어 있었다. 나 자신을 살펴볼 때 나는 하나님을 거스리는 패역 부도한 죄인이었다.』

이런 고백은 당시 그의 가장 심한 감정적 위기를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스펄젼이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의 평안을 얻고 그 영혼이 굴복한 날은 폭설과 푹풍이 몰아치는 주일 아침이었다. 날씨가 좋지 않아 어머니가 권면하신 콜체스터 교회로 가지 못하고 근처에 있는 15명 미만의 한 작은 원시 감리교회를 찾았다. 그 교회 역시 폭설로 목사가 도착 못해 평신도 중에서 한 사람이 예배를 인도하였다. 그 설교자는 구두 수선공이었는데 이사야 45장22절의 말씀을 가지고 10분 정도 질질 끌다가 지식의 한계로 궁색해 있었다.

  그때 마침 고통스러워 하고 앉아 있는 스펄젼을 목격하자 새로운 실마리를 찾았다는 듯 스펄젼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스펄젼에게 외친 것이다. "청년이여, 그대는 고민을 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오! 바라보시오! 그러면 구원을 얻을 것이오!" 그 순간 스펄젼은 예수를 바라보았다. 그 체험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흑암에서 광명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의 즉각적인 이전이었다. 이 체험은 스펄전의 성격과 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고 그의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남아 있었다. 스펄젼의 구원은 그의 일생에 있어 일생일대의 전환점이었다. 그날 이후 진정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경험은 훗날 그의 설교의 핵심 메시지인 "어떻게 구원을 받을 것인가?"에 대한 모체가 되었다. 거듭남의 사건이 있은 후 뉴마켓으로 돌아온 스펄젼은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의 영혼은 기쁨으로 충만했다.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기를 원했고 경건하게 그의 결심을 선언하는 하나님과 자신과의 신앙서약을 작성했다.

『오! 위대하고 오묘하신 하나님이여 당신은 나의 마음을 아시고 나의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성령의 도움에 겸손히 의지하며 내 자신을 당신에게 바칩니다. 나를 위해 희생하심으로 나는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나는 영원무궁토록 변함없이 당신의 소유물입니다. 내가 이 땅위에 있는 한 당신께 봉사할 것이며 당신을 기쁨으로 삼고 당신을 영원히 찬양 할 것입니다. 아멘 !』 -1850년 2월1일 챨스 해든 스펄젼

회심을 하던 그해 1850년 8월에 스펄젼은 학교를 케임브리지로 옮겼고, 경건한 집에서 하숙을 하게 되었다. 그 하숙집은 아침 8시만 되면 주인으로부터 하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자기의 방에서 반시간 동안 기도하는 경건한 집이었다. 케임브리지에는 설교자 연합회가 조직이 돼 있어서 회원인 설교자들은 이 지역의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설교를 하게 되어 있었다. 스펄젼도 역시 연합회에 가입하였다.

어느 날 연합회의 제임스 빈터(James Vinter)회장이 스펄젼에게 테버샴에 가기로 한 설교자와 동행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 승낙을 했는데 그 설교 예정자가 가는 도중에 스펄젼에게 설교를 부탁한 것이다. 그때 스펄젼의 나이가 16세 였다. 스펄젼보다 연장자였으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기에 거절을 했지만 간곡히 부탁을 해서 그의 요구를 물리칠 수가 없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는데다 설교의 경험이 없는 스펄젼으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가을 햇살이 쏟아지는 농촌길을 걸어가면서 조용히 하나님께 간구 했다.

『주님! 제 마음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따뜻한 마음을 이 농촌 사람들에게 전하게 해 주십시오. 성령께서 제 설교를 통하여 그저 왔다가 그저 돌아가는 사람이 없게 해 주십시오.』

설교자를 기다렸던 20여명의 소박한 농부들과 부인들과 함께 찬송과 기도, 그리고 성경봉독을 한 뒤에 역사적인 스펄젼의 첫 설교가 시작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자비에 대해 전한 그 설교로 모두가 감동의 시간이 되었으며, 성공을 거두어 청중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이 사건은 평안의 땅에 거하는 자들(시 35:20)의 귀를 쫑끗하게 했다.

예배가 끝난 뒤 그의 나이를 묻는 사람에게 한 그의 대답은 유명하다. 

"저의 나이보다는 제가 전한 그리스도의 말씀에  신경을 쓰십시오." 라고 말했던 것이다.

1850년 스펄젼이 영국 캠브리지 근처 테버샴에 있는 한 농가에서의 첫 설교는 회중들을 깜짝 놀라게 했으며, 그 이후 그는 여러 곳으로부터 강사로 초청을 받아 예배당, 오두막집, 그리고 캠브리지 근처의 마을에 있는 13개나 되는 정류장 등의 노천에서 설교를 행하였는데, 이 설교는 낮에 학교일을 마친 이후에 늘 행해졌다.

1851년 이슬레암(Isleham) 에 있는 침례교회에 출석하여 켄틀로우 목사로부터 '믿음과 회개'를 바탕으로 한 진실한 세례를 받았다. 18세에 캠브리지의 워터비치에 있는 침례교 회중교회의 목사로 초빙을 받았다. 단 2년 후에 그는 런던에서 목회를 시작했으며 일년내에 이전까지만 해도 텅비었던 그의 예배당인 뉴 파크 스트리트(New Park Street) 교회는 꽉 넘치게되었다. 당시의 사람들이 소년 설교자라고 불렀던 야들야들한 어린 설교자는 극히 짧은 기간동안 사람들의 주위를 끌어 먼 곳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 왔다. 22살의 나이로 그는 일약 런던에서 가장 인기있는 설교자가 되었으며 청중을 사로잡는 놀라운 능력으로 설교를 들으러 오는 군중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메트로 폴리탄 테버네클 교회(Metropolitan Tabernacle Church)을 짓게 되었다. 이 성전 역시 스펄젼이 27세때 2부 예배를 드려야 할 정도로 수많은 회중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결코 큰 것은 아니었다. 그의 설교는 복음주의 적이었다. 그의 성격은 자주적이었고, 자신을 잘 규제하였으며 대담하고, 독창적이었다. 또한 완전히 자유로왔을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자신의 목회계획을 수행할 능력도 있었다.  1857년 10월 7일 그의 나이 23세였을 때 그는 「Crystal Palace」에서 2만4천명의 대 회중에게 설교했다. 그의 34년의 목회기간 중에 그는 천만명의 대 회중에게 설교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더블어 뛰어난 행정가였던 그는 수많은 기관도 건립하기도 했다. 수많은 복음주의 사역자들을 훈련하는 책임을 수행해 온 "목회자대학"(Spurgeon's College)과 가난한 소년 소녀들의 보호와 교육을 위해 힐야드 부인이 헌금한 20,000 파운드를 가지고 "스톡웰 고아원" (Stockwell Orphanage)을 짓게 되었다. 또한 종교서적 장려협회를 만들어 저속한 문학서적으로 감염된 나라의 독서 수준을 향상 시켰는데, 특히 1875년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던 그의 부인이 "책 사보내기 운동"을 시작하며 122,129권의 도서를 반포했다.

또한 그는 1885년부터 매주 한편씩의 설교를 작성하여 출판하였는데, 그 저작물은 "Encyclopedia Britannica" 제9판 27권의 크기에 맞먹는 것이라고 추정할 정도였다. "칼과 흙손"(Sword and Trowel - 1865년1월1일 창간) 이라는 그의 월간지는 많은 이들에게 광범위하게 읽혀졌다.

그는 방대한 양의 글을 많이 썼는데 모두가 다 읽을만한 훌륭한 가치가 있었다. 「브리티쉬 위클리」(British Weekly) 에 오랫동안 관계해 온 로버트 니콜은 그 의미에 있어서 스펄젼이 성경 다음으로 가장 깊다고 그의 책을 읽을 추천하였다. 당대의 유명한 독일의 설교자요, 신학자였던 헬무트 틸리케 (Helmut Thielicke)는 스펄젼에 대한 그의 존경심을 "스펄젼과의 만남"이라는 제목을 가진 책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그는 설교자들에게 강조하기를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팔아서 (여러분이 현재 소유하고 있는 얼마간의 설교집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다) 스펄젼을 사라.(여러분이 헌 책방을 뒤져야 한다 할지라도)"

스펄젼은 성서적, 교리적인 면에서 해박했을 뿐 아니라 철저하게 확고부동하였다. 그는 당대의 세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철두철미하게 강한 개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확신을 위하여 싸우는 것을 겁내지 않았다.  1887년 소위 "미끄러져 넘어지는 신학"(Slipping Theology)의 문제로 스펄젼은 그 자신이 속해 있었던 침례교 교회와의 의견 불일치, 세례중생(Baptismal Regeneration)의 문제 등으로 틈이 생기면서 복음주의 연맹을 탈퇴했다.    그러나 스펄젼은 그의 개인주의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스펄젼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점은 공중연설에 숙달한 까닭으로 자신의 지식과 개성을 십분 발휘하여 전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분명하고도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말했으며, 담백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손짓을 사용하였다. 설교가 노웰즈(James Sheridan Knowles)는 스펄젼에 대해 논하기를 "그의 완숙한 웅변술과 명확한 연기 능력 때문에 세계에서 제일 훌륭한 설교자요, 청중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고 말했다.  스펄젼의 목회 활동에서 영적 대 부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주권자이신 하나님과 관련하여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가 매 예배 때마다 많은 영혼들에게 큰 감명을 줄 수 있었던 것, 특별히 영혼을 사랑하는 불같은 열정, 말씀 사역을 위한 좋은 육성으로 성공적인 설교와 교회 사역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천부적인 재능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1891년 6월 7일 스펄젼은 테버네클 교회 강단에서 마지막으로 설교했다. 1892년 1월 31일 주일 저녁에 그는 지상에서의 삶의 여정을 마감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며' 그것은 성경이 확신시켜 주는 바대로 그에게 더 유익한 것이었다.

 

2. 스펄젼의 설교관


스펄젼의 설교관을 들어보자. 그는 설교자의 준비가 철저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스펄젼으로부터 들을 수 있는 설교자의 준비로서 크게 우리는 3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철저한 설교준비의 자세확립과 근면한 독서생활 그리고 묵상과 상상 훈련등을 살필 수 있다.

첫째로, 철저한 설교의 준비 자세이다. 우리는 스펄젼의 탁월한 설교가 천부적인 은사를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는 한편 한편이 철저하고 성실한 준비에 힘입었다는 것이 그의 자서전 작가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목회자에게 부과되는 설교의 양은 참으로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기에 준비가 소홀할 수 있다. 그래서 요즘은 공개적으로 설교가 즐비하게 쏟아져 나오고 함께 공유하는 메시지가 생겨나게 되는데 스펄젼은 단호히 "형제들이여! 설교 준비를 소홀히 하는 것 따위는 버리시오" 라고 경고하고 있다.

"게으른 자는 강단에 설 자격이 없다 그는 사람들의 영혼을 망하게 하는 사단의 도구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설교자는 그의 마음의 수고를 설교에 투자해야 한다. 설교를 전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되어서는 안된다. 한편의 설교가 끝나기 전에 그는 자기의 생명을 소모한 것처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스펄젼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설교 준비 자체를 기쁨으로 진행한 일이 거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언제나 고통스런 노동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스펄젼은 아내 수잔나의 도움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잔나는 금요일, 토요일 오후 설교본문이 정해지면 주석 중 본문에 관한 부분을 읽어주었다. 스펄젼은 토요일 저녁 깊은 기도 속에서 설교할 내용에 불붙이는 일을 끝내고 마음 속에서 설교가 형성되면 서재로 아내를 불러 이튿날 전할 설교 요약을 들려 주었다. 그에게 있어 치밀함과 동시에 사모와의 공동 사역으로 공간을 채우는 지혜도 엿볼 수 있다. 

둘째로, 근면한 독서 생활이다. 스펄젼은 책을 사랑한 사람이다. 그는 책을 너무 사랑해 다른 이들에게 책을 빌려주는 것을 지독히 싫어했다. 그의 독서 영역은 참으로 방대하다. 모든 문학과 전기, 신학, 과학, 역사, 미술, 시등 참으로 많은 식견을 독서를 통해 얻어낸 것이다. 그의 책에 대한 애찬론은 다음 시구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책이여, 누가 그대를 빌린다거든

  쾌히 승낙하라.

  읽는 것, 연구하는 것은 . 그러나 대출만은 안되오.

  어서 내게 돌아오라.

  그 이유는 서로 나눠갖는 지식으로

  지식의 창고가 비워지기 때문이 아니라오.

  책이란 한번 대출되고 나면

  내게로 되돌아 오지 않기 때문이라오.』

스펄젼은 어린시절 책을 접할 기회가 많았는데 특히 「천로역정」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어 그의 설교와 저술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는 죽기까지 「천로역정」을 100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존 번연의 '풍성한 은혜'와 청교도 계통의 서적들 중에 백스터의 '회심하지 않은 자에 대한 부르심' 제임스의 '열렬한 구도자' 폭스의 '순교자의 책' 앨린의 '죄인들에 대한 경고', 그리고 스쿠겔의 '인간 영혼 안에서의 종교의 생성과 발전' 등의 책들은 늘 스펄젼 가까이에 있었던 책들이고 여러 차례 정독을 하였다.

그는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철저하게 읽으라. 흠뻑 몸에 밸 때까지 그 안에서 찾으라, 읽고 또 읽어 되씹어서 소화해 버리라. 바로 여러분의 살이 되고 피가 되게 하라. 좋은 책은 여러번 독파해서 주를 달고 분석해 놓으라."

그는 평생 오른손에는 성경, 왼손에는 청교도의 경건 서적을 쥐었다. 스펄젼이 그토록 장중하고 예리한 스케일과 문학적 표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독서의 영향력이었던 것이다.

셋째로, 묵상과 상상이다. 스펄젼의 설교가 감각적 호소를 통해 청중을 깊히 파고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묵상 훈련을 통한 상상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그는 평생 수첩을 휴대하여 설교에 도움이 되는 것은 모두다 간단히 요점적으로 적어두고, 자기의 특색과 능력을 개발하는데 최고의 상상력을 동원해 설교 준비를 하였다.

"나는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온 설교를 좋아한다. 우리의 마음에서 나온 설교가 아니라면 청중들의 마음에 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였다. 이 마음에서 솟아나온 설교를 위해서 묵상과 상상의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그는 묵상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것은 마치 하나의 잔에 수정 빛 차가운 물이 반짝임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묵상한다는 것은 그 물을 들여 마시는 일이다. 독서한다는 것이 과일을 모으는 일이라면 묵상은 그 진액을 짜서 즙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그는 묵상한 것을 표현해 내기 위해 놀라운 상상력을 발휘하였다.

"내가 밤에 홀로 있을 때면 종종 나의 상상력은 무척이나 강력하여 천사가 내 곁을 날아오는 것을 거의 보는 듯하며, 내가 말씀을 정신없이 전하고 있을 때면 자갈길을 따라 돌진해 오는 것 같은 '케루빔(그룹)'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 듯하다" 라고 그의 상상력에 대해 고백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설교의 준비는 회중의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을 뜨겁게 달구는 힘을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스펄젼의 설교에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찾아낼 수 있다.

첫째, 그는 성서 중심의 설교자이다.

스펄젼은 한 책의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방면에 있어 상당한 식견을 지니고 있었는데 역시 그에게 있어 최고의 서적은 성경이었다. 그는 자신이 성경에서 발견한 진리를 선포하는데 있어 담대하였다. "나는 언제나 나의 성경책 읽기를 좋아했다" 고 고백한다. 그는 성경을 순수한 사랑을 가지고 애독했는데 이러한 노력으로 그의 설교에서 뚜렷이 명시하지 않은 성경 구절이 무려 수십 구절이나 발견됨을 볼 수 있다. 

그의 설교는 성경에 대한 철두철미한 확신에서부터 비롯된다. "우리가 부흥을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존경심을 회복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사람들의 회심을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설교에서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하며 그의 설교가 본문과 일치하고 있어야 함을 설교의 신조로 하고 있다.

그의 설교는 철저히 성경 중심이었고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회중에게 전하기를 원했던 자이다.

존 스토트 (John R. W. Stott)는 "만일 우리가 회중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갖도록 도움을 주고자 한다면 우리 스스로 그 마음을 길러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한 유일한 길을 우리의 마음을 성서에 흠뻑 젹셔야 한다" 라고 하였다. 스펄젼의 고백을 들어보면 그 역시 "나는 언제나 나의 성경책 읽기를 좋아한다. 성경을 상고하는 것, 그것은 마치 포도주의 틀 속의 포도를 짓이겨 즙을 짜내는 것과 같으며 창고 바닥의 곡식을 도래끼질하는 것과 같으며, 광석으로 금을 제련해 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라고 했다.

"성경의 바로 그 진액을 먹어 들어 가면서 마침내 성경의 언어로 이야기 하게 되고 당신의 영혼이 주님의 말씀으로 향긋해 짐으로써 그 결과 당신의 가족이 성경노선이 되고 당신으로부터 성경의 진수 곧 진액이 흘러나온다는 것은 참으로 축복 받은 일이다 "

리차드 데이(L.Day)는 스펄젼의 성서관에 대해서 "청교도의 황태자인 스펄젼의 정신은 철저하게 성경노선(Bibline)이었다."고 말하였다. 스펄젼의 능력있는 설교의 비결을 이와같은 그의 성서 중심적 사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둘째, 그는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자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이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꾸 자라갈 때 더욱 더 행복해집니다. 사실 그리스도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이 없는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의 아침 묵상집에 나타난 고백이다.

그의 설교의 중심은 바로 그리스도에 관한 선포였다.

스펄젼이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이 시작된 것은 15세 때 회심의 경험을 통해 시작되었다. 그리스도 중심의 사상은 그 중심에서 산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지 않는 어떤 부류의 사상, 선택, 계획, 감정, 행동이라도 단호히 거부하는 정신이다.

18세기 유명한 설교가였던 죠지 휫필드와 요한 웨슬레가 그러했듯이 스펄젼 역시 그의 설교의 중심 내용이 '그리스도'였다.

스펄젼은 그리스도가 그의 설교 핵심 주제였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온 그리스도 중심의 사람이었다. 그것은 그의 설교 속에서, 기도 속에서, 그리고 그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나왔다. 언제나 그와 함께 계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 뿐 이었다.   그의 그리스도 중심의 기도를 살펴본다.

"오! 무한한 사랑이시여! 대체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을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본성은 얼마나 타락한 것인지요! 용서 하소서. 구주시여! 당신의 사랑과 보혈, 상처와 죽음에 대한 죄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오 구주시여 당신의 성령을 주시되 더 풍성히 주셔서 당신이 세상에 계셨던 것같이 저희도 사람의 자녀들 가운데 사는 동안 당신의 삶을 살게 하시고 매일 더 가깝고 완전한 삶을 살게 되길 소원합니다"

그의 기도 속에는 그리스도를 닮아 그리스도처럼 살기를 원하며 그리스도만을 전파하려는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그의 대학 학생들에게는 이렇게 말하였다.

"형제들이여, 언제나 그리고 영원토록 '그리스도'를 설교하라. '그리스도'야말로 복음의 전부이다. 그의 인격과 직무와 사역은 우리의 위대하고 포괄적인 주제가 되어야만 한다. 세상은 여전히 그리스도의 구세주 되심과 그리스도에게 이르는 길에 관하여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형제들이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불확실한 소리가 우리로부터 흘러 나와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의 목회에서 그리스도의 피가 떠나 버린다면, 목회의 생명은 사라져 버릴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에 있어서도 「피는 그것의 생명이다」라는 말이 똑같이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한, 그의 백성을 대신한 그리스도의 고유한 구속,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 이것을 우리는 죽을 때까지 전파해야만 한다."고 했다. 특히 목회자 신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아들에게 스펄젼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뛰웠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졸업을 앞두고 나는 너에게 너의 사역지를 주님께서 골라 주시기를 기도한다. 네가 평생을 바칠 수 있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곳을 위해 너는 주의 뜻을 기다리며 기도해야 한다. 성직자들이 자기의 이름을 내세워 자기 자녀들의 앞길을 열어 주려고 하는 일을 나는 심히 못 마땅해 한다. 오로지 주님께서 너의 임지를 알고 계신다. 온전히 기도에 힘쓰도록 하여라. 그리스도를 전파하라, 내 아들아 ! 그리스도를 전파하라.』

스펄젼의 평생의 설교 사역에 있어서의 대 주제는 "그리스도 중심"이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고 볼 수 있다.



Ⅲ. 스펄젼의 설교 방법론


1. 감각적 호소의 구성 요소


스펄젼으로 하여금 감각적 호소를 이룰 수 있게 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회심의 사건을 통해서 얻을 수 있었다.  조그마한 시골의 한 교회 설교자가 스펄젼에게 외친 설교 몇 마디는 그의 설교의 감각적 호소를 이루는 근원을 찾을 수 있게  준다.

"청년이여, 그대는 고민을 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오! 바라보시오! 그러면 구원을 얻을 것이오!" 그 순간 스펄젼은 예수를 바라 보았고 그 체험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흑암에서 광명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의 즉각적인 이전이 된 것이다.

스펄젼의 감각적 호소의 근원은 그의 자질에다 그의 어린 시절의 훈련과 환경이 잘 배합되어 이러한 은사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언어의 대가들을 면밀하게 연구함으로써 이것을 배양하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을 매혹시키도록 표현하는' 설교를 창작하기 위하여 공부했고, 그의 학생들에게도 설교 방법을 많이 밝혔다. 설교를 분석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자각적인 노력이 모든 곳에 뚜렷하다. 그는 지루한 방법을 탈피하기 위하여 특별한 기술을 채용할 필요성을 보여 주었다.

확실히 그가 믿었던 설교 방법은 근본적으로 능력과 은사가 있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전달되며, 더우기 그런 사람은 기도하면서 부지런히 하면 그 방법을 획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언어와 목소리의 사용에 관하여 그는 기력없는 문구, 진부한 표현, 지루한 천편일률적인 음조가 설교 중심을 이루고 있는 자들의 설교를 비평했다. 스펄젼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기술뿐만 아니라 바로 그 어법까지 습득했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는 언명(言明) 했다. 많은 착상과 표현의 수집은 대단한 도움이 된다. 그리고 어휘나 문체 혹은 말씨를 선천적인 재능으로 돌리는 사람들과는 단호히 거부하였다.

스펄젼의 설교는 유난히 자연에 대한 생동하는 묘사와 깊은 통찰력으로 가득차 있다.  

『만일 우리가 그를 찬양하기를 그친다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잊혀질까요? 아닙니다. 돌들이 노래할 것이며, 언덕이 관현악단이 될 것이며, 산들이 양처럼 뛰놀 것입니다. 태양이 합창을 지휘할 것이며, 달은 그의 은빛 하프를 연주하면서 그 소리에 맞추어 달콤하게 노래 할 것입니다. 별들은 그들의 율동적인 코스에 따라 춤을 출 것입니다. 창공의 지주 없는 깊은 곳이 노래의 전당이 될 것이며 공허하고 광대한 공간이 하나의 큰 소리를 떠뜨릴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잊혀질까요? 아니오 바람이 그것을 속삭일 것이며, 바다가 그것을 영창할 것입니다. 가축들이 그 이름을 굵은 소리로 울부짖을 것이며 뇌성이 그것을 선포하고 땅이 그것을 소리치며 하늘이 그것을 메아리칠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숲은 하나의 서고이고, 곡물은 한 권의 철학 서적이고, 바위는 하나의 역사이고, 그 바위 밑에 흐르는 강은 하나의 노래였던 것이다. 우리는 스펄젼의 설교가 이 살아 있는 자연의 율동으로 가득한 이유를 알만한 것이다.

또한 그에게 있어서는 사물에 대한 균형있는 접근의 시도가 보이고 있다. 우리는 무엇에 관해 열정적일 때 쉽게 균형을 잃어버리기 쉽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예외였다. 스펄젼은 놀라운 조화, 적절한 균형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설교를 구상하였다.

확실히 그는 풍부한 착상을 획득하기 위한 수고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그의 감각적 호소를 이룰 수 있었던 구성 요소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스펄젼에게 있어서 센스어필은 질서있는 과정을 수반하고 있었다.

감각의 영역 그 자체를 파악하는 능력을 의미하는 지각(Perception), 다음의 것을 밝히기 위하여 게시된 진리와 감각 자료들을 연관 시키기 위한 종합하는 능력을 의미하는 상상 (Imagination), 설교자가 하나님의 진리에서 받은 동일한 감각적인 감화와 동일한 종합체를 다른 사람들도 역시 경험할 수 있도록 선명하게 다른 사람들에게 이상의 것을 묘사하는 능력을 의미하는 묘사(Description)라는 확실한 요소에 의존하고 있다.

감각의 지각은 원을 손에 넣는 것과 같고, 종합적인 상상은 생산품의 제작 과정에 있는 동일한 물품을 정제하는 것과 같으며, 사실적인 묘사는 분배의 전략 정책 그리고 수단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스펄젼 자신은 감각의 지각에 관하여 많은 것을 말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그것의 완전한 보기로 내 세운다. 예리하게 그는 그리스도께서 "어떤 누구도 하지 못했던 말씀을 하셨고 아무도 관찰하지 못한 것을 보시고 말씀하신 분" 이라고 주장한다. 스펄젼에게 모든 피조물은 자료의 거대한 원천이었다. 모든 설교자들에게도 피조물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눈을 뜨면 사방에서 풍성한 영상을 발견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니콜 (W. R. Nicholl)은 "스펄젼 선생의 초자연적에 가까운 관찰력의 예리함은 그의 능변의 정수였다"고 극찬하였고, 마군(Margoon)은 "그는 희귀한 관찰력을 소유하고 있다. 관찰 범위는 넓고 다양하다. 그는 자연의 모든 다양함과 과학의 모든 발견물, 문학의 모든 분야에 눈을 뜬 듯하다. 사람의 눈이 바라볼 수 있거나 귀가 들을 수 있는 모든 것은 그의 지적인 능력 위에 지울 수 없는 인상을 새겨놓은 듯이 보인다."고 하였다.

생각 중에 있는 설교문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지각 이상의 것이 필요했는데 스펄젼에게 있어서는 종합적인 상상이었다. 브래스토는 "그는 설교를 통하여 매우 다양한 연관을 매우 다양한 사색과 함께 연결지으면서 설교를 계속적으로 생각나게 하기 위하여 원문이나 혹은 그 일부를 반복함으로 오랜 청교도 설교자들의 기술을 소유했다. 그리하여 새롭게 그것을 이해하고 더욱 인상깊게 하였다."고 말한다.

이 종합적인 상상은 단지 장식이나 예화에만 지나는 것 이상의 것이었다. 그리고 스펄젼 자신이 "우리의 그림을 보이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간파되기 위하도록 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생각 중에 있는 문장은 가장 훌륭한 묘사를 아름답게 전시한다. 묘사는 연설자가 종합하는 가운데 본 것을 다른 사람도 볼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스펄젼의 묘사의 본질 속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는, 선명한 묘사적인 어휘와 어구가 풍부했다. 그는 낱말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한번은 그가 "단어 자체 속에 그림이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라고 말했다. 스펄젼은 학생들에게 "우리의 청중들은 앙상한 정의의 뼈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고기와 맛을 원한다"라고 조언했다. 아마 감각에 호소하는 어휘 '맛'은 살아있는 어휘가 묘사하는 관계를 가장 적합하게 특징지어 묘사하고 있을 것이다.

둘째는, 단순성에서 오는 선명함이라고 패티슨(C. H. Pattison)이 말했다. 브래스토도 스펄젼을 가장 선명하게 설교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고 부언했다. 사실적인 묘사를 하는 스펄젼의 문체는 "단순한 명확성"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2. 감각적 호소의 개관


스펄젼은 설교를 「상상력이라는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회중으로 하여금 설교를 눈으로 듣게 하였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설교에서 감각에의 호소(Sense Appeal)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펄젼의 감각에 호소하는 능력은 주로 설교들을 연구하고 (특별히 청교도 설교가들의 것을 일반적으로 연구했고, 특수하게 존 번연의 것을 연구했다). 자연에 관한 집중적인 연구와 모든 감각의 영역을 연구함으로써 획득한 것이다. 스펄젼의 강점은 그의 설교체에 있다. 그의 설교는 때로 생동감이 있고, 음악적이요, 시적이다. 그는 생생한 영상을 활용하였고 오관을 통한 호소를 하였다. 이러한 감각의 호소는 그의 설교의 주류를 이루는 특징이 된 것이다.

이제 구체적으로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 미각적, 후각적인 호소에 관해 살펴본다.


1) 시각적인 호소

스펄젼은 그의 청중들을 위하여 언어 그림(Word Picture)을 그리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흥미롭게도 그는 설교 자체 속에 그 사실을 드러내 놓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회중들이 눈을 뜨게 하는데에 그치지 않고 떠서 바라보도록 하였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듯한 묘사로 그들 눈앞에 그림을 그려서 걸어 주며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시각에 호소하면서 마음의 눈으로 그것을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입술로부터 살아있으며 생명력이 넘치는 묘사가 쏟아져 나왔다.

『만일 우리 중 누가 마음 속 깊이 그 광경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정복당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아침 그 마지막 놀라운 날을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다른 날들이 그날을 위하여 만들어졌습니다. 기대함으로 그날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하여 말하면서 청중들 자신도 마음의 그림(mind painting)을 그리도록 촉구하고 있다.   

『당신의 추리력으로 윤곽을 그리도록 하고 당신의 사랑이 세밀한 부분을 채우도록 하십시오. 상상력으로 채색을 진하게 한다 해도 나는 불평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대해 애절한 표현을 살펴보자

『그러나 여기를 보십시오. 십자가에 달려있는 저분을 보는가요? 그의 가슴 위로 고요히 떨어지는 그의 고통스러운 머리를 바라봅니까? 그의 볼 위로 뚝뚝 떨어져 내리는 핏방울의 원인인 저 가시관을 바라봅니까? 꿰뚫려 갈라진 그의 두 손과 잔인한 두 못으로 거의 쪼개진 체중을 지탱하고 있는 그의 신성한 발을 봅니까?  당신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를 상상해 주시하여 보십니까? 그의 피흘리고 손과 발이 풀어낸 응혈을 보고 계십니까? 그를 보십시오.』 라고 촉구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영적인 상상력을 통하여 자신이 전하는 말씀을 청중들이 보다 잘 이해하도록 하였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주께서 그의 손가락을 당신의 눈꺼풀 위에 얹으시고, 당신의 입술에 입맞춤으로 당신의 영혼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구세주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강청하기도 하였다.

『살아계시나 죽으셨고 이제는 영원히 살아계셔서 지옥과 사망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의 안에서 살아계시고 가까이 하기 좋은 구세주, 사랑의 목소리로 외치시는 구세주의 모습을 보십시오.』

투명한 아름다움의 특성 자체를 보기 위하여

『이슬방울들이 꽃들의 눈 속에서 눈물처럼 빛난다. 마치 어둠의 긴 밤이 지난 후 다시 태양을 맞는 기쁨에 울고 있는 듯...』

얼마나 신앙을 가지도록 호소하였던가 ?

그의 설교 가운데는 청중의 상상력을 동원하기 위해 '마음의 눈들' '영적인 눈들' 이라는 말들을 자주 사용하였다.

스펄젼은 몸이 그 육신의 눈으로 쉽게 볼 수 있듯이 마음도 영적인 눈으로 쉽게 언어 그림을 볼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듯하다. 이 확신은 그의 설교 이론의 기초를 뚜렷이 이루고 있었다. 그러므로 계속하여 그는 회중들의 눈을 열어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그들에게 보여 주어야 했던 것을 보라고 요구했다.

그는 설교에 그치지 않고 청중들의 눈을 여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였다. 생생하고 사실적인 표현으로 그들의 시각에 간접적으로 호소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이 능력을 사용하도록 격려하면서 살아있는 언어 그림을 그들 앞에 매달았다.

또한 하늘나라에는 피곤함이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는 자연에서 다음과 같이 희귀한 비유를 사용했다.

『그 날개를 영원히 펄럭여도 그것이 날개임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시대 상황을 통감하고 복음의 통로를 활짝 여는 그의 진지함을 발견할 수 있다.

『자기의 차를 멈추고 나에게 오거나, 과일 수레를 세워 놓든지, 검은 구두닦기 통을 그대로 두든지, 누더기 옷을 입었든지, 감옥의 호송 버스에서 탈출했든지간에, 그가 누구인가는 문제가 아니므로 나는 그에게 이 말씀을 받아들일 만함을 분명히 확신시킬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인다 하여 왕이나 성도들의 지위가 낮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은 가장 비천하고 나쁜 자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잠자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악마는 당신의 졸리는 얼굴을 보고 기쁨의 이빨을 드러내 놓으며, 당신이 잠든 동안 마귀들은 잠든 시체 주위를 돌면서 한 그리스도인이 잠들어 있다고 지옥 속에서 말한다.』

스펄젼의 많은 설교들은 이런 간략한 언어 묘사들이 점점이 박혀 장식되어 있다. 또한 그는 섬세한 회화의 숙련가이기도 하다. 어떠한 설교의 문구이든지 선명한 그림을 그리는데 정열을 쏟은 설교가라 하겠다. 스펄젼은 붓과 캔버스를 제쳐놓고 언어조각(word sculpture)까지 시도하기를 두려워 하지 않는 노련한 예술가였다. 얼마나 많은 설교가들이 감히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스펄젼이 '시각에의 호소'를 풍부히 이용했다는 것이 명백할 것이다. 그것이 예외없이 모든 설교에서 현저하다. 그것은 스펄젼 설교의 한 표지로 나타나고 있다.

 

2) 청각에의 호소

시각에의 호소 다음으로 스펄젼의 청각에의 호소를 들 수 있다. 청각에의 호소가 있는 많은 곳에서 인간의 목소리를 포함하여 노래에 관한 것이 나타난다. 자연의 소리에 대한 스펄젼의 호소는 부가적이다. 때때로 그 음향들은 유쾌하고 때로는 불협화음이다. 가끔 시각에의 호소처럼 직접적으로 접근한다.

『우리모두 안전하게 그곳에 도착하게 될 때 승리의 노래가 울려 퍼질 것입니다. 오! 그렇지만 만일 그 중 한 사람이 없어진다면 - 오! 만일 하나님의 택함 받은 가족 중 한 사람이 다른 곳으로 난파해 버린다면 - 그럼 그 구원의 노래는 영원토록 불협화음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낙원에 있는 거문고 줄이 끊어져 다시는 찬양이 울려 퍼지지 못할 것입니다.』

가끔 시각과 청각에의 호소는 가깝게 결합되어 있다. 이것이 나타날 때마다 일반적인 순서는 첫 번째가 시각이요, 그 다음이 청각이다. 그는 처음 일정한 거리에서 한 장면을 스케치한 후 그가 말한 것을 듣게 하기 위하여 청중을 보다 가까이 데려온다. 어쨌든 종종 그 목적은 청중이 그 시야 속에 있는 목적물을 만지거나 냄새 맡거나 혹은 맛보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대개 시각이 다른 감각보다 우선하였다.

대부분 청각에의 호소는 몇 개 되지 않는 중립적인 것과 더불어 유쾌하거나 혹은 불유쾌한 것이다. 지옥의 소리에 관한 것이 적지 않다. 다음의 발췌문을 보자.

『저주받은 자들이 고통의 불타는 쇠사슬 소리를 쩔렁쩔렁 낼 때 그들은 '영원히'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고통 속에서 외치는 그대의 끊임없는 고함 소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며, 그대의 신음소리와 짠 눈물이 당신을 동정하도록 그를 움직이지는 못할 것입니다.』

『당신은 먼 곳으로부터 중상과 냉소의 으르릉거리는 소리를 듣습니까?』

『포근히 싸여있는 북같은 우리의 심장이 무덤을 향한 장송 행진곡에 맞춰 뛰고 있습니다.』 이러한 어두움의 불유쾌한 표현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곡조의 호소도 있다.

예수의 이름을 가장 매혹적이라고 표현한 그의 설교를 들어보자.

『여러분의 귀에는 예수님이라는 매혹적인 이름만큼 달콤하게 들리는 음악소리는 없을 것입니다. 가장 훌륭한 시인의 노래 소리라도 그 이름에 비하면 조금도 사랑스럽게 여겨지지 않을 줄 압니다.』

『들으시오! 들으시오! 나는 달콤한 음악을 들은 듯합니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한 노래, 아라비의 향긋한 작은 숲에서 오는 듯합니다. 땅의 것이 아닌 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오, 조화의 강! 그대가 흘러나오는 그 입술은 어디에 있는가?』

『들어 보십시오! 대서양과 태평양의 파도를 가로질러 영국 국기를 단 많은 배에서 드려지는 기도와 찬송의 소리가 들립니다. 바다의 숱한 작은 섬에서 들려오는 노래가 미풍에 부딪치고 밤의 정적 속에서 영국이 기쁨의 노래를 멈출 때는 오스트레일리아가 그 노래를 계속 합니다.』

주님의 보혈의 피를 강조하여 외치기도 하였다.

『자,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귀담아 들으십시오. 그분이 피 흘린 땅에서 여러분께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피는 아벨의 것보다 귀하고 이 피는 크고 맑은 소리를 울립니다.』 라고 하였고 주님의 부활에 대한 기쁨의 표현도 엿볼 수 있다.

『이제 죄인도 보증인도 다 함께 자유롭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기쁨입니다. 황금 거문고를 가지고 고상하고 고상한 음악을 울릴만한 큰 기쁨입니다.』

대화의 방법은 창조적인 청각의 호소에 있어 가장 효과적이다. 그것은 직접적인 설교의 담대한 사용을 가능하게 하는 형식이다. 스펄젼이 한 것처럼 목소리의 억양을 적당히 조절하면 누구든지 마치 그가 실제의 대화를 듣고 있는 것처럼 느끼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가 그렇게 위대한 가능성을 갖고 있었던 시각에의 호소의 산문적인 특성과 결합되었을 때 특히 그러하였다.

스펄젼이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에도 강하게 호소하였다는 것은 증거에서 명백하다. 다른 세 감각에도 역시 출중한 그의 언어 구사력을 볼 수 있다.


3) 촉각적인 호소

'촉감'에는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다. 그것은 접촉하여 뜨겁거나 찬 온도에 의해 견고하거나 부드러움 또는 습함. 건조한 밀도에 의해 거칠거나 고른 피륙의 바탕에 의해 혹은 고통과 같은 감각 등에 의해 활동되어진다. 이것들은 신체의 외부적인 것일 수도 있고 내부적인 것일 수도 있다.

  스펄젼은 그런 호소로써 규칙적으로 설교했다.

『당신의 손가락을 내미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의 손가락을 내미십시오. 당신이 믿음의 기도나 혹은 소망으로 주님과 접촉할 때까지 가버리지 마십시오.』

몇 개의 다른 구절들에서는 '만지심'(touch)이라는 단어 자체를 포함하고 있다. 주님이 나의 오른손을 붙잡아 주실 것을 간절히 구하는 그의 설교를 만날 수 있다.

『나의 영혼은 종종 나의 영혼의 대장께 "나의 주여, 정복하시는 주의 오른손으로 나를 잡아 주신다면, 그 일을 하겠습니다" 고 말했습니다. 오, 어떤 이가 그리스도의 손을 꼭 붙잡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손을 꼭 붙잡게 될 때, 얼마나 큰 능력이 그 사람 속에 부어지는지요!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교회가 갖게 되는 힘의 원천입니다.』 직접적인 그의 만지심을 보면,

『그는 소경을 만져서 시력을 주셨습니다. 또한 죽은 소녀도 이렇게 하여 살아났습니다. 오! 그의 만지심의 힘! 우리는 예수님의 만지심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가 우리를 만지실 때 무엇인들 안되겠습니까?』

『예수님을 곧 붙잡으십시오. 한 손 전체로 만지지 않으려면 한 손가락으로도 만지십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위대함을 표현하는데 있어

『살아계신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산들을 만지시자 그 산들이 거대한 향단처럼 연기를 피웠기 때문에 그들은 그곳에 떨면서 서 있었을 것입니다.』  조그마한 고통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식탁이 진수성찬으로 차려져 있습니다. 하늘의 만나가 우리의 손 가까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옷이 조금 헤어졌거나 손가락에 조금만 가시 하나가 박혀 있다고 해서 우리들은 마치 가장 나쁜 불행이라도 우리에게 닥쳐온 것처럼 앉아서 웁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의 죽음을 촉각에의 호소(touch appeal)와 육체적인 감각의 어투로 묘사하였다.

『그는 눈을 감지만, 이마 위에 있는 차고 앙상한 손을 느낍니다. 그의 심장 속에 있는 죽음의 씨름 때문에 그는 떨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반성(謀叛性)에 대해서는 "어리석은 손가락, 그것은 자신의 베개를 위해 가시를 준비한다"라고 그는 말했다.


4) 미각적인 호소

미각적인 호소는 청각에의 호소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유쾌한 맛'과 '불유쾌한 맛'의 범주에 속해 있다. 가장 즐겨 사용하는 맛으로는 꿀맛이다.

스펄젼은 끊임없이 그것을 인용하였다. 하나의 설교 제목 전체가 그것을 중심한 것이었다. "꿀로 가득찬 두 손"(Hands Full of Honey)이 그것이다.

『당신이 내게 꿀이 쓰다고 말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나는 '아니오, 확실히 당신은 그것을 맛보았을리 없습니다. 그것을 맛보시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성령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를 가혹하게 비난한 사람들의 말에 대답하면서 그는 말했다.

『매우 좋습니다. 그대로 두십시오. 의술은 종종 쓰지만 이롭게 되도록 일합니다. 그리고 이 약이 쓰다고 의사가 쓴 것은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을 영적인 미식가로 표현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기독교인이 영적인 미식가로 보입니다. 그는 오직 먹을 목적으로 말씀의 사역에 수종듭니다.』

또한 그에게서 특별하게 미각에 대한 적합한 묘사를 발견할 수 있다.

『배고픈 사람이 음식 먹는 것을 보는 일은 즐거운 일입니다. 그에게는 쓴 것도 답니다. 그는 여러분 중의 몇 분이 까다로운 기호 때문에 그러는 것처럼 음식을 이리저리 뒹굴리지 않으며 연골의 작은 조각 하나도 잘라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설명하면서 그는 즐거워 했다.

『시들지 않는 것은 기쁨입니다. 당신은 해마다 그것을 입 속에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싫증나게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남자들은 술에 곧 진절머리가 나고 그리스도인들은 즐거움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꿀과 같고 꿀벌집과 같습니다. 지상 최고의 것입니다.』

시각과 미각에 호소하는 스펄젼의 가장 생생한 언어 그림 중 하나는 앞에서 말한 '꿀로 가득찬 두 손' 이라는 설교에 잘 그려져 있다. 구주는 살해된 사자의 시체에서 꿀을 움켜쥔 삼손에게 비유된다.

『양손에 꿀을 가지고 잔치를 계속하면서 그는 주위에 둘러서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늘의 즐거움을 보이면서 말하기를 "오, 맛을 보고 주의 선하심을 알라. 그를 믿는 자는 복되도다.』  


5) 후각적인 호소

이제 냄새만 남았다. 유쾌한 냄새와 불유쾌한 냄새가 대조되어 나타나 있다. 중간적인 것은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후각적 호소의 구절을 보자

『그는 묘실을 향기로 가득 채우기 위하여 땅 속에서 잠시 동안 쉬어야 했다.』 향기는 그가 즐겨 사용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복음의 귀한 향기가 대지를 향기롭게 하기 위하여 밖으로 쏟아져야만 합니다.』

『한 어린이가 회심 할 때 나는 한 가족이 회심하리라는 희망을 갖습니다. 은혜는 값진 연고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향기를 사방에 뿌립니다. 향기로운 향로 상자 하나가 방안에 놓이면 그 향기는 곧 온 방을 채웁니다. 그는 우리의 기도를 기억의 책갈피 속에 장미 잎처럼 끼워 놓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책이 펼쳐질 때는 값진 향기가 그곳으로부터 퍼져 나올 것입니다.』

좋지 않은 냄새에 관하여도 말했는데 그때에는 대부분 항상 어떤 향기로운 것과 대조를 시켰다.

『"그는 슬픔의 세례를 받으시고 그로 인해 더 나아지고 영광스럽게 되셨다. 나도 역시 그렇게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하십시오. 주의 명하심을 따라 풀무불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불냄새가 여러분에게 날아오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고 있다.

『꼭 유황과 같은 불쾌한 불 신앙은 너무나 자주 우리의 탄원을 못쓰게 하지 않습니다.』

『그 지하 납골당에는 죽음의 안개로 덥힌 습기나 마땅히 있어야 할 부패한 공기도 없습니다. 일반적인 무덤 속에는 부패하는 유독한 냄새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무덤 속에는 어떤 냄새도 나지 없습니다. 오히려 향기가 있을 따름입니다."

또한 청각과 후각이 연결되어진 상태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우리 성도들의 귀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너무나 아름답게 들립니다. 그가 교회의 남편이라 불리든, 교회의 신랑이라 불리든, 교회의 친구라 불리든, 태초부터 죽음당한 어린양으로 불리든, 아니면 왕이나 선지자 또는 제사장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든, 실로나 임마누엘 또는 기묘자나 전능하신 모사라는 이름으로 불리든, 아무튼 그리스도의 모든 이름은 다 꿀이 방울져 떨어지는 벌집처럼 향기롭습니다.』

스펄젼의 설교에서 나타나는 센스어필(sense appeal)의 실재는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Ⅳ. 스펄젼 설교에 대한 평가


스펄젼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많은 설교를 우리에게 남겼다. 그 분량은 27권으로 된 "대영백과사전" 전집 제9판에 해당될 정도의 엄청난 분량이다. 이 설교를 소화내 내는데 만해도 10년이란 세월이 걸린다고 하니 그의 설교는 참으로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인터넷 웹 사이트에 게제된 그의 설교와 업적만 해도 수천에 이르른다.

이렇듯 엄청난 분량의 설교를 우리에게 남겼는데, 설교의 질은 어느 것 하나라도 떨어지는 것은 없다. 그것은 그의 메시지가 항상 깊은 연구와 묵상과 기도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그는 책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적어도 30년간 설교했으나 그는 책을 원했고,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았음에도 그는 책을 원했고,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경험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또한 책을 원했다. 그는 독서를 통해 다른 사람지식을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과는 대화하기를 거부했다. 항상 자기 성장을 이루는 설교자 스펄젼 그의 설교에 나타난 여러 면모를 짚어 보고자 한다.

  

1. 스펄젼 설교의 내용 분석

첫째로 그의 설교는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이다.

스펄젼은 천부적인 은사를 받은 설교자이다. 그러나 스펄젼이 위대한 설교자가 된 것은 그의 천부적인 웅변술이나 재미있는 예화의 사용이나 설교전달의 기교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설교한 데 있다. 즉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나사렛 예수를 사랑했고 나사렛 예수는 그를 사랑했기에" 뛰어난 설교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스펄젼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만을 설교의 중심 주제로 삼았고, 설교에서 그리스도만을 존귀케 하였기에 그의 설교는 위대하게 된 것이다. 스펄젼의 설교는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이었다.

그는 어떠한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하든지간에 그 메시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전하려고 했다. 그 자신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설교하였다" 라고 평가되어지기를 원했다.

스펄젼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아무도 그에게 명확히 구원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지 못했기에 그는 자기의 교우들이 자기가 젊었을 때처럼 방황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철저히 교리적이고 신학적인 설교를 통해 구원과 중생의 확신을 주며 신앙의 좋은 안내자가 되기를 결심하였던 것이다.

스펄젼에게 있어서 교리는 매우 실제적이며 삶의 여정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데 없어서는 아니 될 지침이었다. 그의 설교는 살아 있는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인격적인 메시지였다.

둘째, 그의 설교는 삶에 실질적인 변화를 주는 설교였다.

스펄젼 당시의 설교자들은 회중의 상황과 필요를 고려하지 않고 오히려 회중의 삶과 무관한 메마르고 지루한 산문체의 설교를 하고 있었다. 반면에 스펄젼은 모든 사람이 이해 할 수 있는 평이하고도 쉬운 구어체를 사용했으며 회중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고, 적용할 수 있는 설교를 하였다. 그의 설교는 은유, 직유, 이야기, 유추와 이미지로 가득찬 신선하고도 회중의 마음에 깊이 새겨지며 감동을 주는 설교, 풍성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메시지였다.

그는 마이크와 앰프가 생기기 이전에 6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메트로 폴리탄 테버네클과 1만 2천명이나 수용하는 서레이 가든 음악당에서 모든 사람이 쉽게 알아 들을 수 있는 힘있고 박력있는 음성을 가지고 있었다.

스펄젼의 설교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감명과 영감을 주고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었던 것은 토마스 트로저가 말한 것처럼 환상적이며 시적인 은유의 언어로써 회중의 마음 깊은 곳에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셋째, 그의 설교는 예언자적 감각이 있는 설교였다.

스펄젼은 복음주의 예언자적 설교자의 반열에 설 수 있을 정도로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사회의 구조적인 변화에 대한 관심보다는 전통적인 복음주의 입장에 서서 개인 생활의 도덕적 타락, 알코올 중독, 노름, 부유한 자들의 사치, 노예 문제 등에 관심을 가지고 설교를 했다. 특히 그의 교회는 구제활동을 위하여 런던에 구호소를 설치 하였다. 스펄젼 교회는 고아원을 운영하였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야간 학교를 운영하였다. 무엇보다 그는 말씀의 사역자를 양육하기 위해 목회자 대학(Pastor's  College)을 설립했다.

물론 스펄젼이라고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설교의 내용을 살펴보면성경해석을 하는데 있어서 역사적 상황의 이해는 조금 미약하다 볼 수 있다. 그는 구약성서를 지나치게 영적인 해석 (Spiritualization)을 할 때도 있었다. 스펄젼은 영적인 해석을 단순히 우화적 해석으로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여기에 상상, 풍유, 비유, 모형 상상력(Imaginition)등도 포함시켰다. 그는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 한계만 지킨다면 영적 해석을 하는 것이나 색다른 원문을 쓰는 것은 겁낼 필요가 없다 "고 말하고 있다. 성경의 장절을 살피고 당연히 해야 할 의무가 있는 뜻만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표현에 나타나 있지 않은 것까지도 그 안에서 빼내도록 하는데, 어느 경계선 안에 있어서는 채용할 것을 권하고 있다.

                                               

2. 감각적 호소의 영향


스펄젼의 메시지가 당대뿐만 아니라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세안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는 바로 복음에 대한 확신을 듣는 회중들의 감각에 호소하였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흔히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랬듯이 스펄젼 역시 구원의 확신을 체험한 후 생을 마칠 때까지 복음 전파의 사명감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복음을 외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평범한 어휘와 그의 뛰어난 유머 감각은 그의 설교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그가 사용한 말도 보통 사람의 말이었고 그 내용도 당시 영국 사람들이 보통 경험하는 일을 기초로 한 것이다. 그가 사용한 일화도 역시 그러했다. 그러므로 그의 설교는 누구나 즐겁게 들었고 또 은혜를 받았다."

스미스 (W. M. Smith)가 "스펄젼은 설교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한 것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그는 이면에서 19세기가 낳은 미국의 위대한 설교자 챨스 피니와 견줄 수 있는 인물이지만 스펄젼의 영향력을 지나치게 기교와 연계시키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 현대 일부 학자들은 스펄젼을 평가할 때 그의 설교적 기교에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인데스펄젼의 유산은 그의 육체와 함께 사라진 그의 화술 (Oratory)이나 그의 인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그의 확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복음에 대한 스펄젼의 확신은 자연히 설교의 성격을 결정 지었다. 스펄젼이 설교한 주제는 매우 다양했지만 설교의 중심은 항상 구원, 그리스도,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스펄젼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선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진정한 설교라고 보았고, 한 영혼을 위해 감각에 호소(appeal)한 것이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에게 호소하게 된 것이다.

브래스토(Brastow)는 그의 비평에서 스펄젼의 설교를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재능을 설교에서도 사용하도록 명령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모든 오관을 사용한다. 어쨌든 이 의견은 설교에 적용되지 않아 왔다. 설교를 들을 때 일반적으로 청각과 시각만 움직였고, 나머지 감각은 거의 활용하지 않는다. 스펄젼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듣는 사람이 모든 기관을 사용하도록 한다. 사실상 그는 회중들이 상상력을 사용하는 것을 배움으로 이 감각 기관들을 활동시키도록 요구한다. 스펄젼의 감각적 호소는 충분히 영향력을 미쳐 청중들은 마치 외적으로 보고, 듣고 접촉한 것처럼 눈물 흘리며 흐느끼지 아니할 수 없었다.

"템플 바"(The Temple Bar) 잡지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가 참으로 영감 받은 웅변의 폭발로 설교를 들을 때, 그는 온 회중들이 놀라워하고 청중의 큰 무리가 염려하거나 희망에 차있는 채로 '두었다'. 그러나 모든 경우 청중들은 마치 하늘이 열린 것을 본 것처럼 감동하였다. 그의 맑고 단순하고 그림같이 생생하며, 늘 설득력 있는 말은 모든 사람의 귀에 스스로 가락을 맞추는 어조로 들렸으며,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들어갈 출입구를 발견하였다.』

달간(Edwin C. Dargan)은 관찰력과 상상력 (감각적 호소의 한 부분인)의 면에서 그를 말하고 있다.

『지적인 면에서 그는 훌륭한 상상력과 풍부하고 빈틈없는 관찰력과 광범위한 독서와 좋은 기억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민활하고 영리하고 깊고 강하였다.』이런 면을 보면서 그의 감각적 호소가 끼친 영향을 내외적으로 설명되어진 것이다.

3. 감각적 호소에 나타난 장, 단점


위대한 설교자 스펄젼의 설교에 나타난 감각적 호소에 대해 장, 단점을 찾아낸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작업이다. 어떠한 설교이든 지나고 나면 아쉬움이 남는 법이다. 감각적 호소를 보아온 것에서 보다 더 나은 우리만의 설교를 만들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그의 설교는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의 청교도 전통 위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그의 감각적 호소에서 드러난 장, 단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설교에 나타난 장점을 살펴보자.

그는 오관을 통한 메시지의 핵심이 역시 "그리스도에 대한 사건" 내지는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주 단순하고 당연한 진리이지만 그의 설교의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다.     오직 그의 설교가 그리스도를 중심 어휘로, 그의 말씀이 중심 메시지로, 그리스도의 사건을 중심 주제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센스어필을 통해 소홀하기 쉬웠던 회중이 시각과 청각만 움직이는 설교에서 이제는 거의 모든 감각이 활용되어지도록 회중을 자극했다는 점이다. 마이크도, 앰프 시설도 없었던 시대에 그토록 많은 회중에게 영향력을 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사였고, 거기에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적 호소를 통해 가능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 영혼에 대한 뜨거운 구령열로 그리스도에게로 이끌고자 하는 초청의 메시지가 그 안에 개입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그는 감각적 호소를 통해 회중들에게 확신을 심어 주었고 소망을 주었다는 점이다. 그의 감각적 호소를 통해 확고한 신앙의 체험들을 설교에 삽입하였고, 확신 있고, 설득력 있는 설교를 위해 늘 준비하는 설교자였다는 것이다. 더불어 그는 회중들에게 현실과 내세에 대한 소망과 위로를 풍성하게 제시해 주었다. 그 당시 회중의 필요를 깊이 인식하고 있었고, 실제적인 위로와 사랑의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선포하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한 책의 사람이었던 그는 철저히 성경 중심의 말씀 사역이었다는 점이다. 설교에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이 본문의 말씀에서 벗어나는 비 성서적인 설교라 할 수 있는데, 스펄젼은 철저히 성서 중심이었다는 사실이다. 설교 가운데 성서의 인용이 많았고, 한 책에 편중되지 않고 광범위하게 신, 구약 전체에 고루 퍼져 있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외에 많은 장점을 들 수 있겠으나 이것으로 접고, 단점을 살펴보도록 한다.

그의 설교에 나타난 단점을 살펴보자.

스펄젼은 본문을 한두 구절만 선택하여 제목 설교를 하였는데, 스펄젼이 본문을 1-2절로 짧게 잡음으로 이러한 전통이 영국과 미국 설교의 특징으로 최근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본문을 짧게 잡고 설교할 때에는 설교자가 본문의 맥락을 무시하고 설교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게 된다.

최근에는 제목 설교를 지양하고 강해 설교 쪽으로 경향이 바뀌는데 있어서 보다 효과적인 말씀 사역을 이루기 위해 상호 보완과 절충이 필요하리라 본다.

또한 설교가 너무 길고 지루한 감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설교를 분석하며 그의 설교전집을 보았을 때 그 분량을 강단에 옮긴다면 과연 얼마나 될까?  적어도 50분에서 1시간은 족히 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시간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때 당시의 상황과 지금 현시대와는 다른 점이 있겠으나, 우리가 오늘날 예배 설교로는 너무 긴 감이 있고, 길어지다 보니 불필요한 표현도 많이 있을 수 있다는 맹점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설교가 주로 영혼 구원에 집중하다보니, 개인 구원은 강조가 되지만 사회 구원 측면은 미흡했다는 지적을 할 수 있다. 물론 사회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공동체를 향한 메시지가 아니라 개인적인면에 국한시킴으로 역사변혁의 사명을 충실히 구현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외에 외적인 요소로 스펄젼의 예배는 너무 설교 중심의 예배이고 메트로 폴리탄 테버네클 교회도 예전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고 설교를 듣는 강당처럼 교회를 건축하였다고 하는 아쉬움도 찾을 수 있다.

어찌 되었든 스펄젼은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의 긍정적인 면을 좀 더 부각시켜 오늘날 우리의 설교상황을 고려해 잘 접목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본다.

4. 감각적 호소를 통한 적용


블랙우드 (A. W. Blackwood)는 스펄젼을 가르켜 "사도 시대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설교자"라고 평가 했고, 위어스비 (Warren W. Wiersbe)도 그의 저서를 통해 "우리가 어떤 설교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칭송은 아마도 '그는 스펄젼과 같이 설교를 한다' 라는 말일 것이다," 라고 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틸리케 (Helmut Thielicke)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스펄젼을 사라" 고 극찬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스펄젼을 높이 평가하는 것인가?

그것은 그가 한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는 불타는 열정을 지닌 설교가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의 특징인 감각적 호소를 통해 회중들에게 새로운 생명으로의 거듭남을 촉구하였고 인기를 누릴 수 있었으나, 그는 늘 고백하기를 "오직 나는 그리스도만을 사랑하며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그리스도의 사람이길 원한다"라고 했다.

이러한 스펄젼의 설교에 대한 재평가는 오늘 우리 설교자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며, 특히 강단의 위기적 상황을 맞고 있는 한국의 강단에 귀감이 된다고 하겠다. 스펄젼이 오늘날 우리의 강단에 주는 바람직한 설교자 상을 생각해 보면서 적용해 보도록 한다. 앞에서 논한 주제에 관해 중복되어지는 것은 가급적 피하기로 한다.

그의 설교의 목표가 "영혼 구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 강단에도 신선한 "영혼 구원"의 바람이 일어야 할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은  IMF 시대로서, 국제 금융기관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할 수밖에 없는 참담한 상황에 처하면서 많은 사회문제를 야기 시키고 있다. 곤궁에 처한 사람들, 직장을 잃어 거리를 방황하는 가장들.. 그 아픔을 지닌 모든 영혼들이 우리의 따스한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그 한 영혼이 주께 돌아오고 치유 받을 수 있도록 우리가 앞장서 힘써야 할 것이다.

그의 설교는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철저한 준비와 묵상과 상상이 겸비되어진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고, 아무리 바쁘고 힘든 사역을 했다 할지라도 설교준비만은 철저히 해야 할 것이다. 스펄젼처럼 설교를 모든 사역의 최우선 순위에 두는 철두철미함이 오늘날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설교의 준비 없이 습관적으로 강단에 나가는 것은 죄악이다"라는 스펄젼의 경고의 말을 가슴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셋째, 스펄젼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설교의 본문이 주어질 때까지 기도로써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가운데 "시온의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며, 그 본문을 깊히 연구하고 묵상하였던 것을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이다.

넷째, 그는 그가 전한 메시지의 내용대로 산 사람이다. 그의 청교도 후계자로서 경건한 삶을 살았고 늘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흠이 없기 위해 늘 노력하는 자였다.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인데  설교자는 늘 힘써 말씀에 본이 되는 삶이어야 하겠다.

그는 늘 겸손한 자였고, 오감을 통해 감각적 호소를 가장 생생하게 효과적으로 전달 할 수 있었다.

우리의 과제는 그의 특별한 은사 감각에의 호소(sense appeal)를 좀 더 깊이있게 이해하고, 회중들로 하여금 설교에 참여토록하며, 직접 그림을 (word picture)그릴 수 있도록 유도하여야겠다. 회중의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며 늘 겸손하게 주어진 설교단을 위해 헌신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삶은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전 삶을 불꽃처럼 바친 스펄젼의 생애를 보았고, 그의 설교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탁월한 감각에의 호소에 관해 살펴보았다.

시대가 변하면서 사고의 폭이나 사상이 바뀐다고 하지만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신앙의 선배들이 남겨놓은 거룩한 업적들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미디어 시대, 최첨단의 시대 속에 살고 있다. 삶 자체가 편안해지고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것들로 풍성하다 하지만, 영혼의 진정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늘 무엇인가에 쫒겨 다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어쩌면 100여년 전 스펄젼 당시의 모습과 흡사하지 않는가? 그 당시에도 수많은 설교자들이 있었지만 유독 스펄젼이 드러난 것은 회중의 필요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고, 영혼의 안식을 누리지 못한 회중 개개인에게 말씀이 선포되어지고, 직접적으로 그들 심중에 호소( Sense Appeal )했기에 가능했으리라 본다.

스펄젼은 진실로 한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였고, 설교의 목적을 철저하게 영혼 구원에 두었던 위대한 설교가였다. 그는 진리 전체를 설교했으며 그 진리의 핵심은 "그리스도"로 맞춰졌다. 그는 본문 선택이 순전히 하나님의 뜻에 달렸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가 설교를 준비해 가지고 단에 올라 갔으나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그 즉시 전혀 다른 본문으로 설교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 논문을 정리하면서 함께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하는 것은 설교단을 맡은 말씀 사역자들이 보다 신선한 눈을 떴으면 하는 바램이다. 구태연한 이론적 설교 형태와 의무감에서 나타나는 준비되지 못한 설교, 성경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언어로서의 선포가 아닌 설교자 자신의 인간 언어 등등... 수많은 문제들이 우리 안에 내재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스펄젼과 같은 효과적인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로는 변화하고 있는 회중들의 다양한 요구를 파악하지 못하고 융통성 없이 틀에 박힌 진부한 논리와 설명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회중의 마음을 꿰뚫어 볼 정도로 회중이 지금 필요로 하고 있는 것과 구체적으로, 직접적으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잠재적인 필요까지도 알아 채워주는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회중들을 사로잡는 훌륭한 묘사 즉 감각에 호소( Sense Appel )하는 살아 있는 설교를 위해 온 정열을 쏟아 부어야겠다는 것이다. 물론 목회자로서 맡겨진 일과 수많은 설교의 중압감으로 인해 온전히 설교 준비를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현실이다. 그러나 조금씩만 주님께 투자하면 가능한 일이라 사려된다.

  요즘 풍부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는 설교집들, 컴퓨터 통신이나, 설교 프로그램들로 인해 자칫 자신이 기도하고 준비하는 설교이기보다 다른이들의 설교를 전달해 주는 '다른이의 설교' 라는 과오를 범할 위기에 처해있다. 이러한 것들로 어떻게 영혼을 사랑하며 회중의 변화된 삶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우리 스스로 자성의 목소리를 높이고 이제 스펄젼의 생애와 그의 모든 설교를 위한 열정을 본 받아야겠다.

웨렌 위어스비는 그의 설교 사역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데 이것으로 본 논문의 결론을 내리고 싶다.

"우리처럼 스펄젼도 결함과 취약점이 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확대하였고 하나님의 독생자를 영화롭게 했다. 우리 모두가 다 스펄젼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하는데 스펄젼처럼 신실할 수는 있는 것이다."





참 고 문 헌

1. 국내 서적

곽안련. 「설교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0.

김남준. 「목회자의 아내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서울: 두란노, 1998.

박근원. 「오늘의 설교론」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5.

박종구. 「스펄젼 목사의 생애」 서울: 신망애출판사, 1980

박종구. 「세계 제일의 설교자 스펄젼! 그의 목회와 가정을 본다」 서울: 신망애출판사, 1998.

박영재. 「설교자가 명심해야 할 9가지 설득의 법칙」 서울: 규장, 1997.

박영호. 「청교도의 신앙」 서울: 에수교문서선교회, 1981.

염필형. 「설교신학」 서울: 성광문화사, 1987.

이동원. 「청중을 깨우는 강해설교」 서울: 요단출판사, 1992.

이용호. 「강해 설교와 전달」 서울: 새한기획출판부, 1992.

이주영. 「현대 설교학」 서울: 성광문화사, 1983.

정성구. 「개혁주의 설교학」 서울: 총신대학출판부, 1991. 

정장복. 「설교학 서설」 서울: 엠마오, 1992.

한국교회 장기목회 연구원 편. 「영혼을 울리는 설교개발」 서울: 서로 사랑, 1997.

홍일권. 「설교자를 성숙으로 이끄는 207가지 지혜」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7.

후등광삼. 「설교학」 서울 : 제일출판사, 1969.

_________ .「스펄젼 설교전집」 서울: 보문출판사, 1981.  


2. 번역서적

Adams, Jay E. 「스펄젼의 설교에 나타난 센스어필」 정양숙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Bohren, Rudolf. 「설교학 원론」 박근원 역. 서울: 기독교출판사, 1982.

Blackwood, Andrew W. 「설교는 예술이다」 박광철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3

Brown, H. C. 「설교의 구성론」 정장복 역. 서울: 양서각, 1984.

Criswell, W. A. 「목회자 지침서」 김경신 역. 서울: 정음출판사, 1984.

Dallimore Arnold. 「챨스 스펄젼」 김동진 역. 서울: 두란노, 1993.

Day, Richard. 「스펄젼의 생애」 생명의말씀사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3

Demaray, Donald E. 「강단의 거성들」나용화 역. 서울: 생명의말씀사, 1976.

Donald E. Demaray. 「스펄젼의 경건과 기도」 정영선 역. 서울;생명의 말씀사, 1982.

Knott, H. E. 「설교 작성법」 곽정웅 역. 서울: 태광출판사, 1979.

Randolph, David James. 「설교의 갱신」정용섭 역.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76.

Reid, Clyde. 「설교의 위기」 정장복 역.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Robinson, Haddon W. 「강해설교」 박영호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1983

Spurgeon, C. H.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上」 이종태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2.

Spurgeon, C. H. 「아침묵상」 안보헌 역.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7.

Stott, Jojn R. W 「현대교회와 설교」 정성구 역. 서울; 반석문화사, 1979.

Thielicke, Helmut. 「스펄젼의 설교학」 김병로 역. 서울: 신망애출판사, 1979.

Trim C, De preek. 「설교학 강의」 고서희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6.

Wiersbe, W & Wiersbe, D 「위어스비가 권면하는 설교원리」 김창모역. 서울: 나침반출판사, 1992

Willimon, William H. 「통합적 설교」 이형의 역.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교육부, 1982


3. 외국서적

Achtemier, Elizabeth. Creative Preaching.  Nashville: Abingdon, 1980

Adams, Jay E. Sense Appeal in the Sermons of C. H. Spurgeon. Grand Rapid; Michigan: Baker Book House, 1976.

Alfred E. Garvie, The Christian Preacher.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21

Dargan, E. C. A History of Preaching. 2Vols, Grand Rapids, Mich: Baker Book House, 1954.

Fant, C. E., Pinson, W.M. 20 Centurries of Great preaching, Fortress Press, Philadelphia, 1965.

Lorimer, George C., Charles Haddon Spurgeon. The Puritan Preacher. Boston: Jas. H. Earle, Publisher, 1892.

Muray Iain, ed. The Early Years. London: stockwell, 1985

Needham, George C., Charles H. Spurgeon His Life and Labors. Manchester, Mass: Albert Needham Pub., 1890

Spurgeon, C. H. An All - Round Minstry. London: Passmore and  Alabaster, 1900.

Spurgeon, C. H. Spurgeon's Sermon: memorial Libray. New York: Funk and Wagnalls Co, 1982.

Thielicke Geknet. Encounter With Spurgeon. Grand Rapids: Baker, 1963. 

4. 정기간행물

계일승. "천재강도인 스펄젼." 「신학지남」 1954년 제23권 2집, P.65.

박용규. "스펄젼의 영향력." 「그말씀」1993년 3월호, P. 123.

박희춘. "설교자의; 진지함과 적절함에 관하여." 「목회시사정보」 1997년 7월호. P. 23.

이동원. "무엇이 스펄젼의 설교를 만들었는가?" 「그말씀」1993년3월호, P.113.

좌  담. "한국교회 설교 이대로 좋은가?" 「기독교 사상」 1976년7월호,  P.102.

편집부. "스펄젼의 생애와 사역." 「그말씀」1993년 3월호, P.104.

Stowell, Joseph M. "21세기를 바라보는 목회." 「목회시사정보」 1997년 5월호. P.16.

  Holmes, Robert Leslie "탁월한 설교를 위한 열정." 「설교자 노트」 1998년 5`6월호 P.32.

출처 : 동경성시화운동본부 HOLY CLUB
글쓴이 : kaporet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