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스크랩] 심복순 권사-천안 열매맺는교회

이아기 2007. 1. 30. 01:18
 

심복순 권사-천안 열매맺는교회

 


 

인생이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 했는데 내 나이 올해 86세.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드린다. 더구나 이 나이에도 많은 교회에서 간증을 요청하고 65년째 운영하는 천안 호두과자사업도 여전히 일선에서 돌볼 수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심복순이라는 이름보다는 천안 호두과자할머니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은 매스컴을 통해 여러차례 보도된 것 외에도 천안의 명물이 된 호두과자를 맨 처음 만들어 지금까지 외길을 걸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교회의 권사 심복순에 가장 만족하며 그 직분에 합당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인생이란 지나고 보면 참 허망하다. 잘했다고 생각되는 것보다 아쉽고 부족했던 일이 더 많다. 그러나 바로 그 속에서 참된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제부터 언제나 나의 삶 속에 좌정하셔서 놀랍게 역사하시고 섭리하셨던 하나님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려 한다. 자칫 자랑이나 미담으로 흐르지 않길 기도하며, 이 글을 읽는 분들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분이 단 한분이라도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천안을 생각하면 삼거리와 능수버들, 호두과자를 떠올린다. 영·호남으로 길이 갈라지는 교통 요충지였고 유난히 버드나무가 많아서였다. 그런데 이 두가지는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자취를 감추었고, 65년 전에 첫선을 보인 호두과자만 맥을 잇고 있다. 이 호두과자를 처음 만든 것은 남편이었지만 호두형태의 모양과 팥앙금, 호두를 넣자는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은 바로 나였다. 나는 이 지혜를 주님이 주신 것이라고 믿는다. 이 때문에 나는 많은 물질의 축복을 얻었고 하나님사업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가질 수 있었다.


내 고향은 경기도 이천이다. 딸이 귀한 집안의 외동딸이어서 부모님의 귀여움을 한껏 받으며 자랐다. 건축측량기사였던 부친 때문에 여기저기 자주 이사를 갔지만 당시로서는 드물게 여학교까지 졸업했다. 딸을 가르치면 집안이 망한다고 말할 정도로 무지몽매하던 그 시절에 대전 정명여학교를 마친 것이다. 그런데 토속종교에 심취한 어머니가 나의 사주를 들고 점쟁이를 찾았는데 “잘사는 부잣집에 시집가면 일찍 죽으니 가난한 집에 가야 한다.”는 점괘가 나왔다. 이 말을 그대로 믿은 어머니는 대학을 나온 좋은 신랑감을 모두 마다하고 조실부모하고 학교도 보통학교를 중퇴한 과자기술자인 조귀금이란 청년을 내 배우자로 점찍으셨다. 주위에서 모두 놀랄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부모가 정해주는 배필을 거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오직 순종뿐이었다. 내 나이 19세였는데 남편은 24세였다. 아버지는 절대 안 된다며 결혼을 3년이나 미루시다가 승낙하셨다. 그런데 결혼 후 더 큰 마음고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고 보니 남편은 천안에서 소문난 한량이었다. 처음 결혼이야기가 나왔을 때 남편은 정말 보잘것없는 사람이었는데 그동안 제과기술자로 많은 돈을 벌었다. 남편은 일본 나가사키의 유명한 과자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제과기술을 익힌 뒤 한국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 기술을 따를 사람이 없었다. 가는 곳마다 엄청난 대우를 받았다. 당시 도지사 봉급이 80원인데 남편은 숙식까지 제공받으며 1백20원을 벌었다. 막상 결혼식을 올리고 나니 남편은 친정에서 자신을 무시해 3년이나 결혼을 미룬 것으로 여겨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그래서 보란 듯이 결혼한 지 1주일 만에 여자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깜짝 놀랐지만, 당시에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기에 달리 항의를 하지 못했다.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신앙이야기가 빠졌는데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열심히 교회에 출석했다. 여름성경학교나 교회행사가 있으면 항상 맨 앞자리에 앉아야 직성이 풀렸다. 왠지 교회에 나가면 마음이 포근해지고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부모님도 반대하지 않으셨다. 그때 내가 배운 성경말씀 중에 '불평하지 말고 감사하며 인내하라'는 가르침을 좌우명으로 가슴에 새겼다. 그래서 남편이 외도해도 참 기로 했다. 오히려 집에 데리고 온 여자들을 동생처럼 보살폈다. 남편이 오히려 `너는 속도 없냐'고 말할 정도였다. 또 교회에 나가는 내가 미워 성경책을 세 번이나 찢어 던졌는데 그때마다 소중히 다시 붙여 놓았다. 나는 주위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예수 믿지 않고 남자로 태어났다면 나 역시 한 여자로 만족할 수 없었을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남편이 바른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인데 지금은 때가 일러 싸우지 않고 기도만 하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내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 신앙적인 면에서 오히려 감사의 조건이 되는 것 같다. 남편의 사랑에 만족하고 돈도 잘 벌어서 자식 키우고 돈 쓰는 재미에 흠뻑 빠졌더라면 나는 눈물의 기도를 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제과점을 운영하던 남편은 늘 새로운 과자나 빵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내가 “천안 근처 광덕면에서 많이 나오는 호두와 흰 팥을 사용해 과자를 만들면 어떨까요. 재료를 쉽게 얻으니 만들기 쉽잖아요.”라고 제안했다. 일제시대에는 밀가루와 설탕 등 제과재료가 매우 귀했기에 이런 제안을 한 것이다.

호두의 본딧말은 호도(胡桃)다. 이는 고려 충렬왕 때 유청신이 사신으로 호국(원나라)에 다녀오면서 씨앗을 가져와 심고 이름을 몰라 호지(胡地)에서 온 과일이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이왕이면 호두모양의 과자를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내 제의가 받아들여져 서울 을지로 주물공장에서 틀을 맞춘 뒤 과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1934년, 드디어 천안호두과자가 첫선을 보였다.


1930년대 먹거리가 부족했던 시절 우리 가게에서 판매하는 호두과자는 말 그대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가게 앞에 줄까지 설 정도였다. 특히 단것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에게 인기가 더 많았다. 지금도 한국을 찾아온 일본인 중에서 이곳에 들렸다가 옛날의 바로 그 맛 이라며 회상에 젖는 사람도 많다. 천안에서 유명해진 호두과자는 이제 전국을 무대로 팔려나갔다. 다음 중국 천진과 상해 서주까지 수출했고 일본 관동군사령부 산하 군부대에 납품했다. 이때 상호를 학화(鶴華)라고 붙였다. 학처럼 오랫동안 빛나라는 의미였다. 당시 제일 어려웠던 일은 밀가루를 구하는 것이었다. 특히 대동아전쟁 때는 호두과자를 만드는 일보다 밀가루 구하는 일이 더 힘들었다. 사실 학화호두과자가 이미 유명해졌고 독점품이었으니 부족한 밀가루를 좀 묽게 반죽하고 팥과 호두도 좀 적게 넣으면 더 많은 이득 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재료나 양을 조금도 바꾸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정했다. 흉년이 들어 팥을 구하기 힘들고 가격이 엄청 올랐어도 정해진 정량을 다 채웠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이런 비슷한 경우를 너무 많이 경험한다.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는 주님을 열심히 찾고 간구하다가 축복을 받고 모든 것이 편해지면 신앙도 함께 나태해지는 것이다. “변함없는 호두과자를 만들 듯 신앙생활과 기도도 변함없이 하자” 이런 자세로 사업과 교회생활을 병행했다. 사실 당시 내가 사업에 뛰어든 것은 남편이 놀기를 더 좋아해 내가 관리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돈 버는 재미에 푹 빠져있던 나는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배고픔이 어떤 것인지 죽음의 공포가 어떤 것인지를 체험하게 되었다. 아픈 사람이 병원을 찾듯이 죄많은 사람이 교회에 가서 눈물 흘리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죄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한다. 자신이 죄가 없다고 생각하면 느끼지도 울지도 회개하지도 않는다.

전쟁이 터져도 피란 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내게 우리 집 머슴으로 있었던 젊은이가 붉은 완장을 차고 북한인민군과 함께 찾아왔다. 그리고 총부리를 내게 겨누며 돈 이십만원과 시계, 망원경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주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려워 고개도 못 들던 친구가 내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기도하니 마음이 차분해지며 진정됐다. 저 친구가 머슴으로 있으면서 시계와 망원경을 얼마나 갖고 싶어 했는가를 느낄 수 있었다. 태연 하게 있던 돈과 시계를 주고 망원경이 있는 곳도 알려 주었다. 두 사람은 아주 만족해하며 돌아갔다. 지금 돌이키면 이 상황은 주님이 지혜를 주신 것이라 믿는다. 옛날을 생각하며 그 친구를 야단치거나 거부했을 때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지 모른다. 우리 집은 인민군이 묵는 숙소로 변했고 모든 살림살이는 그들의 것이 되었다. 그동안 힘들게 모은 것은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6·25 당시 큰아이는 경복중학교, 둘째는 경기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남편이 세 번이나 서울에 올라가 간신히 아이들을 천안으로 데려왔다. 우리 식구는 집을 인민군에게 내주고 남의 집을 전전하며 산속에 숨어 지냈다. 모두 단벌로 집을 빠져 나왔기에 빨래를 할 때는 속옷과 겉옷을 차례로 빨아 입었다. 아이들 바지의 엉덩이 부분이 다 헤어졌지만 천이 없어 속주머니를 뜯어 기워 입힐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먹을 것이 없어 굶는 때도 많았는데 그전에 많은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지 않고 잘해준 덕분인지 이것저것 식량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많았고 그 때문에 남들보다 고생을 덜했다. 그때 인생의 귀한 교훈을 얻었다. 남에게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고 도움을 주고 베푸는 일에 내가 더 열심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남에게 베풀고 갚으면서 사는 것이 더 복되다는 말씀이 있다. 은혜를 입으면서 `나도 이렇게 남에게 갚아야지'라는 다짐을 했다. 그때 고생하며 움츠려 지낼 때 누가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해주면 그렇게 고맙고 감사했다. 남이 잘해주면 자기도 잘해주고, 남이 못하면 자신도 못하는 것이 어느 누구에게나 당연한 일이다. 남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배려하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때 얻은 경험으로 같은 말이라도 다정하게 해서 남에게 상처를 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민군이 물러가고 휴전이 되면서 우리 가게는 다시 문을 열었고 예전의 명성을 다시 찾아 문전성시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때는 거지 가 엄청나게 많았다. 피란을 왔다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이나 고아들이 문전걸식을 하며 떠돌았던 것이다. 우리 가게에도 거지들이 수시로 찾아왔다.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던 12월 어느 날, 아기를 업은 20대 후반의 여자거지가 가게를 찾아왔다. 다리 밑에서 천막을 치고 사는데 여름옷을 입은 갓난아이에게 속옷 한 벌만 사달라고 간청했다. 너무 불쌍해 시장에 데리고 가서 아기 옷과 맨발인 그녀를 위해 버선까지 사주었다. 다음해 여름, 다시 불쑥 나타난 그녀가 호박 두개를 내게 내밀었다. 다리 밑 공터에 호박을 심어 거둔 것이라고 했다. 팔아서 다른 데 쓰라고 말했지만 막무가내로 놓고 갔다. 그날 저녁 나는 정말 따뜻한 정이 묻어나는 호박찌개를 먹었다. 당시에는 호두과자를 모두 손으로 직접 구웠기에 부스러기가 많이 남았다. 그래서 그것을 챙겨 놓았다가 배고픈 사람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1970년대 중반 어느 날 21세의 청년이 나를 찾아와서 “저의 어머니께서 제가 호두과자 부스러기를 먹고 컸다고 말씀하셨어요. 할머니가 아직도 그곳에 계신지 알아보라고 해서 왔어요.”라고 말하면서 공손히 인사를 하고 갔다. 그 후 그의 어머니가 울먹이며 가게로 전화를 했다. 그리고는 세월이 흘러도 어려울 때 도움을 받았던 기억을 잊을 수 없었노라고 말했다.


천안성심교회를 건축하게 된 과정을 돌이켜볼 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깨닫게 된다. 나는 원래 내가 소유한 과수원터 중에서 가장 좋은 땅에 하나님의 교회를 짓겠다고 작정을 했었다. 그런데 둘째아들이 금광사업하는 친구를 돕는다며 보증을 섰다가 일이 잘못되는 바람에 내 소유의 많은 땅이 모두 압류를 당하고 종국에는 경매에 넘어가게 되었다. 보증서지 말라는 성경말씀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 여파는 엄청나게 크게 다가왔다. “이제 사업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모든 것을 정리해 아이들이 살고 있는 서울로 가자. 더 이상 천안에 미련을 갖지 말자.” 내가 서울로 갔더라면 교회를 건축하고 미력하나마 각종 선교사업에 참여하는 일도 그때를 기점으로 더 이상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경제활동을 멈추고 자녀에게 용돈을 받아 생활하면 선교 일을 하고 싶어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업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앞에 한 약속은 꼭 지켜야한다'는 생각으로 과수원터 중 3백평을 약속대로 교회에 바치고 떠나려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세무서측은 내가 돈을 빼돌리기 위해 땅을 판 것으로 여기고 1천만 원의 양도소득세를 부과했다. 1977년 당시의 1천만 원은 상당히 큰 액수였다. “하나님, 이렇게 억울한 경우가 있습니까. 아들이 빚보증을 잘못 서 그 많던 재산을 모두 빼앗긴 것만 해도 괴로운데 교회에 바친 땅에 양도소득세라니…” 세금을 내지 못하면 일단 구속된다고 했다. 평생 남을 속이거나 나쁜 짓을 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던 나, 아들이 보증 잘못 선 죄밖에 없고, 남은 땅을 교회에 바쳤더니 이런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나는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1977년 12월22일. 성탄절을 3일 앞두고 나는 천안경찰서에 유치됐다. 유난히 추운 날씨가 내 기분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2주후 내가 무죄인 것이 밝혀져 당당히 경찰서를 나올 수 있었지만, 그 당시 차디 찬 마룻바닥에서 내가 느꼈던 감정과 생각은 복잡하고 미묘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러한 경험을 한 것도 감사하다. 수감생활을 통해 내가 무엇에 대해 감사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생의 목표를 분명히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들어간 뒤 처음엔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지만 내가 당하는 고통이 의를 위해 핍박 받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자 나의 고난이 오히려 복된 것으로 여겨졌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쁨이 강물처럼 넘쳤다. 하나님께서 나를 단련시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이런 과정을 밟게 만드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기도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고난에 감사하며 그것을 통해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죄를 짓지 않고 이런 곳에 들어오는 경험을 한 데 대해 감사하자. 일제 때 신앙의 선조들 중 오직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얼마나 많은 분들이 이런 곳에서 목숨을 잃었던가. 이것을 계기로 주님께 더 헌신하자” 경찰서에서 나온 후 은행대출을 받아 세금을 냈고 교회명의로 땅의 등기도 마쳤다. 더 항의를 하지 않고, 세금이 나라를 위해 긴요하게 사용되기만을 기도했다.

이 첫 교회의 기공식을 앞두고 주님은 내게 귀한 선물을 주셨다. 그것은 그토록 오랫동안 간구했던 남편의 구원이었다. 남편은 오토바이를 타다 다쳐 골수염으로 오랫동안 고생했고 자주 병원신세를 졌다. 나중에는 휠체어를 타고 지내야 했다. 그런데 그동안 나는 남편의 건강보다 구원을 위해 더 많이 기도했다. 그리고 성전 짓는 건축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놀랍게도 주님은 이 기도에 응답하셨던 것이다.


기도응답으로 남편이 구원받은 이야기를 자세히 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 시절 그토록 나를 괴롭히고 속을 썩이던 남편은 병환으로 거동을 못하게 되자 그제야 마음이 많이 약해졌다. 나는 아예 남편에게 경북 김천의 용문산기도원에서 지낼 것을 권유했다. 믿음이 없던 남편은 처음엔 무슨 소리를 하느냐며 완강히 반대하더니 병세가 심해지면서 인간의 의술로 치료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승낙했다. 매주 월요일이면 밑반찬을 들고 용문산을 찾았다. 가게도 돌보아야 하니 여간 바쁘고 힘들지 않았다. 그곳에서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다. 남편은 기도원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을 영접하고 병도 치료받는 기적을 체험했다. 제대로 걷지도 못했는데 치료를 받은 후 용문산 정상 사자봉과 맷돌바위까지 오르내렸다. 거듭난 남편은 이후 나의 신앙생활을 적극 지원해 주는 것은 물론 나중에 집사안수까지 받았다. 또 첫 교회인 성심교회를 지을 때는 맨 먼저 터를 닦았고 기공예배의 모든 준비도 도맡아 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남편이 성전 짓는 건축가가 되게 해달라는 저의 기도에 응답하셨군요. 믿고 구하면 무엇이든 이뤄 주신다는 말씀 을 다시 확인시켜주시니 감사드립니다.'

1979년 1월에 시작된 교회건축은 그해 12월에 완공돼 입당예배와 헌당예배를 함께 드렸다. 참으로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나의 마음에 한없는 기쁨과 감사가 솟아올랐다. 성전을 하나 봉헌하는 것이 이렇게 기쁜 일인 줄 몰랐다. 당회장으로 천안중앙장로교회 이상구 목사님이 오셨다. 나는 성전봉헌의 감격 속에서 평생 일곱 개의 성전을 짓겠다는 서원을 했다. 성경에서 7이 완전 숫자이기도 했지만 당시 내 나이가 66세여서 그 이상 지을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넘치게 축복해 주시는 하나님은 오늘까지 여덟 개의 성전을 짓는 데 참여하도록 역사하셨다. 너무도 감사한 일이다.

그동안 이뤄진 교회건축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부족한 손길을 통해 이룬 것이라고 믿는다. 그 일은 돈이 있다고 해서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인도와 성령의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아들의 빚보증으로 그 많던 재산과 땅을 다 잃고 난 후에 나의 재물관도 변했다.

예전에 하나님께 드릴 때는 내 것의 일부를 드린다는 자세였다. 그러나 이젠 내 것 전체가 하나님의 것이니 필요하다고 하시면 언제든지 드려야 한다는 것으로 변했다. 세상에 재물을 쌓는 것은 허망하다. 주위에 하나님께 드릴 것이 없어 못 드린다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그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돈이 없으면 시간을, 시간이 없으면 건강이나 지식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 드릴 수 있다. 사실 하나님께 복을 받아야 더 많은 봉사와 헌신을 할 수 있다. 성경 신명기 28장을 보면 복 받는 방법이 단순명료하게 나와 있다. 야훼의 말씀에 순종하면 모든 복이 우리에게 임한다고 했다. 들어와 도 나가도 복을 받고, 우리와 관계하는 모든 것들과 떡반죽 그릇까지 복을 받는다고 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을 받으려는 마음에 앞서 복을 받기 위해 그릇을 준비해야 한다. 주님은 이 믿음의 그릇의 분량대로 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한 마음을 하나님은 헤아리시고 이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주위에 교회 안에서는 천사지만 세상으로 나가면 세 상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주님과 나의 영적 관계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늘 점검하고, 부족한 것은 기도와 헌신으로 채워야 한다.


교회건축을 많이 한다는 소문이 나서 그런지 교회를 지어 달라거나 건축하는 데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 교회 중 에서 감동이 오면 찾아가 보곤 했다. 천안의 모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하려고 남의 밭에 천막교회를 세우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다 겨우 3백만 원을 모아 땅주인에게 3백만 원을 건넸다. 그런데 목사님이 영수증을 받지 않아 땅주인이 나중에 언제 돈을 주었느냐며 시치미를 떼고 오히려 천막을 뜯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목사님은 나를 찾아와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며 도움을 호소했다. 목사님은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돈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었다. 성도들도 천막교회에 정을 붙이지 못했다. 나는 우선 그 교회성도들이 교회건축에 대한 자신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 같이 기도하며 간증집회를 갖자고 제안했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교회에서 강사를 초청하면 준비기도를 충분히 하라고 말한다. 강단에 서면 교회의 영적 상태가 몸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집회를 앞두고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합당하고 용기를 주는 말씀이 되도록 지혜를 주세요.” 천막교회 안에는 얼마 되지 않는 성도들이 앉아 있었다. 나는 마가복음 9장23절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을 주제로 간증하고 함께 기도하자고 권면했다. 한참을 기도하는데 천막 밑에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자그마한 돌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 돌을 강대상 앞으로 들고 나가 성도들과 목사님에게 말했다. “여러분, 지금부터 이 돌이 금덩어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여러분은 이상한 늙은이가 주책을 부린다고 할지 모르지만 믿음은 믿을 수 없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예측할 수 없으니 믿고 구합시다.” 그런데 목사님과 성도들이 감동을 받고 아멘을 외쳤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모르겠다. 분명 성령의 강한 인도였다. 그로부터 두달이 지난 후 천막교회 목사님이 다시 찾아와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날 기도 후에 목사님은 돌을 소중히 간직해 두 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서울의 강남중앙침례교회(김충기목사)에서 연락이 왔는데 교회개척자금 1천5백만 원을 준비했으니 가져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한편 목사님은 그 돌을 가지고 금은방에 들러 그 돌만한 크기의 금 가격이 얼마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금은방주인이 약 1천5백만 원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믿고 구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뤄주신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체험한 은혜로운 사건이었다. 목사님은 그 일로 신앙의 큰 도전을 받아 교회를 건축한 후에 “이 교회가 세계만방 사람들이 와서 기도하는 곳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 교회가 많은 외국인들이 독립기념관을 구경하러 오는 길에 들러 기도하고 예배도 드리는 교회가 되었다고 간증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모두 듣고 계시며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구하는 것이라면 모두 이루어 주신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주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놀랍게 역사 하고 계신다. 따라서 우리의 삶 전체는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이 돼야 한다.


많은 성도들이 “권사님은 돈을 많이 버시니 얼마나 좋을까”라는 말을 자주 한다. 세상살이가 모두 돈으로 연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돈 때문에 오히려 자녀들을 잘못된 길로 가게 만드는 경우를 자주 본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바른 물질관을 갖는 것도 신앙생활을 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나는 자녀들에게도 돈에 대해서는 철저한 편이다. 비록 자녀들에게 돈을 빌려 주어도 반드시 받는다. 남편이 언젠가 친구에게 돈을 빌렸는데 친구가 돈을 던져주며 “돈 꼭 갚어”라고 말해 기분이 매우 상했다고 한다. 그래서 남편은 그 돈을 갚을 때 “여기 돈 있다”며 다시 던져 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친구가 “내가 웃으면서 돈을 꿔 주었으면 너는 천천히 돈을 갚았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도 자녀들에게 “돈 꼭 갚어”란 말을 사용한다. 그리고 번만큼 쓸 것과 여유 있을 때 쌓아 놓지 말고 나눌 것을 가르친다. 사실 돈이란 돌고 도는 것이다. 잠시 내 소유가 되는 것이지 그것이 결코 영원하지 않다. 오래 갖고 있으면 썩을 뿐이다. 물질보다는 작은 것에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이 더 중요하다.

수십 년 전에 신문에 난 일이다. 홀로된 부인이 채소장사를 하다 4백원을 밑졌다. 당시에는 그 돈이 적지 않은 돈이었는데 그 부인이 너무 비관한 나머지 자살을 한 것이다.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인생의 가치를 돈에 두었기에 그런 슬픈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모두 고달픈 인생들이다. 기쁨이 없고 감사가 없고 행복이 없다. 정직하게 행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산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늘 함께함을 느낄 수 있다. “내가 네 마음 다 안다. 조금 도 걱정하지 말아라. 네가 원하는 건 내가 다 이뤄 주마” 이런 신앙의 자세를 늘 유지한다면 삶 자체에 두려울 것이 없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게 된다. 나는 자녀교육을 위해 늘 기도했다. 장사로 바빠 제대로 돌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누구나 부러워할 좋은 대학을 나오게 하셨고 좋은 가정과 직장을 주셨다. 또 하나님도 잘 섬기니 더 바랄 것이 없다. 나는 교회 재정부장을 오래 했다. 그런데 교회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성도들을 많이 보았다. 교회 일꾼이라고 세워 놓았는데 교회를 이용해 자기 이득을 챙기려는 사람도 많고, 교회를 위해 쓰는 데 돈 1천원을 아까워하는 성도들도 있었다. 또 성도들이 헌금한 공금은 아낌없이 쓰면서 자기 돈으로 종이나 풀을 사면 어김없이 영수증을 들고 와 돈을 청구하는 신자들도 많다. 교회물건을 아끼고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물컵 하나 종이 한 장도 교회 것이라는 생각으로 아껴야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며느리에게 교회잔치나 행사에 가더라도 음식을 싸오지 말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신앙의 기본이다.

신명기 28장12절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의 말씀이 있다.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 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라고 기록돼 있다.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나 다름없고 주의 종을 섬기는 것은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자는 반드시 축복을 받는다.


우리 호도과자 가게에 자주 들리는 보따리 장사 아주머니가 있다. 그녀는 자투리 헝겊으로 조각이불과 조각보를 만들어 팔러 다녔다. 사연을 들어보니 그녀의 시어머니는 서울의 유명한 교회 권사였는데 그녀 자신은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내가 물건을 팔아주면서 교회를 나가라고 해도 “예수님이 밥먹여 줘요”라며 시큰둥했다. “물론 예수님이 밥먹여 주시지. 우리의 생명까지 주장하시고 섭리하시는데 그런 말하면 못써. 나는 작은 교회라도 하나님 성전 짓는 것이 평생소원이야” 그런데 그녀 집 근처에 교회가 개척됐는데 내가 꾸준히 권면한 탓인지 출석하게 됐다. 믿음이 뭔지 모르는 그녀는 내게만 오면 목사님과 사모님 흉보기에 바빴다. 나는 안 되겠다 싶어 두꺼운 마분지를 명함보다 약간 크게 잘라 1번부터 7번까지 번호를 매기고 뒷편에 성경구절을 적었다.

“자네 화가 날때는 1번을 보고, 남이 부러우면 2번을 보게. 남편이 속을 썩이면 3번을 보고, 누가 미워지면 4번을 보게나.”

상황별로 7번까지 성경을 읽을 것을 강조하고 만약 이 카드를 잃어버리거나 읽지 않으면 앞으로 물건도 안 팔아주고 만나지도 않을 것이라고 단단히 약속했다. 다음에 만났을 때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할머니. 정말 신기해요. 말씀하시는 대로 했는데 그 때마다 화가 가라앉고 부러움이 없어지는 거예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녀가 사는 오산에 두 번째 교회당을 짓게 되었다. 작은 교회였지만 꼭 필요한 교회였기에 세우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녀에게 교회부지 매입비를 건네며 우리는 가게 한쪽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주님. 우리 주변에 많은 훌륭한 분들이 계시고 물질이 넉넉한 장로님도 많이 계신데 시골에서 호두과자를 굽는 늙은이와 헝겊을 기워 파는 여자를 사용해 이 교회를 세우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은혜가 벅찼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하고 약한 것들을 들어 지혜롭고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그녀를 볼 때 감사했고 수년이 흘러 그녀에게 “아직도 그 종이 있어?”라고 물었더니 “그럼요”하면서 속주머니에서 소중히 꺼내 보여 주었다. 지금은 권사가 되어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


내게 가끔씩 찾아와 벌침을 놓아주는 목사님이 계시다. 그분과의 첫 만남은 눈이 펄펄 내리는 어느 겨울날이었다. 목사님은 개척교회를 하느라 집세가 계속 밀렸는데 이제 더 이상 버티지 못해 쫓겨나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돈도 없고 갈 데도 없으니 집주인에게 대신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목사님을 따라 주인을 만났다. 사정을 했지만 자신도 참을 만큼 참았다며 양보할 기미를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보따리 하나를 들고 처량하게 서 있는 목사님과 사모님을 보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혹시 몰라 준비한 1백만원을 주인에게 주며 곧 1백만원을 더 갖다드리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문간 옆 작은 방 하나를 내주며 그 곳에 기거하도록 허락했다. 이 때 너무 고마움을 느낀 목사님이 그 후 벌침놓는 법을 배워 나를 찾아오신 것이다. 우리가 가진 것을 서로에게 베풀며 나누는 것을 하나님은 무척 기뻐하신다.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우리나라에는 20만명이나 되는 외국인근로자가 있다. 이들 중에는 불법체류자도 많지만 이들을 복음화하는 것도 기독교인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뒤 본국에 돌아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면 이 역시 훌륭한 해외선교다. 평소 친분이 있는 김응제권사의 아들이 훌륭한 목사(홍종현목사)가 되어 외국인근로자선교후원회 회장으로 봉사하고 계신다. 그분의 사역을 우연히 알게 됐다. 그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설교하는 전임사역자의 사례비를 마련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갑자기 이 선교에 동참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가슴을 때렸다.

“네가 직접 그들을 전도하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설교하는 주의 종을 도우면 너도 그들을 전도하는 것이 아니냐?”

이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아 목사님의 사례비 명목으로 매월 50만원씩을 돕기로 결정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개운해졌다. 하나님께 감사했다. 1천만명이 넘는 기독교신자 중에서 내가 이 일을 맡게 된 것도 하나님의 섭리로 해석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느 날 하루 영업을 끝내고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때 방송에서 장애를 가진 청년이 신학대학에 합격했는데 입학금을 마련하지 못해 학교에 못 가게 됐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돈계산을 해보니 장사가 잘 안돼 팥앙금재료비 줄 돈만 남아 있었다. 내일 아침이면 마음이 달라질지도 몰라 즉시 방송사에 전화를 걸어 청년의 전화번호를 알아내고 이튿날 아침에 입학금을 송금하기로 했다. 주위에서는 남을 돕는 것도 좋지만 너무 즉흥적이라며 잘 알아보고 도와주라고 충고하는 분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또 도울 수 있는 형편이니 더 감사한 일 아닌가. 그동안 학비를 못내는 학생들을 위해 이곳저곳에 도움을 주었다. 그중 중부대학교 조경장학회에서는 1997년 나를 회장으로 추대했다. `조경 및 식물보호분야의 지도적 인물을 배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탄생된 이 장학회를 맡기는 했으나 큰돈을 내지 못해 미안하게 여긴다. 나는 86세가 되도록 아직 성지순례도 다녀오지 않았다. 남들처럼 이곳저곳 구경도 많이 다니고 싶다. 그러나 교회건축과 선교, 장학사업이 더 급하고 중요한 것이라 여겨 여태껏 미루어 왔던 것이다.

내 것 다 쓰고 남을 돕는 것도 좋다. 그러나 부족한 가운데서 아껴 쓰면서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고 봉사하는 것을 하나님은 더 예쁘게 보실 것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크리넥스 티슈상자를 금고로 사용한다. 이를 보다 못한 주위 사람들이 멋진 금고를 하나 장만하라고 권유한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다. 그것은 이 티슈상자의 장점을 몰라서다. 좋은 금고는 내 속에 돈이 많다는 것은 선전하는 꼴이지만 종이상자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휴지통으로만 보이기 때문에 도둑이 들어도 크게 염려하지 않는다. 쓰다 낡아서 버려도 아깝지 않고 폐품활용에도 한몫한다. 티슈상자금고를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예수믿는 사람 중에도 겉모습은 잘나고 화려하고 든든해 보이지만 언제나 도둑에 노출돼 있는 신자가 있다. 그런가 하면 겉으로는 어리숙하고 보잘 것 없어도 내면에는 절대로 도둑에게 빼앗기지 않는 값진 보화가 가득 담겨 있는 알찬 신자가 있다. 예수님은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권면하신다. 그곳에는 좀도 없으며 도적질도 못한다고 하셨다. 실속있고 알찬신자가 되어야 한다.


내 생활 가운데서 신앙생활 외에 다른 즐거움을 꼽아보라면 서예를 하는 것이다. 서예에 입문한 것은 5살 때이다. 아버님 밑에서 천자문을 배우며 서예도 함께 익혔다. 아버님은 나의 글솜씨가 남다르다며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하셨다. 늘 사업에 바쁜 사람이 차분히 앉아 글을 쓴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나는 과자점 구석에 늘 붓과 벼루를 비치하고 한문성경과 성경구절을 쓴다. 그런데 손님들은 이런 내 모습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열심히 쓰다 보니 어느새 서예가란 소리도 듣게 되었고 부족한 작품들이 국내는 물론 중국 길림성에서 초대전을 갖기도 했다. 중국에서 서예전을 할 때 나는 누구나 가지고 가면 절대 안 된다는 성경을 10권이나 담대하게 갖고 들어갔다. 그리고 십자가목걸이와 함께 복음을 전하며 나누어 주었다. 목걸이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그들이었지만 나중에는 성경이 얼마나 귀한 것인 줄 깨닫게 되길 기도했다. 서예를 하면서 가장 많이 쓰는 글은 `선선자 후득복'(先善者 後得福)이다. 우리 집 가훈이기도 한 이 글은 “먼저 선을 행하는 자가 나중에 복을 얻는다”는 뜻이다. 이 말은 지극히 성경적이다. 벽에 공을 강하게 던지면 그만큼의 힘으로 다시 튕겨 내게 돌아온다. 사회나 이웃을 위해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선을 베풀면 그것에 대한 보답이 반드시 돌아온다는 것이 86년을 살아온 나의 인생지론이다. `호부호부 호사호사'(好夫好婦 好思好事)란 글귀도 많이 쓴다. 이는 좋은 남편이 되고 좋은 아내가 되고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일을 하자는 뜻이다. 시대가 바뀌고 생각이 바뀌고 풍조가 바뀌어도 사람의 도리는 바뀌지 않는다.

1981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게 손아래 시누이가 하나 있는데 6·25때 연락이 두절되어 만날 수 없었다. 금산쪽 어디에서 산다는 것 같았는데 찾을 수 없었다. 친척이 거의 없는 남편도 시누이를 만나면 매우 기뻐할 것 같아 꾸준히 기도를 해왔다. 어느 날 아침 우리 가게에 인삼을 팔러다니는 아주머니 2명이 찾아왔다. 밤새 완행열차를 타고 온 듯 피곤해 보였다. 식당이 문을 안 열 어 아침식사를 못했다고 했다. 인삼은 필요없었지만 정성껏 음식을 차려 대접했다. 맛있게 식사를 하는 그들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더니 금산쪽이라는 것이다. 갑자기 시누이가 생각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시누이를 찾는다고 했더니 자신들이 한번 찾아보겠다고 했다. 얼굴도 모르는 시누이를 이름만으로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기 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도 때마다 그들이 시누이를 찾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그 두 사람이 불과 일주일만에 시누이를 찾아 가게로 데리고 온 것이다. 남편과 시누이의 상면은 눈물바다를 이뤘다. 인삼장사에게 베푼 적은 호의가 이렇게 큰 기쁨으로 보상받을 줄 몰랐다. 주님께서 기도응답을 해주신 것이다. 이와 함께 요한1서 3장 18절의 말씀이 떠올랐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주님은 지금도 작은 자(소자)에게 냉수 한잔을 대접하는 사랑과 나눔을 강조하고 계신다. 찾지 않아서 그렇지 여러분 주위를 돌아보면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인생에는 누구나 고난과 고통이 따른다. 남들은 내가 봉사와 선교에 앞장서고 경제적 능력이 있어 보이니 고생없이 평탄한 삶을 살아온 것으로 안다. 그러나 앞에서도 아들이 빚보증을 잘못 서 재산을 잃거나 남편의 질병으로 고생한 것 등 몇가지 어려움을 겪은 이야기를 밝히긴 했으나 가장 쓰라리고 아픈 기억은 둘째아들 국우를 잃었을 때였다. 어릴 때부터 순종 잘하고 무엇이든 못하는 것이 없었던 둘째는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를 거쳐 동경대학원까지 졸업했다. 당시 동경대학원에서 9명을 뽑는데 1백30명이 몰렸고 거기서 수석을 했다고 기뻐하며 전화했던 아들이었다. 일본에 갔을 때 교포들이 `한국의 자랑'이라고 추켜 세워줘 얼마나 가슴뿌듯했는지 모른다. 그런 둘째가 어느 날 수원근처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너무나 엄청난 비보라 가족들은 내가 쓰러질까 알리길 주저했다. 교통사고가 났다는 소식만 들었을 때 나는 곧바로 기도를 시작했고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둘째를 데려가시리란 것을 알았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나의 마음을 준비시키셨다. 한동안 이 엄청난 충격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한없이 침몰해 가는 고통의 나락에서 나를 일으킨 것은 주님이 받으신 고난을 생각하면서였다. 주님께 위로를 간구할 때마다 솜털같은 평안과 안위로 나를 감싸주시며 새힘을 불어넣어 주셨다. 이 때 주님은 “내가 너의 아픔을 다 안다. 그래도 너는 감사의 제사를 올려야 한다”는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 같았다. 인간의 소견으로 하나님의 귀한 뜻을 알 수도 평가할 수도 없다. 단지 그것을 수용하며 순종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는 편안하고 모든 것이 잘될 때보다 건강을 잃거나 어려워질 때 하나님을 찾고 만난다. 또 고난 속에서 참 진리를 깨닫게 된다. 고난을 통해서나마 신앙의 세계로 입문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다.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했고 또 “우리의 잠시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하였다. 이 땅에서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이것을 통해 천국의 영광스러움을 바라보고 찬송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유익이 없다. 또 우리는 남의 부귀와 권력과 각종 가진 것을 부러워하고 탐내기도 한다. 그리고 성스러운 삶과 신앙을 흠모하며 자신의 부족과 나약을 질책한 다. 그러나 내가 이제 깨닫게 된 것은 주님은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시고 기뻐하신다는 사실이다. 내게 주어진 일이 천직이자 또 성직이 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교회를 8개나 세웠다는 사실만 부각시키는데 나의 천직인 호도과자 굽기에 충실하지 못했더라면 이 열매는 분명 히 맺지 못했음을 알아야 한다. 또 한가지 깨달은 신앙의 법칙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지금 당장은 조금 아쉽고 손해보는 것 같아도 이것이 내게도 큰 기쁨이 되어 메아리처럼 돌아온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자기가 만족하고 기뻐하는 일을 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행한 봉사와 사역이 엄청난 기쁨으로 되돌아오는 것, 이것도 주님이 주시는 상급이 아닐까


얼마전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아들의 손가락을 짜른 아버지가 있어 참담하다 못해 몸서리를 쳐야 했다. 지금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일제시대와 6·25사변, 보릿고개의 고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그래도 지금은 `천국'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렇게 어려운 시절에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정신이 황폐해진 탓이다. 지금 어느 때보다 가족의 사랑과 믿음이 회복되고 그 훈훈한 정이 서로를 감싸야 할 시점이다. 가족이야기를 하니 6·25가 난 뒤 남편이 두아들에게 보였던 절절한 사랑이 기억난다. 전쟁이 나자 남편은 천안역에서 경복중학과 경기중학에 다니는 두아들이 내려오기를 며칠간 기다렸다. 길이 어긋났나 싶어 집에도 다 녀왔지만 아들들은 내려오지 않았다. 남편은 미숫가루를 허리춤에 찬 뒤 서울행을 시도했다. 하숙집으로 곧장 갔으나 아이들이 이미 떠난 뒤였다. 당시는 젊은 중학생도 무조건 붙잡아 인민군으로 보내던 상황이었다. 남편과 아들들을 모두 서울로 보낸 나는 매시간을 기도로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예 식음을 전폐하고 가족들이 무사히 돌아오길 기도했다. 아이들은 몇차례나 천안으로 내려오려고 시도했으나 한강다리가 끊기고 차편도 없고 인민군의 눈도 피해야 하니 여의치 않았다. 더구나 식량까지 떨어져 다시 하숙집으로 돌아오니 아버지가 조금전에 다녀갔다는 것이 아닌가. 맥이 빠져 있던 아이들의 얼굴에 생기가 돌며 기운이 번쩍 솟았다고 한다. 그래서 곧장 아버지가 갔을만한 길을 따라 나섰다. 빨리가면 만날 수 있으리란 기대감이 배고픔도 다리아픈 것도 잊게 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그 수많은 피난행렬에서 남편과 아이들이 기적적으로 만나도록 해주셨다. 남편이 아이들을 먼저 발견하고 온 세상이 떠나갈 듯 큰 목소리로 자신들을 불렀다고 한다. 아이들은 그 때처럼 아버지의 목소리가 감격적으로 들린 적이 없었다고 그 때의 기억을 말했다. 그 때까지 남편은 입이 바짝 타 들어 가면서도 허리춤에 찬 미숫가루를 손대지 않았고 그때서야 아이들에게 타서 마시게 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마시며 울었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사랑도 이 보다 더 진할 것이란 생각을 가져본다. 자녀를 키워보아야 부모의 사랑 을 알 수 있듯이 깊은 은혜속에 들어가 보아야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사랑을 깨닫게 된다. 어려울 때일수록 서로의 진한 사랑을 발견하는 것이 가족간이다. IMF로 이혼도 많고 흩어지는 가족도 많지만 이럴수록 서로 더 사랑 하고 더 위로하고 더 격려하자. 그리고 믿지않는 가족이 있으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주는 영적 평안이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 소중하고 귀한 것임을 전하자.


많은 교회에서 간증을 요청하는데 힘이 들어 일일이 갈 수 없어 안타까웠다. 그래서 생각끝에 간증집을 만들기로 했다. 그리 내세울 것은 없는 삶이지만 문서전도에 조금이라도 은혜가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내가 구술을 했고 은혜기획의 임병해 국장님이 정리를 해주셨다. 책제목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다가 평소 입버릇처럼 말하던 `나는 다윗왕보다 행복합니다'라는 글귀로 정했다. 내가 이 말을 늘 했던 이유는 유명한 다윗 왕도 생전에 성전을 완성하지 못했는데 이 늙은이가 호두과자를 구우면서도 성전을 여러개 지었으니 나처럼 행복한 사람은 없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졌는데 나와 친분이 있는 목사님과 사모님, 성도들이 많이 오셔서 축하를 해주셨다. 감격적인 일이었다. 설교와 기도, 축사를 해주신 분들이 그동안 내가 주님을 위해 헌신한 내용들을 자꾸 부각시켜 몸둘바를 몰랐다. 그동안 주님사업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다. 나의 의지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그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증집회를 위해 교회에 가면 우선 교회주변을 한번 둘러본다. 어느 시골교회는 교회 앞마당에 잡초가 무성했다. 그래서 간증 중에 성도들에게 여러분의 집에 잡초가 있으면 그냥 지나치겠느냐고 물었었다. 나중에 교회가 깨끗해졌다며 목사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성도들은 80살을 훨씬 넘긴 이 늙은이의 이야기를 잘도 들어주었다. 요즘은 예전처럼 총기나 건강이 따라주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내가 맡은 일과 사명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려 한다. 내 기도제목 중 중요한 첫째 항목은 내가 설립한 교회들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로 날로 부흥되며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교회가 되게 해달라는 것이다. 기도할 때마다 나는 일일이 교회이름을 거론한다. 첫 교회인 천안 성심교회로 시작해 오산 성심교회, 여주 성심교회, 연천 성심교회, 화성 성심교회, 논산 성심교회, 서울 순종교회, 삼척 신기중앙교회 등이다. 지난해 10월에는 열매맺는 교회를 창립했다. 가장 건축비가 적게 들어간 교회에도 최소 5천만원 이상이 소요됐으니 전체교회로 치면 적지 않은 액수가 돼 내가 정말 이 건축을 다했는지 스스로 놀란다. 나는 이 건축선교를 한 후에는 모든 것을 즉시 잊는다는 철칙을 갖고 있다. 일을 했다고 나서면 자만심을 키우게 되고 자칫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비쳐져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사업하며 그 말씀에 순종한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지내왔다. 돌이켜보면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에 연결되지 않는 것이 없다. 우리는 누구나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않는다. 더 높은 곳과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물질을 향해 돌진하려고만 한다. 그러나 86년간 나의 지나온 삶을 찬찬히 돌이켜보면 더 많이 움켜쥐려고 욕심을 내는 것보다 자기를 자꾸 비우려는 삶이 얼마나 더 행복하고 즐거운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어차피 하나님 앞에서 빚진 자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평생 빚진 자의 심정으로 이웃을 향해 내주는 삶이야말로 행복한 삶이다. 부족한 이야기를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감사드리며 연재 중 많은 교회에서 간증요청을 받았지만 응하지 못해 지면을 통해 죄송함을 전한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태복음 6:19~20)


/국민일보 1999년 01월 14일

/정리=김무정moojeong@kukminilbo.co.kr 

출처 : 사랑과 축복
글쓴이 : God bless you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