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고백

[스크랩] 108. 임재, 나타나심 (2)

이아기 2007. 1. 30. 01:22

▣108. 임재, 나타나심 (2)

 

 

 

 

 

6. 이사야의 임재 체험

  - 쉐키나의 영광이 필요한 시대         http://blog.daum.net/ygbhygbh/7163516

 

7. 에스겔의 임재 체험

    - 하나님의 영광이 떠남과 회복 (아래 하단)

 

8. 막달라 마리아의 임재 체험

   - 마리아의 목마른 갈망                  http://blog.daum.net/ygbhygbh/6995738

 

9. 사도들의 임재 체험

   - 찾아오시는 부활의 주님               http://blog.daum.net/ygbhygbh/6976635

 

10. 바울의 임재 체험

    - '바울 신앙의 노하우' 중에서  

         - ◑4. 바울 신앙의 노하우 - "그날 밤"의 신앙

                                                     http://blog.daum.net/ygbhygbh/6149951

 

11. 은혜의 보좌

     - 은혜의 보좌                             http://blog.daum.net/ygbhygbh/3070537

 

12. 찬양할 때 임재하시는 주님

     - '찬양하라' 중에서  

          - ▲찬양하면 대적이 물러간다 http://blog.daum.net/ygbhygbh/6687470

 

13. 주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예배 인도 

      - 단 한 분의 청중                        http://blog.daum.net/rfcdrfcd/6398405   



 

 

◈6. 이사야의 임재 체험

 

- 쉐키나의 영광이 필요한 시대



쉐키나(하나님의 임재=하나님의 영광, 영어로 쉐카이나)의 영광이 나타난 설교...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사 6:1절)


▲웃시야의 선정과 유다의 융성

웃시야는 16세 때 유다의 왕으로 즉위해서 52년간 오래 통치했다.

그는 정치를 잘 해서, 그의 재위 동안 나라는 매우 융성하고 번영했다.


웃시야가 그 부친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 역대하 26:4-5


암몬 사람이 웃시야에게 조공을 바치매 웃시야가 심히 강성하여

이름이 애굽 변방까지 퍼졌더라

웃시야가 예루살렘에서 성 모퉁이 문과 골짜기 문과 성굽이에 망대를 세워

견고하게 하고...   역대하 26:8-9


▲그의 말년의 교만

이렇게 융성하고 번영하면 꼭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는데

→다름 아닌 교만이다.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역대하 26:16


그래서 그는 징계를 받아 그만 문둥병에 걸리게 된다. 26:19

그러니까 시작은 좋았는데, 끝이 비참했다.


▲반면교사

사람이 처음에 얼마나 잘 하는가? - 이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분당우리교회가, 4주년이 된 지금, 굉장히 시작이 좋았던 것은 사실이다.

많은 이웃교회들이 부러워하는 자리매김이 된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오늘 이 즈음에 우리가 꼭 마음에 담아야 할 것은

혹시 우리 마음속에 교만은 없는지...?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서 이 자리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목사가 목회를 잘 했으니까 이렇게 부흥했지...’

‘재직들이 그 동안 교회를 위해 수고를 많이 했으니까 이렇게 부흥했지...’

-이런 교만이야말로 우리의 마지막을 비참하게 만드는 복병임을 명심하자.

그래서 요즘 제 머릿속에는 시종여일(始終如一, 처음과 끝이 한결같음)

이란 사자성어가 항상 떠나지 않는다. 그런 교회와 개인이 되자.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 말씀은, 당시 백성들의 좌절과 낙담을 농축하고 있는 표현이다.

52년 동안 나라를 잘 태평하게 다스리던 왕이 죽었으니 좌절할 만 하다.


박정희 대통령이 19년 인가 장기집권 하다가 갑자기 서거하셨는데

제가 고등학교 때, 어느 날 갑자기 박 대통령 서거 소식을 듣고서

그 때 우리 국민들 모두는 혼란과 앞으로 나라의 운명을 걱정했었다.


그런데 하물며 52년 동안 나라를 잘 다스렸던 왕이 죽었으니...

말로 다할 수 없는 상실감, 두려움, 미래에 대한 공포가 어떠했겠는가?


이 위기 때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전을 찾는다.

거기서 이사야는 어떻게 문제의 해답을 찾았는가?



◑2.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다 (1-4절)


▲쉐키나를 경험한 이사야

웃시야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사 6:1-3


사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경험한 적이 없다.

그래서 이것이 어느 정도의 영광인지 입으로 도저히 묘사할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사야는, 이 땅에서 경험할 수 없는

놀라운 신적 권위를 가지신 하나님의 임재가 드러나는

쉐키나를 경험하게 되었다.


▲경제적 풍요 속에 감취어진 영적 위기

당시 유다는 달 다스리던 웃시야 왕이 죽어서 위기가 아니었다.

비록 나라는 융성했지만,

실제로 백성들의 영적, 도덕적 상태는 이미 위기에 빠져있었다.


경제적인 풍요로움은... 영적, 도덕적 위기를 가져오기 쉽다.

나라가 부강해지고 군사력이 강해지는 것이 태평성대인줄 알지만

그것은 오해다.


이사야 1장은 당시 유다의 영적 상태를 이렇게 묘사한다;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것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로다  사 1:5-6.


겉으로 보기에는 비싼 옷을 입고, 좋은 차를 타고

겉으로 보기에는 좋은 직장에 다니는데

그 내면을 들여다보니,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와 같다.


사회적으로도 보면, 당시 유다의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의 땅을 더 많이 착취하려고 혈안이 된 것처럼 보이고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 같다)

나라의 지도자들은 탐관오리가 되어, 부패와 축재에 열 올리고 있었다.


백성들은 백성들대로 살인, 도적질, 술 중독, 음란 행위에 몰두하면서

다 썩어빠진 상태에 있었다.


사람들은 겉으로 웃시야가 경제적으로 나라를 잘 살게 만들었다고

안심하고 있었지만, 

은 교만에 빠져 문둥병으로 죽어가고

온 백성은, 하나님 보시기에 “성한 곳이 없었다” 사 1:6


▲한국 교회의 위기는 ‘다빈치 코드’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이사야의 환상이 필요하다.

눈을 들어 이 세상을 바라보면,

부도덕하고 부정직한 (투기) 세력들은 날로 뻗어나가고 있다.

현실은 찌들고 답답하기만 한 것 같다.


지금 한국은, 예수님이 사생아를 낳았다는 <다빈치 코드> 때문에

당하는 위기가 아니다.

풍부한 상상력으로 E.T.같은 소설과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뭔들 못하겠는가.


쉐키나, 곧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 본 적이 없이 교회를 다니니까

그런 이상한 소설 하나에 신앙이 흔들리는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진다.

그것이 곧 한국 교회의 위기이다.


오늘 교회의 위기는,

하나님의 영광(쉐키나)이 뭔지 모르고 사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데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뭔지 모르고 목사, 장로 노릇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가끔씩 있기 때문에... 교회가 어려워진다.


눈을 뜨면 억울하고 내 가슴을 찢어놓는 세상이지만

눈을 감고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하시기 바란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시기 바란다.


이 땅에 죄와 탐욕으로 부패한 땅이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땅입니다!” (임재로 인해) 눈물로 선포하시기 바란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요 11:40



◑3. 죄 있는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다. (5절)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5


인간은 착각의 존재다. 죽어도 위의 고백이 잘 안 나온다.

자기가 망하게 되었다니...?

참된 임재를 경험해 보지 못하니까, 부패한 자신의 실체를 못 본다.


▲제가 참으로 불가사의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람들은 자신을 너무 모른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얼마나 똑똑한가?

너무도 예리하게 세상을 분석하고

주변 모든 사람들을 난도질할 만큼 예리한 비판력을 가지고 있다.


희한하게 그런 비판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 자신은 너무 모른다.

진짜 자기를 정확하게 알면, 비판 못 한다. 낯 뜨거워서 하겠는가!


모든 세상 사람들을 다 난도질할 만큼 날카로운 비판력을 가졌는데

자기 자신은 너무 모르는 것... 정말 불가사의다.


▲이런 현대인의 모순도,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나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다.


이사야도 처음에는, 이 탐관오리들 때문에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었는지 모른다.

술에 찌들어있고, 부패한 이 시대 백성들 때문에

유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다고 생각했을는지 모른다.


그랬던 그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나니까

그 화살이 자기에게로 돌아왔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저들이여)


▲일생에 단 한번 만이라도 그런 고통스런 고백을 해 본 적 있는가?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인가?

날마다 날카로운 비판의 잣대를 들이대며 “당신들이 문제다!”

이렇게 교회 지도자들을 비판하거나, 사회를 비판하는 것이 좋은 교회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스스로 부패를 고백하는 교회가 좋은...?


어떤 가정이 좋은 가정인가?

날마다 날카롭게 시어머니, 며느리, 남편, 아내가 서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스스로 부패를 자백하는 가정이 좋은...?


▲무엇이 하나님의 임재가 경험되어지는 예배인가?

그저 감정적으로 뜨거워져서 눈물이 나오는 예배인가? 그럴 수 있겠지만

정말 자기 자신의 부패와 무능력을 철저히 깨닫고서,


다른 사람을 향해 날리던 비판의 화살을 자기에게로 돌리는 것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고백하는 것이 임재의 예배 아닌가.


그래서 비판하던 사람을 향해, 따뜻한 화해의 손을 내미는 것이

진정 하나님의 임재가 경험되는 예배 아닌가.



◑4. 하나님의 심정을 회복해 주시다 (6-8절)


▲그의 연약한 부분을 치료해 주시고

그 내면에 하나님의 심정을 회복시켜 주시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사 6:6-7


하나님 앞에 자신의 추함을 고백하기만 하면, 치료해 주실 줄 믿는다.

자기를 모르니까, 고백하지 않게 되고, 치료가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 6:8


▲이것은 제 개인적인 생각이다.

오늘 한국 교회가 왜 세상 평판에 좋은 소리를 못 듣고 있는가?


성령의 은혜, 쉐키나의 영광을 한 번 체험하고 난 후에,

신비주의, 기복주의로 흐르는 경향 때문이라고 본다.

(사회적 책임, 사명 감당으로 흐르면 좋을 터인데...)


▲진짜 쉐키나의 영광을 경험하면 → 하나님의 심정을 회복하게 된다.

그래서 안타까운 세상을 바라보면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고백하게 된다.


오늘 한국을 비롯해서 전 세계가 정신적 아노미(혼란) 상태를 겪고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든 전통적 절대 권위를 부정하고 죽였다.

그래서 절대적인 전통적 하나님 상(이미지)이 죽어버렸다.

다빈치 코드로 예수님을 난도질 하고, 다음은 하나님 차례다.

“하나님은 죽었다”는 사신론이 머지않은 장래에 등장할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버린 결과, 절대 기준이 없어진 결과

서구의 가정이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하나님을 버린 벌을 받고 있다)

자녀들은 매우 정신적, 문화적 혼란을 겪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를 버린 세대는, 스스로 비참한 정신적 고아가 되어버렸다.


하나님은 오늘도 탄식하고 계신다.

이렇게 하나님을 난도질하고 죽인 세대를 향해

누가 그들에게 복음 들고 갈 것인가?


쉐키나의 영광과 임재를 경험하면

사명이 회복된다. 하나님의 심정이 회복된다.

그런 쪽으로 눈이 열린다.


오늘도 잃어버린 한 영혼을 향하여

영적 고아들이 방황하는 영적으로 메마른 땅을 향해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고 헌신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의 심정(사명)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저는 목사로서 여러분으로부터 이런 고백을 듣고 싶다.

“목사님, 제가 분당우리교회에 등록하고 나서

제 인생 후반전에 사명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매년 교회 창립기념일마다 단체로 헌혈을 하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예수님 피 흘려 희생하셨듯이, 나도 피 흘려 헌신하는 삶을 살자! 아닌가.


▲분당우리교회가 창립 4년 만에 4천명이 모였다.

그래서 뭐 어떻다는 것인가?

잠실야구장에 5만 명 모인 것이 무슨 대수인가?


안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 교회가 없어서(부족해서)

또 교회를 한 개 더 세웠느냐고 곱지 않게 볼 것이다.

교회 근처 주정차 문제나 유발하는 교회, 뭐 하러 또 세우느냐는 식이다.

4주년 됐다고 시끌벅적 대는 것... 세상은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제 몇 주만 지나면,

분당우리교회 사회복지법인 허가가 난다.


저는, 지난 4년 동안 우리가 받은 큰 은혜를

너무 개인적인 곳에 쓰고 있지 않았나? 자주 반성해 본다. (후략)


*06.05.07. 이찬수 목사님 설교 요약, *원제목 : 가슴 벅찬 은혜와 비전(창립 4주년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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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에스겔의 임재 체험

 

- 하나님의 영광이 떠남과 회복       


에스겔서를 천천히 읽어보면,

겔11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셨다가 (19년 후)

겔43장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다시 임하시는 환상을 본다.

지금 내게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시는지/떠나셨는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겔 8장: 하나님이 떠나시겠다(사전 경고)

그들이 여기서 크게 가증한 일을 행하여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 8:6


*그들이 행한 가증한 일들

①예루살렘 성 담 구멍 안에서 (남들 몰래) 장로 70인이 향로 들고 우상숭배.

②성전에 들어가는 문에서 여인들이 담무스를 위해 애곡함.

③성전 코앞에서 방백 25인이 성전을 등지고 동방 태양에 경배함 8:16


여인들과 방백 25인은 성전을 출입하면서도 동시에 우상을 가까이 섬겼다.

그들은 성전이 직장인 사람들이거나, 예배드리러 수시로 출입하는 자들이다.

하여튼 성전을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이 정도이니, 일반인은 어떠하랴?


▶겔 9장: 하나님이 떠나실 준비(시동)

하나님의 영광이 (떠)<올라>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9:3


이 모든 가증한 일로 탄식하여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그리고 이마에 표 없는 사람은 늙은이/젊은이/처녀/어린아이 모두 죽여라.

성전 앞의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해라 9:4-6


지금 현실은 늙은이/젊은이/처녀/어린아이 모두가 타락하고 강퍅한 시대이다.

하나님은 "탄식하여 우는 자"를 찾고 계신다. 9:4


모양이 이지경인데도 탄식하여 울지 않으면... 

그들을 칼로 제하여 버리시겠다고 하시며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신다.★


▶겔 10장: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심(저속 기어)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무르니 10:4, 18


삼손이 머리가 깎이고 여호와께서 떠나신 것을 깨닫지 못했다. 삿 16:20

다윗은 저를 주님 앞에서 쫓아내지 마옵시며,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

Do not cast me from your presence or take your Holy Spirit from me!

-성령님이 자신을 떠나지 않으시도록 간절히 부르짖었다. 시 51편


에베소 교회는 처음에 뜨거웠으나 나중에 미지근해서

'촛대를 옮기겠다' 경고 받았다.

반대로 두아디라 교회는 나중이 처음보다 더 열심 있었지만,

음행을 허용한 문제가 있었다.


에베소 교회는 거짓 사도를 폭로한 '올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첫사랑이 식어진 '냉냉한 가슴'의 단점이 있었다.


버가모 교회는 순교자를 내면서까지 믿음을 버리지 않고 '뜨겁게' 싸웠지만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교리적 타협'(세속화)의 단점이 있었다.


이 것 한 개를 잘하면, 저 것 한 개의 단점이 있었다. 책망을 받지 않고

모든 면에서 온전한 서머나/빌라델비아 교회가 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책망과 훈계를 받고도 계속 적당히 타협하며 살다가는

하나님이 촛대를 옮기신다. (영광이 떠나가신다)


▶겔 11장: 하나님의 영광이 진짜로 떠나심(고속 기어)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중에서부터 올라가서 성읍 동편 산에 머물고 11:23


25인은 방백들(지도자)인데

이들은 성읍에서 살육하여 시체를 거리에 채운다는 환상이 나온다. 11:6

→25인은 앞서, 태양 우상 숭배자들 8:16

우상 숭배자들은 결국 백성들을 해롭게 한다.


우상의 본질이 죽이고 도적질하고 멸망시키는 사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상 숭배자들이 생기지 않도록 울며 탄식하며 막아야 한다. 9:4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시면, 예루살렘과 성전은 이방인에게 짓밟히게 된다.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가는데, 그 고난의 목적은 정결함/회개이다.

그들이 그리로 가서 모든 미운 물건과 가증한 것을 제하여 버릴지라 11:18


비록 포로로 잡혀가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영원히 버리지 않으신다.

그들이 이른 열방에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11:16


▶겔 43장: (19년 후)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다시 회복되는 환상을 본다.

하나님은 징계/정결케 하시고 다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시다.


성전 문지방(현관 출입구)을 떠나신 하나님은 (10:4),

다시 문(지방)에 돌아오셨다 (43:1).

그러나 그 기간은 에스겔이 환상을 다시 보는데(10장~43장 사이) 19년이요,

실제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70년이 걸렸다. (19년 근거는 연대표를 참조했음)

삼손도 한 번 떠나시고 나서 머리카락이 다시 자랄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 기간은 포로/수치/능욕의 기간임과 동시에 회개/정결케 되는 기간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시기 전에 붙잡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   


▲지금 내게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계신가? 떠나려 하시는가?

아니면 이미 떠나셨는가?

 

①떠나신 징후: 오랜 기간의 압제/수치/능욕 당함. 사방에 대적이 많다.

탄식/회개가 더 많이 필요하다.


②떠나시려는 징후: 경고 메시지/작은 고난의 연속이며,

하나님의 임재, 그 영광이 주시는 감격이 메마름. 가물에 콩 나듯 한다.


예로, 자의/타의로 자동차 사고 및 고장이 연속될 때 민감해야 한다.

하나님은 보통 경고를 먼저 주셔서 회개로 인도하신다. ←기도자의 경우

지속적으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경고의 싸인/메시지를 받아도 전혀 깨닫지 못한다.


지금 타락한 세상을 중보하며 울며 탄식하는 자(9:4)를 찾고 계신데,

지금 울며 탄식하지 <않고>, 파수꾼의 경고의 나팔을 불지 <않는> 것은

(겔3장, 33장) → 나 역시 타락한 세상에 동화되어 살고 있다는 증거다.

성전 앞의 늙은이처럼(9:6).★


③머물러 계신 징후:

영광이 주시는 감격/감사의 연속. 고난 중에도 죽도록 충성한다.

서머나 교회는 '10일 간'(고난의 기간은 짧다는 상징적 숫자, 단1:12)의

고난/궁핍 속에서도 죽도록 충성했다.


<김지윤  01.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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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막달라 마리아의 임재 체험

 

 

-마리아의 목마른 갈망

 

 

 

갈급한 심정, 깨어진 마음, 목마른 갈망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OUT OF SIGHT, OUT OF MIND

눈에 안 보이면, 마음도 점점 멀어진다는 말인데, 사실이다.

예수님이 이미 돌아가시고, 장례까지 치렀으니... 마음도 멀어질 만 하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갔다.

주님은 눈앞에서 사라졌지만, 그녀의 마음은 전혀 멀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무덤 문이 열려있고,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곧장 동네로 돌아가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요한이 걸음이 빨라 먼저 도착했으나, 무덤에 먼저 들어간 것은 베드로였다.


그들은 시신이 없어진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집으로 되돌아갔다.

명색이 수제자라는 사람이, 명색이 가장 사랑받는 제자라는 사람이...

예수님의 시신을 찾을 생각도 않고, 황급히 집으로 되돌아가버린 것은

매우 실망스럽다.


아마 베드로와 요한은 염려가 앞섰던 모양이다.

시신이 사라져 버렸는데, 거기 무덤 근처에서 서성거리다가

시신을 도둑질해 간 용의자로 체포될 것을 염려했던 모양이다.


▲외모를 보지 않으시는 예수님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계속 울며 무덤 곁에 남아있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갈급함 때문이었다.

거기서 그녀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나는 영광을 체험했다.


막달라 마리아는 어떤 여자인가?

과거에 일곱 귀신이 들렸었고, 전직도 의심스러운 여자이었다.

예수님은 부활의 소식을 전하려면, 지도자인 사도들에게 먼저 알려서

그들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 질서도 있고, 합당하지 않은가.

예수님은 가장 미천한 여자 중에 더 미천한 여자에게 먼저 나타나셨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적지 않다.

예수님은 오늘도, 지체 높은 사람, 명망 있는 사람보다는 

비록 미천하더라도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고 찾는 사람들에게 나타내신다.

물론 지체 높은 사람을 역차별 해서도 안 된다.


요지는, 누구든지, 주님을 간절히 찾기에 갈급한 사람에게

주님은 나타내시고 만나 주신다.


▲시편에 무명의 저자들도 많다.

시 2, 3, 4, 6, 7, 9, 11, 42, 43편과 그 외에도 많은 시편들이,

각각 다른 시대를 살던 사람에 의해 기록되었는데,

거기엔 임금과 장군 등 지체 높은 사람도 있었으나,

성막에서 그저 봉사하던 이름 없는 사람도 있었다.

뛰어난 지도자도 있었지만, 무명의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에 대한 간절한 갈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자 주를 갈망하나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면 믿음의 수준이 높아진다.

하나님의 사람 토마스 아퀴나스는 수도사였고, 신학자였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퀴나스를 내려다보니

그는 수시로 금식하며 무엇인가 하나님께 간청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 하나님은 기도 할 때 그에게 나타나셨다.

“사랑하는 내 종 아퀴나스야, 네가 나에게 무엇을 원하길래

그렇게 눈물로 나를 찾느냐?”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내 종아,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오랜 세월을 금식하고 고행하며

울며 내 이름을 부르느냐? 내가 너를 위해 무엇을 해 주랴?”


그 때 아퀴나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주님, 저는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제게 무엇인가 주시고 싶으시다면

주님 자신을 제게 주옵소서!

주님은 저의 것이고, 저는 주님의 것입니다.”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 후 아퀴나스는 놀랍게 변화되었다고 한다.

그가 쓴 그 유명한「신학대전」은 완성된 작품이 아니다.

훗날 친구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미완성된 이유를 알 수 있는데...

“내가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후

이제껏 써 놓은 나의 작품이 부끄러워서

더 이상 펜을 들 수가 없었다네...”


▲주님을 만나는 지극한 행복 체험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만나게 되자

슬픔과 공포, 실의 속에 휩싸여있던 이 여인에게

무덤 속에 비친 그 찬란한 빛만큼이나 환하게 밝은 기쁨

그녀의 마음속에 가득 차게 되었다.     


여러분, 왜 우울하게 사시는지 아시는가?

일이 힘들어서? 돈이 없어서? 사람들이 괴롭혀서? 건강이 안 좋아서?

아니다. 주님이 안 계셔서 그렇다.


보시라. 이 여인에게 바꿔진 처지가 무엇이 있는가?

거기서 울다가도 군인들이 오면 잡혀갔을, 여전히 불쌍한 처지였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니까,

그 환한 영광 의 빛이 가득 이 여인의 마음속을 채웠다.

주님의 임재 를 경험하니까

빈 무덤 같이 공허했던 그녀의 마음이

기쁨과 희락, 영광과 존영으로 가득 찬 그런 마음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쁨으로 충만해져서 사도들에게 달려갔다.


▲부흥은, 집으로 돌아간 후에 나타났다.

베드로와 요한이 빈 무덤을 보고 실망해서 집으로 돌아간 후에,

끈질기게 남아있던 마리아가 부활의 주님의 임재를 체험했듯이...


교회 역사를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 부흥이 일어나지 않고

사람들이 (실망하고) 다 집에 돌아간 후에, 부흥이 임한 경우가 많다.


1907년 평양 대부흥,

사경회 마지막 날 저녁, 끝나는 시간에도 성령은 임하지 않으셨다.


사회자가 광고하기를

이제 사경회는 모두 끝마쳤으니 집으로 돌아가시고

더 기도하실 분들은 남아서 함께 기도하십시다!


1천6~7백 명이 모인 자리에서 절반 이상 집으로 돌아갔고

8~9백 명 남았는데, 집회 후에 그들끼리 모여서 기도했을 때

역사에 길이 남을 그 위대한 ‘1907년 평양대부흥’ 이 나타났다.


주님은 당신을 향한 목마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 즐겨 나타나신다.

그래서 그들을 통해 영광 받으신다.

주님은,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남아서 사모하는 자에게 나타나신다.


▲주님을 갈망하는 기도

주님, 저희로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구하고 찾게 해 주옵소서.

풍부와 비천 어떠한 삶의 상황에서든지,

주님을 갈급하도록 축복해 주옵소서.

우리 온 마음과 뜻을 대해 주님의 얼굴을 구하도록 우리에게 복을 주옵소서.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을 향한 목마른 마음을 주옵소서.


<김남준 목사님 설교 발췌 요약 06.04.16.  *원제목 : 울며 누구를 찾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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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사도들의 임재 체험

 

-찾아오시는 부활의 주님



▲박 집사님의 갈등

믿음 좋은 박 집사는 지난 몇 주간 동안 특별새벽기도회 빠짐없이 참석했다.

사순절 기간동안 예수님이 내 죄를 담당하셨음을 깊이 묵상했다.

또한 부활절이 이르러, 주님의 부활을 분명히 믿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 믿는 신앙이 자신의 현실 생활과 아무런 연관성(보상)이 없었다

는 사실에 박 집사는 마음이 아팠다.

지난 특별새벽기도회 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참석해서 기도하며 매달렸다.

그런데 직장을 잃었던 남편의 취직은 여전히 감감 무소식이었다.

말썽쟁이 아들의 성적은 기대만큼 쑤욱 올라가지도 않았다.


예수님의 부활을 분명히 믿지만, 그에게 부활이 현실에서는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박 집사님의 갈등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과 동일한 갈등이요,

또한 요 21장, 부활 후에도 갈릴리에서 고기 잡던 제자들의 갈등이었다.  



◑1. 찾아오시는 부활의 주님


▲울고 있는 마리아를 찾아오심

요 20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일 먼저 무덤가에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조차 하지 않고

그들의 관습대로 시신에 기름을 바르기 위해 무덤을 찾아갔었다.

무덤문은 굴려져 있었고, 예수님의 시신을 누가 훔쳐 간 줄로 여겼다.

그래서 절망 가운데 그 곁에서 울고 있었다.

바로 이 때 주님이 마리아를 찾아오셨다.


원인 모를 절망과 불안 가운데 계신 분,

오늘 아침 부활하신 주님이 여러분을 만나주실 것이다.


▲불안에 떠는 제자들을 찾아오심

요 20장에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이 모여 있던 다락방에 찾아오셨다.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요 20:19


그들은 다락방 깊숙한 곳에 모여 앉아 무엇을 했는가?

아무것도 안 했다. 그냥 두려워 떨고만 있었다. 왜?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인 로마의 공권력이,

제자들까지 잡아서 십자가에 못 박을지 모른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터였다.

그들은 다락방 문뿐만 아니라, 마음의 쇠 빗장 까지 걸어 잠그고 있었다. 


바로 이 때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오셨다.

문을 두드리신 것도 아니고, 제자들이 문을 열어준 것도 아니고

문을 부수고 들어오신 것도 아닌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서 계셨다.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눅 24:37

“놀라고 무서워하여...” 라고 당시 정황을 기록하고 있다.

점잖케 표현해서 그렇지, 리얼하게 표현하면

“귀신인줄 알고 혼비백산했다” 이다.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19

그리고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못 박힌 손과 옆구리를 내밀자

“주님이시구나!” 제자들은 깜짝 놀라며 반가워했다. 요 20:29


동시에 얼마나 송구하고 민망했을까?

주님이 잡히실 때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주님은 고통 중에 부르짖으실 때

제자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신변을 염려해서 그 자리를 피했다.


힘없는 여인들과 이름 없는 제자들이 주님의 장례를 치를 때에도

소위 사도라는 제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이 찾아오셨으니... 죄송하지 않겠는가.


주님은 배신자들을 책망하거나 꾸중하시려고 찾아오신 것 아니었다.

찾아오실 때 예수님은 이미 깨끗이 용서하시고 찾아오셨다.


예수님은 재차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21

이렇게 두 번씩 말씀하신 것은, 첫 번째는 만나는 인사말 이라 치더라도

두 번째는, 죄송해서 고개를 못 드는 제자들을 깨끗이 용서하신다는 뜻이다.

죄책감 갖지 말고, 평안하게 살아라는 뜻이다.


▲심지어는 불신 청년 사울에게까지 찾아오셨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전 15:8


부활하신 주님은 아나니아를 만나셨다.

그리고 사울 청년을 만나서 안수하고 그의 눈을 뜨게 하라고 지시하셨다.

또한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셨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은, 복음전파를 위해 꼭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오신다.

그리고 만나주신다.

이 복된 부활절 아침, 여러분은 주님께 꼭 필요한 사람들이 되시기 바란다.

하나님 나라에 유용한 존재들이 되시기 바란다.

언제든지 예수님은 여러분을 만나주실 것이다.


▲오늘도 찾아오시는 예수님

오늘도 예수님 믿고 교회를 다니지만 평안이 없으신 분들이 있다.

설교를 들어도 은혜를 못 받고 도리어 두려움에 시달리는 분이 계신가?

오늘 부활절 날, 부활의 희망을 갖지 못하고 절망에 사로잡힌 분이 계신가?

주님 이미 부활하셨는데, 못난 제자들처럼, 주님 죽으신 것처럼  

절망과 탄식을 늘어놓는 분 계시는가?

-주님께서 여러분을 (불쑥) 찾아와 주시기를 축원한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며 소망과 은혜를 주실 것이다.



◑2. 그물질 하던 제자들을 찾아오심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요 21:1


여기 우리는 주목시키는 두 단어가 있다. “그 후에

앞서 요 20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21장에 “그 후에 또” 나타나신 것이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로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요 21:3


베드로가 사명을 져버리고 타락해서 물고기 잡으러 갔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있을 때는, 모든 생계 문제를 주님이 해결해 주셨다.

이제 예수님과 떠나 있고, 예수님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들의 절실한 생계 문제가 가로 놓여 있었다.


그러자 맏형 격인 베드로가 큰 짐을 느꼈던 모양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 안 되니까 베드로가 ‘내가 한 번 해 보겠다’며

앞장서서 나선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물고기가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다.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요 21:3


이처럼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는데

취직도 안 되고, 빚더미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특별새벽기도 때 분명히 은혜를 받았는데, 여전히 사업은 제자리걸음이다.

현실의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다.

제자로서도 실패하고, 어부로서도 실패한 그야말로 캄캄한 “밤”이었다. 21:3


절망과 좌절이 엄습해왔다. 피곤에 지쳐 있었다.

물고기조차 제자들을 비웃는 듯 보였다. ^_^

그날 밤, 과거에 예수님과 함께 지내던 것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애들 수준의 신앙

그 때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21:5


여기서 얘들아! children 라고 부르신 것은, 단순한 호칭을 떠나서

지금 제자들이 하는 행동과 생각이 애들 수준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들은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었다.

그러나 지금 내 곁에 안 보이신다. 육체로 안 계신다.

그러므로 내 직장, 생계, 가정, 학교생활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부활하신 주님이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 하신다.


말씀이 어디 갔는지, 기도가 어디 갔는지,

성경적 진리의 가치관이 어디 갔는지...

내 재주, 내 방법, 내 꾀만 남아 있다.

애들 수준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이다.


예수님 부활하셨다. 그래서 내 모든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다.

내 인생의 궁극적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내 생명을 너희 위해 내 놓았는데, 어찌 각양 좋은 은사를 주지 않겠느냐?’

예수님의 이 복음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믿었어야 했었다. 롬 8:32


적어도 이런 질문들이 제자들의 고민이 되었어야 했었는데...

‘어떻게 부활의 능력이 내게 나타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부활의 소식을 작은 예수가 되어서 전하며 살 수 있을 것인가?’


물고기 잡으러 간 것 - 잘못된 것 아니다.

땀 흘리며 일하고 공부하는 것이 무슨 잘못인가?

그러나 그 방법이, 가치가, 목적이, 이유가

예수 없는 인생, 복음 없는 인생,

말씀 덮어 두고, 기도 덮어 두고,

내 방법, 내 재주, 내 꾀 - 이런 것들만 남아 있다면

그것이 바로 애들 수준의 신앙이라는 것이다.


▲인생 실패의 밤을 지내고 계시는 분이 있는가?

사업의 빈 배를 안고 목 놓아 울어야 하는 분이 계신가?  

영적으로 비틀거리는 자기 모습을 바라보며 실망하신 분이 있는가?

얽히고설킨 문제 때문에 몸과 마음이 지친 분이 계신가?

실망과 좌절에 지친 ‘빈 그물’ 들고 살아가고 계신가?

-그래서 주님이 당신을 버렸다고 생각 하시는가?


‘이제는 믿어도 더 이상 소용없다. 깨끗이 믿음 생활을 포기하자.’

‘내 살길 내가 찾자. 예전에 버렸던 그물을 다시 한 번 챙겨보자.’

이것이 애들 수준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부활하신, 살아계신 주님이 당신을 찾아오실 것이다. 믿으세요!

그리고 애들 수준을 벗어나라고 권면하신다.


이제는 내가 살아도 예수 방법대로 살고

손해를 봐도 예수 방법대로 보고

이 방법대로 살다가 내가 죽어도 예수 방법대로 살겠다!

-이런 각오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예수님 왜 찾아오셨을까?


①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빈 그물 들고 새벽 바다에서 괴로워하는 그들을 내버려 둘 수 없어서

주님 찾아 오셨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 14:18


세상에 아무도 도와 줄 사람이 없는, 친구도 자녀도 없는 사람 계신가?

그런 외로운 사람에게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찾아오신다.


②주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은, 제자들에게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그물을 내려야 할 곳은 갈릴리 바다가 아니었다.

죄악의 파도가 넘실거리는 예루살렘 거리에 그물을 내려야 했다.


세상에 조그만 어려움에 부딪히면

인생의 목적도, 내 인생의 비전과 사명도 온데 간 곳 없어지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아서 되겠는가.


아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예수께로 돌아와야 한다.

왜 찾아오셨을까? 축복주시기 위해 찾아오셨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실패한 채로 버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제자들이 빈 그물 들고 인생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 빈 그물 채워주시기 위해 예수님 찾아오신다.



◑3. ‘오른 편’이란 ‘예수 편’이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요 21:6


▲“오른 편”이란?

시간적으로, 포기하지 말고 다시 던지라는 것이다.

장소적으로, 고기가 있는 곳에 던지라는 것이다.

영적으로, 예수 편에 던지라는 것이다.


마 25장에,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양들은 오른 편에, 염소들은 왼 편에 두라고 얘기하신다.

오른 편은 구원의 편이요, 왼 편은 멸망의 편이다.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 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 편에 있다 전 10:2

지혜자 곧, 주님을 믿는 사람은 오른 편이다.

우매자 곧, 믿지 않는 사람은 왼 편이다.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 16:11

그러니까 천국 가치관은 오른 편이다.

세상 가치관, 세상 꾀는 왼 편이다.


▲네 생애의 방향을 전환하라

성경은 언제나 오른 편을 예수님 편, 구원의 편으로 묘사한다.

베드로는 지금 고기 잡겠다고 바다로, 세상으로 나갔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도, 주님을 등지고 나아갔다.


오른 편에 던지라는 것은 네 생애의 방향을 전환하라는 것이다.

예수 편으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사명 버리고, 주님 버리고, 천국 버리고 세상으로 나가지 말라는 것이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먼저 구하라는 것이다.


네 인생의 주사위를 예수 편으로 던지라는 것이다.

말씀 중심, 기도 중심, 신앙 중심, 예수 중심으로 살라는 것이다.


현실에 조그만 문제에 부딪히면, 마치 예수님이 아니 계신 냥

신앙이 없는 것인 냥, 말씀이 아무런 능력이 없는 것인 냥

네 멋대로 살지 말고, 그럴 때 일수록

부활하신 예수님, 살아계신 예수님, 살아있는 말씀, 기도의 능력

성령의 능력을 믿고 살라는 것이다.


▲3년 전 베드로는 이곳에서 고기 잡는 그물을 던졌었다.

그 때도 고기를 못 잡고 있었을 때, 깊은 데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을 듣고

순종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를 잡았다.


잡고 보니, 이 분은 물고기를 다스리시는 분임을 깨달았다.

파도를 잔잔케 하시는 것을 보니, 바다를 다스리는 주인이시고

천지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물고기를 쫓아버리기도 하시며, 물고기를 잡히게도 하시는 분이셨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자기를 발견하고 예수님을 발견했다.

그 때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했다.

그 때 베드로가 따랐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눅 5:11

물고기를 버렸다. 그물도 버렸다. 배도 버렸다.

세상 가치를 버렸다. 세상 방법을 버렸다.

지금까지 살아온 자기 꾀와 재주를 버렸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3년 동안 따라다녔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만났다.

그런데 먹고 사는 문제에 부딪히자 베드로는

배설물처럼 버렸던 그것을 다시 챙겨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왼편의 삶이라는 것이다. 망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살아계신다.

여러분이 어떤 삶의 환경에 처한다 할지라도, 여러분을 찾아오실 것이다.

만나 주실 것이다. 그 분을 버리고 살지 말라는 것이다.


▲신기록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21:6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잡은 고기가 153마리라...

153마리란 뜻은 신비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아마 베드로 혼자 잡은 물고기중에 신기록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특별히 숫자를 세어 기록했다.


여러분, 찾아오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오른편에 그물을 내려서

인생에 신기록이 수립되시기 바란다.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대 기록이 수립되시길 바란다.

 

사업과 직장에 축복받아서 주님께 크게 헌신하고,

구령사업에 크게 헌신하는, 대 기록이 세워지게 되시기를 바란다.

 

여러분의 사업과 직업의 성공을 통해

많은 영혼들을 '잡아서' 주께 인도하는 대 기록의 비전을 꿈꾸시기 바란다. 

그물에 가득한 고기(영혼)를 잡는 꿈을 다시 회복하시기 바란다.

 

사업과 직장을 통해, 잘 되면 잘 되서 더 즐겁게 헌신하고,

반대로 고난이 많으면 그래도 인내로써 헌신해서,

주님의 물고기들을 많이 기르고, 주님의 양떼들을 많이 치는 비전을

재다짐, 재헌신하게 되시기를 바란다. 부활하신 주님과 만남을 통해서...

 

▲찢어지지 않은 그물

큰 고기가 153마리라. 이 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21:11


신기록이 수립되었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세상 그물은 고기가 안 잡히거니와, 잡혀도 걸핏하면 그물이 찢어진다.


출세했다고 하나 건강이 찢겨지는 사람,

성공했다고 하나 행복이 찢겨지는 사람,

성공했다고 하나 인격이, 가정이, 신앙이 갈기갈기 다 찢겨지는 사람...


그러나 예수 방법대로 이룬 성공은, 그물이 찢겨지는 법이 없다.

그러므로 삶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예수 방법을 선택하시길 바란다.

말씀으로 돌아오시길 바란다.


인생의 어떤 막다른 골목에 처했다 할지라도

예수 버리고 살려고 하지 마시기 바란다.

기도 포기하고, 신앙 버리고 살려고 하지 마시기 바란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집시다.

애들 신앙을 버립시다.

 

아멘, 부활하신 주 예수여! 어서 제게 오시옵소서!


<06.04.16. 류영모 목사님 설교 요약, 편집.  *원제목 : 예수님이 오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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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바울의 임재 체험

 

 

◑바울 신앙의 노하우 - “그날 밤”의 신앙


바울은 그날 밤의 계시, 그날 밤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사도 바울의 인생 여정에는 그날 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①아시아로 향하던 바울의 발걸음을 유럽으로 옮겨놓을 때도

행16:9절에 그날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지시를 한 것이다.


②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을 때도 행23:11절에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 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그날 밤 - 주님께서 나타나신 밤이다.

성령님께서 조명으로 비춰주신 밤이다.

그날 밤에 바울 곁에 주님이 계셨다고 말한다.


③로마의 비전이 실현되어지는 첫 관문에서

유라굴로 라는 태풍을 만나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을 때

행 27:23절에 나의 속한 바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한두 번 은혜를 받고 환상을 보고 비전을 가졌다가

세월 속에 묻혀 버리는 환상이 아니라

바울과 같이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지울 수 없는 기억된 환상을 가지고

막힐 때마다 희미해질 때마다

그날 밤에 말씀하시는 말씀 붙들고 일어서는 비전 메이커가 되자!


사실 한 두 번 비전이나 희망사항 안 가져 본 성도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자신의 희망사항인지, 하나님이 주신 환상인지 어떻게 알 수 있나?

바로 답은 그날 밤이다.

그날 밤에 주께서 내 곁에 계셔 말씀하시느냐? 그렇지 않느냐?

성도 여러분 - 내게도 그날 밤이 있기를 소원한다.


▲15세기 프랑스의 영웅 또는 성녀라고 불리어지는 잔 다르크가

샤를 왕을 방문하여 “왕이여 어제 밤에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하기를”하니

왕이 기분이 언짢아서 대꾸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이 왕의 귀에 들리지 않고 네게만 들리느냐?”


왕의 핀잔에 잔 다르크가 하는 말이

“왕이여, 왕도 고요한 밤중에 들판에 나가 하나님께 무릎 꿇는다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올 겁니다.”라고 한다.

고요하게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그날 밤이 있는 신앙이 되시기 바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바울의 신앙이 노하우는

행 27:25절 그러므로 여러분들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날 밤의 신앙도 중요하지만

그날 밤에 하신 성령의 음성을 그대로 믿는 믿음도 중요한 것이다.

그날 밤의 신앙을 가지면, 그대로 믿는 믿음도 저절로 생길 줄 믿는다.


<김성덕 목사님 설교 발췌,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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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은혜의 보좌                                     



◑1. 은혜를 입은 사람 노아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창 6:8)

노아가 자기 시대에 귀한 사명자가 된 것은, 그의 열심 이전에 “은혜”가 있었다.

노아의 때와 같으리라”고 했는데, 그래서 우리도 노아처럼 은혜 입음이 필요하다.


은혜의 보호가 필요한 현 시대

주변에 너무 많은 가정들이 이혼하는 슬픔을 겪고 있다.

부부지간도 은혜입음이 필요하다.


자녀들도 인터넷 중독, 학원 폭력, 마약(미국) 등에 24시간 노출되어 있다.

은혜 없이는 자녀들의 안전은 전혀 불가능하다.  


내 안에도 타락한 본성이 남아 있다.

그런 가운데 노아처럼 우뚝 서려면 - 은혜로 보호받음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매일 주님께 드려야 한다.

 

 


<법궤 위 속죄소=은혜의 보좌 복원 사진, 모양이 다른 사진도 있음>

 



◑2. 은혜의 보좌를 구약으로 풀어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1. 속죄의 자리

신약 히브리서의 ‘은혜의 보좌’throne of grace는 구약에서 ‘속죄소’를 뜻한다.

(왜? → 히브리서 문맥을 읽어보면, 대제사장이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갔는데,

구약에서 대제사장이 나아가는 목적지가 지성소의 속죄소이다)

속죄소(출25:20, mercy seat)는 지성소 안 법궤 덮개 위를 일컫는다.

두 그룹cherubim 천사의 양 날개 아래이기도 하다.

제사장이 일년에 한번씩 들어가 짐승의 피를 손가락에 묻혀 7번 뿌렸다.(레 16:14)


죄를 용서 받아야 은혜가 임한다.

오늘도 우리가 <은혜의 보좌>로 나가는 것은, 죄를 용서해 주시고

죄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뜻이다. 


*‘은혜의 보좌’를 시은소(施恩所, 베풀 시)로 칭하기도 한다(찬247장).

한글 성경에는 그냥 ‘은혜의 보좌’throne of grace로 번역되어 있다.


▲2. 하나님과 대면의 장소

1년 1차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피를 갖고 들어간다.

이 날, 하나님은 속죄소 두 그룹이 날개 사이에서 영광의 구름 사이에서

1년에 단 한 차례 당신의 모습을 영광의 빛 가운데 현현/임재해 보여 주신다. (쉐카이나)

(신학자들은 예수님 변화산에서 변화된 모습을 속죄소의 쉐카이나와 동일시한다)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레 16:2)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출 30:6)


이와 같이 속죄소(은혜의 보좌)는 하나님과 영광스런 대면의 장소이다.

하나님을 대면하여 만나는 것..... 그것이야말로, 영광중의 영광이다.

베드로가 변화산을 떠나기 싫었던 것처럼....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고(히4:16), 노아가 은혜를 입은 것은...하나님과의 대면이다.  

 

 

◑3. 은혜의 보좌란?


▶1, 심판자리가 아니라는 뜻

성도들이 잘못했을 때, ‘너 이리 와봐' 해서 매 때리는 곳이 아니다.

심판의 보좌, 징계의 보좌가 아니다.


'은혜'란 -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호의다.

우리가 죄를 범한다든지 베드로처럼 넘어졌다든지 한다면 죄송스럽다.

또 어떨 때는 징계가 두렵기도 하다.

그러면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등을 돌리려고 할 때가 있다.

주님께 나오려고 하기보다 점점 더 멀어지려고 하는데,

우리가 이 은혜의 보좌를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은혜의 보좌는 우리가 연약함이 있을 때,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아오라고 말씀하시는데,

성경은, 마음을 열고 담대히 용기를 가지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자고 촉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구약시대 대제사장은 벌벌 떨면서 거기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제 주님은 우리에게 담대하게 나아오라고 하신다.


▶2. 연약한 자가 은혜를 받는 자리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믿음을 끝까지 지키고 승리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굳은 결심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은혜의 보좌 앞에 늘 필요할 때마다 나가서 힘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늘 필요할 때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때를 따라 도움을 받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제 제사장에게 갔는가?

그들이 연약한 가운데 있을 때에 제사장에게 간 것이다.

우리도 우리 연약함이 있을 때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야 한다. 이것이 율법이 아닌, 은혜의 신앙생활이다.


▶3.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 놓으신 길이다.


은혜의 보좌는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셔서, 지성소 깊은 곳에 들어가셔서

영혼의 닻을 지성소 깊은 곳에 내리시고 배를 움직이지 않게 하실 때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히 6:19)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앞에 나가셨기 때문에, 그 예수님을 통해, 그 길을 통해,

나 같은 죄 지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은혜의 보좌는 하늘 높은 것도 아니고 어느 특정한 장소가 아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열어 놓으신 길을 따라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그 장소가 바로 은혜의 보좌이다. 


▶4. 나의 은혜의 보좌  

지성소에서(휘장은 없어졌음) 신령한 을 먹으며

신령한 기도의 향연을 피어 올리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등대의 빛을 발하는 곳이 은혜의 보좌(히4:16) 앞이다.


가정에서도 말씀기도찬양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곳이면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신다.


한 밤중 외로움 속에서 고달픔을 안고 아픔을 호소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부르짖을 때, 여러분이 앉으신 그 침상이 여러분의 은혜의 보좌가 된다.


예수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그리스도께 참회하고 가까이 나아갈 때

은혜의 보좌는 여러분 마음속에 있다. 부엌이나, 서점에나 장소에 상관없이...


그러나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크게 역사하신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예배를 통해 은혜 받는 처소가 바로 ‘은혜의 보좌’다.

 

<김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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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찬양할 때 임재하시는 주님

 

 

▲찬송할 때 온 나라가 평안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시 33:1)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찌어다 (시 30:4)


주의 의로운 규례를 인하여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시 119:164)


다윗은 일생을 찬송하는 삶을 살았다.

다윗이 왕이 되니 나라가 평화로워졌다. 나라가 번영하고 발전했다.

온 나라에 번영과 축복이 온 것은 영적인 찬양을 부르면서

영적인 회복이 왔기 때문이었다.


그때에 한 번도 없던 성가대원만 288명을 다윗이 임명해서

궁중에서 월급을 주면서 국가가 성가대원을 길렀다.


그뿐만 아니다. 아침 저녁 번제를 드릴 때도 성가대원이 서서 찬양하면서

제사를 드리게 했다. 수많은 악기가 개발 되었다. 시편금, 삼현금,

큰소리 나는 제금, 높은음의 제금, 낮은음의 제금, 퉁소와 현악과 비파와 수금


이런 수많은 악기들이 다윗 시대 때에 계발이 되어서 오늘날까지

온 세계에 최고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악기로 발전해 내려온다.


찬양하는 자가 복이 있다. 미리암이, 마리아가, 한나가 찬양을 했다.

축복받은 성도는 남자든 여자든 하나님을 찬양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영원토록 주 찬양 주 앞에 영광 돌리세 주 앞에 영광 돌리세

영원토록 주 찬양 할렐루야 아멘♬


우리가 할일은 무엇인가? 힘써서 사는 것인가?

하나님 은혜로 사는 우리들은 우리를 구속하신 이 높으신 절대자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야 할 것 아닌가?


세상을 비관하고 낙심하며 저주하고 그러다가 자꾸 자살해 죽고...

이러면 되겠는가?

몸 망가지고 정신 망가지며, 가정이 모두 다 파괴되어도

찬양 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야고보 5장 13절에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고 했다.


▲찬양하면 대적이 물러간다

① 사무엘상 16장 23절에 보면

다윗이 수금으로 연주하고 노래 할 때에, 사울에게 있던 악귀가 떠나갔다.


그렇다. 마귀는 찬송하면 물러간다. 여러분 가정이 답답하신가?

찬송을 불러보시라. 노래방 가지 말고 찬송을 불러 보시라.

삼십 분 내에 기적이 일어난다.

찬송하면 두려움과 불안이 물러간다.

시편 56편 4절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라고 했다.


②찬송 할 때 지진이 일어났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밤중에 찬양했더니 지진이 나면서

감옥 문이 열렸다. 


내 가는 앞날 길이 열릴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해 보시라.

어두운 이 감옥이 천국으로 변화된다.


③찬송 할 때 전쟁에서 이긴 기사도 성경에 여러 번 나온다.

하나님을 잘 믿는 여호사밧이란 왕은 암몬과 모압과 또한 세일산 민족들이

같이 쳐들어 왔을 때, 성가대는 찬양했다.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자비하심은 영원하시도다.”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면서 성가대 가운을 입혀 가지고

노래하는 자들을 군인들 앞에 보냈다. 그리고 군인들은 뒤에서 따라갔다.

앞에 가면서 ‘주 찬양 주 찬양 영원히 찬양 드리세 영원토록 세세토록’

그랬더니 하나님이 이 모압, 암몬족속을 다 물리쳐 주시고 승리를 주셨다.



불의한 것으로 불의한 것을 해결하려 하지 말고,

의롭고 거룩한 것으로 우리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원수 마귀 모두 쫓겨 가기는 예수 이름 듣고 겁이 남이라

우리 찬송 듣고 지옥 떨리니 형제들아 찬송 찬송합시다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 앞에 가신 주를 따라 갑시다.


백성들아 함께 모두 모여서 우리 모두 함께 개가 부르세

영원토록 영광 권세 찬송을 우리 임금 주께 돌려보내세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 앞에 가신 주를 따라 갑시다 (찬송가 389장)♬


오늘  이 병든 사회를 치료하는 길은 능력 있는 찬송이며,

찬송으로 나라와 민족을 구하고

우리 가정에 천국이 이루어지시기를 바란다.


<김삼환 목사님 설교 중 발췌 편집  06.03.12.  *원제목 : 찬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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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단 한 분의 청중 Audience of One

Jesus, be the centre

스티그마 안수현


 

▶예흔 찬양선교팀 이름 예배로 섬기던 어떤 달의 일입니다.

그날은 특히나 사람이 적었답니다.

저는 사람 수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습니다.

물론 단 한 사람만이라도 이 시간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예배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노라고

마음먹고 섬기는 일이건만, 마음 한 구석에는

알아주는 사람이 너무나 적다는 것에 아쉬워하고 있었구요.

예배순서를 진행하면서 그런 제 마음에 점점 확실해지는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이 시간 이 자리에, 한 명의 청중이 더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전에 R. C. 스프라울의 책

『사람이 무엇이관대』Hunger for significance, 죠이선교회 역간)

라는 책에서 이런 질문을 제기하는 것을 본 기억이 납니다.

"사람들은 왜 튀려고 하는가?"

왜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고, 금메달을 따기 위해 훈련받고,

고시 패스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는가 말이죠.

그 근간이 되는 이유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라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우리들은 남을 의식하면서 생활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걱정하면서,

그들로부터 인정받기를 갈망합니다.

주위 사람들의 한 마디 칭찬에

모든 시름을 잊고 몸을 던져 일하지만,

또한 의미 없이 내뱉는 비판에 모든 희망을 상실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의 평가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고 자리매김하며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의 더 큰 칭찬과 인정을 얻기 위해

달음박질하고 때로는 남을 깔아뭉개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나를 높이 평가하고 깊은 호의를 보일 때

비로소 만족할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우리는 여전히 불안해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보이는 환대의 가면 뒤에

숨겨져 있을 시커먼 속셈을 계산해보면서

'과연 저 사람들이 나의 벌거벗겨진 모습을 보고도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나의 매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를 계속해서 채찍질하게 됩니다.


다른 이들의 칭찬이 우리의 존재가치를 결정할 때,

우리네 삶은 이처럼 피곤하고 쉼을 찾을 수 없는

고단한 것이 되고 맙니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다는 것이지요.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반응만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두려워하면 제약 가운데 갇히게 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다른 청중을 의식하는 데서 돌이켜

오직 최후의 청중이요 최고의 청중인

한 분의 청중(An audience of One)만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겠노라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의 마음 앞에서)'의 삶이 존재할 때

우리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씨를 뿌릴 수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단 한 명의 청중'으로부터의

그 사랑의 음성만으로 충분합니다.

이것이 내가 사는 이유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고후 3:5)



♬ Audience of One ♪



It's a such a strong temptation to live for man's applause

남의 칭찬을 받고픈 유혹 있지만

But I don't want to buy into the lie       

억지로 칭찬을 사고 싶지 않네

'cause I know that's not a worthy cause         

그건 아무 가치도 없는 것.

So to keep things in perspective, I hung a sign up on the wall

이것을 기억하기 위해 벽에 한 구절을 써 붙였지

The sign is nothing special, but it really says it all

뭐 별 특별한 내용은 아니지만

And the sign says ;                

그 한 문장 (바로 아래 문장) 으로 충분해



CHORUS



I'll be content to serve an audience of One   

단 한 분의 청중을 섬기는 것으로 만족하리!

Only His approval counts when all is said and done

모든 일에 필요한 건 그분의 동의뿐

And this is my prayer, when the race is finally run: 

나의 갈 길을 다 달려 간 후에

I want to hear " well done"     

그 한 분에게 "잘 하였다" 라고

from the Audience of One           

칭찬 듣는 것이 나의 기도이지

When the drive for recognition starts to get the best of me 

나는 인정받으려고 애쓸 때

All I've got to do is look around at the people serving selflessly

헌신적으로 남을 섬기는

And they don't serve for glory, and they've not keeping score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들

There's a sign that's written on their hearts       

그들의 마음속에 새겨진

A sign I've seen before -            

언젠가 보았던 흔적

(repeat chorus)

In the not too distant future                  

머지않은 미래

When the crowds all fade away            

모든 주위 사람들 사라지고

I'll stand alone before my Lord   

주님 앞에 홀로 설 때    

And this is what I long to say    

고백하고픈 이 말

I've overjoyed to serve an audience of One                     

주님을 섬기는 것이 기쁨이 넘치네

It's what I've been created for ever since day one           

이것이 내가 창조된 이유

And this is my song, as I bow before Your throne ;          

주님 보좌 앞에서 부를 노래

I love to hear "well done"        

단 한 분의 청중에게 들을 말

from the audience of One               

"잘 하였다"

 

So this will be my prayer, 'til the race is finally run : 

달려갈 길 마칠 때까지 나의 기도는

I want to hear "well done", I long to hear "wel done",         

단 한 분의 청중에게

I want to hear "well done"

"잘 하였다" 칭찬하시는

From the audience of One .... !    

그 음성을 듣는 것...


Greg Furgeson

1991 Ever Devoted Music (ASCAP)

- from the album [A PLACE TO CALL HOME]


출처 : 설교 클래식
글쓴이 : 김지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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