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스크랩] [도올] 요한복음 강해 0

이아기 2008. 7. 19. 20:20

철학자 강유원씨가 쓴, 도올의 요한복음 강해에 대한 독서일기.

 

요한복음 강해

김용옥(지음), [[요한복음 강해]], 통나무, 2007.

 

이 책은 "한국교육방송공사에서 최근에 신설한 인터넷 어학교육프로그램(www.ebslang.co.kr)의 교재로서 개발된 책"이다. 이비에스 사이트에 제시된 과정 제목은 '영어로 읽는 도올의 요한복음'이며, 과정 안내는 "영어만 잘하면 유엔사무총장도 될 수 있고, 대학자도 될 수 있고, 세계를 주름잡는 CEO도 될 수 있다"이다. "영어만 잘하면"이라는 조건문이 유치해보인다. 과정 소개는 "어학(philology)은 만학(萬學)의 기본! 영어를 탁월하게 잘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바이블 독파가 제일! 간결하고 심오하고 아름답다.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영어실력이 저절로 붙는다. 영어실력은 결국 작문(composition)에서 판가름난다. 재미있는 인터넷 세상에서 영어실력과 은혜를 담뿍 받아가자!"이다. 소개가 썩 촌스럽다. 영어실력에도 은혜에도 별 관심이 없었으므로 인터넷 강의는 들어보지 않았다.

저자는 이 강의를 시작하게 된 경과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텔레비젼 강의가 아닌 인터넷 렉쳐의 새로운 기원을 창출해 보자는 교육방송의 야심찬 기획에...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의 가능성에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고, 인문학을 대중문화와 접목시키는 끊임없는 시도야말로 이 시대의 지성의 사명이라는 생각이 끓어올라 적극 찬동하게 되었다."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전개된지 10여년이 되었는데, 이제야 그 가능성에 눈을 뜨고 사명감이 끓어오르게 된 것은 좀 의아한 일이다. 세상물정에 어두운 사람같다.

저자가 요한복음을 강해하고자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나는 한국 기독교의 미래는 오직 '성서의 바른 이해' 그 하나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해를 위하여 나는 요한복음을 강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 역시 한국 기독교의 미래를 결정할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가 성서의 바른 이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저자는 성서 중에서도 요한복음을 선택하여 강해하는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보아 성서의 바른 이해는 공관복음서(마가, 누가, 마태)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저자는 요한복음을 강해함에 있어서 카슨Carson의 주석서에 의존하고 있다. 그는 이 주석서가 "압권"이라고 평가한다. 이 주석서는 요한복음이 요한 한 사람이 쓴 텍스트임을 확고하게 전제하고 저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서 역사비평 등을 통하여 성립된 성서신학의 기초자료를 도외시하는 해석을 중심으로 한다. 따라서 이러한 주석서를 압권이라 한다면 강해의 신뢰성에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저자는 또한 역사적 예수에 관해 참조하고 있는 Crossan의 Jesus: A Revolutionary Biography를 "역사적 예수에 관한 여태까지의 모든 성과를 종합한 사계의 최고봉"이라 평가한다. 그런데 "역사적 예수의 문제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무데도 치우침이 없는 역사적인 정보를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쓰여진 게르트 타이쎈의 [[역사적 예수]](다산글방)는 기독교 이외의 자료를 과감하게 수용한 "크로산이 정경 이외의 자료들의 연대를 지나치게 초기로 상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지 않고 있다"고 하며, "역사적 예수에 접근하는 가장 좋은 길은 공관복음서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학문적으로 폭넓은 의견일치가 있다"고 본다.

저자가 요한복음을 보는 관점은 다음 구절에서 알 수 있다: "나는 요한복음을 영지주의라든가 반영지주의라든가 하는 틀 속에서 이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영지주의라는 전제로부터 요한복음을 근원적으로 해방시켜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타이쎈의 해설에 따르면 "영지주의 사상에 가깝거나, 전적으로 영지주의적인 일련의 자료들이 있다. 정경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는 요한복음을 들 수 있다... 정경에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는 로기아 자료에 대응하는 영지주의적 문서라 할 수 있는 도마복음을 들 수 있다... 이런 자료들의 공통점은 예수를 어떤 초월적이 메시지의 계시자로 보며, 이 메시지는 특별한 이해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이 이해('그노시스')는 그 자체로 결정적인 구원행위이다." 타이쎈의 해설과 저자의 생각은 대립된다. 타이쎈이 설명하듯이 영지주의(적) 문서들은 앎과 구원을 동일시하는 특징을 가진다. 이것은 희랍철학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저자는 "요한복음의 언어는 매우 일반적인 희랍철학의 전통 속에서 일차적으로 료해되어야 한다는 것은 해석학적 당위에 속하는 것"이라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요한복음을 영지주의라는 틀 속에서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저자가 거론하는 많은 분량의 희랍철학적인 설명들은 바로 이러한 "당위"에서 나온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철학'일 뿐이고 기독교의 결정적인 내용은 아니다. 저자는 희랍철학적 개념을 신약적 개념과 동일시 하고 있다. 다음 구절이 그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개념도 그 근원을 엄밀하게 따지고 들어가면 유대교적인 개념이 아니라 희랍철학적 개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구약적 개념이 아니라 신약적 개념인 것이다."

나는 영지주의나, 신플라톤주의 등에 관해 잘 모르고 있으며, 그것이 과연 요한복음 안에 얼마나 관철되어 있는지도 판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요한복음이 쓰여진 곳이 에베소인데, 그에따라 에베소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이 당연하게도 복음서에 반영되어 있다는 것, 거기에 더해서 파르메니데스의 철학까지도 녹아들어가 있다는 식의 논의, 즉 헤라클레이토스에서 시작하여 "필로로부터 플로티누스에 이르는 과정에 요한이 있다"는 판단은 철학사와 신학사의 기본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거의 전적으로 저자의 상상력의 결과라 여겨진다.

이상의 지적들은 저자의 해석을 성립시키는 몇 가지 원리들에 관한 것이다.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부활에 관해서는 다른 해석이 개입할 수 없다. 이 점에 관하여 저자의 논의가 가진 문제점을 지적해둔다.

저자는 기독교가 다음 두 가지를 핵심으로 가진다고 말한다: "1)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진정한 그리스도이시다. 2)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행위를 통해 생명(Life)을 얻을 수 있다." 첫번째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으나 두번째는 핵심이 아니다. 기독교의 핵심을 말하려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얻게 되는 생명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밝혀야만 한다. 저자가 말하는 생명은 영혼의 불멸인듯 하다. 그가 바울이 말한 부활을 설명한 다음 구절이 그것을 증거한다: "그는 육체적 부활을 말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 부활을 말한 것이다." 또다른 설명도 있다. "살아난 예수의 몸에만 다시 우리가 집착하면 부활의 궁극적 의미를 상실한다는 것이다. 요한에게 있어서 부활의 궁극적 의미는 우리 가슴에 성령(파르클레토스)의 임하심인 것이다." 저자가 부활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희랍철학적 개념과 신약적 개념을 동일시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음을 볼 때 그리 놀랍지 않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저자가 파악하는 죽음은 예수의 죽음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죽음이요, 그가 말하는 부활은 사도신경이 명백하게 알려주고 있는 "육신의 부활"이 아닌 영혼불멸이라는 희랍철학적 부활인 것이다. 이 점을 좀 더 상세히 보기로 하자.

플라톤은 [[파이돈]] 편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죽음, 육체, 영혼 등에 대해 말한다. 우선 죽음은 "몸(soma)은 몸대로 혼에서 떨어져 나와 그것 자체로만 있게 되고, 혼(psyche)은 혼대로 몸에서 떨어져 나와 그것 자체로만 있는 것"(64c)이다. 따라서 "지혜를 사랑하는 이(철학자)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혼으로 하여금 몸과의 결합상태에서 최대한 벗어나게 하는 사람"(64e-65a)이다. "제대로 지혜를 사랑하는(철학하는) 사람들은 실은 죽는 것을 수련하고 있거니와, 죽음이 모두 가운데서도 이들에게 가장 덜 무서운 것"(67e)이다. 그런 까닭에 소크라테스는 영혼불멸을 믿으며 즐겁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이와 확연하게 다르다. 예수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공포와 번민에 싸여서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남아서 깨어 있어라."(마가, 14장) 두려워 하는 것을 넘어 하느님에게 죽음을 거두어 달라고 애원하기도 한다.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에서 구해 주실 수 있는 분에게 큰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고..."(히브리서, 5:7) 인간의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예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면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렇지만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다. 그렇게 온전히 죽은 뒤 몸과 영이 다 함께 되살아 난다. 이것이 부활이다. 정신적인 부활이 아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창조물이다. 몸은 영혼의 감옥이 아니다. 성령의 집이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고전, 6:19)라는 바울의 설교는 바로 이 점을 밝혀 보인 것이다. 예수는 부활하였고, 그리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첫번째 사람이 되었다. 이로써 기독교도들은 영혼의 부활이 아닌 "육신의 부활"을 믿는 것이다.

끝으로 저자의 "서재에 꽂혀있는 개인 소장본"을 바탕으로 한 참고문헌 목록 중에서 '신학류'에 관하여 간단하게 언급한다. 여기서 저자는 폴 틸리히의 저작을 다섯 권 적어 두고 있다. 그러면서 "조직신학의 대가이니까 읽을 만한 책들"이라고 한다. 조직신학 문헌을 거론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칼뱅과 같은 고전이나 현대의 칼 바르트 등을 참조하지 않은 것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지도없는 독학의 흔적으로 보인다.

출처 : 즐거운 과학
글쓴이 : 루덴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