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고백

[스크랩] 신령한 노래를 부르려면 (방언 찬양)

이아기 2009. 7. 8. 02:01

 

  우리가 기도하거나 집회를 할 때 성도들이 모입니다.
두 세 사람 이상이 모이는 곳에는 주님도 함께하시므로

여기에는 주의 영이역사하실 바탕이 마련된 것입니다.

 

 이렇게 모였을 때 그 가운데에 일어나는 다양한 영적 현상 중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영적 현상을 거의 만나보지 못했을 것이며,
따라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모를 것입니다.
찬미는 찬양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시와 신령한 노래는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 내용을 알고도 이런 새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있다면
이 글을 통해서 새 노래를 부르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먼저,  새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는 방언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새 노래는 주로 방언찬양으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방언기도를 하면서 우리는 그 주체가 바뀌는 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 찬양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찬양을 시작해야 합니다.
방언 역시 우리의 의지로 시작해야 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처음 방언을 받을 때는 우리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혀가 말리고
이상한 소리가 나오기 때문에 주체할 수 없습니다.
말로 기도하려고 해도 혀가 말을 듣지 않고 이상하게 말려 다른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정신이 맑아지거나 황홀한 분위기 속에 휘말려 들어가면서

전혀 통제할 수 없이 방언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경험은 방언을 처음 받는 초기에 나타나는 현상이고 이후에는
스스로 방언을 시작하지 않으면 방언이 나오지 않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물론 습관적으로 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방언을 비롯해서 모든 영적 현상은 우리의 의지의 통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중이 많이 모인 곳에서는 분위기에 따라 인도하는 사람의 통제를 받아
 적당히 절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 현상은 우리의 의지에 의해서 통제를 받는 것이 정상이며,
예외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강력한 기름 부음이 임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성령의 특별한 뜻에 의해서 우리의 의지가

배제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면 모든 영적 현상은 우리의 의지의 통제를 받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 영적 현상들을 이끌어낼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치유를 행하거나 귀신을 쫓아내는 것 역시 우리의 의지로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령한 노래 역시 우리가 의지로 그 시작을 해야 합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어느 정도 영적 분위기가 잡혔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의지로 시작한 방언이 몇 차례 분위기가 바뀌면서 무척 쉽고 가볍게 방언이 흘러가기
 시작할 때 찬양해야 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음의 흐름을 타기 시작하십시오.

   우리가 기분이 좋아지면 콧노래로 흥얼거리듯이 방언으로 흥얼거리기 시작하면
 성령께서 우리 영에 곡조를 불어넣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곡조가 붙은 방언 찬양을 하기 시작하게 되며,
 간혹 우리말로 찬양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시’와 ‘찬미’입니다.


  방언으로 때로는 우리말로 찬양하며 하나님을 높이게 됩니다.
 시편기자가 찬미하듯이 우리의 영의 소리로 그것이 말로 시를 담은

 찬양이 나오게 됩니다.
  방언을 하지 못하는 분들은 다소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와 찬미는 방언과 관계없이 행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영적 분위기가 고조되면 우리말로 주님을 찬양할 수 있으니까요.
 저의 경험으로 보아도 방언과 우리말이 교차하면서 찬미가 이루어집니다.
 그런 것으로 보아 방언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방언을 하면 훨씬 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흥얼거리며 곡조를 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옛 어른들이 모내기를 하면서 또는 힘든 일을 하면서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흥얼거리면서 즉흥적으로 사설을 담은 노래를 하는 것을 저는 어려서 자주 보았습니다.
 모내기 하면서, 또는 집을 지을 때 진흙을 게면서, 어울려 땅 다지기를 하면서
 민요가락에 스스로 작사한 가사를 붙여가면서 서로 노래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은 아주 평화롭고 흥겨웠습니다.

 이제는 그런 모습을 별로 만나볼 수 없게 된 것은 곡조로 만들어진 유행가가
 넘쳐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의 일에도 마찬가지로 이미 만들어진 찬송가와 복음성가가 넘쳐나기 때문에
 이런 즉흥적인 ‘신령한 노래’는 우리 곁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노래는 우리의 신앙고백일 뿐만 아니라, 예언과 계시가 흐르는 통로가
 된다는 점에서 무척 중요한 기능입니다.
 시와 찬미를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이 담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예언적 말씀과 계시가 이 신령한 찬양을 통해서 흘러나오기 때문에
 이 즉흥적 찬양을 많이 부르려고 합니다.

  먼저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분이 지시하는 대로 따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고, 지시하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는 순종의 세월을 지내고 난 후에
 스스로 판단해서 행하는 사람과 한번이라도 주의 음성을 듣고 그대로 행동해본 경험이 없이
 스스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일 것이라고 여기고 행동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성경은 자율의지(연단된 지각)와 자유의지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율의지란 연단을 받음으로서 생긴 지각을 말합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일정기간 동안 훈련을 거쳐서 생긴 판단을 말합니다. 
 이런 경험이 없이 스스로 판단하는 것은 좋은 판단일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과녁 정 중앙을 맞히는 확률은 매우 낮습니다.

 

   훈련 받지 않으면 우리의 자각에는 불순물이 그대로 남아 있게 됩니다.
 주님은 연단을 풀무에 비교합니다.

 담금질을 받음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불순물이 제거되며,
 이로써, 순수성이 더 높아지며, 이런 상태에서의 지각은

 하나님의 뜻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을 주님은 원하시는 것이며, 우리는 이런 지각을 사용해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새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선한 의지를 동원해서

 스스로 작용을 시작해야 합니다.

 방언은 우리가 필요할 때 우리의 의지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령한 노래 역시 우리가 필요할 때 그 시작을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곡조를 타듯이 흥얼거리기를 시작하십시오.


  주님이 해 주시기를 손놓고 기다린다는 것은 어리광부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지각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기를 사모하면서
 시와 찬미로 노래하기를 소망하면서 방언으로 흥얼거리기 시작하십시오.

 

출처 : 행복한 예수님의 사람들
글쓴이 : 문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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