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성경으로 돌아가자―성경 대탐구 (제2편) 정경화 작업 ③] 영지주의자 도
[성경으로 돌아가자―성경 대탐구 (제2편) 정경화 작업 ③] 영지주의자 도전 계기 2∼3세기 걸쳐 27권 채택
신약성서 가운데 복음서가 맨 앞에 등장하지만 가장 먼저 저작되고 교회에 유포·회람된 책은 바울 서신이다. 신약성서 27권 중 바울 서신이 기록된 시기는 48년부터 58년 사이로 성서비평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그 뒤를 이어 마가복음이 60∼70년경, 마태복음 70∼80년경,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80∼90년경, 그리고 요한복음이 90∼100년경에 씌어졌다. 따라서 바울 서신은 복음서보다 대략 20년 내지 10년 앞서 교회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주로 이방인들이 주축이 된 교회들 사이에 회람된 바울서신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以信稱義)'를 강조하는 선교 신학이다. 이는 믿지 않는 자들을 교회에 입문시키는 기초 신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바울 신학은 바울 자신도 시인했듯이, 유대인 출신 사도들이 보기에는 행위를 강조하는 측면이 부족하다는 비판(롬 3:1∼8)을 촉발시키기도 했다.
◇예수 모방신학 복음서=이런 바울 서신보다 대략 20년 늦게 저작된 복음서들은 바울이 강조한 논지는 살리되 바울 신학이 가져올 수 있는 부정적 여파를 차단하는 이른바 '예수 모방 신학'을 제시하고 있다. 복음서들은 구약성서에서 단편적이고 간헐적으로 실체화됐던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를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다. 반면 바울 서신은 임박한 재림 신앙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의 참여를 통한 자아갱신과 성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때문에 개인적·실존적 의미의 구원을 설명하는 데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공동체·개인구원론 사도행전=복음서에 나타난 공동체적 하나님 나라와 바울 서신에서 강조되고 있는 개인 구원론 사이에는 나름대로 틈새가 벌어진 듯 보일 수 있다. 여기서 통전적 사고에서 멀어지면 번민의 늪으로 빠져들 수 있다. 바로 이 틈새를 연결짓는 고리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속편으로서 공동체와 개인 구원론을 아우르는 '인류를 위한 복음'을 내세우는 사도들의 발자취다.
그런데 정작 예수께서는 단 한 편의 글도 남기지 않으셨다. 신약성서가 문서화된 것은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 승천해 제자들의 곁에서 그 모습을 감춘 이후 길게는 7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였다. 이 공백의 세월 동안 물론 부분적인 문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예수의 메시지는 구전 전승에 의해 보존돼 왔다. 구전 전승의 대열에는 누구나 참여했던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예수의 메시지를 전파할 의무를 부여받은 제자들로 국한됐기 때문이다.
구전 전승과 제자들의 문서화 과정을 거쳐 정경화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사실 2세기가 마감되던 시기까지 초대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됐던 기독교 경전은 구약성서뿐이었다. 당시에는 각 지역 교회 지도자들이 교인들의 신앙과 경건에 유익이 된다고 판단되는 문서들을 추천했다. 이렇게 선택된 문서들은 교회 지도자들의 사견에 의한 것들도 포함돼 있었다. 많은 문서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지기 시작했고 추천된 것들도 점차 늘어났다.
◇이단·영지주의자의 활동=이 과정에서 문제가 불거졌다. 2세기 중반 초대 기독교의 가장 강력한 이단인 영지주의자가 활개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초대교회보다 먼저 자신들의 사상을 정당화하기 위해 복음서의 일부 내용을 이용했다. 산상수훈의 내용과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 등을 영지주의적 시각으로 해석하면서 이를 교회에 유포시켰다. 영지주의자들의 문서들은 교회 안에서 아무런 제약없이 무차별 유통됐다.
이단들의 이런 극열한 활동은 신앙의 표준이 될 수 있는, 그래서 어느 교회에서나 통일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텍스트의 선정에 대한 필요성을 가져다 준 계기가 됐다. 때를 같이해 영지주의자의 리더격인 마르시온의 도전은 정경화를 서둘러야 할 원인까지 제공했다. 마르시온은 구약과 관련된 모든 문서를 배격하고 심지어 마태·마가·요한 복음까지도 제외시키면서 오직 바울 서신에 매료돼 사도행전으로 책을 만들어 '정경'이라 주장했다.
그는 마태·마가·요한 복음은 구약적인 색채가 짙다고 해서 정경에서 제외시켰고, 대신 누가복음은 바울과 연관이 있다고 판단, 정경에 포함시켰다. 그러면서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구약성서의 인용문들은 모두 삭제해 버리는 등 '사사로운 수정'을 가했던 것이다. 이렇게 수정을 가한 마르시온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바울의 10개 서신 그리고 자신의 저서인 '대구(對句)'를 정경에 포함시켜 교회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의 저서 '대구'는 구약성서와 상반되는 구절들을 대립시켜 열거한 내용을 담고 있다.
마르시온의 도전에 교회는 정경화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해야 했다. 이단자 마르시온이 먼저 일부 성서를 정경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초대교회에는 큰 자극으로 다가왔다. 따라서 2∼3세기 동안 이단의 도전을 받으면서 서서히 경전의 모습을 갖춰 갔던 초대교회는 4세기에 이르러 신약성서의 정경화를 추진하게 된 것이다.
◇신약성서 정경화 낙착=역사상 최초로 정경 채택을 위한 회의는 363년 소아시아 프리지아의 수도 라오디게아에서 열렸다. 여기서 예루살렘의 감독이었던 키릴의 주도로 요한계시록을 뺀 지금의 신약성서 26권이 정경으로 결정됐다. 그리고 4년 후 367년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아타나시우스에 의해 신약성서 27권이 맨 처음 정경으로 채택됐다. 아타나시우스는 그해 기독교 절기에 대한 정확한 날짜를 이집트 교회에 통보하고자 편지를 발송했는데, 바로 그 편지에서 요한계시록을 포함한 지금의 신약성서 27권을 정경으로 공식 인정한 것이다. 그후로도 신약성서 27권에 대한 정경 확인은 393년 북아프리카 히포 공의회, 397년과 419년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회의 등에서 이뤄졌다. 그리고 16세기 종교개혁에서도 신약성서 27권은 변함없이 그대로 인정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병곤 선임기자 nambgon@kmib.co.kr
◇도움말 주신 분들 △김근주 교수(웨스터민스터 신학대) △김상근 교수(연세대) △김진섭 교수(백석대) △김회권 교수(숭실대) △민경식 박사(세계성서공회연합회 명예 번역자문위원) △신현우 교수(웨스터민스터 신학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