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성경으로 돌아가자―성경 대탐구 (제2편) 정경화 작업 ①] 구약성서, 언제
[성경으로 돌아가자―성경 대탐구 (제2편) 정경화 작업 ①] 구약성서, 언제 어떻게 정경화 됐나
구약성서는 1000년에 가까운 긴 역사 속에서 기록돼 왔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좀더 엄밀하게 말하면 정경화 작업은 기록의 역사와 거의 맥을 같이 한다고 해도 큰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구약성서 원본 즉 히브리 성서는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 등으로 구분된다. 이런 형태를 장르별 구분이라 한다. 율법서를 히브리어로 토라라고 부르는데 이는 '사활적' 의미를 담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그야말로 삶과 죽음이 수시로 교차되는 절박한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사는 일이었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 길이었다. 사활적이란 바로 이런 의미다.
율법서의 장르에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등 5개의 책이 속해 있으며 후일 신학자들은 저자의 이름을 따서 '모세 5경'이라 불렀다. 율법서가 정경화된 시기는 주전 5세기로 보여진다.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은 주전 458년 에스라 선지자의 인솔로 2차 귀환길에 오른다. 바로 이 시기에 에스라의 주도로 정경화가 진행된 것이다.
에스라 주도의 정경화 배경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에스라 이전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접근이 요구된다. 주전 930년경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고 그후 200여년후인 722년경에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한다. 그나마 남은 남유다도 주전 606년경에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혼미를 거듭한 후 20년이 흐른 586년경에 함락돼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버린다. 이 때 법궤도 분실되고 만다.
법궤의 분실은 이스라엘 공동체에는 그야말로 기댈 기둥을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법궤의 분실은 성서 원본 혹은 필사본의 분실을 의미한다. 그것도 통째로 잃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포박돼 잡혀가 적게는 50년에서 많게는 140여년동안 더부살이보다 더 견디기 힘든 포로생활을 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정경화 작업은 생과 사를 가름하는 사활적 발로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놓지지 않아야 할 질문이 있다. '원본과 필사본이 통째로 사라져버린 상태에서 어떻게 그것을 복원할 수 있었을까?' 정경화에 박차를 가했던 에스라는 포로였던 자기 백성을 이끌고 왔을 때 이미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스 7:6)였다고 성서는 증언하고 있다. 율법을 모두 암송했으며 그것을 다른 언어로도 통역하기도 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의 말씀을 보전한 것이다. 보통 히브리어 성서 시대를 에스라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는 이유는 이런 역사적인 맥락 때문이다.
물론 율법서의 정경화 시기는 이보다 훨씬 앞서 전개된 흔적도 종종 눈에 띈다. 주전 621년 요시야의 종교개혁의 동기로 신명기가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때 신명기에는 벌써 율법책(신 29:21, 30:9∼10)이 등장한다.
히브리 성서 두 번째 부분인 예언서의 정경화 시기를 주전 3세기 이전으로 보고 있다. 예언서는 전기 예언서(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와 후기 예언서(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12소선지서)로 나뉜다.
유대교 경전의 세 번째 부분인 성문서의 정경화는 가장 마지막에 이뤄졌다. 성문서에는 시가(시편, 잠언, 욥기)와 오축(아가, 룻기, 애가, 에스더서, 전도서) 역사(다니엘서, 에스라, 느헤미야, 역대서) 등 12권의 책이 포함돼 있다. 가장 많이 거슬러 올라가면 주전 2세기 후반부터 정경화를 위해 성문서의 결집이 시작된 것으로 파악된다. 기독교 경전에서 한발짝 벗어나 있는 외경의 집회서에 따르면 성문서의 정경화에 대한 추론의 근거를 포착할 수 있다. "시락이라는 사람의 손자가…율법과 예언서와 우리 조상의 다른 책들을 읽는 데 헌신했다"
여기서 율법, 예언서에 이어 '다른 책들'이란 매우 포괄적 의미를 담고 있으나 히브리어 성서의 순서로 볼 때 이것이 성문서일 것으로 판단된다. 집회서가 쓰여진 시기는 주전 2세기 후반이다.
이것이 신약성서로 넘어오면 그 해석은 더욱 분명해진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눅 24:44)
여기서도 율법과 선지자의 글(예언서)에 이어 나중에 등장하는 시편은 분명히 성문서에 속한다. 누가복음의 기록연대를 주후 1세기 후반으로 볼 때 성문서는 이 시기에 유대인들에 의해 이미 애독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렇듯 구약성서의 정경화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때로는 '요동치는 개혁'에 의해, 때로는 유수처럼 '자연스런 과정'에 의해, 때로는 아직은 알 수 없는 '막막한 과정'에 의해 이뤄졌다. 그렇지만 성문서가 정경화됐을 것으로 추론하고 있는 주후 1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사실상 정경화는 깔끔하게 매듭되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화룡점정(畵龍點睛)과 같은 사건이 유대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후 70년 로마인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 사건이 그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뜻과는 관계없이 흩어졌고 피신처를 찾아 나섰다. 그러면서 그들은 바벨론 패망을 떠올리며 그때처럼 다시 뿔뿔이 흩어져 버릴 것을 염려해 신앙이란 끈으로 백성들을 결집시키고자 했다. 가장 안전한 곳이 웃시야가 차지했던 성읍 중 하나였던 얌니아였다. 그곳에서 절박한 심정으로 정경화에 대한 필요성을 체득했다. 멸망 후 20년이 지난 주후 90년 유대인들은 얌니야에서 총회를 개최했다. 율법서와 예언서 그리고 성문서도 총회에서 정경으로 낙착됐다. 비유대인들은 이 엄청난 총회를 그저 '얌니야 회의'라 불렀다.
남병곤 선임기자
◇도움말 주신 분들 △김근주 교수(웨스터민스터 신학대) △김상근 교수(연세대) △김진섭 교수(백석대) △김회권 교수(숭실대) △민영진 박사(전 대한성서공회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