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복음적 설교 이렇게 하라(2)-어떤 주제를 고를까?
II. 어떤 주제를 고를까? 모든 설교는 한 가지 주제 밖에 없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놀라운 삶"이다. 그게 뭔지 모르고 설교할 수는 없다. 또한 그 지식이 짧으면 당연히 설교거리 때문에 고민할 수 밖에 없다. 설교자 자신부터 믿어 별로 덕본게 없는데 어떻게 예수가 좋다고 자랑할 수가 있겠는가! 혹시 한다면 거짓말이지. 바울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과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말했다. 그러면서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말했다. 이게 설교자부터 이루어져야 평신도에게도 미치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에게 해 주신 일"은 무궁무진한게 아닌가! 설교자는 늘 그것을 연구해야 한다. 그렇다면 설교거리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 동시에 또 할 일이 있다. 그것을 어떻게 잘 설명할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의 주제와 그것의 전달은 설교자가 평생을 통해 갈고 닦아야 할 요소이다. 1. 측량할 수 없는 풍성 이 주제에서 설교는 무진장하다. 하지만 설교하는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못하다. 매 설교마다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새로운 각도로 조명한다는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러니까 설교자들은 누구나 이러한 무게에 눌려서 고통하지 않을 수 없다. 주의 은헤는 무진장인데 설교 거리는 지극히 한정되다니. 회중들이 듣기 원하는 내용이나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은 한계가 없다. 한계는 단지 설교자에게 있을뿐이다. 설교자가 평신도들보다 신앙이 좋고 훈련을 받았다해도 한계 속에 있다. 느끼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경험도 다 제한된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용량을 늘려야만 한다. 존 헨리 조웨트는 설교자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가 영국 북부에서 목회할 때 해변가에 사는 구두수선공을 심방했다. 작업실은 너무 좁았다. 목사는 물었다. 이렇게 좁은데 있으면 같혀있는 느낌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답은 달랐다. "아닙니다. 저는 절대로 그런 느낌을 받지 않고 일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이 앞의 창문을 열기만하면 한 없이 넓은 바다가 내 눈에 들어오지요." 그러니까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냥 앞의 바다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지내도 된다는 이야기다. 조웨트는 말했다. "이게 바로 목회이다. 문제에 빠진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문을 열여 하나님의 영감을 넣어주는 것이다." 참 좋은 이야기다. 그러나 그게 실제로 가능한가가 문제이다. 설교도 같은 조로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무한한 영감을 받으십시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는지를 말하지 않으면 그 말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설교자가 실제로 하나님의 영감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리고 날마다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설교자료는 용수철과 같다. 오래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잘 튀지를 않는다. 하지만 자꾸 사용하면 대단한 탄력을 제공한다. 설교자는 두 가지로 자신을 훈련시켜야 한다. 첫째 복음적으로 둘째 설교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많은 고참 설교자들은 설교적으로 매사를 본다. 하지만 그것을 복음적으로 풀지는 못한다. 설교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대화나 독서나 기도나 여행이나 모두가 다 설교거리로 변한다. 심지어는 실수나 실패 그리고 수치스러운 일과 고통거리도 모두가 다 설교에 사용된다. 설교자는 항상 수첩을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어디서건 설교의 단서가 떠오르면 즉시 적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곧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복음적으로 풀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적이라는게 다른게 아니다. 그리스도가 내게 해주신 일을 통해서 나 자신을 이해하고 그 힘으로 모든걸 풀어나가는 것이다. 신자는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의 힘만으로 살아야 한다. 설교자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고 사는게 훈련이 되어야 한다. 기도를 할 때 자기의 공로 즉 많이 오래 금식한 것 보다는 하나님의 자비와 얼마든지 들어주신다는 은혜로운 약속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고 한다면 확신과 평안을 가질 것이다. 장사를 하건 작품을 만들건 하나님 자녀의 능력이 자기 속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믿음으로 확인하면서 한다. 복음적 삶의 단면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삶"이란 오직 한 주제는 모든 설교에 적용된다. 절대로 여기서 벗어나서는 않된다. 이것에만 늘 관심을 쏟고 있다면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거의 모든 것에 대해 적합한 설교 자료를 제공할 것이다. 또한 신자는 삶의 모든 분야를 이 주제로 풀어야만 한다. 그것들은 매번 설교할 내용을 준다. 그 내용들은 설교자가 그때 그때 신중하게 생각해서 선택을 해야 한다. 물론 절기도 있고 특별한 경우도 있다. 강해설교로 하거나 씨리즈로 연속해서 설교할 할 경우도 있다. 여하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설교자가 다음의 세 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주제를 선택하면 된다. 2. 설교자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를 선택하라. 하고 싶은 말을 주제로 고르라. 그것이 주제를 택하는 가장 쉽고 필요한 방법이다. 말하고 싶은 것이 솟아오르게 하라. 문제 해답이건 좋은 소식이건 교훈의 말씀이건 상관 없다. 하지만 그것을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에 근거해서 말하도록 하라. 그렇게만 된다면 복음적인 설교로 바뀌고 만다. 설교자가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내용은 역시 제일 흥미가 많거나 가장 자신있는 분야이다. 모든 면에서 다 잘 할 수 있는 설교자는 없다. 자연히 한 분야가 다른 분야보다 더 뛰어나게 마련이다. 또한 흥미도 항상 같을수는 없다. 관심사도 바뀌게 마련이다. 누구나 관심있고 잘 아는 부분을 말할 때는 신이난다. 어떤 경우에는 설교자가 구원에 대해 관심이 많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사회정화에 신경이 집중될 것이다. 그외에 다른데는 관심이 별로 없어진다. 어떤 경우에는 사랑에 대해서 또는 교회봉사에 대해서 많이 말하고 싶어질 것이다. 이런 부분을 말한다면 자연히 힘이 생기고 자신이 있게 마련이다. 너무도 유명했던 필립 부룩스의 말이다. "청중의 입장을 생각해 보라. 지금 말하는 내용이 설교자 스스로 관심도 없고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내용인줄 알고 있다고 치자. 그런데도 말할 내용이고 말할 때가 되어서 한다면 기쁜 마음으로 재미있게 듣겠는가?" 그럴 수 없다. 그들도 단지 의무적으로 들어줄뿐이다. 최고의 설교 논지는 설교자의 마음을 사로 잡고 있다. 무엇을 말할까 고민하는게 아니다. 너무 할 말이 많아서 무엇을 빼야할지 걱정할 정도이다. 그런 설교는 쉽게 만들어지고 힘차게 전달될 것이다. 혹시 다른 교회 헌신예배에 초청되거나 특별집회를 나갈 때는 그런 경우가 많이 있음을 경험한다. 하지만 모든 설교가 다 그럴수는 없다. 오히려 그런 경우는 드문게 실제 예이다. 또한 모든 주제가 다 그런 것도 아니다. 사람들에게는 매일매일의 문제가 기다리고 그에 대한 도움도 필요하다. 그런데도 목사가 관심있는 내용 잘 할 수 있는 것만 말한다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자연히 교인들은 갈증을 느낀다. 그러므로 해야할 내용 때문에 힘들게 설교를 준비해야 한다. 자신이 말하고 싶고 마음에 불이 붙어서가 아니다.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절기가 되면 하기 싫어도 거기에 맞는 설교를 해야 한다. 그것도 여러해를 하다보면 더욱 짜내기가 힘들어진다. 이래저래 의무로 준비해야 하는 설교는 힘들기만 하다. 그러나 아주 유용하고 강력한 설교가 여기서 나온다. 때때로 이 고생스러운 일을 하다보면 새로운 감동이 솟아오른다. 그러므로 필립스부룩스의 말을 따르면 "설교는 펌프질을 해서 파내는게 아니고 샘물이 터져 나오는 것 같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 과정을 통해서 설교자가 성장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설교자 자신이 자기가 약한 부분에 관해서 가장 많이 설교를 들어야 한다. 또한 자기 설교를 가장 열심히 들어야 할 사람도 자기 자신이다. 준비한 설교에대해서 가장 도움을 받는 사람은 설교자 자신이다. 약한 부분이라고 피하지 말고 연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에게 설교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설교는 적어도 설교가 되어지기 전까지는 설교자가 좋아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설교를 성공할 수 없다. 또한 설교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주제를 택해야 한다. 혹시 그렇지 못하다면 좋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설교할 때는 좋아하는 내용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3. 청중이 기뻐하는 주제를 택하라 청중을 기쁘게 해주라니! 이 말은 잘못된 충고처럼 들린다. 사람을 즐겁게 하려는 선지자들에 대해서 성경은 대단히 비판적이다. 참된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돌에 맞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이 박혔다. 백성들이 듣고 싶어하는 예언을 일삼는 선지자들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대상이었다. 청중을 즐겁게 하려는 설교자는 무엇인가 잘못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이 점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청중을 기쁘게 하는게 반드시 하나님의 일에 역행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레미아는 말했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긴다고 했다. 거짓이 잘못된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의 원리를 보자. 청중은 관심 없는 내용을 듣지 않는다. 조금 듣다가도 청취를 중단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청중과 관련을 시켜 주어야 한다. 스스로 자신의 설교를 듣는 청중의 입장이 되어보라. 그리고 그 설교가 청중인 자신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를 확인해 보라. 반드시 관련을 시켜야 한다. 정말로 복된 소식을 전한다면 청중들은 좋아할 것이다. 잘 모르는 것을 말하는게 아니다. 그냥 청중이 듣기 좋아하는 말하는게 아니다. 또는 돈많고 유명한 몇 사람 좋아하라고 말하는게 아니다. 그렇게 한다고 청중이 기뻐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에게 정말로 유익이 된다면 싫어할 사람이 없다. 반드시 좋아한다. 미국 사람들에게 설교를 한 뒤에 듣는 말이 무엇인가? 한국 사람들처럼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말한다. "I enjoyed your sermon." 처음에 들으면 이상한 느낌이다. 직역하면 "당신의 설교를 즐겼습니다"이다. 즐기다니! 하나님의 말씀을 즐기는 것인가? 그렇다 그것은 즐거워해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소요리문답 제 일조가 무엇이던가? "사람의 제일되는 복적이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대답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니라." 전에는 잘못 번역해서 "하나님을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라고 했었다." 그렇지 않다. 즐거워하는건 우리 사람들이다. 하나님 속에 우리가 즐길 모든게 있다는 가르침이다. 또한 하나님을 즐거워해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도 된다. 설교자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청중들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즐길 수 있는지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설교를 즐겼습니다"와 "하나님을 즐기고 있습니다"는 같은 내용이어야 한다. 설교자는 자신이 누구에게 설교하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주의 종이 죄인들을 꾸짖고 위선자들에게 바른 길을 가르치는 것으로 생각하면 않된다. 설교 대상은 먼저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그 다음에 동료 신자들에게 함께 그 설교를 듣게 하는 자세로 해야 한다. 자기 자신도 청중 속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청중이 기뻐하는 것은 자신도 기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악행을 꾸짖을 때는 자신이 먼저 꾸짖음을 당하는 마음으로 하라. 청중은 그 꾸짖음을 달게 받을 것이다. 또한 자기 자신이나 가족을 격려하듯 복음의 말씀으로 청중을 일으키라. 그들이 기뻐할 것이다. 그들도 나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원하고 있음을 알자. 4.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주제를 택하라. 종교개혁 당시 영국의 휴 레티머는 왕실 교회에서 설교할 때 어떤 말을 들었다. "조심해서 설교하시요. 오늘 당신은 영국 왕 앞에서 설교합니다." 그러자 그는 다시 한 말을 들었다. "조심해서 설교하시요. 오늘 당신은 왕들의 왕 앞에서 설교합니다." 이 뒤의 말이 모든 설교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적용될 것이다. 설교 작성하면서 스스로 물어본다. "조직이 잘 되었는가?" "예화가 괜찮은가?" "청중이 좋아할까?" 그러나 정작 물어보아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기 원하시는 내용인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게 최대의 관심사요 최대의 목표라고 한다면 작성하면서 내리는 결단이 다 옳을 것이다. 때때로 양심에 걸리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설교인가 아니면 내 자신의 설교인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주제인가 아니면 내 욕심을 위해서 하는 설교인가? 이것이 복음적인 말씀인가 아니면 당장 교인들이나 움직일 위협적인 율법인가? 스스로 마음에 물어보고 확실한 대답을 얻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주제가 무엇인가? 이미 여러 번 설명했었다. 하지만 한번 더 말하자면 이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확실하게 드러나는 주제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확실한 주제가 아닌가!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해 주신 일이 무엇인가? 또한 지금 해주시고 앞으로도 해 주실 일이 무엇인가? 그래서 우리가 어떤 존재로 바뀌었는가? 이 질문의 대답을 하나님이 설교를 통해 말하고 싶어하신다. 다시 말해 한 가지 주제 곧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놀라운 삶"이다. 이 한 주제가 바로 복된 소식이다. 그 대주제를 놓고 여러 작은 주제들이 만들어진다. 그때 설교자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를 택하라. 그러나 항상 그러지는 말자. 또한 청중이 좋아하는 주제를 택하라. 물론 그것도 언제나 그러면 않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주제를 택하라. 이것만은 항상 그래야 한다. 5. 여러 가능한 주제들과 설교자 구원의 주제는 크게 나누어서 중생과 성화이다. 이것을 좀 더 세분하면 중생에 관련된 하나님, 죄와 회개, 그리스도, 성령 같은 부분과 성화와 관련된 개인적 또는 사회적 윤리, 개인이 가진 문제, 신앙훈련등을 주제로 삼을 수 있다. 중생과 성화로만 집중시키는 이유는 그렇게 복음과 연관되어 풀어지기 때문이다. 이것들을 가지고 여러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 때때로 주제를 하나씩 잡지 않고 씨리즈로 할 수 있다. 인물중심으로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십자가 주위의 얼굴들", "구약의 어머니들", "사도행전의 영웅들" 같은 제목이 나올 수 있다. 비유, 예수의 칭호, 팔복, 사도신경, 주기도문등의 씨리즈를 다룰 수 있다. 어떤 내용을 하던간에 설교자는 청중이 균형잡힌 양식을 먹도록 심사숙고하고 준비해야 한다. 특히 주제의 선택은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장기간의 설교 계획을 세워두어야 한다. 거기에서 빠진 것이 없는지 교회력을 읽어보고 조직신학의 여러주제들을 살펴보라. 신구약의 배합도 생각해 본다. 하지만 순발력도 잃지 않아야 한다. 세상적으로 떠들석한 일이 생겼는데도 전혀 무관심한채로 설교할 수 없다. 교회행사나 함께 하는 사업도 무시하고 설교할 수 없다. 가능하면 설교자도 청중도 다 마음에 드는 주제를 택하라. 그러나 항상 그럴수는 없음도 인식하라.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주제는 꼭해야 한다. 성경은 설교자의 일이 측량할 수 없이 풍성하고 다양한 것을 증거하고있다. 설교자들의 할일은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직이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고 하신대로이다. 또한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하는"(행 20:27) 것이다. 이대로라면 너무도 신나는게 설교자의 일이다. 바울은 설교자의 일을 묘사한다.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전하여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시며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달아"(엡3:8, 18) 알게 하려는 것이다. 스펄전은 그의 3500 설교가 출판된 뒤에 말했다. "35년간 일한 뒤에 발견한 것은 성경의 보석들이 무진장이라는 점이다. 아직 나는 이 일에 초보 단계에도 이르지 못했다." 여기서 설교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꾸준한 노력이다. 계속적으로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찾아 누리고 그것을 전파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