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말씀(text)과 상황(context)

이아기 2005. 3. 29. 00:46
말씀(text)와 상황(context)
                                                                라황용 목사

1.말씀이냐, 상황이냐 ?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서의 생각과 뜻을 그 창조물속에 나타내시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소의 잇빨을 보면 채식을 하도록 만드셨고 신체내부 구조설계도 채식에 맞게 창조하신것이 분명하며, 사자와 호랑이의 잇빨은 대부분이 송곳니로서 육식을 하도록 만드셨음을 알수있고 신체구조도 육식에 맞게 창조하신것이 확실합니다. 이 원리를 어기고 소가 육식을 하게되면 미치게 되어있어며, 사람은 곡식과채소를 먹어야 살수있고, 사자가 채식을 하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영혼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설계하신데로 살지 않으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떡으로만 살수없고 영혼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어야 영원히 살수있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말씀으로 창조하신 우주는 말씀따라 순응하면서 잘 운행되고있으며, 동식물도 말씀대로 순응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에도 순응하지 안고있습니다.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만드신것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도록 즉 신본주의 의 상징으로 설계하신것으로서, 사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고 그를 신뢰하며 순종하여 그로 인하여 영원토록 즐거워 하며 살도록 하기위한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탄의 유혹에 빠져,소가 육식을 하듯 선악과를 따먹게 된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인간의 상황에 맞는 인본주의로 말씀을 가감하여 이브를 교육하였으며, 이브는 말씀보다 상황을 받아들임으로서 불순종하게 되었고 말씀대로 정녕 죽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영원히 살수있는 길은 신본주의의 모든 말씀을 먹고사는것이고,영원히 죽는길은 인본주의의 상황을 따라 사는것이라는 것을 에덴동산에서 부터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집고 넘어 갈것은 교육의 중요성 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교육하셨고, 아담은 이브를 교육했는데 이브가 교육을 잘못받아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입니다.그리고 삶의 현장에는 항상 사탄이 유혹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여자는 상황에 약하고 남자는 여자의 말을 검증없이 받아들이고 말씀보다 여자를 더 좋아 한다는 것입니다.
반복적인 말씀교육을, 하는것과 받는것을 싫어 한다면 ,그 결과는 뻔 합니다.

말씀과 상황의 역사, 신본주의와 인본주의의 역사는 에덴동산에서 부터 갈등하면서 인류역사 속에서 끝없이 대립하며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따라가는냐, 상황을 따라가는냐,하나님을 기뻐시게 하랴,사람을 기뻐게하랴 ---는 항상 존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자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선악과를 따먹듯 말씀을 무시하고 상황을 앞세울때 불안해지고 삶의 의미와 참된 기쁨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교회안에는 신본주의의 사람, 신본주의와 인본주의가 혼합된 사람, 인본주의의 사람으로 분류가됩니다. 신본주의의 사람은 하나님나라 안에 있으면서 교회에도 속한 사람이고, 혼합된 사람은 교회에는 속하였으나 하나님나라에는 아직 속하지 못한 사람이며,인본주의 사람은 교회에도 하나님나라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 신본주의의 사람을 원하신것 처럼,하나님나라에도 신본주의의 사람만 원하십니다.

2. 구약의 말씀과 상황

노아는 그 어느때보다 패역한 시대에 살았는데"방주를 지어라"하는 말씀을 들었고,그때의 상황이나 지금의 상황이나 산 중턱에 큰 방주를 만든다는것은 웃음거리이고 전공도 아닌 사람에게 방주를 만들어라는 말씀은 의심받고 부인할수 밖에 없는 상황이 었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가족은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첫번째"고향을 떠나라", 두번째는 훗날에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을 들었는데,그때의 상황은 75세 나이고 ,자리잡은,안정된, 텃세지역에서,떠난다는것은 무리한 명령이었고, 또한 100세에 기적적으로 얻은 하나뿐인 아들을,노년의 행복의 대상이었던 외 아들을 번제로 드린다는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상황에 항복하지않고 말씀대로 떠났고,말씀대로 독자를 드렸습니다.

욥은 자녀모두와 재산 모두를 순식간에 잃고,건강마저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면서 저주하고 죽을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말씀의 사람이었고,

다니엘과 친구들은 그 당대의 최고 권세를 가진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말씀을 따라 갔습니다.

구약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따라 신본주의로 생활 상황 속에 들어가 말씀을 적용하고, 인본주의 앞에서 신본주의의 승리를 보여주며 살아온 말씀의 사람과 ,인간중심으로 현실상황을 중요시하며 말씀에서 떠난 상황의 사람들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은 말씀의 사람들에게는 약속의 땅을 선물로 주시며 땅의 복을 누리게 하셨고, 신약에서는 말씀의 사람에게 약속의 하나님 나라를 주시며, 하늘의 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상황의 사람들을 인용하셔서 성경에 인간의 부정적(Negative)인 모습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3. 교회시대의 말씀과 상황

초대교회를 말씀(text)이라고 한다면, 중세교회는 상황(context)이라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말씀이 지배하고 성령의 역사로 상황을 정복하고 변화시켰으며, 중세교회는 말씀 위에 교회가 군림하여 말씀보다 상황을 앞세웠습니다.

중세교회의 교회조직이 말씀을 숨기고, 독재를 위해 말씀교육을 못하게 했습니다. 인간중심의 계급을 가진 사제주의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위장된 신본주의로 상황에 이용되었고, 말씀의 사람들의 저항을 핍박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죽이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조작된 신본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르네상스가 등장하게 되었고, 인간의 이성을 최고로 신봉하면서 로마 카톨릭의 거짓신본주의 가면을 벗기기 시작했습니다. 167년후 말씀의 사람이 교회개혁을 시작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권위를 회복시키며 바르게 해석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문예부흥의 인본주의 한류와 교회개혁의 신본주의의 난류가 뚜렷이 구분되어 말씀과 상황의 두 줄기의 사조가 다시 흘러가게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것입니다.

르네상스의 상황전통은 계몽주의(합리주의)지역으로 흘러 자유주의 신학,토착화신학,참여신학,민중신학,해방신학,포스트 모더니즘신학 형태로 흘러가고있고, 교회개혁의 말씀 전통은 복음적 경건주의, 복음주의, 개혁주의로 흐르고 있는것입니다.

교회시대에도 인본주의가 점차 강하여 말씀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사람이 죄의 상태에 있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반드시 계명이 강화되어야함을 요구하나,

계명이 무시당하면서 부터 사회의 부패를 심각하게하고 가정생활이 부서지게 되면서 다른 성실을 기대 할수없게 되는 현시대의 사회상 중 가장 위협적이고 위험한 상황까지 만들고 있는것입니다.

한국교회 안에도 인본주의 사람들이 들어와 기독교의 토착화를 시도하면서 샤마니즘과 불교와 유교를 혼합했으며,자기들이 옳다고 여기는것만 진리이고 성경원리를 무시하게되면서 신본주의 사람이 점차 줄어들고있으며 이는 말세에 믿음을 보겠는냐는 계시된 말씀과 연결되어있는 것입니다.

4. 결 론

예수님은 말씀(text)만 강조 하신것이 아니며,그렇다고 상황(context)을 원리로 강조하신 즉도 없습니다.

말씀만 강조 하다보면 성경문자주의가되고 상황과 현실에 대한 고려가 없어지게되며 성령의 역사 없는 교리주의에 빠지게되고 생명력이 없으며 삶과의 접촉이없는 ,선교의 명령을 가볍게 생각하는 죽은 믿음이라는 이상한 방향으로 치우치게됩니다.

상황만 강조하면 실존주의자가 되어 새로운 무엇을 만들기 바쁘고 말씀을 이용하게 됩니다. 그 예로 지역현실에 따라 아프리카신학 아시아신학,인간현실에 따라 여성신학 흑인신학,역사현실에 따라 포스터 모더니즘신학 번영신학,사회현실에따라 민중신학 해방신학 환경신학 통일신학등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성경을 억지로 교묘하게 풀어 보려는 것에 불과하므로 이러한 사상에 매력을 느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상황속에 들어가 말씀이 변질되지 않고 오히려 말씀이 상황을 말씀의 형태로 변화시키는것을 요구하십니다.
교회 출석하여 예배만 드리고 변화가 전혀 없다면 말씀의 사람이 아니며, 나중 영적 형편이 처음형편보다 더 나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현재적 상황뿐만아니라 종말적 현실과 초월적 상황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상황에 대하여 바르고 깊은 분석과 조명된 해답을 제시하되 증인됨을 나타내게만 하십니다.
상황의 사람은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근시안이 되기 십상입니다.

말씀을 기준 뿌리로 해서 상황을 변화시킨 모범적인 칼빈을 존경하고 따라야 합니다. 기독교사상,각종 사조들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칼빈을 능가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적 지혜를 주신 모범된 사람입니다. 장로교는 칼빈의 신앙을모범으로 따랐는데, 지금의 모습을 반추해 보아야 합니다.

현대는 말씀을 일부 부인하는 사람, 말씀을 이용하여 자신을 높이는 사람,상황때문에 말씀을 숨기는 사람, 항상 상황을 앞세우고 말씀은 말씀으로서만 가만히 있기를 원하는 사람,말씀을 가감하는 사람들,이러한 위험한 형태가 점차 많아지는 추세로 나타 나고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구분되어 있듯이
신본주의와 인본주의 대립은 주님 오시는날 까지 계속될것입니다. 상황이 득세하나 말씀은 영원히 승리 할것입니다.

말씀은 성령의 인도가 있으나, 상황은 에덴동산에서 처럼 사탄이 항상 이용하며 교회를 혼란케하고 치우치게 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