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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고난주간 묵상
이아기
2005. 3. 29. 01:25
LONG
-특별새벽기도회 설교 전문-
1.첫째날-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4:7-8
이 새벽에 우리의 찬양이 하나님께 상달되기를 바랍니다. 아침에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지만 간절히 마음을 다하여 찬송해 보십시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직접 우리 곁에 오셔서 사랑을 십자가로 보여주신 그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찬양해 봅니다. 89장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천상에서의 예배는 찬양예배를 드림을 볼 수 있습니다. 천사들도 찬양하고 먼저 간 신앙의 선배들도 함께 찬양을 합니다. 그런데 천사들의 찬양과 먼저 간 신앙의 선배들 간의 찬양이 다를 때가 있습니다. 천사들은 어린양의 피를 모릅니다. 어린양의 피 능력과 피 권세를 모릅니다. 오직 이 세상에서 어린 양의 피로 구원받음 사람들만이 어린 양의 피와 구원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 찬양을 할 때 천사들을 체험이 없으므로 감격하지 못하지만 사람들은 감격합니다. 모두들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 감격은 정말 천사들도 모르고 세상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릴 사랑하시어 마음으로만 작정하시고 불쌍히 여기신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를 보면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것이 창세 전부터 계획된 것인데 때가 되매 나타난 바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깨닫은 바울은 감격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그 크기와 넓이와 높이와 깊이가 측량할 수 없이 큰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측량할 수 없는 그 은혜, 측량할 수 없는 그 사랑!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왜 예수를 믿고 영적으로 거듭남의 체험을 하면 그렇게 행복하고 기쁨이 샘솟고 그럴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은 행복입니다. 사랑을 받으면 이렇게 행복합니다. 사람이 사람의 사랑을 받아도 너무 행복하고 기쁜데---하물며 하나님의 사랑이야 말할 수 없을 정도이지요.
일본의 한 사람(요네야마 마사노부)이 물에 관해서 글을 썼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번역되어져 출판되었습니다. 물의 결정 사진을 찍어보면 여러 가지 모양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물이 얼었다가 다시 물로 돌아가기 직전 -5도에서 0도 사이에서 물의 결정체 사진을 찍을 때에 ‘사랑합니다.감사해요’이런 말을 하면 보석처럼 빛이 나고 모양이 아름답고 선명하게 나타나고 ‘망할 놈, 미워죽겠어, 악마.짜증나’ 이런 말을 하면 결정체가 나타나지 않고 흐리고 마치 중심의 검은 부분이 밖으로 공격하는 것처럼 무섭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과연 물도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이런 반응을 나타내는 것을 보면 인간의 말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가를 알 수 있습니다. 또 베토벤의 음악이나 찬송가 같은 음악을 물에 다 틀어주었더니 결정체가 아름답고 분명하게 나타났는데 헤비메탈 음악을 틀어놓으니 마치 ‘악마와 분노와 망할 놈 미워죽겠어’말을 들을 때와 같은 모습이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또 전자파를 쐬게 하면 물의 결정체가 나빠진다는 것입니다. 핸드폰,TV,등 말입니다.
이처럼 사랑이란 것은 대단합니다. 물도 사랑의 개념이 들어간 표현에 빛을 내고 보석처럼 밝고 분명한 결정을 나타낸다는 것을 볼 때 사랑의 힘이란 것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4: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이 말씀은 계시의 절정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마음으로 입술로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그 사랑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가 아니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랑에는 달인이 없습니다. 완성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자나 가르침을 받는 자나 모두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할 이유가 어디있습니까? 헬라어 원문에는 왜냐하면 하는 ‘호티’라는 접속사가 붙어있다. 그것은 사랑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냥 사랑이 좋은 것이기 때문에가 아닙니다. 또 해야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사랑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나타내는 특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하나님을 따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것이기에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기 영으로 우릴 중생시키시고 그 안에 거하시사 자기 백성을 양자삼으시고 의와 사랑을 행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사랑을 행하는 행위는 하나님께로 났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가인과 같은 사람이 그렇습니다. 사랑없이 동생을 죽였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하나님을 잘 안다고 해도 형제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이고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실뿐더러 그 자신이 사랑이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 예수님을 통한 십자가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입술로만 해서는 안됩니다. 마음으로만 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사랑을 이용하는 위선자입니다. 구체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행동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하고 말로 표현하고 행동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죽은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이 것이 최고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사랑의 절정인 것입니다.
오늘 그 사랑을 받은 몸과 마음으로 우리 서로를 바라보시고 하루의 삶 속에서 사랑을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은 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지 모릅니다. 우리 눈에는 다 똑같은 물처럼 보이지만 물도 사랑합니다 하면 글 결정체가 빛나고 아름다운 것처럼 우리도 사랑을 받았고 사랑할 때 더욱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도 모르게 큰 축복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습니다, 행복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달라졌습니다. 왜 너무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갔던 베드로가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달라졌습니다. 그 사랑을 전하고 그 사랑으로 기뻐하십시다. 할렐루야!!
첫째날(월요일)-권위의 날-성전청결
둘째날 2.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 요한일서4:9-10절
불신자들이나 믿음이 약한 사람들 중에는 십자가를 저주의 십자가,힘없이 처형당한 실패한 십자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십자가는 인류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요,하나님 사랑의 절정이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도 없다. 구약의 제사제도,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기적과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십자가는 하나님의 비밀이요, 하늘의 지혜이다.
어떤 영화를 보다가 그 사랑의 깊음에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클래식’) 정말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눈알을 바치고 자신은 눈 먼자가 되어 외롭고 고독하게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그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이 눈알을 준 것을 모르도록 숨어서 살아갑니다. 나중에 그것을 알게 된 사랑하는 사람이 안타까와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사람은 나중에 그 자식들 세대에 가서 이루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사랑하면 내 몸과 생명을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목숨을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가 되었다고 소개합니다. 그 사랑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어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고 말입니다.(9절)
어디에서 죽으셨습니까? 십자가 위에서----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시면 당하실수록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더욱 더 깊은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물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목숨과 바꿀 정도로 가치있는 존재입니까?’
오늘 하나님께 물어보십시오. 하나님 내가 그렇게 소중한 존재입니까?
죄악 가운데서 오늘도 수없이 하나님을 부인할 수 밖에 없는 제가 그토록 소중한 존재입니까?
그리고 여러분 이번에는 자신에게 이렇게 또 물어보십시오. ‘내가 그렇게 소중한 존재라면 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내 안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니가 가치있는 존재라면 하나님이 독생자의 목숨과 바꿀 정도로 니가 가치있는 존재라면 이젠 가치있게 살아야 한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부인하던 베드로와 같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팔아먹은 유다같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우리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10절)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10절의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십자가의 사랑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어 그 아들을 보내시어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건널 수 없는 강’ ‘건널 수 없는 다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건널 수 없는 강처럼 되어버렸는데 하나님께서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힘으론 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하나님이 그 아들을 통해서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복된 소식입니다.
이처럼 그 아들을 십자가 위에서 죽이심으로 우리를 살리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받고 있다면 우리는 이제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움은 하나님께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때 우리는 두려움을 이기고 기쁨과 감사 속에 평안 속에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죄를 이기는 능력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신 비밀인 것입니다.
십자가가 사랑이 될 수 있습니까? 형벌의 고통이 사랑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하셨습니다.
오늘 고난주간 2일째를 맞이했습니다. 우리주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한지 첫날에는 성전을 청결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2일째는 변론의 날이라고 합니다. 종교문제뿐만 아니라 정치문제까지도 서기관들과 논쟁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에수님을 모함하기 위해서 제일 되는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어왔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과부의 두렙돈의 헌금을 칭찬하심으로 신앙의 핵심이 외형적인 화려함이나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고 진실한 내면적인 질에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기도제목: 1.말세에 십자가의 사랑이란 복음의 빛을 붙들게 하옵소서
2.남의 눈의 티보다 내눈의 들보를 보게 하소서
3.물질의 부요함보다도 믿음의 부요함을 주소서,
4.핸드폰이나 전화로 음성이나 문자로 내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이 누군인가를 생각하고 전화하기,문자보내기
세째날 3.우리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요한일서4:11-12
요한서신은 그 시대의 이단인 영지주의자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영지주의 자들은 성도들의 사랑의 실천이 육체를 경시하고 신령한 지식에 대한 사랑만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령한 지식 곧 영적인 지식을 사랑하고 소유하는 것으로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관념적인 사랑, 마음 속으로만 생각하는 신앙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그러다보니 실천적인 적극적인 사랑을 행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많은 이 세상과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 인간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그 분이 지신 골고다의 십자가는 우리의 고통의 문제를 구경하시는 방관자가 아닌 적극적으로 인간의 고난을 해결하여 주시기 위해 우리의 고난 가운데로 들어오셨고 함께 눈물흘리시며 고난을 당하시므로 해결하여 주신 사건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의 절정이라는 것을 앞에서 상고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의 적극적인 사랑을 본받아 행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불법을 행치않는 삶은 소극적인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나 더 적극적인 성도의 삶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 대부분의 성도들은 소극적인 사랑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여기서 ‘이같이’란 말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이같이 사랑하신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의 사랑이 아닙니까? 참진리이신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을 의미합니다. 구속의 복음에 근거하지 않은 사랑이란 본질상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인본주의적이며 세속적인 사랑밖에는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랑에는 인간의 이기심이 깔려있습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천국의 영원한 삶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현세 지향적인 삶을 살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그의 의보다는 나와 내 가족의 사랑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인류를 위해 나를 버린 예수님의 사랑은 그 이기적인 사랑을 초월하게 만듭니다. 여기에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므로(이것이 은헤인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요한일서 3:16절에는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우리가 서로서로 사랑하라는 이 말씀을 행하지 않으면 곧 소극적인 사랑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12절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꼭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받은 사랑이 우리를 감격시켜 사랑을 실쳔하도록 성령은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실천이 없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거나 아직도 회의하고 있거나 믿음 위에 서있지 못한 사람입니다.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아멘!!
이렇게 새벽에 나와서 함께 기도하는 것도 서로 사랑하는 적극적인 모습입니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찬양이가 참 우리 열린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기에 그 행동이 나타납니다. 주일이면 꼭 열린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 된다고 부모님을 설득하고 주일 날 나와서 반주로 봉사하고 동생들을 데리고 놀아줍니다. 그 사랑의 행함으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새벽에도 나오려고 힘을 다하여 노력합니다. 어제도 보니 졸지도 않고 똑똑한 모습으로 힘을 다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얼마나 애처러우면서도 자랑스러웠습니다. 아이들도 순순하게 이런데 어른들은 조금 피곤하다고 더 해야될 일이 있다고 이 고난주간에 새벽기도에 동참하고 사랑을 나누는 일에 회피해서는 안됩니다.
새벽기도만 했다고 만족하지 마시고 금식도 하시고 그러면서 교회 계획에 동참하면 그것이 바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북한동포를 이 고난주간에 돕는 것, 이웃불우 노인들을 돕는 것----그것이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사랑의 교훈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도 그 사랑에 승리하셨습니다. 오늘도 기도하실 때에 우리의 기도가 나 자신에게만 머물지 마시고 나의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 영혼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오늘도 먼저 손내미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 침묵의 날 혹은 은퇴의 날(3월 23일: 수)>
많은 변론으로 피곤한 하루를 보내신 예수님께서 베다니로 가셔서 쉬신 날이어서 ‘침묵의 날’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날 주님은 제자들을 불러 놓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에 대해 경고와 교훈을 하셨다.
이 날 여기에서 주님은 영원히 기념될 만한 한 여인의 헌신을 받으신다. 마리아로 호칭되는 여인이 자기 행동에 대한 타인들의 반응을 의식하지 않고 주께 받은바 은혜에 감사하며 자신의 가장 귀한 것 곧 값진 향유를 조금도 아낌없이 주님께 부어 드려 주를 섬겼으니 이는 곧 ‘주님의 장례를 예비하는 의식’을 행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식사 초청을 한 전에 문둥이였던 시몬은 마리아 못지않은 은혜를 받고서 예수님을 식사에 초청까지 하여 자기 집에 모시는 영광을 허락 받았으나 욕심 때문에 주께 봉사할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또한 아버지 하나님과 영교하시기 위해 한적한 곳에 가셔서 간절히 기도하신 날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 편에서는 유다를 비롯하여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과 군관들이 예수를 체포할 은밀한 흉계가 꾸며지고 있었다.
#기도제목:① 그간 믿음 안에서 은혜를 입은 사람, 사랑을 받은 사람을 찾아 보답
② 혹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사람이 있었으면 전화를 걸거나 편지를 쓴다.
③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이나 일들을 찾아 해결을 받도록 한다.
네번째 날- 4.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요한일서4:18-21
영국의 한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 마을에서 어떤 유명한 젊은 그리스도인이 여행을 하고 돌아와서는 신문에 여행에 관한 기사를 올렸습니다.
‘---혼잡한 기차였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빈자리가 있어 편히 여행할 수 있었던 일에 감사한다는 글이었습니다.----그러면서 언제나 어떤 경우에서도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글이었습니다.---’
이글을 보면 어디에고 잘 못이 없습니다. 흔히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감사생활을 표현한 은혜로운 글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러나 그 다음 다음 날 똑같은 마을 신문에 한 불신자의 글이 올려졌습니다.
‘나도 어제 그 사람이 탔던 혼잡한 기차에 타서 여행을 했다. 하나님의 은혜인지 몰라도 그 유명한 젊은 그리스도인 옆에 자리가 나서 앉았다. 그러나 어떤 노인분이 서 계신 것을 보고 옆에 있는 젊은 그리스도인이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기에 내가 양보하여 일어서는 것 때문에 힘든 여행을 했었다. 그러나 그 힘겨워 하시던 노인네분이 편안히 앉아 가시는 것을 보고 힘들었지만 내내 행복했었다---’
이제 여러분 첫 번째 아주 유명한 젊은 그리스도인의 감사가 어떤 감사인가? 하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의 특징일텐데--- 위의 한 불신자의 글은 그리스도인의 감사를 비웃는 글이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감사를 우리 자신도 모르게 할 때가 많습니다. 얼마나 이기적인 감사요,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감사입니까? 하나님은 이런 감사를 받아주지 못할 것이고 이런 감사는 남을 아프게 하는 감사요, 남을 넘어지게 하는 감사요, 하나님을 욕되게 만드는 감사인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아직도 죄가 남아 있어서 그렇습니다. 죄는 우릴 두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힘들면 이러다가 죽지---? 내가 편안해야 할 텐데----내가 행복해야할 텐데----내가 천대받는 삶을 살면 어떻게 되지---불안하고 답답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는 언제나 두렵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녀의 문제에서 이 범위를 뛰어넘지 못합니다. 자녀들을 바라볼 때마다 불안하고 답답하고 두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바른 인도보다는 세상적인 방법을 따라가면서 스스로 자위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결국 자기 사랑인 것입니다. 자기 사랑 안에 있을 때 자기를 버리려고 하면 두렵고 불안하고 힘듭니다. 이 땅에 사는 우리들은 누구도 아직 이 이기적 사랑 속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주의 성령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치 않습니다. 자기 중심적 사랑을 뛰어넘습니다.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것은 남을 위해서 내놓을 때 행복해 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삶이 내 인생의 목표라고 생각하고 결단하면 두려움이 없어지고 불안해지지 않습니다. 나를 지키려고 하니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이것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도 부자간에도 이웃간에도 나를 지키려고 하면 화해가 없습니다. 평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렸습니다. 그 안에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그 사랑 안에 있을 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나를 버리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욕심과 사랑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향한 가장 큰 사랑은 무엇일까요? 예수 믿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 곧 복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이요.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잘 알지 못합니다. 먼저 받은 우리가 그들의 눈높이에 맞게 먼저 맞추어주어야 합니다. 눈높이라는 의미를 가장 먼저 사용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시면서 천국을 말씀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신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눈높이를 맞추신 것입니다.
우리는 불신자들의 눈높이늘 맞추어주기 위해 때론 물질로, 빵으로, 봉사로,기도로. 치료로, 도움을 베풀어야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하게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받았으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마다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4:11절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3:16절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슴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여기서 ‘-마땅하니라 ’라는 말고 4: 21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느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에서 사랑할찌니라는 선택이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될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번 고난주간에도 나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시면서 금식하시고 다투지마시고 나보다 남을 위해 사는 삶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제4일째- 번민의 날 또는 세족의 날(3월 24일: 목)>
니산월 14일로 유월절 목요일이며 예수님은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가르침을 주심을 기념하는 날로 사실상 전 제자들과 공식적으로는 마지막 대화를 나누셨으며 오후 6시에 최후의 만찬 식을 제정하시고 최후의 교훈을 하신 날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날이어서 세족(洗足)의 날이라고도 한다. 예수님은 이 일을 통하여 서로 발을 씻기며 섬기고 사랑하라고 하셨다.
또 이 날 고별사를 하신 후 밤 11시경에 열한 제자를 데리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구속 성취를 위한 고뇌의 기도를 드리셨으니 이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중보 기도였다. 이어 자정이 되자 가룟 유다의 가증스러운 입맞춤을 신호로 체포되셨다.
이날은 가족들끼리 혹은 교회의 구역 식구들끼리 세족식을 해봄으로써 서로에 대한 사랑과 섬김의 마음을 다지는 것도 의미있을 것입니다.
# 기도제목
➀ 부활절날 성찬에 참례할 때 더 고난의 의미와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깨달을 수 있도록
② 섬김을 받으려고만 했던 잘 못된 삶이 섬기는 삶으로 바뀌도록, 은연중에 사랑받기만을 위했던 나의 모습이 사랑을 나눠주는 나의 모습으로 바뀌어지길---
③ 지금도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나의 죄를 지적하실 때마다 자백하는 기회로 삼도록---
‘성금요일-고난일 세족식(3/25)’-‘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라’-요한복음13:12-15
‘수난일’ 이라고도 하는 Good Friday(성 금요일)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어 주신 놀라운 사랑이 나타난 날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슬픈 날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하여 인간을 위한 그분의 사역을 성취하셨기에, 곧 부활 사건의 전체를 Good으로 받으셨기에, Good Friday라고 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God's Friday에서 Good Friday가 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주님은 자정에 유다에 의해 체포되셔서 새벽 1시경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갔다가 베드로의 부인의 아픔을 맛보시고 새벽 2시경에는 안나스의 심문을 먼저 받는다. 새벽 3시경 사상 유래 없는 산헤드린 공의회가 비공식적으로 소집돼 심문을 받는다. 새벽 4시반 경 가야바의 심문을 받고 산헤드린에서 사형 구형을 받는다. 새벽 5시에는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끌려가 1차 심문을 약 30분쯤 받은 후 헤롯 왕에게로 보냄을 받는다. 새벽 6시경에 다시 빌라도에게 끌려와 로마 병정들에게 희롱을 당하시다가 6시반 경 급기야 멸시와 조롱을 받으시면서 사형이 확정되자 채찍질을 당하시고 옷이 벗기워 지고 침 뱉음을 받으시는 등 온갖 고통과 수치를 당하셨다.
사형 집행을 위해 무거운 통나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향하여 죽음의 행진을 하셨다. 오전 9시 머리에 가시관이 씌워지고 홍포를 입히고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폐를 붙여 사형을 집행한지 6시간 동안 지독한 고초를 당하신다. 완전한 사람이신 예수님의 인성으로는 이 잔이 지나가기를 원하시면 서도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기를 기도하셨던 주님은 온 세상의 믿는 자를 구원하시기 위한 십자가 고난의 잔을 받으셨다. 이는 죽기까지 순종하시는 성자의 모습이며, 죄인들의 속죄를 위한 희생양의 모습이었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성취였으며 온 세상 인류에 대한 구원의 완성 이였으며 사단에 대한 완전한 승리였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이루신 것이다.
사망 권세를 이기실 생명의 주님인 것을 알지 못하는 그들은 아리마데 요셉의 빈 무덤을 인봉하고 군사를 동원하여 헛되이 지키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성금요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주님은 약속대로 예언대로 3일후 주일 새벽에 부활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흔히 우리가 이름붙이기를 세족식에 관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3장 전반부에 나타나는 이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세족식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나타내고자 한 뜻이 3 가지가 있습니다. 흔히 우리들은 세족식을 통해서 섬김만을 강조할 때가 있는데 그것만이 아닙니다.
1.먼저 13장 8절 말씀을 통해서 세족식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씻김을 통해서 죄씻음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고 있습니다.‘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을 때 우리의 죄가 씻김받습니다.죄씻음을 받음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영혼 속에 오시고 우리 영혼의 주인이 되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토록 교제할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를 사랑하시어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죽으신 사건임을 깨닫고 믿는 것이 곧 나의 죄를 씻음 받는 것이요, 죄씻음을 받은 자만이 거듭나고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영원토록 함께 먹고 마시고 사는 것입니다.
2.13장 10절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세족식의 또 다른 의미는 예수믿고 거듭난 사람들의 회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긋하나 다는 아니니라’
이미 목욕한 자는 예수믿고 거듭난 자 곧 중생한 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근본적인 변화를 이미 경험했기에 또 다시 거듭남이 필요없습니다. 다만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범한 죄를 회개하는 것이 필요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족식의 또 다른 의미는 목욕한 자가 더러워진 발을 씻듯이 매일매일 범죄한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삶을 나타내고 잇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 회개의 삶을 매일매일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여기서 누구를 지적하고 있습니까? 가롯인 유다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3년 동안 모시고 가르침을 받고 따라 다녔지만 그리고 예산의 중요한 직책을 맡았으나 중생하지 아니한 자요, 곧 진정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자요, 회개도 매일매일 하지 않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한 번 회개하고 예수 믿고 영접하여 거듭난 체험이 있다하더라도 매일매일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가롯유다처럼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만큼 중생 이후의 회개의 삶은 중요한 것입니다.
3.세족식의 세 번째 의미가 오늘 본분에서부터 있습니다. 특히 14-15절을 보면 세족식의 또 다른 의미는 섬김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식탁에서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하시는 가운데 식탁 옆에서 대야에 물을 받아 제자들의 발을 씻겼습니다. 그리고 발을 다 씻기신 후에 다시 식탁의 의자로 돌아가 앉으시어 제자들에게 섬김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섬김에 대해서도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를 통해서 볼 때 주와 선생이 되는 사람들---곧 섬김을 받을 자들이 먼저 섬겨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깨닫은 자가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선생이 된 자(가르치는 자), 먼저 예수 믿게 된 자가 스스로 섬김의 본을 보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본이란 어느 순간에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맛보기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섬김의 본을 평생토록 살아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선생이 된 사람이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범은 보여주고 또 보여주길 원합니다. 그러나 계속 그렇게 사는 것은 싫어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지위가 올라가고 교회에서도 중직자가 되면 나이 어리고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섬기기를 바랍니다. 만일 그랬다면 하늘과 땅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33년이었지만 시간으로 따진다면 그 분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고 시간으로 따진다 해도 창조때부터 계신 가장 연장자가 아니겠습니까? 우린 우리의 이 몸덩어리가 다 헤어질 때까지 주님만 바라보고 섬김의 삶을 평생 본으로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일부러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실한 삶을 묵묵히 살아가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일부러 잠시 어느 순간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지속적으로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14절의 마지막에 ‘옳으니라’(오페일레테)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마태복음18:30절에서는 ‘빚지다’란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곧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의무를 나타내고 있는 낱말입니다.그리스도를 본받아 성도들을 섬기는 봉사는 그리스도에게 빚을 갚는 그리스도인의 의무라는 것입니다. 섬김이 의무인 것입니다.
섬김의 두 번째 의미는 14절의 중반에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는 것입니다. 성도들끼리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마땅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괜찮겠지가 아닙니다. ‘서로’,‘서로’가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섬기는 것이 옳으니라’ 이 말씀은 반드시 실천되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성도들 서로서로가 섬겨야 됩니다. 섬김이 무슨 뜻입니까? 내가 먼저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 섬김입니다. 내가 받기만을 위하고 내가 직분을 가지고 섬김받기만을 위한다면 내가 직분을 가지고 있으면서 무거운 짐을 회피한다면 섬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성도를 섬기자면 자신의 삶에서는 피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희생이 없이는 헌신과 섬김, 봉사는 없습니다. 우리가 가장 작은 것 중의 하나 교회의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볼 때 내가 참석하면 다른 사람들도 힘을 얻지 목사님도 힘을 얻지---먼저 내가 힘을 얻지만---예배에 참석하여 예배드리는 것도 섬김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성도를 섬기는 모습입니다. 내가 내일 때문에 힘들어서 한다면 누가 주를 섬기고 누가 성도를 섬기고 누가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섬김은 내가 시간이 남을 때, 내가 힘이 있을 때, 내가 할 수 있을 때가 아닙니다. 내가 시간 내기가 어려울 때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시간을 내고 내가 할 수 없을 때는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순종하겠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나가는 것이 믿음이지 내가 시간없다고 안나오고 내가 힘들다고 안나오고 그러다면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이 멀어지고 늘 환경에 시달리는 믿음없는 사람이 되고 신본주의가 아니라 인본주의가 될 것입니다. 섬겨야 됩니다. 가장 신앙의 모습이요 기본인 예배에 섬김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미국의 어느 큰 교회에 그 날따라 주일예배에 발디딜 틈도 없이 성도들이 가득 모여서 예배를 막 드리려고 하는 그 때였습니다. 조금 늦게 도착한 한 어린 소년 두 명이 예배당으로 들어왔습니다. 예배 안내위원이 예배를 방해할까봐서 조용히 뒤에 서있으라고 하고 자석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러나 빈 자리라고는 없었습니다. 빈 자리가 없으니 오늘은 그냥 가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어린 소년들이라 어른 예배에 별 도움이 될 것같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이 예배위원은 어린 소년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을 오늘 예배당까지 보내신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앞자리로 나아가서 성도들에게 좀끼어 앉고 앉을 자리를 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예배드리는데 이게 무슨 귀찮은 일이람, 또 예배드리는데 이게 무슨 방해람,---사람들 눈초리가 않좋았지만 그래도 두 자리를 겨우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두 소년이 와서 예배에 동참을 했습니다. 그날 목사님의 설교를 마치고 예수 위해 내 생명바쳐 섬기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오십시오. 두 소년 중에 한 명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앞으로 뛰어나갔습니다. 그리고 땅끝까지 주의 복음들고 섬기리라 헌신을 하나님 앞에 약속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빌리그래함 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예배위원의 한 영혼,어린 영혼도 중요하게 여기는 그 한 사람의 작은 헌신이 빌리그래함이란 위대한 전도자를 결단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세계 수백만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도 오늘 예수님의 고난일 죽음의 날을 맞이하여 십자가의 죽으심이 하나님 사랑의 절정인 것을 알고 우리 주님께서 세족식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자 한 뜻을 깊이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서 이땅에 오시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이제 그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죄씻음을 체험하고 거듭나게 되며 그렇게 중생한 사람은 매일매일의 삶 속에 짓는 죄를 날마다 회개하며 살아야 하며 또한 믿음의 앞선자들을 섬김의 본이 되는 삶을 실천하며 성도들은 서로 섬기며 주님 오실 그 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그 섬김은 성도들부터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중생, 회개, 섬김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끊임없는 관계가 계속될 때 우리는 승리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세족식을 할 때 발을 씻기는 분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본을 받아 우리도 서로 발을 씻기길 원합니다. ’ 하고 짦을 기도를 그 사람을 위해서 해주시면 마지막에 ‘아멘’으로 화답하시면 됩니다.
(세족식 시행요령)
담임목사(이종기)가 장로, 권사님, 사모님, 전도사님에게 세족식
장로-안수집사님들에게
안수집사님(중 대표 올 해는 황인회집사)과 권사님들은 성도들에게 행하면 됩니다.
물동이는 3개 준비, 대야 3개 준비, 물받는 통 3개 준비, 수건 준비
세족식 다음 순서로는
고난주간 특별 영상 보고 ---기도회
ARTICLE
1.첫째날-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4:7-8
이 새벽에 우리의 찬양이 하나님께 상달되기를 바랍니다. 아침에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지만 간절히 마음을 다하여 찬송해 보십시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직접 우리 곁에 오셔서 사랑을 십자가로 보여주신 그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찬양해 봅니다. 89장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천상에서의 예배는 찬양예배를 드림을 볼 수 있습니다. 천사들도 찬양하고 먼저 간 신앙의 선배들도 함께 찬양을 합니다. 그런데 천사들의 찬양과 먼저 간 신앙의 선배들 간의 찬양이 다를 때가 있습니다. 천사들은 어린양의 피를 모릅니다. 어린양의 피 능력과 피 권세를 모릅니다. 오직 이 세상에서 어린 양의 피로 구원받음 사람들만이 어린 양의 피와 구원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 찬양을 할 때 천사들을 체험이 없으므로 감격하지 못하지만 사람들은 감격합니다. 모두들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 감격은 정말 천사들도 모르고 세상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릴 사랑하시어 마음으로만 작정하시고 불쌍히 여기신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를 보면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것이 창세 전부터 계획된 것인데 때가 되매 나타난 바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깨닫은 바울은 감격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그 크기와 넓이와 높이와 깊이가 측량할 수 없이 큰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측량할 수 없는 그 은혜, 측량할 수 없는 그 사랑!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왜 예수를 믿고 영적으로 거듭남의 체험을 하면 그렇게 행복하고 기쁨이 샘솟고 그럴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은 행복입니다. 사랑을 받으면 이렇게 행복합니다. 사람이 사람의 사랑을 받아도 너무 행복하고 기쁜데---하물며 하나님의 사랑이야 말할 수 없을 정도이지요.
일본의 한 사람(요네야마 마사노부)이 물에 관해서 글을 썼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번역되어져 출판되었습니다. 물의 결정 사진을 찍어보면 여러 가지 모양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물이 얼었다가 다시 물로 돌아가기 직전 -5도에서 0도 사이에서 물의 결정체 사진을 찍을 때에 ‘사랑합니다.감사해요’이런 말을 하면 보석처럼 빛이 나고 모양이 아름답고 선명하게 나타나고 ‘망할 놈, 미워죽겠어, 악마.짜증나’ 이런 말을 하면 결정체가 나타나지 않고 흐리고 마치 중심의 검은 부분이 밖으로 공격하는 것처럼 무섭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과연 물도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이런 반응을 나타내는 것을 보면 인간의 말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가를 알 수 있습니다. 또 베토벤의 음악이나 찬송가 같은 음악을 물에 다 틀어주었더니 결정체가 아름답고 분명하게 나타났는데 헤비메탈 음악을 틀어놓으니 마치 ‘악마와 분노와 망할 놈 미워죽겠어’말을 들을 때와 같은 모습이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또 전자파를 쐬게 하면 물의 결정체가 나빠진다는 것입니다. 핸드폰,TV,등 말입니다.
이처럼 사랑이란 것은 대단합니다. 물도 사랑의 개념이 들어간 표현에 빛을 내고 보석처럼 밝고 분명한 결정을 나타낸다는 것을 볼 때 사랑의 힘이란 것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4: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이 말씀은 계시의 절정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마음으로 입술로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그 사랑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가 아니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랑에는 달인이 없습니다. 완성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자나 가르침을 받는 자나 모두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할 이유가 어디있습니까? 헬라어 원문에는 왜냐하면 하는 ‘호티’라는 접속사가 붙어있다. 그것은 사랑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냥 사랑이 좋은 것이기 때문에가 아닙니다. 또 해야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사랑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나타내는 특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하나님을 따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것이기에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기 영으로 우릴 중생시키시고 그 안에 거하시사 자기 백성을 양자삼으시고 의와 사랑을 행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사랑을 행하는 행위는 하나님께로 났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가인과 같은 사람이 그렇습니다. 사랑없이 동생을 죽였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하나님을 잘 안다고 해도 형제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이고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실뿐더러 그 자신이 사랑이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 예수님을 통한 십자가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입술로만 해서는 안됩니다. 마음으로만 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사랑을 이용하는 위선자입니다. 구체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행동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하고 말로 표현하고 행동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죽은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이 것이 최고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사랑의 절정인 것입니다.
오늘 그 사랑을 받은 몸과 마음으로 우리 서로를 바라보시고 하루의 삶 속에서 사랑을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은 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지 모릅니다. 우리 눈에는 다 똑같은 물처럼 보이지만 물도 사랑합니다 하면 글 결정체가 빛나고 아름다운 것처럼 우리도 사랑을 받았고 사랑할 때 더욱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도 모르게 큰 축복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습니다, 행복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달라졌습니다. 왜 너무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갔던 베드로가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달라졌습니다. 그 사랑을 전하고 그 사랑으로 기뻐하십시다. 할렐루야!!
첫째날(월요일)-권위의 날-성전청결
둘째날 2.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 요한일서4:9-10절
불신자들이나 믿음이 약한 사람들 중에는 십자가를 저주의 십자가,힘없이 처형당한 실패한 십자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십자가는 인류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요,하나님 사랑의 절정이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도 없다. 구약의 제사제도,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기적과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십자가는 하나님의 비밀이요, 하늘의 지혜이다.
어떤 영화를 보다가 그 사랑의 깊음에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클래식’) 정말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눈알을 바치고 자신은 눈 먼자가 되어 외롭고 고독하게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그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이 눈알을 준 것을 모르도록 숨어서 살아갑니다. 나중에 그것을 알게 된 사랑하는 사람이 안타까와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사람은 나중에 그 자식들 세대에 가서 이루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사랑하면 내 몸과 생명을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목숨을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가 되었다고 소개합니다. 그 사랑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어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고 말입니다.(9절)
어디에서 죽으셨습니까? 십자가 위에서----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시면 당하실수록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더욱 더 깊은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물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목숨과 바꿀 정도로 가치있는 존재입니까?’
오늘 하나님께 물어보십시오. 하나님 내가 그렇게 소중한 존재입니까?
죄악 가운데서 오늘도 수없이 하나님을 부인할 수 밖에 없는 제가 그토록 소중한 존재입니까?
그리고 여러분 이번에는 자신에게 이렇게 또 물어보십시오. ‘내가 그렇게 소중한 존재라면 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내 안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니가 가치있는 존재라면 하나님이 독생자의 목숨과 바꿀 정도로 니가 가치있는 존재라면 이젠 가치있게 살아야 한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부인하던 베드로와 같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팔아먹은 유다같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우리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10절)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10절의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십자가의 사랑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어 그 아들을 보내시어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건널 수 없는 강’ ‘건널 수 없는 다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건널 수 없는 강처럼 되어버렸는데 하나님께서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힘으론 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하나님이 그 아들을 통해서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복된 소식입니다.
이처럼 그 아들을 십자가 위에서 죽이심으로 우리를 살리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받고 있다면 우리는 이제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움은 하나님께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때 우리는 두려움을 이기고 기쁨과 감사 속에 평안 속에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죄를 이기는 능력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신 비밀인 것입니다.
십자가가 사랑이 될 수 있습니까? 형벌의 고통이 사랑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하셨습니다.
오늘 고난주간 2일째를 맞이했습니다. 우리주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한지 첫날에는 성전을 청결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2일째는 변론의 날이라고 합니다. 종교문제뿐만 아니라 정치문제까지도 서기관들과 논쟁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에수님을 모함하기 위해서 제일 되는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어왔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과부의 두렙돈의 헌금을 칭찬하심으로 신앙의 핵심이 외형적인 화려함이나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고 진실한 내면적인 질에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기도제목: 1.말세에 십자가의 사랑이란 복음의 빛을 붙들게 하옵소서
2.남의 눈의 티보다 내눈의 들보를 보게 하소서
3.물질의 부요함보다도 믿음의 부요함을 주소서,
4.핸드폰이나 전화로 음성이나 문자로 내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이 누군인가를 생각하고 전화하기,문자보내기
세째날 3.우리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요한일서4:11-12
요한서신은 그 시대의 이단인 영지주의자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영지주의 자들은 성도들의 사랑의 실천이 육체를 경시하고 신령한 지식에 대한 사랑만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령한 지식 곧 영적인 지식을 사랑하고 소유하는 것으로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관념적인 사랑, 마음 속으로만 생각하는 신앙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그러다보니 실천적인 적극적인 사랑을 행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많은 이 세상과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 인간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그 분이 지신 골고다의 십자가는 우리의 고통의 문제를 구경하시는 방관자가 아닌 적극적으로 인간의 고난을 해결하여 주시기 위해 우리의 고난 가운데로 들어오셨고 함께 눈물흘리시며 고난을 당하시므로 해결하여 주신 사건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의 절정이라는 것을 앞에서 상고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의 적극적인 사랑을 본받아 행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불법을 행치않는 삶은 소극적인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나 더 적극적인 성도의 삶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 대부분의 성도들은 소극적인 사랑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여기서 ‘이같이’란 말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이같이 사랑하신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의 사랑이 아닙니까? 참진리이신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을 의미합니다. 구속의 복음에 근거하지 않은 사랑이란 본질상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인본주의적이며 세속적인 사랑밖에는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랑에는 인간의 이기심이 깔려있습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천국의 영원한 삶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현세 지향적인 삶을 살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그의 의보다는 나와 내 가족의 사랑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인류를 위해 나를 버린 예수님의 사랑은 그 이기적인 사랑을 초월하게 만듭니다. 여기에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므로(이것이 은헤인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요한일서 3:16절에는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우리가 서로서로 사랑하라는 이 말씀을 행하지 않으면 곧 소극적인 사랑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12절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꼭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받은 사랑이 우리를 감격시켜 사랑을 실쳔하도록 성령은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실천이 없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거나 아직도 회의하고 있거나 믿음 위에 서있지 못한 사람입니다.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아멘!!
이렇게 새벽에 나와서 함께 기도하는 것도 서로 사랑하는 적극적인 모습입니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찬양이가 참 우리 열린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기에 그 행동이 나타납니다. 주일이면 꼭 열린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 된다고 부모님을 설득하고 주일 날 나와서 반주로 봉사하고 동생들을 데리고 놀아줍니다. 그 사랑의 행함으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새벽에도 나오려고 힘을 다하여 노력합니다. 어제도 보니 졸지도 않고 똑똑한 모습으로 힘을 다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얼마나 애처러우면서도 자랑스러웠습니다. 아이들도 순순하게 이런데 어른들은 조금 피곤하다고 더 해야될 일이 있다고 이 고난주간에 새벽기도에 동참하고 사랑을 나누는 일에 회피해서는 안됩니다.
새벽기도만 했다고 만족하지 마시고 금식도 하시고 그러면서 교회 계획에 동참하면 그것이 바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북한동포를 이 고난주간에 돕는 것, 이웃불우 노인들을 돕는 것----그것이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사랑의 교훈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도 그 사랑에 승리하셨습니다. 오늘도 기도하실 때에 우리의 기도가 나 자신에게만 머물지 마시고 나의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 영혼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오늘도 먼저 손내미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 침묵의 날 혹은 은퇴의 날(3월 23일: 수)>
많은 변론으로 피곤한 하루를 보내신 예수님께서 베다니로 가셔서 쉬신 날이어서 ‘침묵의 날’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날 주님은 제자들을 불러 놓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에 대해 경고와 교훈을 하셨다.
이 날 여기에서 주님은 영원히 기념될 만한 한 여인의 헌신을 받으신다. 마리아로 호칭되는 여인이 자기 행동에 대한 타인들의 반응을 의식하지 않고 주께 받은바 은혜에 감사하며 자신의 가장 귀한 것 곧 값진 향유를 조금도 아낌없이 주님께 부어 드려 주를 섬겼으니 이는 곧 ‘주님의 장례를 예비하는 의식’을 행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식사 초청을 한 전에 문둥이였던 시몬은 마리아 못지않은 은혜를 받고서 예수님을 식사에 초청까지 하여 자기 집에 모시는 영광을 허락 받았으나 욕심 때문에 주께 봉사할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또한 아버지 하나님과 영교하시기 위해 한적한 곳에 가셔서 간절히 기도하신 날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 편에서는 유다를 비롯하여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과 군관들이 예수를 체포할 은밀한 흉계가 꾸며지고 있었다.
#기도제목:① 그간 믿음 안에서 은혜를 입은 사람, 사랑을 받은 사람을 찾아 보답
② 혹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사람이 있었으면 전화를 걸거나 편지를 쓴다.
③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이나 일들을 찾아 해결을 받도록 한다.
네번째 날- 4.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요한일서4:18-21
영국의 한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 마을에서 어떤 유명한 젊은 그리스도인이 여행을 하고 돌아와서는 신문에 여행에 관한 기사를 올렸습니다.
‘---혼잡한 기차였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빈자리가 있어 편히 여행할 수 있었던 일에 감사한다는 글이었습니다.----그러면서 언제나 어떤 경우에서도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글이었습니다.---’
이글을 보면 어디에고 잘 못이 없습니다. 흔히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감사생활을 표현한 은혜로운 글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러나 그 다음 다음 날 똑같은 마을 신문에 한 불신자의 글이 올려졌습니다.
‘나도 어제 그 사람이 탔던 혼잡한 기차에 타서 여행을 했다. 하나님의 은혜인지 몰라도 그 유명한 젊은 그리스도인 옆에 자리가 나서 앉았다. 그러나 어떤 노인분이 서 계신 것을 보고 옆에 있는 젊은 그리스도인이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기에 내가 양보하여 일어서는 것 때문에 힘든 여행을 했었다. 그러나 그 힘겨워 하시던 노인네분이 편안히 앉아 가시는 것을 보고 힘들었지만 내내 행복했었다---’
이제 여러분 첫 번째 아주 유명한 젊은 그리스도인의 감사가 어떤 감사인가? 하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의 특징일텐데--- 위의 한 불신자의 글은 그리스도인의 감사를 비웃는 글이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감사를 우리 자신도 모르게 할 때가 많습니다. 얼마나 이기적인 감사요,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감사입니까? 하나님은 이런 감사를 받아주지 못할 것이고 이런 감사는 남을 아프게 하는 감사요, 남을 넘어지게 하는 감사요, 하나님을 욕되게 만드는 감사인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아직도 죄가 남아 있어서 그렇습니다. 죄는 우릴 두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힘들면 이러다가 죽지---? 내가 편안해야 할 텐데----내가 행복해야할 텐데----내가 천대받는 삶을 살면 어떻게 되지---불안하고 답답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는 언제나 두렵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녀의 문제에서 이 범위를 뛰어넘지 못합니다. 자녀들을 바라볼 때마다 불안하고 답답하고 두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바른 인도보다는 세상적인 방법을 따라가면서 스스로 자위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결국 자기 사랑인 것입니다. 자기 사랑 안에 있을 때 자기를 버리려고 하면 두렵고 불안하고 힘듭니다. 이 땅에 사는 우리들은 누구도 아직 이 이기적 사랑 속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주의 성령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치 않습니다. 자기 중심적 사랑을 뛰어넘습니다.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것은 남을 위해서 내놓을 때 행복해 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삶이 내 인생의 목표라고 생각하고 결단하면 두려움이 없어지고 불안해지지 않습니다. 나를 지키려고 하니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이것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도 부자간에도 이웃간에도 나를 지키려고 하면 화해가 없습니다. 평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렸습니다. 그 안에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그 사랑 안에 있을 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나를 버리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욕심과 사랑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향한 가장 큰 사랑은 무엇일까요? 예수 믿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 곧 복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이요.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잘 알지 못합니다. 먼저 받은 우리가 그들의 눈높이에 맞게 먼저 맞추어주어야 합니다. 눈높이라는 의미를 가장 먼저 사용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시면서 천국을 말씀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신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눈높이를 맞추신 것입니다.
우리는 불신자들의 눈높이늘 맞추어주기 위해 때론 물질로, 빵으로, 봉사로,기도로. 치료로, 도움을 베풀어야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하게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받았으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마다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4:11절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3:16절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슴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여기서 ‘-마땅하니라 ’라는 말고 4: 21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느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에서 사랑할찌니라는 선택이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될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번 고난주간에도 나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시면서 금식하시고 다투지마시고 나보다 남을 위해 사는 삶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제4일째- 번민의 날 또는 세족의 날(3월 24일: 목)>
니산월 14일로 유월절 목요일이며 예수님은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가르침을 주심을 기념하는 날로 사실상 전 제자들과 공식적으로는 마지막 대화를 나누셨으며 오후 6시에 최후의 만찬 식을 제정하시고 최후의 교훈을 하신 날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날이어서 세족(洗足)의 날이라고도 한다. 예수님은 이 일을 통하여 서로 발을 씻기며 섬기고 사랑하라고 하셨다.
또 이 날 고별사를 하신 후 밤 11시경에 열한 제자를 데리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구속 성취를 위한 고뇌의 기도를 드리셨으니 이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중보 기도였다. 이어 자정이 되자 가룟 유다의 가증스러운 입맞춤을 신호로 체포되셨다.
이날은 가족들끼리 혹은 교회의 구역 식구들끼리 세족식을 해봄으로써 서로에 대한 사랑과 섬김의 마음을 다지는 것도 의미있을 것입니다.
# 기도제목
➀ 부활절날 성찬에 참례할 때 더 고난의 의미와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깨달을 수 있도록
② 섬김을 받으려고만 했던 잘 못된 삶이 섬기는 삶으로 바뀌도록, 은연중에 사랑받기만을 위했던 나의 모습이 사랑을 나눠주는 나의 모습으로 바뀌어지길---
③ 지금도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나의 죄를 지적하실 때마다 자백하는 기회로 삼도록---
‘성금요일-고난일 세족식(3/25)’-‘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라’-요한복음13:12-15
‘수난일’ 이라고도 하는 Good Friday(성 금요일)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어 주신 놀라운 사랑이 나타난 날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슬픈 날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하여 인간을 위한 그분의 사역을 성취하셨기에, 곧 부활 사건의 전체를 Good으로 받으셨기에, Good Friday라고 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God's Friday에서 Good Friday가 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주님은 자정에 유다에 의해 체포되셔서 새벽 1시경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갔다가 베드로의 부인의 아픔을 맛보시고 새벽 2시경에는 안나스의 심문을 먼저 받는다. 새벽 3시경 사상 유래 없는 산헤드린 공의회가 비공식적으로 소집돼 심문을 받는다. 새벽 4시반 경 가야바의 심문을 받고 산헤드린에서 사형 구형을 받는다. 새벽 5시에는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끌려가 1차 심문을 약 30분쯤 받은 후 헤롯 왕에게로 보냄을 받는다. 새벽 6시경에 다시 빌라도에게 끌려와 로마 병정들에게 희롱을 당하시다가 6시반 경 급기야 멸시와 조롱을 받으시면서 사형이 확정되자 채찍질을 당하시고 옷이 벗기워 지고 침 뱉음을 받으시는 등 온갖 고통과 수치를 당하셨다.
사형 집행을 위해 무거운 통나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향하여 죽음의 행진을 하셨다. 오전 9시 머리에 가시관이 씌워지고 홍포를 입히고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폐를 붙여 사형을 집행한지 6시간 동안 지독한 고초를 당하신다. 완전한 사람이신 예수님의 인성으로는 이 잔이 지나가기를 원하시면 서도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기를 기도하셨던 주님은 온 세상의 믿는 자를 구원하시기 위한 십자가 고난의 잔을 받으셨다. 이는 죽기까지 순종하시는 성자의 모습이며, 죄인들의 속죄를 위한 희생양의 모습이었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성취였으며 온 세상 인류에 대한 구원의 완성 이였으며 사단에 대한 완전한 승리였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이루신 것이다.
사망 권세를 이기실 생명의 주님인 것을 알지 못하는 그들은 아리마데 요셉의 빈 무덤을 인봉하고 군사를 동원하여 헛되이 지키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성금요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주님은 약속대로 예언대로 3일후 주일 새벽에 부활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흔히 우리가 이름붙이기를 세족식에 관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3장 전반부에 나타나는 이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세족식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나타내고자 한 뜻이 3 가지가 있습니다. 흔히 우리들은 세족식을 통해서 섬김만을 강조할 때가 있는데 그것만이 아닙니다.
1.먼저 13장 8절 말씀을 통해서 세족식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씻김을 통해서 죄씻음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고 있습니다.‘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을 때 우리의 죄가 씻김받습니다.죄씻음을 받음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영혼 속에 오시고 우리 영혼의 주인이 되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토록 교제할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를 사랑하시어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죽으신 사건임을 깨닫고 믿는 것이 곧 나의 죄를 씻음 받는 것이요, 죄씻음을 받은 자만이 거듭나고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영원토록 함께 먹고 마시고 사는 것입니다.
2.13장 10절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세족식의 또 다른 의미는 예수믿고 거듭난 사람들의 회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긋하나 다는 아니니라’
이미 목욕한 자는 예수믿고 거듭난 자 곧 중생한 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근본적인 변화를 이미 경험했기에 또 다시 거듭남이 필요없습니다. 다만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범한 죄를 회개하는 것이 필요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족식의 또 다른 의미는 목욕한 자가 더러워진 발을 씻듯이 매일매일 범죄한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삶을 나타내고 잇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 회개의 삶을 매일매일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여기서 누구를 지적하고 있습니까? 가롯인 유다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3년 동안 모시고 가르침을 받고 따라 다녔지만 그리고 예산의 중요한 직책을 맡았으나 중생하지 아니한 자요, 곧 진정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자요, 회개도 매일매일 하지 않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한 번 회개하고 예수 믿고 영접하여 거듭난 체험이 있다하더라도 매일매일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가롯유다처럼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만큼 중생 이후의 회개의 삶은 중요한 것입니다.
3.세족식의 세 번째 의미가 오늘 본분에서부터 있습니다. 특히 14-15절을 보면 세족식의 또 다른 의미는 섬김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식탁에서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하시는 가운데 식탁 옆에서 대야에 물을 받아 제자들의 발을 씻겼습니다. 그리고 발을 다 씻기신 후에 다시 식탁의 의자로 돌아가 앉으시어 제자들에게 섬김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섬김에 대해서도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를 통해서 볼 때 주와 선생이 되는 사람들---곧 섬김을 받을 자들이 먼저 섬겨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깨닫은 자가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선생이 된 자(가르치는 자), 먼저 예수 믿게 된 자가 스스로 섬김의 본을 보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본이란 어느 순간에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맛보기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섬김의 본을 평생토록 살아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선생이 된 사람이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범은 보여주고 또 보여주길 원합니다. 그러나 계속 그렇게 사는 것은 싫어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지위가 올라가고 교회에서도 중직자가 되면 나이 어리고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섬기기를 바랍니다. 만일 그랬다면 하늘과 땅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33년이었지만 시간으로 따진다면 그 분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고 시간으로 따진다 해도 창조때부터 계신 가장 연장자가 아니겠습니까? 우린 우리의 이 몸덩어리가 다 헤어질 때까지 주님만 바라보고 섬김의 삶을 평생 본으로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일부러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실한 삶을 묵묵히 살아가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일부러 잠시 어느 순간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지속적으로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14절의 마지막에 ‘옳으니라’(오페일레테)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마태복음18:30절에서는 ‘빚지다’란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곧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의무를 나타내고 있는 낱말입니다.그리스도를 본받아 성도들을 섬기는 봉사는 그리스도에게 빚을 갚는 그리스도인의 의무라는 것입니다. 섬김이 의무인 것입니다.
섬김의 두 번째 의미는 14절의 중반에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는 것입니다. 성도들끼리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마땅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괜찮겠지가 아닙니다. ‘서로’,‘서로’가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섬기는 것이 옳으니라’ 이 말씀은 반드시 실천되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성도들 서로서로가 섬겨야 됩니다. 섬김이 무슨 뜻입니까? 내가 먼저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 섬김입니다. 내가 받기만을 위하고 내가 직분을 가지고 섬김받기만을 위한다면 내가 직분을 가지고 있으면서 무거운 짐을 회피한다면 섬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성도를 섬기자면 자신의 삶에서는 피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희생이 없이는 헌신과 섬김, 봉사는 없습니다. 우리가 가장 작은 것 중의 하나 교회의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볼 때 내가 참석하면 다른 사람들도 힘을 얻지 목사님도 힘을 얻지---먼저 내가 힘을 얻지만---예배에 참석하여 예배드리는 것도 섬김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성도를 섬기는 모습입니다. 내가 내일 때문에 힘들어서 한다면 누가 주를 섬기고 누가 성도를 섬기고 누가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섬김은 내가 시간이 남을 때, 내가 힘이 있을 때, 내가 할 수 있을 때가 아닙니다. 내가 시간 내기가 어려울 때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시간을 내고 내가 할 수 없을 때는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순종하겠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나가는 것이 믿음이지 내가 시간없다고 안나오고 내가 힘들다고 안나오고 그러다면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이 멀어지고 늘 환경에 시달리는 믿음없는 사람이 되고 신본주의가 아니라 인본주의가 될 것입니다. 섬겨야 됩니다. 가장 신앙의 모습이요 기본인 예배에 섬김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미국의 어느 큰 교회에 그 날따라 주일예배에 발디딜 틈도 없이 성도들이 가득 모여서 예배를 막 드리려고 하는 그 때였습니다. 조금 늦게 도착한 한 어린 소년 두 명이 예배당으로 들어왔습니다. 예배 안내위원이 예배를 방해할까봐서 조용히 뒤에 서있으라고 하고 자석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러나 빈 자리라고는 없었습니다. 빈 자리가 없으니 오늘은 그냥 가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어린 소년들이라 어른 예배에 별 도움이 될 것같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이 예배위원은 어린 소년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을 오늘 예배당까지 보내신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앞자리로 나아가서 성도들에게 좀끼어 앉고 앉을 자리를 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예배드리는데 이게 무슨 귀찮은 일이람, 또 예배드리는데 이게 무슨 방해람,---사람들 눈초리가 않좋았지만 그래도 두 자리를 겨우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두 소년이 와서 예배에 동참을 했습니다. 그날 목사님의 설교를 마치고 예수 위해 내 생명바쳐 섬기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오십시오. 두 소년 중에 한 명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앞으로 뛰어나갔습니다. 그리고 땅끝까지 주의 복음들고 섬기리라 헌신을 하나님 앞에 약속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빌리그래함 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예배위원의 한 영혼,어린 영혼도 중요하게 여기는 그 한 사람의 작은 헌신이 빌리그래함이란 위대한 전도자를 결단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세계 수백만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도 오늘 예수님의 고난일 죽음의 날을 맞이하여 십자가의 죽으심이 하나님 사랑의 절정인 것을 알고 우리 주님께서 세족식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자 한 뜻을 깊이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서 이땅에 오시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이제 그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죄씻음을 체험하고 거듭나게 되며 그렇게 중생한 사람은 매일매일의 삶 속에 짓는 죄를 날마다 회개하며 살아야 하며 또한 믿음의 앞선자들을 섬김의 본이 되는 삶을 실천하며 성도들은 서로 섬기며 주님 오실 그 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그 섬김은 성도들부터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중생, 회개, 섬김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끊임없는 관계가 계속될 때 우리는 승리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세족식을 할 때 발을 씻기는 분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본을 받아 우리도 서로 발을 씻기길 원합니다. ’ 하고 짦을 기도를 그 사람을 위해서 해주시면 마지막에 ‘아멘’으로 화답하시면 됩니다.
(세족식 시행요령)
담임목사(이종기)가 장로, 권사님, 사모님, 전도사님에게 세족식
장로-안수집사님들에게
안수집사님(중 대표 올 해는 황인회집사)과 권사님들은 성도들에게 행하면 됩니다.
물동이는 3개 준비, 대야 3개 준비, 물받는 통 3개 준비, 수건 준비
세족식 다음 순서로는
고난주간 특별 영상 보고 ---기도회
2005년 열린교회(중계동 주공2단지 앞) 고난주간행사
주제:‘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
특별새벽기도회4일간(3/21-3/24), 성금요일:세족식
특새첫날 1.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4:7-8
특새둘째날 2.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요한일서4:9-10
특새셋째날 3.우리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요한일서4:11-12
특새네째날 4.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요한일서4:18-21
성금요일(3/25저녁8:30분)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라’-요한복음13:12-15 세족식 기도회
주제:‘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
특별새벽기도회4일간(3/21-3/24), 성금요일:세족식
특새첫날 1.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4:7-8
특새둘째날 2.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요한일서4:9-10
특새셋째날 3.우리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요한일서4:11-12
특새네째날 4.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요한일서4:18-21
성금요일(3/25저녁8:30분)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라’-요한복음13:12-15 세족식 기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