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성경에 대한 반론과 그 대답

이아기 2005. 5. 1. 00:22

성경에 대한 반론과 그 대답

 

 

 

케네트 호킨스

 

성경의  상당 부분이 역사의 형태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역사는 아니다. 우리가 그것을 역사로만 본다면 그 핵심을 놓치고 만다. 그것은 하나의 관점에서 본 역사요 목표를 가진 역사이다. 

이야기들은 단순히 그것들이 발생했기 때문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세상에서의 그의 활동에 대한 어떤 것을 계시하기 때문에 기록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종종 "구원의 역사"라고 부른다.

 

특수한 뜻을 지닌 역사

이러한 사실이 관점을 바꾸어 준다. 세속 역사가라면 (성경에) 히브리 유목민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13장 이상의 분량으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 권력을 가진 한 전제 군주 오므리에 대해서는 12절도 채 못되는 분량으로 요약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의아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는 그 시대에 관해 알려진 고고학적 사실과 잘 부합할지라도, 고고학적 기록에는 심지어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조차 언급이 없다. 그러나 오므리는 후대에 훨씬 널리 알려졌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창시자요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이요 신앙의 인물이며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며, 또한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대단히 의미 심장한 인물이다. 그러나 오므리는 사마리아 성읍을 창건한 악한 사람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이야기에서 대강 묘사될 뿐이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드러나고 그의 구원 사역이 계속될 때 역사에서의 인물들과 사건들은 그 가치의 비중이 다르게 나타났다.

모순

성경에서 역사적 문제들은 쉽게 발견된다. 그러나 끈기 있는 탐구자에 의해 점차 그 문제들이 많이 해결되었다. 성경의 서로 다른 부분간에 나타나는 모순은 종종 그것이 세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수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성급히 모순적인 내용을 취급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예컨데,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에는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에 대한 기사가 있다. 두 기사를 서로 맞추어 두 책의 방문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아는 것은 난제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바울의 활동에 대한 완전한 기록을 제시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며, 성경에 기록되지는 아니하였지만, 바울은 다른 때에도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또 다른 예로서, 어떤 이야기에 대한 성경의 설명과 다른 고대 기록물에 나타난 설명 사이에 뚜렷한 모순이 있을 수 있다. 성경의 신빙성을 불신하려는 사람들이, 다른 고대의 기록들의 신빙성에는 그렇게도 크게 신뢰를 하는 것은 이상하다! 그래서 먼저 우리는 다른 기록물이 사실 신뢰할 만한 것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고, 둘째로 우리는 우리가 고대 옛기록에서 얻는 완전한 증거가 얼마나 적은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다니엘서에 대한 논쟁이 이를 예증한다. 다리오(Darius)를 "비 역사적인"인물로 치부해 버릴 수는 없다. 문제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해결이 가능하다.

숫자에 대한 문제

성경의 숫자 사용과 관련된 여러 난제들이 제기된다. 여기서 우리는 사본들 자체에서도 각기 다른 숫자가 제시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우리가 유념해 두어야 할 사항은, 히브리서(적어도 포로기 이후)와 헬라어의 알파벳의 개개의 철자들은 동시에 숫자도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어떤 철자들의 유사성 때문에 복사(필경)시에 실수들이 쉽게 끼어들었다. 숫자 계산의 다른 방식이 채용되기도 하였다. 년은 해로 간주되기도 하였고, 왕의 통치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총괄적인 계산되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일요일 오후에서 다음 일요일 오후 까지는 첫날과 마지막날이 온전한 하루가 아니라도 팔일이 포함된 것이라고 하여 칠일이 아니라 팔일로 칭해진다. 거듭 말하거니와 문제는 있지만 그 문제를 해력하는 방안도 있는 것이다.

신화

오늘날 흔히 제기되는 문제는, 성경 역사가 과연 참인가 아닌가를 논하는 것은 대단히 문자주의 적인 소치인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문제되는 것은 어떤 사건이 실제로 발생했느냐 하지 않았느냐가 아니라 그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것은 성경이 단순한 역사라는 견해와는 상반되는 견해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성경의 이야기들은 역사가 아니라 "신화"라고 한다. 이 "신화"라는 용어는 아주 다양하게 사용되기 때문에 정확히 정의하기에는 대단히 어려운 용어이다. 성경의 이야기가 신화라는 말은, 그 이야기가 전혀 진실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사실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용어는 초자연적인 어떤 것이 있을 때마다 거기에 붙여지는 명칭이다.

이제 먼저 생각해야 할 문제는, 과연 성경 저자들은 그들의 말이 역사로 인식되기를 바랐는지 아니면 신화로 인식되기를 바랐는지를 살피는 일이다. 성경의 이적들에 대한 기사들은 다른 사건들에 대한 기사처럼 사실적으로 기록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자연히 제기되는 두번째 질문은 우리는 그 기사들을 억지로 수납할 수 있는지, 아니면 우리는 그것들을 신화로 취급하여 그것들은 "비신화화"해야 하는지, 즉 이 말은 이적이란 실제로 이적적인 사건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어떤 영적인 진리가 상징적인 형태로 이야기 속에 간직된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거의 기반에는 성경이 비과학적인 시대, 즉 사람들이 "삼층 덮개로 된 우주"에 하나님이 계속 간섭하는 것을 생각하던 당시에 기록되었다는 사상이 있다. 그러나 지금 계몽된 과학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들의 우주관(또는 세계관)이 상당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다. 이적은 고대인들의 비과학적인 견해와는 일치할는지는 모르지만, 오늘날의 과학적인 견해에는 들어맞지 않는 것이라 한다. 우리는 이제 세상이 법칙에 맞게 운행하며, 그래서 사물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불러들이지 않아도 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관은 이미 시대에 뒤진 고대의 산물이 되어 버렸다. 과학, 아니 과학자들조차 더 이상 자연의 법칙에 대하여 이처럼 엄격한 견해를 견지하지 않고 있다. 법칙이란 정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들을 관찰한 것을 모사한 것이다. 만일 어떤 법칙이 발생하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충분한 서술을 하지 못할 경우에는 수정되어야만 한다. 어떤 과학자들은 이적들을 배척할지 모르지만, 과학 그 자체는 이적들을 배척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우리는 역사의 주제를 생각해 왔다. 이적이 발생했는지의 여부에 관한 질문은 역사에 관한 질문이지 과학에 관한 질문이 아니다. 역사는 과거에 발생한 것을 다루며, 그런 다음에 설명거리를 찾는다. 과학은 과거에 발생한 것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그 지식을 체계화한다.

 

이적에 대한 질문

성경에 기록된 가장 큰 이적은 죽음에서 다시 사신 예수님의 부활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주에서는 그러한 부활이 일어날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과학"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역사적인 검증의 관점에서 그러한 부활의 발생으로 말미암아 우주의 특성에 대해 어떤 빛이 비추어졌는가를 묻는 것은 좀더 과학적인 것이 될 것이다. 환언하자면, 과학이 부활을 부정하지 못한 다는 것이다. 부활은 과학이 반드시 고려해야할 사실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렇다면 부활에 대해 말하는 것은 여타의 이적들에도 적용 될 수 있다. 

여기서 여러 반론들이 제기될 것이라는 것은 당연지사다. 이적들이 항시 발생한다면 우주에는 질서가 없어지고 말 것이며, 자연의 법칙이 없이는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환란과 위험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항상 개입하신다면, 우리는 책임 있는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우지 않아도 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성경은 약 이천 년에 걸친 역사의 기록이지만, 대부분의 이적들은 몇몇 인물과 사건에 제한되어 있다:

  •          모세와 이스라엘 국가의 시초에

  •          엘리야와 엘리사, 그리고 이스라엘 국가에게 하나님과의 언약 체결 관계로 돌아갈 것을 호소한 일련의 선지자 등장시에

  •         예수님과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 그리고 그의 구원. 그 후 사도들과 기독교회의 설립시에

그러므로 대부분의 이적들은 이 세 시기에 따로 따로 일어났다. 이적들은 올바른 관점으로 조망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보충설명

과학에서 어떤 사건을 설명하고 그것의 모든 면모를 묘사하는 하나의 이론을 언제나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안으로서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서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이론들이 필요할 때가 있다. 빛은 파장으로도 미립자로도 설명할 수 있다. 어떤 하나의 묘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둘다 필요한 것이다. 설명하는데 수많은 다양한 차원이 있을 수 있다.

이제 어떤 과학자가 "이적"을 탐구할 경우 그는 "자연적인"설명을 할 수도 있고 할 수 없을 수도 있다. 이것이 과학의 기능이다. 홍해를 건넌, 성경의 기사에는 강한 바람이 언급되고 있다. 그것은 자연적인 설명이다. 그러나 동일한 기사가 그 사건을 하나님이 하신 일로 돌리고 있다. 두 단계의 묘사가 있는데, 둘다 참이다. 하나는 어떻게라는 방법론의 질문에 대한 답이며, 다른 하나는 왜라는 이유의 문제에 대한 답이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궁극적인 원인을 제시한 묘사(그것이 가능했다면)는 하나님께서 그 일을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설명한다.

성경에서 이적들은 우리의 사고 속에서 구분하는 것 처럼 다른 사건들과 엄밀히 구분되지는 않는다. 특이한 사건뿐 아니라 자연의 평범한 사건 모두가 하나님에게서 기인한다. 하나님은 이적에서만 아니라 모든 자연에서 행동하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적들은 단지 하나님의 비범한 활동방법일 뿐이다.

종교적인 진리와 역사적인 진리

이적 이야기를 역사적인 진리로 취하는 것에 반대하는 또 다른 이론이 철학 분야에서 제기되었다. 우리는 철저하게 분리시켜야 하는 두 범주들이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래서 성경을 반대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것은 "종교적으로" 참된 진술이며, 여기에는 영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나, 역사적인 차원에서는 예수는 죽어 묻힌 채 그대로 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예수님의 몸이 실제로 다시 살아났다고 말하는 것은 "이 범주들을 혼동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이 범주들이란 무엇이며, 그것의 출처는 어디인가? 이 범주들은 오직 이러한 범주들을 고안해 낸 사람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들이다. 이 범주들은 증명할 수도 없고 반증할 수도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대한 문제가 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범주들을 인정하고 시작한다면, 일반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예수님은 죽음에서 살아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시작하는 셈이 된다. 부활에 대한 역사적인 증거가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부활을 인정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또다른 어떤 설명을 찾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철학적인 반론은, 이 세상과 우주에서는 이적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소위 과학적인 반론과 아주 동일한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증거도 없고 확증하기도 전에 그 반론이 타당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참으로 모든 "증거"가 자동적으로 기각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문제점을 증명하지 않은 채 대답을 추정한다. 이러한 반대자들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즉 그렇다면 당신은 이적이 일어났음을 확증하기 위하여 어떤 종류의 증명을 원하고 있는가?

창조 이야기들

비슷한 문제가 성경의 맨 처음 부분은 창조 이야기들에서 발생한다. 어떤 사람들은 창조 이야기들을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와 같은 신화로 치부해 버린다.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그것들을, 문자적으로나 역사적으로는 참이 아니며, 진리를 포함하고 있는 신화라고 칭한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창조 이야기들은 참인가? 그 이야기들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창조 이야기에 과학의 이름으로 반론이 가해졌다. 그래서 과학의 영역이 얼마나 신성불가침의 영역인지를 안다면 놀랄 것이다. 창조 이야기는 하나님이 만물 - 우주, 인간, 그리고 그밖의 모든 것 - 의 창조주라는 것을 거침없이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떻게 창조하셨는지는 제시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땅의 먼지에서 인간을 만들었다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비교하여 피조물인 인간의 본성에 대한 어떤 것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다. 단지 먼지에 불과한 우리가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게 하시기 때문일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서 우리의 삶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떻게 먼지에서 사람을 만드셨는가? 그것은 과학적인 질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대답 또는 비슷한 대답을 얻기 위해 성경이 아니라 과학으로 간다. 우리는 성경적 인간관에 대해 공정한 평가를 하지 아니하는 이론에는 만족할 수가 없다. 동시에 우리는 단순히 우리의 생각을 성경에 투사하여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성경관을 파악했는지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약성경의 타당성

어떤 사람들은 구약성경이 비기독교적이라든가 기독교보다 저급한 것이라고 해서 부분적으로든 전체로든 구약을 배척한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사상은 아니다. 먼저 그리스도인의 구약관은 그리스도의 구약관과 일치해야한다.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권위와 타당성을 인정하셨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문제는 그리스도와 기독교가 구약의 모습을 무효화시키는 새롭고 더 참된 신관을 제시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면들에서는 구약이 이제는 무효화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단번에 궁극적인 희생을 드리심으로써 희생 제사는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다. 유대인의 의식법들 중 대부분이 이와 마찬가지로 폐기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곧 구약의 의식들을 이제는 완전히 무시해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본성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관한 영구한 진리를 제시한다. 교훈은 동일하지만, 실제적인 수행은 그리스도로 인해 달라졌다. 하나님은 여전히 거룩하시다.

구약성경 가운데서 가장 큰 반대를 야기시키는 것은 하나님을 진노의 하나님, 그의 종들에게 하나님을 위하여 심판 행할 것을 명령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한 부분이다. 이것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선포하는 신약의 모습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는 원시적인 신관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신약과 구약사이에 어떤 근본적인 대립은 없다. 구약에 하나님의 사랑과 사죄에 관한 가르침이 상당 부분이 있으며, 신약에 그의 의로운 진노와 심판에 관한 가르침이 또한 상당 부분 있다. 가장 강력한 말씀은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일 것이다. 구약을 배척하는 사람들은 신약도 배척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 악에 대한 진노 그리고 심판등에 대한 사상은 특히 자기 뜻대로 사는 시대에는 그리 달가운 사상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성경의 가르침을 진리가 아닌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인간인가 기계인가?

그리스도인의 성경관을 반박하는 마지막 것으로 성경은 인간의 생각은 무시하고 인간을 기계로 만든다는 주장이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성경 저자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기계적으로 받아썼고, 독자들은 모든 진리가 성경에 제시되었기 때문에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 반론은 성경을 철저하게 오해한 것임을 드러낸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하여 직접 말씀하셨고, 그는 인간 저자들이 그가 하시고 싶은 말씀을 전하도록 그들을 통제하셨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인간 저자들은 그것을 수행할 때 그들의 사고 작용을 십분 발휘하였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그들의 인간성은 성경 각 책의 다양한 문체, 다양한 접근법 등에서 보게 된다.

또한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서 그의 정신 작용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성경을 주의 깊게 읽고, 여러 본문들을 비교하며, 할 수 있는 한 여러 참고 자료를 이용해야한다. 이외에 성령의 도움을 간구할 필요가 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으므로 그 의미를 조명해 주도록 하기 위함이다. 성경 저자들 처럼 독자들 역시 마음과 전존재를 하나님께 헌신해야한다. 성경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성경에는 평생의 지침이 되는 충분한 큰 지식이 담겨 있지만 무식한 사람이라도 그것을 읽고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을 읽고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