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열린교회 고난주간 특새 설교 내용
06년 고난주간 특새 ‘예수님의 기도’(마26:36-46절)-열린교회
1.월요일 새벽기도회 마26:36-41절 ‘겟세마네의 기도’ 186장
목요일 저녁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마치시고 찬미하시며 감람산으로 나아가셨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침묵하시고 고민과 슬픔 속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게 깨어 있으라(38절)’
1.버림받음에 대한 고민과 슬픔
(1)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배신 당함-가롯 유다에게 배신당할 것을 미리 말씀하심
26:23-25, 베드로의 예수 3번 부인 예고-26:34
(2)하나님께 버림받음-무엇 때문에 -인간의 죄 때문에-죄값을 대신 치루어야 함
2.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39절-41절
예수님은 겟세마네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기도입니다. 그래서 41절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십자가의 승리는 이미 겟세마네에서 결판이 났습니다. 영혼의 고투 끝에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리셨을 때 십자가에서의 싸움은 이미 끝났던 것입니다. 그 이후의 일은 잠잠히 침묵을 지키며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그러했습니다. 곤욕을 당할 때에도 입을 열지 아니 하였고, 마치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 하였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문제를 하나님 앞에 미리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미리 해결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울부짖으며 소리 친 사람은 사람 앞에 잠잠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사람 앞에 말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께 말이 적은 사람이거나,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적은 사람입니다. 기도의 사람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아뢰고 맡겼으므로, 잠잠히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시작하십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십자가 사역을 앞두고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최후의 고투를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당하신 예수님의 그 처절한 고통을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하심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의 승리는 사실 겟세마네 기도의 자리에서 결정된 것입니다.
(전체기도-기도의 우선순위-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 수 있도록)
2.화요일 새벽기도회-마26:42-46절 말씀‘기도의 승리가 삶의 승리’
‘기도의 승리’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 중에서 특히 겟세마네의 기도가 가르치는 의미는 대단합니다.
우리가 어제 새벽에도 26:36-41절까지에서 알아본 바와 같이 십자가의 승리는 겟세마네의 기도의 승리에서부터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의 승리없이는 인생과 사역의 승리가 없습니다. 인생과 사역의 승리는 결코 이 땅에서의 인생의 성공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승리는 이세상의 성공적인 입장에서 보면 사실 망한 것입니다. 성공이 아니라 망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승리는 하나님적이고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사람의 수나 물질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따르느냐 안따르느냐? 하나님 말씀을 바로 알고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은 항상 삶의 승리를 말씀하삽니다.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는 성도들과 목사들이 가지는 시각 차가 이런 것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적이냐? 아니면 세상적이냐?
오늘 우리가 부유하지 않아도 힘들고 어려운 세상을 산다고 해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그 인생은 승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세상 것을 다 얻었다 해도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면 실패한 인생입니다.
야곱이 삼촌 집에서 돌아올 때 많은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가축의 수도 많았고 아내도 자식도 많이 가졌습니다. 물질도 가질 만큼 가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31장에서 고향으로 돌아올수록 두려운 것입니다. 형 에서가 자신을 죽일려고 400명의 군사들 데리고 온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재산과 가족을 앞장세우고 그는 얍복강에서 울며 기도하지 않습니까?
결국 기도의 승리가 그의 잘못 산 인생을 바로 잡아놓고 천사가 환도뼈를 쳐서 절둑발이가 되었어도 기쁨으로 새날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형 에서를 만나더라도 겁이 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담대해졌습니다. 정말 기도의 승리 후 에서를 만났지만 하나님은 기쁨으로 만나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42절에서 예수님도 처음에 두려워합니다.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런 두려움 속에 있을 때 정말 함께 기도해 주는 사람이 그립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제자들인데---그래서 깨어 함께 기도해주길 바라는 것입니다.
목사에게도 누구가 동역자일까요? 누가 가장 좋은 동역자일까요? 함께 기도해주는 성도입니다. 함께 기도하는 성도만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섬기고 동역하면 언제가는 인간적으로 교만해져서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성도는 영적으로 목회자를 봅니다. 영적 권위를 인정하도록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에 언제나 그 교회를 위해서 충성합니다. 그래서 함께 아무도 없는데서 기도하면 걸어가는 성도가 절실한 것입니다. 그것만큼 힘이 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제 고등학교 친구 중에 한 사람이 요즘 인터넷을 통해서 연락이 되었는데 교회를 따라서 이천으로 이사갔다는 것입니다. 그것만 보아도 그 친구의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언제나 옆에서 기도해주는 사람이 목회자에게 가장 좋은 동역자입니다. 저는 그 친구가 정말 하나님께 복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곁에서 함께 기도해주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두 번씩이나 예수님이 두려움 속에 영적 눌림 속에 제자들을 찾아왔지만 연약한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승리 이후에는 예수님이 달라졌습니다. 45절을 보니 담대해졌습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 46절에 일어나라 함께 가자
담대해
지셨습니다. 기도의 승리 이후에 담대해졋습니다. 십자가를 달게 지십니다. 고난으로 달려가십니다. 사명따라 달려갑니다.
출애굽기에서도 이런 장면 곧 기도의 승리가 삶의 승리 전쟁의 승리를 보여주는 사건이 잇습니다. 출애굽기 17장 8절 이하에 보면 아말렉과 이스라엘이 르비딤에서 싸울 때입니다.
여호수아는 앞으로 나아가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는 산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기도의 팔이 올라가면 곧 기도의 승리가 있으면 여호수아 군대가 이기고 모세의 팔이 내려오면 여호수아의 군대가 패합니다. 곧 기도의 승리가 전쟁의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승리는 기도의 현장에 있습니다;. 기도의 승리가 삶의 승리인 것입니다. 기도에서 지면 삶에서도 집니다. 삶이 부유하더라도 남부럽지 않아도 영적으로 지면 다 지는 것입니다. 인생의 성공은 삶의 물질적 부유가 결코 아닙니다. 더 고통당하는 삶을 살더라도 하나님과 함께하면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 승리는 하나님께 무릅굻고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는 기도에 있습니다.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인생을 보는 눈이 넒어지고 쉽게 포기하지 않고 담대해집니다. 고난이 있어도 예수님처럼 사명따라 갑니다. 이 것이 축복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축복입니다. 승리입니다. 그런 삶, 그런 기도의 삶이 되길 기도합니다. 할렐루야!! (전체 기도-한국교회와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도)
제 3일 수요일 눅22:39-46절 ‘간절한 기도’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에서의 겟세마네 기도입니다.
우리는 고난주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고난 자체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만 육신의 고통 이전에 겪으셔야 했던 영적 고통에 대해서는 별로 마음 기울이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적 승리에는 간절한 기도가 있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보니 44절에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주님의 생애가운데는 건성으로 기도하신 적이 없다.
늘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셨고 마음과 정신과 몸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찾고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전날 밤 특별히 기도하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을 오르셨습니다. 특별한 상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일상의 삶 속에서 특별히 간절히 기도해야할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일반적인 생활 속에서는 일반적인 기도를 특별한 상황 속에서는 특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에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 후로 모든 삶은 오직 하나의 푯대를 향하고 있엇습니다. 하늘 영광 다 버리고 이 세상에 오시어 오직 한 사건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인류를 구원하기 그 목적에 따라 자신을 제물로 바치시는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처럼 절박하고 간절한 기도로 아버지 앞에서 ,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시는 것은 평소에도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의 자세를 가지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생활은 어떻습니까? 사무적이고 형식적인 기도로 힘을 다 소진하며 하나님과의 교제의 시간을 떼워 보려는 우리의 안일한 기도 태도들이 우리를 능력있는 기도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능력있는 기도로 우리를 이끄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오래도록 기도에 매진하는 것이고 또하나는 마음과 육신의 힘을 기울여 기도하는 갓입니다. 인내하지 못하는 성급한 마음으로 힘을 쏟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마음을 바치지 않고 하는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합당치 않습니다.
간절히 기도한다는 것은 곧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먼저 육신의 노고를 동반합니다. 거기에는 자신의 안락과 편안함을 포기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간절한 기도는 힘을 다하는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은 천사들이 하늘로부터 와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도왔다고 말씀하십니다.43절에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과 같이 되더라’
우리는 왜 이처럼 간절히 기도하지 못할까요? 왜 우리는 특별히 도우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을까요? 그 가장 직접적인 이유 중 하나가 우리가 도무지 간절히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몸부림치는 기도 속에서 육신의 힘을 다 하였고 간절한 기도는 그의 육신을 지치게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육적인 힘이 떨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간절한 기도는 육체를 힘들게 만듭니다.
기도하면서 자신의 육체의 힘이 다 소진된 사람은 천사들이 도와줍니다. 하나님께서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육신의 힘을 다하기까지 기도에 자신을 바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체의 힘을 다 쏟았을 때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동원하여 새 힘을 주고 십자가에서 승리하게 만드셨습니다.
땀이 핏방울이 흐르는 것처럼 떨어졌다는 것은 땀 속에 피가 섞였다는 것입니다.그 만큼 간절히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간절한 기도이기만 다 승리하고 응답받는가? 아닙니다. 겟세마네 기도에서 우리가 붙드는 것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입니다. 결국 피할 수 없는 길이라면 십자가를 지는 것이, 사명을 따라 사는 것이 응답받는 비결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전체기도-우리 민족의 장래와 북한과의 통일을 위해)
제 4일 목요일 새벽 요한복음 17장 20-26절 말씀 ‘우리를 위한 기도’
겟세마네의 기도가 예수께서 고난받으시기 전의 인간적인 고뇌를 표현한 기도였다면 요한복음 17장의 기도는 십자가 고난에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 곧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기도의 특징은 장차있게될 승리를 예견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승리와 기쁨이 깔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겟세마네의 기도가 다소 침통한 분위기를 나타낸다면 신약성도의 중보자로서 대제사장적 권위를 가진 그리스도의 승리와 기쁨의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내용을 분해하며 1-5절까지는 성부하나님의 영광과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6-19절은 제자들을 위한 중보기도입니다. 끝으로 20-26절은 신약교회 성도들의 연합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 중에서 시간상 우리는 마지막부분인 신약교회의 성도인 ‘우리를 위한 기도’에 관해서 상고하도록 하겠습니다.
1.먼저 예수님께서는 20-23절을 통하여 성도들간의 일치와 연합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지난 번 남전도 헌신예배 때 자세하게 상고하였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되는 것은 곧 연합하는 것은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 가운데 통일성을 가져야 합니다. 즉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으나 한 몸(고전12:12-27절)‘을 이루는 것처럼 성도들의 연합이란 결국 몸의 머리되신 주 안에서 일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21절처럼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예수님 안에 우리가 ,우리 안에 예수님이 연합되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신비적 연합이라고 했습니다.
또 이렇게 하나됨의 목적은 무엇이라고요? 23절에 나오는 것처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함입니다. 곧 쉽게 전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사도를 세우신 목적이 유대인의 구원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신 목적을 이루기 위함에 있습니다.
2. 24-26절에서 성도들이 장차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24절에서 창세 전부터 예수님께 주신 영광을 성도들이 보길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다시 오실 예수님 그 분이 심판주로 다시 오시어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할 때 그 때까지 예수님에게 주신 백성들 곧 성도들이 끝까지 인내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 이 요한복음 17장의 기도에는 영광이 나오고 하나와 연합이 나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십자가를 지는 버림받음과 하나님의 뜻을 강조하고 그 사명을 감당하는 어려움을 나타내고 있지만 여기서는 영광과 연합이 나옵니다. 이 모두는 십자가의 사명을 완수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마도 겟세마네 기도의 승리를 내다보시고 쓰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같은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오늘날의 교회들이 자신들이 믿는 신앙과 신학적 견해 차이가 아니라 세상적 이해 관계나 인본주의적 요소로 인해 분리되고 연합되지 못하는 일들이 정당화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 안에서 진리 안에서 성령 안에서 연합되고 일치됨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도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에베소서 4장 1-6절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과 사랑 가운데서 모든 성도들이 서로를 용납하고 하나가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전체기도-성령을 의지하면서도 또 넘어지고 죄짓는 연약한 죄성을 가진 나의 애통함을 위해 기도)
제 5일 금요일 저녁 세족식 (4/14) 오후 8시
2006년도 성금요일(4/14) 세족식 ‘겟세마네 기도가 준 교훈’(막14장26-72절)
저 북한과 가장 가까운 곳에 기도원이 하나 있는데 강원도 신철원에 있는 ‘대한수도원’입니다. 몇 년 전에 우리 여전도회 회원 여러분과 대심방을 마치고 한 번 들린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후원하는 ‘살롬의 집’ 김천일 전도사님도 그곳에서 기도 가운데 치료받고 사명받고 가장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사역을 감당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 기도원 예배당 앞에 큰 돌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그곳에는 이런 말이 비슷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여기는 우리의 겟세마네이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땀이 피가되도록 기도하셨던 겟네마네 동산처럼 이 기도원은 바로 우리들이 생명걸고 기도해야하는 곳이다. 우리들의 겟세마네 동산이다. 이런 뜻입니다.
그렇게 기도의 삶을 살아간 사람들에게 많은 응답과 섬김이 영광스럽게 주어졌습니다.
고난주간에 일어난 예수님의 행적 가운데서 구원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들을 들라면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성전청결, 다락방강화(세족식가 성찬식), 겟세마네 기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사건은 겟세마네동산에서의 기도와 십자가 사건입니다.
2006년도 고난주간 행사에서 특별새벽기도회와 세족식을 하는 가운데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 특히 공관복음서의 겟세마네 기도와 요한복음의 대제사장적 기도에 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다룬 것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였습니다.
오늘 세족식을 거행하기 전에 이번 특별새벽기도회의 결론을 내야 될 것 같아서 오늘 기도회와 세족식 전에 ‘겟세마네 기도가 준 교훈’ 아니 ‘예수님의 기도가 준 교훈’에 관해서 상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의 내용을 다시 요약하면 1.나와 함께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자 2.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3. 나와 함께 일어나 가자. 입니다.
이 세가지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그럼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여야 할까요?
1.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을 신앙하는 우리들은 기도없인 이 길을 걸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가 내 힘으로 살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내 인생을 인도하시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기도의 삶을 게을리하는 사람들은 사명따라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내 영광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교회 다니다가 잘 안나오고 그러다 모습마져도 안보이는 사람들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주일날 예배에도 안나오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중심이요. 아직도 세상의 유혹 속에 더 마음이 많이 끌리고 그러니 아예 기도하는 자리에는 나올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기도하는 자리에 없는 사람들은 주일에도 못나옵니다. 사명 감당 못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다 포기하고 지내는데도 별 죄의식이나 또는 변화가 없는 삶을 살아가는데 의지하도록 만드는 성경구절이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 속에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38절 말씀입니다. ‘다같이 읽어보시다.-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그 위에 37절을 보면 이것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 중에서 베드로에게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하고 하신 말씀으로 볼 때 38절의 말씀에는 제자들을 바라보는 주님의 책망과 동정이 함께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깨어 기도하지 못하는 것도 죄입니다. 왜나고요? 깨어 기도하지 못하면 시험에 들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책망과 동정을 함께 하셨습니다. 무엇을 보고요. 인간의 연약함을 보시고 말입니다. 여기서 책망은 죄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공의적 입장에서 하신 것이고, 육신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모습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인한 표현입니다.
십자가에는 바로 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함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공의,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관계에 관해서 알아보아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 육신의 연약함으로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짓고 죽었습니다. 사망은 죄의 결과로 오는 것입니다. 이 연약함을 보시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시어 인간을 구원하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죄의 권세인 사탄의 권세는 사망을 따라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죄를 지어 죽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어시러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피조물이니까요---창조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연약함으로 오는 죄는 그냥 넘길 수가 없습니다. 왜냐구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으면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셨기에 그 약속을 지키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린 죽엇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고 그 영적 죽음이 육신의 죽음까지 몰고 왔습니다.
곧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이시고 그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 연약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뻐게 만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하나님은 그 연약함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함 속에 있다가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필요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라 우리의 연약함으로 오는 죄를 어찌할 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망이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그 죄를 누구에게 담당시켰습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셔서 우리를 구원케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또 여기서 인간의 연약함은 체력(힘)이 약하다는 것만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힘이 약하고 체력이 딸려서 기도생활 못한다고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이입니다. 교만과 욕망이라는 영적인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교만해집니다. 교만은 나 중심적 욕망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기 전에는 다 교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에덴에서의 아담과 하와의 범죄도 교만이었습니다. 이 교만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십시다.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에서의 겟세마네 기도 사건과 그리고 가롯인 유다의 예수님을 팔아 건네주는 모습과 베드로의 부인사건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도은 겟세마네 기도 후에 유의 배반과 베드로의 부인 사건을 뒤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로 승리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따라 십자가를 지는 승리를 하시는데 깨어기도하지 못한 제자들은 배반하고 도망하고 부인하고 저주하는 사건을 맞세워 놓은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승리와 인간의 실패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인간의 실패는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연약성을 용서하시되 하나님께 기도하며 회개하지 않으면 용서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성을 사랑으로 용서하시되 기도하며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심으로 동정하신다는 것입니다.
가롯유다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혹시 회개했다면 제자인 자신이 스승을 돈 받고 팔아 죽게 만들었다는 인간적인 관점에서의 회개였게지요. 영적인 회개가 필요하다. 하나님으로 섬기는 신앙)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꿇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잘 못 알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성경적 사실과 지식이 신학이 우리를 저주와 심판과 사망으로 인도합니다. 요즘 부활절을 앞두고 제기되는 ‘유다복음’ 웃기지 마라고 하십시오. 사탄의 소리입니다. 뭐 유다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도록 공헌한 공로가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완용이도 충신입니까? 오늘날 이완용이를 충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더 한 것입니다. 악의 도구로 쓰임받았다고 용서가 됩니까? 그럼 애급의 바로는 모세와 히브리민족을 가로막고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도구로 사용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바로를 칭찬하셨습니까? 구원받을 백성이라고 하십니까? 또 있습니다. 사탄도 그럼 나중에 존경받아야 되겠네요? 말도 안되는 생각들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보십시오. 인간의 연약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탄이 밀까부르듯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눅22:31절) 예수님이 막상 잡히시고 매맞는 모습 보니까, 자기도 잡혀 죽을 것 같아 겁이 나고 두렵습니다. 아까까지만 해도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고 큰 소리치던 그가 오늘 본문 막14:54을 보니 그래서 ‘예수님을 멀찍이 좇아-’갑니다. 다른 복음서에서 이 때 제자들은 모두 다 도망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3번씩 부인합니다. 부인만 합니까? 막 14:71절, 마26:70-74절을 보면 절대로 예수님을 모른다고 맹세에서 더 나아가 예수님을 저주까지 합니다. 이것이 깨어기도하지 못한 모습입니다. 시험에 든 모습입니다. 인간의 연약함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을 때 회개합니다. 마26:75절에 보면 말씀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말씀이 깨닫아지고 들려야 은혜가 넘칩니다. 말씀이 생각날 때 회개가 터집니다.
누가복음 22장 31절-32절을 보시면‘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이 말씀 깨닫고 힘을 얻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요한복음에 보면 에수님께서 고향으로 찾아오시어 3번씩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그 음성듣고 회개하고 돌이키고 오순절날 성령받기 위해 기도에 힘쓰지 않습니까?
그리고 전적으로 예수님만을 의지하는 기도의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내 원대로 살면 교만해집니다. 예수님도 하나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내뜻 굽히지 않으면 가롯유다됩니다.
오늘 우리는 인간의 연약성을 가지고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약한 인생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볼 수 없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앞에 순종하겠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연약하기에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기에 연약함을 가진 우리는 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가롯 유다됩니다.
그러나 실패했어도 회개하고 기도하면 베드로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성만 붙들면 책망하십니다. 그러나 깨닫고 깨어 기도할 때 능력으로 인도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잇으니까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시겠지----아닙니다. 연약성을 가졌어도 깨닫고 회개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연약성을 극복케 하시면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 기도의 능력입니다. 기도할 때 성령이 도우십니다. 기도할 때 교만하지 않고 순종합니다. 기도할 때 은혜넘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더 느낍니다. 기도할 때 사명따라 삽니다. 기도할 때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능력생깁니다. 마음이 문제입니다. 체력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영적인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더욱 기도하며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되시길 기도합니다.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으로 힘으로는 한 끼도 못합니다. 그저 한다면 밥맛없고 덜 배고픈 아침 금식한다고 합니다. 하루를 굶어보십시오. 그러면 정말 굶는 고통이 어떤 것인가를 실감합니다.
김찬양-온 가족이 금식하는 날-아침금식-학교에서 점심시간에 먹는 급식 밥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금식 안해도 살아요. 기도하지 않아도 살아요. 그럼 예수 안믿어도 살아요---그렇습니까?
인간에게 가장 약한 것이 무엇이라고요. 기도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 내 뜻과 고집과 욕망을 꺾어지게 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서 왕노릇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기도하려고 하면 시험들게 합니다. 기도 못하게 합니다. 기도에 실패하게 만듭니다. 매일매일 개인적으로 기도하시고 교회가 함께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수요 심야기도회, 그리고 최소한 토요일 새벽기도회는 힘을 다해 보십시다. 하나님이 도우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본래 성경적으로 하면 세족식과 성찬식은 어제 목요일 저녁에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에서는( 사람이 많은) 목요일날 성찬식을 합니다.
우리늘 성찬식은 세례식이 있는 부활주일날 합니다. 그리고 세족식은 오늘 합니다. 세족식은 요한복음 13장에 소개되고(13:4-18절)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성례가 아닙니다.
세족식의 진정한 의미는
1.요한복음13:4-11절까지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린신 보혈이 영혼의 죄악을 씻어주신다는 상징적인 의미-한 번 믿고 구원받으면 영원토록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2.요한복음 13:12-18절까지에서, 섬김의 본입니다. 13-15절에 ‘주와 선생이라 또는 주라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그래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삶도 거룩하고 성결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모여기도하고 예배하는 자리와 성도들이 아프고 어려움을 당하는 자리에 언제나 함께 있으면서 그들의 발을 씻겨야 합니다. 죄를 씻기도록 하고 섬기고 말씀으로 기도로 힘을 주어야 합니다. 물질로도 도와야 합니다. 이것이 세족식의 모습입니다.
오늘 여러분! 세족식하시면서 하나님 앞에 예수님도 우릴 섬겼는데 나도 우리의 이웃을 교회를 성도를 섬기겠습니다 라고 결단하시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전체기도-섬김,사명따라 사는 삶, 선교사님들을 위해 기도, 전도를 위해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