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스크랩] 강해설교와 현대목회

이아기 2006. 9. 4. 10:51
 

강해설교와 현대목회

이동원 목사

(지구촌 교회)


서론

저는 현대목회라는 막연한 단어보다는 교회 성장의 측면에서 ‘강해설교와 교회 성장’이라는 제목으로 타이틀을 조금 바꾸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아무래도 목회하는 사역자로서 모두 다 교회 성장에 대한 관심은 피할 수 없으리라고 봅니다. 우리들의 목회의 장(場)인 교회의 성장을 추구하고 있는 목회자로서 강해설교란 특수한 장르가 갖는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우리들의 설교의 고민, 설교의 특권 등 이런 것에 대해 잠시 함께 나누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현대설교의 위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단적으로 말하면 ‘설교 불신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두세 사람이 다투거나 혹은 그들 사이에 갈등이 초래되었을 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나한테 설교하지 마라.” 하는 소리를 여러분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평범하게 던지는 말 속에 깔려 있는 중요한 전제는 현대인들이 이제 더 이상 설교 자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우리 서료자들에게 매우 불리한 상황입니다. 한 설교학자의 말을 빌리면, “오늘날 설교자들의 가장 커다란 적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시대 그 자체이다.”라고 지적하였습니다.


다음의 네 가지 특성에서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시대를 진단해 보기로 합니다.


(1) 세속주의 시대

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세속주의 시대라고 규정짓고 싶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현저하게 세속화된 시대로 지나간 날의 시대처럼 먼 피안의 시대에 대해 현대인들은 관심을 별로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여기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실존적 관심 외에는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다른 종류의 관심은 상실한 지 오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세속적인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시대적인 정황 속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과 함께 저 건너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완성된 천국의 소망을 설교한다든지, 종말론적인 우리의 소망을 선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닐 것입니다.


(2) 전자시대

저자시대, 멀티비전 혹은 멀티미디어로 대표되고 있는 이 시대의 특징은 다른 어떤 시대보다도 소위 색채문화를 발전시켜 왔고 속도문화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아마도 현대인들에게 가장 강력한 설교자 기능을 대신하고 있는 설교자가 있다면 그것은 강단 위의 설교자가 아니라 TV브라운관일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 교인들이 하루 24시간 중 가장 집중적으로 자기의 생각과 관심을 투자하고 잇는 대상이 있다면 아마도 TV일 것입니다. 이러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영어 선생님이 중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 영어 알파벳을 가르치면서 T자 다음에 뭐냐고 하자 당연하게 “T자 다음은 V죠.”라고 대답을 했답니다. 그만큼 우리는 TV에서 쉴새없이 바꿔 버리는 이 시대 문화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시대와 경쟁할 수 있습니까? 여기에 현대 설교자들의 위기가 있고 불완전한 과제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호화찬란한 색채를 의지하 않고, 또 멀티비디오를 동원하지 않은 채 단순히 단조로운 목소리 하나만 의지하여, 수천 년 간 우리 선배들이 계속해 왔던 그 방법 그대로 성경 한 권만 손에 들고 강단에 서서 전자문화에 물들어 가는 현대인들을 설득해야 한다는 과제는 분명히 손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에 현대 설교자의 위기가 있다고 봅니다.


(3) 상대주의 시대

모든 절대적인 가치관이 부정되고 포기된 시대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랜시스 쉐퍼의 말을 빌리면 19세기로부터 20세기로 넘어오는 과정에 있어서 현대인의 사고방식 가운데 가장 큰 병화는 진리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라고 하였습니다. 20세기 바로 직전만 해도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림이든 누구나 공유하는, 그리고 부정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 혹은 절대적인 윤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살았고 행동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전제에서 어긋나면 “당신은 이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라고 말하며 서로를 설득해 왔습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와서 생긴 현저한 변화 가운데 하나는 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느냐라는 기존의 진리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된 것입니다. 전에는 남자와 여자와의 삶에 있어서 이성 간의 결합인 결혼이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현대는 남자는 왜 남자끼리 살 수 없느냐, 또 여자는 여자끼리 살 수 없느냐 하는 근본적인 물음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또 남과 여의 일대일의 부부로 가정을 영위하는 가정보다 서구사회의 경우 이혼한 가정이 더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목회를 했고 저희 아이들도 미국에서 키웠습니다. 어느 날 저희 둘째 아이가 저한테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 애는 그때 학교에서 내 준 숙제를 하고 있었는데 숙제가 가족의 계보를 그림으로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하는 말이 왜 우리집에는 계모가 없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계부, 계모가 없는 것이 아주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계부, 계모가 많은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고 1 : 1 부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지극히 비정상적인 시대, 가치관이 전도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저는 멀지않아 그 물결이 한국 땅에도 도착할까 싶어 심히 걱정스럽습니다. 우리 한국 사회가 세계화 추세 속에 서구문화에 노출되어 있는 이상 이런 현상에 저항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봅니다.

최근 뉴욕에서는 고등학교 교과서 가운데 동성연애를 교육하기 위한 교재로 “my partner - 남편이나 아내가 아닌 파트너-”라는 제목이 교과서의 한 단원으로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급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소위 절대적인 진리, 절대적인 규범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회의되고 도전받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급변하는 시대일지라도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진리와 규범을 선포해야 하는 우리는 이 시대의 정신과 더불어 매우 힘겨운 싸움을 싸우고 있는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여기에 바로 설교자의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4) 실용주의 시대

실용주의는 사실 현대인에게 많은 편리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우리들의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켜 주었습니다.

실용주의가 끊임없이 던지고 있는 질문은 ‘이것이 나를 얼마만큼 편리하게 해줄 수 있는가? 우리를 얼마만큼 유익하게 할 수 있는가? 우리의 삶에 어느 정도 긍정적인 도움을 제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용주의에 있어서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이것이 과연 진리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실용주의는 이것이 진리이냐 아니냐 하는 사실보다는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느냐의 여부 속에 철두철미하게 이기적인 인간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과제인가, 또 이것이 설교자의 위기임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선포하라(딤후 4:2)는 주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이 음성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들고 주일마다 강단에 섭니다. 그리고 자기가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많은 청중들에게 영향을 주리라고 기대합니다. 아울러 우리 교회의 성장도 기대합니다. 여기서 특별히 많은 목회자들이 가지고 있는 교회 성장이라는 과제와 설교를 연관시켜 두 가지 전제 하에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두 가지 전제란 먼저 설교가 교회 성장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둘째로 조흔 설교는 교회 성장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하도 강해설교를 강조하니까 저와 가까이 교제하시는 홍정길 목사님께서 저한테 늘 하시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분은 “설교에는 두 가지 형태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두 가지 형태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설교에는 좋은 설교와 나쁜 설교만 있다고 해서 함께 웃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건강한 설교, 바람직한 설교, 좋은 설교, 성서적인 설교, 진정한 의미의 감동적인 설교는 반드시 교회 성장을 초래한다고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가 교회 성장의 도구로 이용되어진다는 사실에 비애를 느낍니다. ‘무슨 설교를 해야 내가 더 많은 인기를 얻을 수 잇고 우리 교회에 더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가?’ 이런 관점에서 설교에 대한 관심이 시작된다면 그것은 강단의 타락이요, 설교의 타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도 바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시대 정신인 실용주의의 간접적인 영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것은 결국 설교의 도구화를 초래하고 설교자를 설교 잘 하는 사람으로, 즉 단순한 기능인으로 전락시키는 중대한 오류를 초래하리라고 봅니다.

설교는 무엇보다도 진리 자체의 선포에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기대하는 가장 중요한 목표들, 즉 사람의 영혼을 구원한다든지, 사람을 변화시킨다든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바꾼다든지 하는 보다 중요한 근원적인 목적은 등한히 한 채, 어떤 설교를 하면 사람이 많이 모인다더라, 마지막 문장에다 ‘축원한다’를 붙이면 사람들이 ‘아멘’하며 좋아하더라, 또 그렇게 해야만 은혜 있는 설교라고 인식되더라 등등 소위 표피적이고 감각적인 이유에 맞추어 설교를 한다면 확실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교는 분명히 교회 성장을 초래할 수 있지만 교회 성장이 설교의 유일한 원인 혹은 설교의 제1차적인 원인으로 강조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먼저 강조하고 싶습니다.


본론

1. 사도행전에 나타난 말씀사역과 교회 성장

우리가 교회 성장의 가장 건강한 모델로 삼고 있는 것이 초대교회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로 돌아가기 위해서 힘써 소리치고, 능력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 영적으로 애쓰고 있습니다. 당시 그들이 살고 있던 시대를 바꾸고 복음화할 수 있었으며 또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사도행전의 역사를 통해 분명하게 거듭거듭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0절 이하를 보면 오순절날 베드로의 설교 마지막 부분에서 “말씀을 받는 사람들이 삼천이나 더하더라”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말씀을 받는 사람들, 즉 오순절의 초점은 기적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순절의 초점은 방언이 아닙니다. 오순절의 초점은 겉으로 드러난 어떤 현장에 있지 않습니다.

오순절 설교의 핵심은 언제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 설교의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았던 사실 때문에 가슴에 깊은 찔림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회개하고 그 말씀에 따라 주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초대교회의 성장의 기초는 뚜렷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4장에도 계속됩니다.

사도행전 4장 4절을 보면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성도들을 성도 되게 하고 또 그들의 회심을 가능케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 앞에 직면시켰고 그들을 회개시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게 했으며, 그 결과 믿는 사람들의 숫자가 오천 명이나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을 보면 그들은 집이나 회당 어디서든지 말씀을 가르치고 전도했음을 알게 됩니다.(5:42) 그들이 끊임없이 외치고 강조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들은 말씀을 통해서 변화된 사람들, 말씀을 통해서 회개한 사람들, 말씀을 통해서 주 앞에 돌아온 사람들의 성장이 초대교회 성장의 못자리였다는 사실을 사도행전의 역사를 통해서 끊임없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2. 효율적 말씀사역을 위한 교회 성장의 상황

오늘의 목회 현장을 통해서 말씀이 말씀되어지고 그 말씀에 기초하여 바람직하고 건강한 교회 성장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강조해야 합니까? 저는 몇 가지를 특별히 말씀과 더불어 강조하고 싶습니다.


(1) 설교자의 인격

말씀이 인격에서 분리되면 말씀을 전달하는 행위는 단순한 하나의 기능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필립 브룩스라는 유명한 설교자는 “설교는 인격을 통하는 진리의 전달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공중에서도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말씀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방법을 택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을 통해서 말씀을 전달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의 사건, 소위 인카네이션의 사건 자체가 구체적인 인격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에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제가 잘 알고 있는 후배 목사님 가운데 미국에서 목회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 설교는 제가 들어봐도 참 좋습니다. 목사들이 목사에게서 설교의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만큼 설교를 잘 합니다.

이 친구는 어느 교회에 가든지 가자마자 1~2년 동안은 급속하게 성장시킵니다. 그러나 3년째부터는 문제가 달라집니다. 교인들이 흩어지고 교회에 문제가 생겨 이 친구는 교회를 옮깁니다. 벌써 몇 교회를 옮겼는지 모릅니다. 최근에도 이 친구가 목회하던 교회가 한동안 부흥하고 성장하다가 교인들이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그 교회 교인들에게 같은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교회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기고 또 커다란 화재가 발생하니까 이 목사가 어느 날 주일 강단에서 전 교인과 더불어 금식기도를 하자며 금식기도를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산에 가서 일 주일 동안 금식기도를 드리고 내려 오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간에 정오 조금 지나서 그 교회 교인 하나가 헬스 클럽 사우나에 갔다가 산 기도하러 갔다던 목사님을 사우나탕에서 만났다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이 친구가 목회하는 교회가 왜 그토록 많은 어려움을 느끼고 계속해서 이 교회 저 교회를 전전하는지 그 이유를 쉽게 짐작하실 것입니다.

그는 설교에 대한 좋은 은사의 기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목회하고 있는 대상인 성도들을 하나님 말씀 안에 바로 세우는 일에는 실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인격을 떠난 설교의 기능이 가져온 비극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인격이 효율적인 말씀사역을 위한 교회 성장의 상황에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2) 교육사역(제자훈련)

교회를 바람직하게 훈련시키는 사역에 있어서 설교와 더불어 설교를 설교 되게 하는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교유사역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사역을 증언해 주고 있는 세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선포하셨고 가르치셨고 고치셨습니다. 그는 선포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시간이 있을 때마다 소그룹의 제자들을 모아서 가르치셨습니다. 때때로 그는 많은 청중들로부터 제자들을 분리시키시고 제자들만을 놓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짧은 목회 경험을 통해 성도들이 삶에 대한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설교만으로 안 된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한번 교인들을 놓고 그들이 정말 은혜받고 삶이 전격적으로 변했을 때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변화하게 했었는가를 연구해 보십시오. 뜻밖에도 설교를 통해서 변화되었다는 비율은 기대한 만큼 높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소그룹 규모의 성경공부들, 혹은 일대일의 개인적인 권면을 통해 결정적으로 삶의 변화를 가진 성도들을 더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개인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진정한 의미의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르침의 사역이 보완되지 않고서는 설교를 설교 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시기 바랍니다.


(3) 교회 행정

교회 성장에 있어서 중요한 또 하나의 실제적 요소는 교회 행정입니다.

저는 행정부분에 아주 미약한 사람이라 늘 고민이 많습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 우리 사역자들은 열린 마음을 가지고 공부하는 자세를 가져야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요즈음 시대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소위 마케팅 리서치(Martketing Reserach) 등을 통해서 더욱 급속도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한때는 이 사회를 이끌던 교회가 이제는 이 사회에서 제일 처져서 행군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웨슬리 전기를 읽어 보면 웨슬리와 조지 위필드는 절친한 동역자였음을 알게 됩니다. 아마도 설교 역량에 있어서는 위필드가 웨슬리를 능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인들에게 더 많은 영향력을 남기고 또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 믿음을 보존할 수 있도록 실제적인 도움을 준 것은 위필드보다 웨슬리였습니다. 그 이유는 요한 웨슬리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을 잘 조직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행정에 능통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실제적인 측면으로 교회 성장의 부문에서 교회 행정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4) 교회 비전

우리의 설교가 설교다운 설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교회가 얼마나 적극적이고 희망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가도 중요합니다. 비전이 없는 교회,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교회에서 성도들은 그 강단에 서서 설교하는 목사님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교회 비전은 설교를 설교 되게 하는 가장 건강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5) 표적과 기사(Signs and Wonders)

실제적으로 표적과 기사에 관해서는 사람들마다 다양한 의견의 차이를 나타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와 이적은 피할 수 없는 전세계 교회의 목회 경향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저는 두 가지 극단을 언제나 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기사와 이적만이 교회 성장의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입니다. 이런 경향들은 자칫 잘못하면 교회 내 이교도적인 신비주의를 끌어 낼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합니다. 교회가 부흥되는 가시적인 현상을 보이는 어떤 교회의 모습을 비판없이 수용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요사이 유행하고 있는 뉴에이지 운동같은 요소들이 교회 속으로 마구 몰려드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교회로 모을 수 있고, 병자를 고칠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그 사람의 신학이 어떤 것인지, 믿음이 어떤 것인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능력의 사도로 추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다른 극단은 이런 이적 속에 나타난 성령의 존재와 역사를 도외시한 채 무조건 반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시대마다 어떤 특별한 운동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계시하셨습니다. 어쩌면 제3의 물결 운동 속에서도 현대이늘은 영혼의 깊은 갈증을 느낄지 모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토론토 축복이라는 이야기를 들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캐나다 토론토의 비행장 옆에 에어포트 빈야드라는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에서 금세기 최대의 부흥이 일어나고 있다고 선전되면서 전세계의 수많은 크리스찬들이 그 교회로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월요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밤 교회에서 집회가 열리고 있는데 저도 한 번 참석해 보았습니다.

저는 거기서 많은 복잡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이 자리에서 그 교회의 운동 자체에 대한 비관은 보류하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굶주려 있는지를 다시 한 번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제가 기대했던 대로 과거 교회사에 나타났던 부흥의 패턴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려드는 수많은 물결 속에서 배워야 했던 것은 영혼의 곤고함이었습니다. 그 곤고함을 채워 주기 위해 과감히 우리의 목표를 갱신하고, 사람들의 영혼을 벌거벗은 채로 만나 그들을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 앞에 열린 마음을 갖고, 자신을 던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3. 설교사역의 우선 순위

(1) 구약에 있어서의 영적 부흥

성서의 구속사에 나타난 모든 부흥의 패턴 한복판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특별히 에스라가 주도했던 부흥의 역사를 통해서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돌아올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가르치기로 결심하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결심을 한 에스라를 귀하게 쓰셨습니다.

느헤미야 8장 2절 이하를 보면, “칠월 일일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남자, 여자 무릇 알아 들을 만한 회중 앞에 이르러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성경을 읽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율법의 말씀을 듣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 날의 부흥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이 부흥은 철저하게 말씀 중심의 부흥이었습니다. 다른 인간의 수단이나 방법에 의해 사람의 마음이 변화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타올랐던 부흥, 그것이 바로 수문 앞 광장에서 있었던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났던 부흥운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말씀에 대한 선포로 시작하셨음을 알게 됩니다.(4:18)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18~19).

그는 책을 펴서 말씀을 선포하시고 그 말씀 속에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사역 내용을 선포하심으로써 공적인 생애를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3) 사도 바울

바울의 설교의 패턴은 어떻습니까? 사도행전을 보면 확실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행 17:23). 그가 읽은 내용이 무엇인지 뜻을 풀어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말씀에 의지해, 바울의 설교 형태는 철두철미한 강해설교였다고 믿습니다.

다음에,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17:3)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설교는 기독론적 설교였습니다. 그는 성경 중심의 설교를 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초점을 맞춘,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의 기독론적이고 복음적인 설교였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바울을 바울 되게 하고 단순히 선교전략가로서만 성공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그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이 바울 사도를 비롯한 초대교회 사도들의 설교 패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4) 초대교회

사도행전 6장을 보면 초대교회 사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거룩한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구제문제를 둘러싸고 교회 안에 갈등이 생겼을 때, 성령과 지혜가 충만했던 일곱명의 청지기를 선택했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사도들은 구제나 그 밖의 모든 비본질적인 일들은 집사에게 맡기고 그들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만 전념하기 위해서 집사를 뽑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사도들의 우선 순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우선 순위가 무너지면 설교자의 강단은 결국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설교보다 더 중요한 사명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설교를 위해 드리는 시간보다 더 중요한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너무 많은 일로 바쁘다면 능력은 점차 감소하게 될 것입니다. 목사에게 말씀을 준비하는 일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토요일 설교 준비를 하고 있는데 누가 찾아왔습니다. 목사님이 토요일날 아무도 안 만난다는 것을 아는 그 집 관리인이 나와서, “목사님은 지금 설교 준비중이십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토요일에는 아무도 안 만나십니다. 돌아가십시오.” 라고 했더니 방문객이 화가 나서 “나도 하나님의 종이요, 종이 왔다고 전하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스펄전 목사님께 전했더니 “나가서 전하시오. 나는 지금 그 종의 주인을 만나 뵙고 있는 중이라 하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때부터 우리들의 강단은 능력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초대교회의 우선 순위였습니다.


(5) 교회사에 나타난 영적 부흥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그것은 초대교회 사도들의 우선 순위일 뿐만 아니라 교회사에 나타난 일관성 있는 영적 부흥의 역사적 패턴이었습니다. 교회사의 암흑기를 보면 그것은 바로 설교의 암흑기였습니다. 중세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는 영광스러운 설교자들이 없었습니다. 설교가 침묵했던 시기였습니다. 강단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침묵 속에 잠겨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나 종교개혁시대를 보십시오. 그 시대는 설교의 황금시대였고 아울러 그 시대 자체가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고 있었던 시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강단에서 성령의 기름부음 받은 능력 있는 메시지가 사라져 갈 때 역사도 캄캄한 어둠 속으로 떨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때는 부흥의 역사 전후에 강력한 하나님 말씀의 운동이 있었습니다. 강단을 강단 되게 하십시오. 그러면 시대도 갚은 잠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4. 목회사역에 있어서 설교의 위치

저는 좀더 실제적인 측면에서 우리의 목회사역에 있어서 설교가 갖는 기능적인 위치를 몇 가지 지적함으로써 설교에 대한 우리들 자신의 헌신을 확고히 하고 싶습니다. 왜 그렇게 설교가 중요합니까?


(1) 설교는 목회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저는 인간의 변화에 관한 한, 설교만 가지고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그렇게도 여러 해 동안 말씀을 외쳐서 증거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변화 없이 앉아 있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서 무력감을 느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효과적인 가르침의 사역, 교육적인 사역, 그리고 제자훈련의 사역을 통해 설교사역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은 이미 지적한 바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가 가진 중요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설교하는 것보다 목회의 방향을 제시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들의 설교를 분석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최근에 우리 교회가 달려 온 방향을 분석해 보십시오. 우리 교회가 걸어온 발자취를 쉽게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가 어디로 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설교는 어떤 방향을 지향하고 있습니까? 이처럼 설교는 교회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2) 설교는 교회 방문자들에게 교회의 첫인상을 제공합니다.

사람들이 우리 교회 문 안에 발길을 들여 놓는 순간 그들은 여러 가지의 첫인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건물에 대한 인상, 성가대에 대한 인상, 안내위원들에 대한 인상 등 많은 이상들이 그 교회의 전체적인 인상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첫인상은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일 것입니다.

저는 12년 동안의 목회를 어느 정도 마무리짓고 작년에 분당 근처에서 개척을 했습니다. 분당도 아닙니다. 가서 보니까 분당 바깥에도 비빌 데가 없어서 수원 남쪽으로 내려가 용인군 수지면에다 개척했습니다. 제가 처음 개척할 때는 수지아파트도 건설되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빈 들, 시골집 몇 채밖에 없는 빈 들에 선경 마그네틱이라는 회사 공장의 강당을 다행스럽게도 빌릴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강당은 5층에 있었습니다. 5층까지 층계는 왜 그리 많은지, 그래서 저희 교인들은 층계를 오를 때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라는 찬송을 부르며 올라옵니다.

지난 여름 얼마나 더웠습니까? 더위를 해결할 방법은 없고 정말 상황은 열악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처음 시작하니 성가대가 있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저로서도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개척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래도 저희 교회가 부흥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설교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교회 상황이 열악하면 열악할수록 설교 준비에 매달렸습니다. 다른 쪽으로는 좋은 인상 줄 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건물이 좋습니까? 성가대가 있습니까? 괜찮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으니까 설교에 매달렸고, 하나님께서는 저의 설교를 말씀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설교라는 것이 교회 방문자들에게 교회의 첫인상을 결정한다는 측면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믿고 있습니다.


(3) 설교는 목회자의 목회 리더십을 세워 줍니다.

아무리 인격적으로 훌륭한 인격을 갖추고 있는 목회자라 할지라도 그 목회자의 말씀을 통해서 성도들이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그 목회자의 리더십에는 많은 문제가 있게 마련입니다.

비록 목회자에게 어떤 결격 사항이나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주일날 말씀의 자리에서 성도들이 은혜를 경험하고 있는 한 그 교회의 리더십은 견고할 수 있습니다. 다른 방법으로 리더십을 가지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저는 말씀 자체에서 오는 리더십보다 더 자연스러운 목회자의 리더십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4) 설교는 목회자로 하여금 교인들과 만남의 장을 제공한다.

교회가 성장하고 대형화하면 할수록 담임 목사님의 심방 기능은 점점 약해질 것입니다. 교인이 많아지다 보니 교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목사님과의 접촉 기회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형 교회 교인들이 고독감을 느끼지 않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작은 그룹을 통해서 조직에 대한 충족감을 얻을 때와 또 하나는 전체적인 예배시 말씀을 통한 예배시 말씀을 통한 은혜가 그들의 심령을 적시고 있는 한 성도들은 목회자를 계속해서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그들 마음속에 전혀 은혜가 되지 못한다면 그들은 주일날 교회에 갔을지라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으며 아울러 목회자를 만났다는 충족감도 얻지 못하고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는 목회자로 하여금 교인들과 만남의 장을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5) 설교는 목회자 자신의 성숙의 현장입니다.

목회자가 새롭고 신선한 설교를 결심하고 있는 한 그 목회자는 계속 성숙할 것입니다.

미국에서 저에게 설교학을 가르치던 교수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자기는 한 교회에서 10년 이상 목회한 모든 목회자에게는 설교학 박사나 목회학 박사 학위를 아무 이유 없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2, 3년마다 옮기는 목사야 반복되는 이동 속에 자기 성장이 없겠지만, 매주일 새로운 설교를 하기 위해 무릎 꿇어야 하고 쉼 없이 독서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성장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사실 12년 만에 한국에 오면서 너무너무 기뻤습니다. 왜냐 하면 지난 12년 동안 설교한 것이 있으니까 12년 동안은 설교 준비 안 해도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주일 만에 제가 목회하고 있는 미국 교회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설교 테이프 복사하는 부서에서 옛날 것을 복사해서 내보내니까 새로운 설교를 해달라고 야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 준비 안 하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깨닫고 새롭게 준비하자고 마음먹었던 적이 있습니다.

목회자가 성실하게 설교준비를 한다면 모고히자의 성장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리라고 생각됩니다.


5. 좋은 설교란 무엇인가

우리 모두가 좋은 설교하기를 원합니다만 교회를 자라게 하고 성도를 자라게 하는 좋은 설교는 어떤 것입니까?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어떤 목사님한테 들은 이야기입니다. 목회한 지 6~7년 된 젊은 목사님이 자기 방에서 침대 정리를 하다가 침대 밑에 조그만 상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 열어보지 못하고 저녁에 아내가 돌아왔을 때 물었답니다. “여보, 이 상자가 도대체 뭐요?” 그러자 그의 아내가 “당신은 몰라도 돼요. 그건 알려고 하지 마세요.”라고 하더랍니다. 그 이야기를 듣자 궁금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자기 아내가 외출한 다음에 공구를 가지고 한참 동안 씨름하다가 드디어 그 상자를 열었습니다. 그 속에는 빈 종이와 계란 세 개가 있고 삼천 달러가 있더랍니다. ‘계란 세 개와 삼천 달러면 비밀이라고 할 필요도 없을텐데 도대체 이게 무엇일까?’ 하여튼 다시 닫아 놓고 못 본 척하고 이쓴데 이상한 자기 표정을 보고 아내가 묻길래 솔직히 열었다고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미안하게 됐소만 계란 세 개와 삼천 달러가 도대체 뭐요?” “내가 당신한테 이야기 안 할려고 했는데, 전 항상 당신 설교를 위해 기도하고 있어요. 그래서 당신이 설교를 너무너무 못할 때마다 계란을 하나씩 집어넣었어요. ”그 얘기를 들으니까 너무너무 신이 나더래요. ‘지난 6, 7년 동안 넣은 계란이 세 개면 내가 못한 설교가 세 번밖에 없단 말이지.’ 너무 기뻐서, “그러면 삼천 달러는 무엇이요?” “계란이 열두개 될 때마다 팔아 모은 돈이 삼천 달러죠.”라고 하더랍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것 일곱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성경에 충실한 설교여야 합니다.

설교를 듣는 성도들 입장에서는 설교를 들은 다음에 ‘내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혹은 ‘성경을 배웠다’하는 성취감을 느끼려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지식 축적을 위한 소스가 다양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은 철학이나 사회학이 아닙니다. 그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설교자가 자기의 논증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성경의 권위에 입각한 설교, 성경 본문에 성실할 수 있는 설교여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삶의 현장에 적용될 수 있는 설교야말로 성경적 설교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하늘의 메시지를 가지고 당당하게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할 수 있는 설교야말로 좋은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2) 설교의 중심 생각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설교에 대해 이런 테스트를 해 볼 수 있습니다. 설교 작성이 끝난 후 ‘내 설교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어떤 내용일까?’ 설교를 들은 사람들에게 설교의 핵심이 무엇이었냐고 물었을 때 그 핵심을 성도들이 말할 수 있다면 그 설교는 분명한 핵심을 전달한 것입니다. 저는 설교 준비를 할 때 읽고 또 읽으면서 이 본문의 핵심은 무엇이고 핵심이 어떻게 전개되었느냐를 생각하면 이 두가지만을 가지고 씨름을 합니다.

설교를 듣고 난 후 성도들이 목사님 설교의 핵심을 명쾌하게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는 설교를 했다면 설교 준비와 설교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이 완벽했다고 봅니다.

개혁자 칼빈은, “성경 본문이 위대한 것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핵심 진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심리적으로 철학적으로 영적으로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본문을 전달하고 있는 명확한 메시지 때문에 성경이 성경적이라는 칼빈의 말은 오늘날 설교가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귀중한 충고라고 생각합니다.


(3) 설교의 서론이 탁월해야 합니다.

설교에 있어서 서론이란 본론을 소개하기 위한 과정과 청취의 이유를 설득하는 과정입니다. 성도들이 설교가 들을 만한 가치가 있나 없나는 대체로 서론에서 결정됩니다. 그리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나오는 모든 성도들이 목사의 설교에 대해 기대를 갖고 앉아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그렇지 않은 청중들도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인의 협박’ 때문에 할 수 없이 앉아 있는 경우도 있고, 집안의 평화를 위해 앉아 있는 사람, 심심풀이로 앉아 있는 사람, 습관을 좇아 앉아 잇는 사람 등 다양합니다. 이들에게 보좌로부터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여야 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서론 부분에서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서론의 중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4) 설교의 대지 형성이 논리적이어야 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 목사님들을 보면 대개 주보에다 설교 내용을 쓰시는데 아주 용감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가끔 다른 교회에 가서도 주보를 유심히 보는데 주보에 적혀 있는 설교를 보면 대충 한국 교회의 설교를 분석해 볼 수 있습니다. 아우트라인(outline)을 보면서 주제, 제목, 본문과 대지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나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떤 아우트라인을 보면 전혀 상관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것은 첫째, 둘째로 나열하는 의미밖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대지의 종류를 보면 주제를 전개하는 논리적 방식에 따라 대지를 형성하는 논리적 형태의 대지가 있고, 대지 상호간의 관계적 발전의 대지가 있고, 점진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점진적 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자체에 대지의 순서가 드러나 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종류의 대지를 사용하든지 각 대지마다의 내용이 논리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을 나열해 놓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시대의 필요’로 제목을 정한 후 첫째 대지는 우리 시대에 씨를 뿌릴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우리 시대는 씨를 뿌릴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셋째 눈물로 씨를 뿌릴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이렇게 하면 점진적 전개 방식입니다.


(5) 성도들의 삶에 적용이 가능한 설교이어야 합니다.

성도들의 삶에 적용이 가능한 설교는 어떤 것입니까? 설교를 듣고 나서 교인들이, “목사님, 그 설교는 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혹은 “오늘 설교는 저에게 하신 말씀 같았습니다.”라고 하는 말을 듣게 된다면 설교의 메시지가 성도들의 삶의 현장에 강조되어 선포된 것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런 설교가 가능합니까?


첫째, 창조적 상상의 필요

성경 말씀이 단순히 2천 년 전, 3천 년 전의 기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 현실에 맞게 바꾸어 보는 훈련이 중요합니다.


둘째, 대지마다 성도 대상 적용

성도 대상을 적용할 때 대지마다 적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 부분까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가 결론 부분에 가서 적용하면 오늘 목사님 정말 좋은 이야기하셨다.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면서 이야기책 듣듯이 듣다가 끝부분에 가서 조금 긴장하다 끝납니다. 처음부터 적용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적용을 할 때도 항상 주의해야 할 것은 전체적인 적용을 하면서도 특정한 개인을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청년회 헌신예배 때에 청년만 나오는 것은 아니므로 노인들 입장도 고려하셔야 됩니다. 청년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무관한 설교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시키며 그 자리에 머물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도 그 설교가 무관하지 않고, 설교의 감동을 안고 돌아갈 수 있는 배려를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점을 놓치면 안 됩니다. 적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적용이 구체적이어야지 막연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세계 복음화를 위한 설교를 했을 때 마지막 결론으로 “우리 모두 세계 복음화에 헌신합시다.”라고 끝내면 어떻게 헌신하라는 것인지 적용이 힘듭니다.

그보다는 “여러분이 이 한 주간 동안에 만나는 이웃, 동료들에게 책임지고 복음을 전한다면, 아니 우리 교인 전체가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친절을 보인다면, 그리고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이 복음은 전세계에 위대한 능력을 갖고 선포될 수 있습니다.”라고 하면 보다 구체적이지 않겠습니까?


(6) 설교는 쉽고 재미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졸지 않게 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에게 설교학을 가르치던 교수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성도들을 졸리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열심히 설교하고 있는데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졸고 있으니까 보다 못해 옆사람보고 깨우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깨우면서도 중얼거리기를 “자기가 재워놓고 누구보고 깨우라고 그래.”라고 했답니다.

설교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하십시오. 저도 초창기에는 어렵게 했습니다만 세월이 갈수록 점점 제 설교가 단순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쉬운 설교는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구성 자체가 단순하고 문제도 단순한 것을 말합니다. 물론 쉽고 재미 있는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예화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예화는 자기 자신이 개발하는 것입니다. 다른 예화집 볼 필요도 없고 설교집도 볼 필요 없습니다. 자신에게 맞는 제일 좋은 예화를 개발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예화 파일을 만드십시오. 여러분이 매일 읽은 신문이나 잡지라든가 누구한테 들은 내용을 바로바로 복사해서 자신의 파일집을 만드십시오. 그러면 그것은 다른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여러분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화 파일집이 될 것입니다.

제가 지방에 갔을 때 시간이 좀 있어서 주일날 어느 교회에 갔더니 설교내용이 제가 했던 것과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고마웠습니다만 그 날 저는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자기에게 맞는 자신의 예화를 개발하십시오. 그렇다고 남이 한 예화를 못할 건 없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세상에 새로운 것은 전혀 없습니다. 도 처음 과정에서는 어느 정도의 모방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왕 모방할 것이면 좋은 모방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위대하고 바람직한 모방은 설교 초기에 있어서는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7) 설교의 결론이 도전적이고 복음적이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 설교자들이, “이제는 결론을 맺겠습니다.”라는 말은 안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청중들은 그 소리를 듣고 ‘이젠 끝날 시간이 되었구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머지 부분, 즉 가장 중요한 결론 부분에 대한 관심도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결론 부분을 클라이막스로 끌어 올리십시오. 지금까지 강조했던 부분을 아름답게 요약하고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결단을 호소하십시오. 헌신을 촉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끝나야지, “말씀을 마치겠습니다.”하고 끝내면 끝에 가서 김이 빠집니다. 이러한 점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결론

지금까지 제가 강조했던 설교의 패턴은 귀납법적 강해설교입니다. 그냥 강해설교가 아니고 귀납법이란 단어를 붙인 이유가 있습니다. 귀납법은 특수한 상황을 다룬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연역법은 일반적인 원칙을 다룬 것입니다. 설교를 너무 일반적인 것으로 시작하면 사람들은 별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하면 아무도 안 듣습니다.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연역적인 설교가 규범적이고, 페쇄적이고, 습관적이고, 설명적이고, 선포적이라면 귀납법적인 설교는 창조적이고, 개방적이고, 실험적이고, 대화적이고, 참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를 창조적으로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도 함께 공감대를 느낄 수 있는 설교의 장으로 그들을 초청해 보십시오. 함께 그 설교에 대해 호흡하도록 만드십시오. 참여자가 되게 하십시오. 그래서 설교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도록 하십시오. 교인들 개개인들로 하여금 자신을 위한 메시지였다고 항복하게 만드십시오. 설교자는 청중이 잇는 곳에 함께 있어야 합니다.

존 스타인벡이 쓴 소설 중에 「분노의 포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 케인즈라는 주인공이 자기가 살던 마을사람들이 서부로 다 이사 가고 몇 사람 안 남게 되자 그 마을 한복판에 서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이 가는 곳에 나도 가야겠지.” 저는 그 부분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여러분 청중들이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있습니까? 그 현장에 서십시오. 그래서 그들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대답하고 있으며, 또 하나님의 말씀만이 소망이고 능력임을 깨닫게 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것이 귀납법적 강해설교의 축복이요, 특권이자 영광이라고 믿습니다.

출처 : 예수중심 JESUS CENTERED
글쓴이 : 동순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