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스크랩] v목회자의 권위와 지도력

이아기 2006. 9. 4. 11:10
 

목회자의 권위와 지도력

정진경 목사

(신촌성결교회)


Ⅰ. 서론 : 목회 현장의 문제점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내용은, 학문적인 내용이 아니라 목회를 하는 방법적인 차원에서 경험을 토대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아울러 앞으로 여러분의 평생 목회에 다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신학교에서 신학 이론을 공부합니다. 그러나 신학교에서 배운 이론이 목회 현장을 통해서 새겨지고 표현이 되어야만 그 신학이 산 신학이 될 것이며, 또한 목회 현장에서 선포되는 모든 메시지들과 프로그램들이 사회와 연결될 때 복음이 산 복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학교에서 15년 동안 있었지만 저의 궁극적인 소망은 목회 현장에서 목회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 기회가 있어서 목회를 하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 잘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늘 “목회자가 무엇이냐” “어떻게 목회할 것이냐” “왜 목회를 해야하느냐” 등의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또한 목회자에게 주어진 과제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세상의 어떠한 다른 직분을 맡은 사람들보다도 목회자에게 주어진 과제는 다양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교로부터 시작하여 예배, 설교, 교회, 심방, 상담, 행정, 재정, 교계, 대 사회문제 등의 문제들이 우리 목회들이 취급하는 과제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요약한다면 목회자의 직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양떼를 먹이고 바른 길로 인도하여 그들을 다스리는 일들을 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설교하고, 교육하고, 행정 하는 일을 잘하면 우리는 신실한 목회자로서 존경받게 될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심고 가꾸어 그 결과로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것이 목회자의 본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목회자는 교회를 섬기는 자입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직분입니다.

현대에 와서 목회자가 신학교를 졸업하고도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고 또한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것도 좋다고 말하지만, 사실 목회자라 하면 양치는 사람인데, 적어도 목회자는 교회를 섬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일생동안 교회를 통하여 정치에 대해서도 말을 하고 예술에 대해서도 말하는, 즉 교회를 중심으로 모든 분야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목회자의 직분이라고 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목회자의 직분은 그 기본적인 기능 면에서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권위가 바로 인식되어야 하고 목회자의 신분과 위치가 바로 파악되어야 합니다. 또한 목회자의 사명과 임무가 바로 이해되고 실천되어야 합니다.

목회자에 대한 확실한 이해 없이 평생을 목회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따라서 목회자들 자신의 권위, 신분, 위치, 사명, 임무 등의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철저히 규명되고 연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목회자는 후회 없는 목회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의 직분을 감당함에 있어서 두 가지 꼭 유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급격하게 변하는 시대와 문화, 그리고 상황에 민감하고 미래지향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시대에서나 똑같이 적용됩니다.

두 번째는 이러한 능력을 소유하기 위해서 목회자가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학교 공부를 끝내고 목사가 되어서 교회에 나와 목회를 시작할 때 우리의 질적 향상은 겨우 설교 한 편 만들어 내는 데에서 그칠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목회자에게 너무나 많은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평생을 투쟁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매질해 가면서라도 자신의 질적 향상을 꾀하고 그리하여 어느 시대, 어떤 환경에서라도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에게 기대되는 기능의 요구는 제가 처음 목회자로 헌신할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신학적인 변화도 심할뿐더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도 엄청나게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목회의 직접전이 대상인 인간 자체의 변화입니다.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대상, 즉 우리의 전하는 복음을 받고 우리의 영적인 지도를 받을 사람들에게 과거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놀라운 변화가 일고 있습니다.  어제의 목회자로서는 상상조차 못했던 변화들이 우리 목회자들에게 도전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의 목회자는 옛날의 목회자와는 많이 다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선배 목사님들은 거의 교회 안에서나 목회를 하였습니다. 세상과는 별로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세상과 교회를 엄격히 구별하는 성속의 이원론을 극복하지 않으면 목회를 성실하게 해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적인 관심은 교회뿐 아니라 속세에까지도 표함된다는 폭넓은 관찰과 이해가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목회자는 교회 자체의 자립과 유지만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이 세상의 모든 문제들, 즉 정치, 경제, 노동, 문화 등의 사회의 전 영역에 걸쳑서 목회적 배려를 해야 할 시대적인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교회 하나만 잘 꾸려나가면 훌륭한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교회의 숫자가 몇만 개가 되고 신도의 숫자가 천만 명이 넘는다고 말합니다.

기독교가 소수(minority)에 속할 때에는 전부에 대하여 항거도 하고 불평하기도 하고 사회에 대하여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다원종교사회에서 다수(majority)를 차지하는 기독교는 타종교에 비교해서 배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불평 불만이나 하는 목회, 세상은 어떻게 되든 교회당 안에 숨어서 하는 목회는 그만두고 이제 우리의 이웃들에게도 목회적인 배려를 해서 하나님의 구속의 사건들을 전파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도전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목회나 교회, 선교 활동이 목회자만의 기능으로는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전 신도의 참여를 유도하는 신학의 수립이 필요한 단계에 와 있습니다.

인류 문명을 연구하는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지난 10년 동안의 변화가 그 이전 과거의 모든 인류의 역사적 변화의 폭보다 더 넓고도 더 크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옛날과 너무나 달라졌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것은 과학기술의 발달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혁명과 평행을 유지하면서 오늘날의 사회 변화를 촉진시켜 온 것은 산업화, 도시화, 지식 폭발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서론으로 이와 같은 변화의 시대에 직면한 목회 현장의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목회자의 권위와 지도력에 대한 문제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현대목회자가 도전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부문은 신도들의 지식, 폭발, 즉 지식 수준의 놀라운 향상입니다. 과거에는 교회에서 교육을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이 목회자였습니다. 신도들이 목사님을 능가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양상이 달라졌습니다. 많은 신도들이 목사보다 더 높은 교육을 받았거나 아니면 그러한 방향으로 상황이 자꾸만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있는 목회를 하기 위해서는 많은 중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현대 목회자의 기능에 가장 강하게 도전해 오고 있는 것은 목회의 대상인 인간 자체의 변화입니다. 오늘날의 인간들은 옛날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교회 안의 신도들을 대해 보아도 그 변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변화의 첫째는 현대 인간의 세속주의적인 경향이고, 둘째는 종교를 필요로 하지 않는 무종교성이며, 셋째는 과학기술을 종교처럼 믿는 현대인들의 세계관입니다. 이것이 다 목회의 대상입니다.

이러한 세속주의 물결은 현대 인간에게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까지 깊이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물질 만능주의, 매스컴을 타고 만연되는 퇴폐 풍조가 교회 밖에서 맴돌고 있을 때에는 신도들에게 문제가 안 되었습니다. 신도들에게 조심하라고, 나가서 속되지 말라고 잘 가르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러한 문제들이 교회안으로 들어와서 하나의 ‘삶의 스타일(Life Style)'이 되어서 교회안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이제는 교회인지 속세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점점 그 구분이 불 분명해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교회 밖에서 행해지는 모든 세속적인 일들이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자행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목회자들은 이러한 인생 철학을 가진 현대인과 어떻게 대화를 하고, 어떻게 이들에게 당면한 문제들에 대해서 복음을 가지고 해답을 줄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종교를 등지고 하나님이 없다고 자초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풀어갈 수 있다는 과학만능주의, 물질만능주의가 교회 안으로 침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대인들에게 종교적인 대화라고 하는 것은 사실 미신적인 용어로밖에 간주되지 않을 경우가 많습니다.

현대인들과 대화를 함에 있어서 종전과 같은 목사의 상식을 가지고서 대화를 이끌어나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폭넓은 현대 과학의 이해, 또한 현대에 대한 깊은 인식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급격한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의도에서 관악산 기슭의 안양시 관양동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관양동 한 동네 안에 교회가 몇 개쯤 되느냐 하면 24개쯤 됩니다. 저는 종종 동네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곤 하는데, 30-40대 후반이 대부분인 목회자들이 종전과 똑같은 식의 목회를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많은 노력을 하는데도 그곳에서 당장 돈을 거두어서 교회당을 만들  능력도 없습니다.

현대의 목회자는 현대의 변화의 소용돌이 밖에 머무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과 같은 변화의 와중에서 전통적인 목사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되면 좌절하거나 시대의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 목회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목회자가 되려면 목회자의 끊임없는 질적 향상이 반드시 요청됩니다. 늘 언제나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용기가 없이는 영성 문제에 있어서나 지식 면에 있어서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이렇게 많은 것 가운데서 목회자의 권위 문제, 그리고 권위와 지도력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드리려 합니다.


Ⅱ. 목회자의 권위의 위기

1. 목회자의 권위

권위는 목회자의 생명입니다. 요즈음에는 지난 시대의 모든 권위주의를 없앤다고 많은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2천년 전이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목회자 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특히 정신적인 소모가 많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젊은이든 노인이든 권위를 이르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목회자는 목회자로서의 권위를 잃으면 목회를 할 수 없습니다.

권위는 모든 것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자의 권위란 목회자의 지도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풍부한 학식과 다양한 재능을 가진 목회자라고 해도 권위를 잃으면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고 또한 지도력을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요즈음 교회의 성도들은 대단히 영리합니다. 목회자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전부 보고 있으며 어느 부분에서든 목회자의 권위를 찾아내고 인정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2. 권위의 위기

현대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은 내적인 원인과 외적인 원인 두 가지 측면에서 권위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 내적인 원인

목회자들이 지난 날의 권위를 잃게 된 내적인 원인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목회자의 최대의 관심을 우리의 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두기보다는 교권과 정치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복음의 내용과 생명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전통과 형식, 신학과 파장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셋째, 섬기는 자세보다는 섬김을 받으려는 데 치중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지난 날을 청산하고 새롭게 목회적인 변화를 시도하려면 결단이 필요합니다. 지난날의 목회의 잘못을 청산하는 방향 전환의 결단 없이는 바른 목회를 하기 어렵습니다.

비기독교 사회에서는 교회와 목회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조차 자기들을 지도하는 목회자의 권위를 인정하려 들지 않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고민입니다.

밖의 세속사회에서 목회자들의 권위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내 지도를 받고 있는 많은 신도들이 그 권위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외적인 원인

위에서 지적한 급격한 변화의 물결 속에 있는 현대인들은 전통적인 권위와 권위자에 대해서 매우 냉소적입니다. 정치ㆍ경제 모든 분야에서 그 권위를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지식 수준이 높아진 이유도 있지만 인간 생활의 세속화 과정 때문입니다. 우선 현대인들은 성속의 개념이 흐려졌고, 가치관이 급속도로 변했습니다. 믿지 않는 세계에서 기독교인들이 존경을 받으려면 가치관이 그들과 달라야 합니다. 우리의 가치관이 세상의 가치관과 똑같다면 성속의 개념은 분명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영적 세계나 그 분야에 종사하는 지도자에 대하여 전과 같은 경의를 표하려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교회에서 목회자는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무조건 존경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목회자를 기능이 다른 한 직업인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더욱이 오늘과 같은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비 물질적인 정신 세계나 영적인 세계를 상대로 하는 직업은 대단치 않게 취급됩니다.

우리는 외국에 나갈 때면 당신 직업이 무엇인가를 기록하라고 하는 질문에 당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에서의 밥벌이가 아니라 부르심의 소명에 응답하는 길이라는 자부심으로 목회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 이상도 그 이하로도 보아주지 않습니다. 이렇듯 권위의 개념이 옛날과는 판이하게 달라졌습니다. 이러한 권위의 상실은 현대사회의 급격한 변화가 몰고 온 부산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상실한 권위 회복에 대한 목회자의 시도

(1) 목회의 포기

세계제2차대전 이후에 고개를 들었고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계적인 경향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 지도자들의 권위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특별히 목사와 성직자들의 권위에 대한 문제는 심각했습니다. 이러한 권위의 상실 때문에 많은 목회자들이 딜레마(dilemma)에 빠졌습니다. 어떤 분은 목회를 포기해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의 제자 중의 하나는 “목사님, 제가 처음에는 이러이러한 용기를 가지고 시작했는데 이제는 못하겠습니다. 제가 이것을 버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책망하시지 않겠지요.” 하면서 떠난 사람도 있습니다.

구미 세계에서는 1970년대를 목회자들의 출애굽시대라고도 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주어진 목장을 버리고 다른 일터를 찾아나선 것입니다.

그 한 예로, 카톨릭에서는 1970년대중에 한 해인 일 년 동안에 수녀 500명이 옷을 벗었고 1만명의 신부들이 사직원을 제출했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수천명의 목사가 강단을 떠났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이 성직자로서 권위 상실에서 오는 좌절감 때문이었다고 보도되었습니다.

물론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목회를 하나의 직업처럼 생각하고 아무렇게나 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으나, 성직자가 자기가 섬기는 교회에서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면 훌륭한 목회자가 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직자들이 목회를 포기하게 된 이유는 권위주의에 대한 반항이기도 하고 성직자들을 특종 인간으로 가두어 버리는 사회에서 목회에 대한 반항이기도 합니다.


(2) 영적 체험으로 방어하려는 시도

1970년대에 권위를 상실한 목회자들은 영적 경험으로 자기의 권위를 방어해 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을 권위 상실의 방편으로 채택한 목회자들은 권위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으니 결과적으로는 바람직하지 못한 방법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권위주의로 가장된 영적 체험은 장기간 계속될 수 없었습니다. 밤낮으로 산에 가서 기도하고 영적인 구호를 외쳤으나 그것이 목회자의 권위를 회복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3) 권위의식에 대한 새로운 이해

이러한 권위 상실에 대한 문제 인식을 하면서 많은 목회자들은 옛날의 목회 이해와 오늘날의 목회 이해를 새롭게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현대 교회에서 새로운 권위는 무엇입니까? 지난 날 전통사회에서 권위는 거의 그 직위에 따라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그 개념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것은 주어진 권위를 어떻게 하면 능력있게 다루어 나가느냐는 기능 면에서 권위를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부름받은 교회의 사역자들은 소명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권위가 주어졌다고 믿습니다. 말씀 전하는 권한과 성례전을 집행하는 권한을 부여 받았습니다. 어떤 교단에서는 “축도권을 부여하노라.” 라고도 합니다. 그때에는 목사의 직위가 자동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것입니다. 말씀 선포권과 성례전 집행권, 그리고 축복권은 아무나 행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위임받은 그 일을 감당하는 기능 면에서 권위가 인정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권한과 성례전을 집행하는 권한을 부여받았는데 목회하는 동안에 말씀을 바로 전했느냐, 그리고 성례전을 성경에 말씀대로 뜻있게 집행햐였느냐에 따라서 권위가 인정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잘못되면 아무리 권한이 주어졌다 해도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오늘의 권위는 직위에 따르는 권위가 아니라 내게 주어진 모든 권한을 어떻게 집행하고 수행하느냐, 하는 기능 면에서의 능력입니다. 옛날에는 장관이 임명되면 장관이 바보라도 임명된 그 권한을 가지고 부하들을 호령하고 업무를 집행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다릅니다.

장관이 그만한 권한을 부여받았어도 그 권한을 바르게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훌륭한 장관이라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Ⅲ. 목회자의 권위와 지도력의 관계

1. 섬기는 생활

목회자는 섬김을 받으려는 의식에서 섬기려는 의식으로 전환되는 과감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교회일을 해보면 이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알 것입니다. 목회자가 어떤 결론을 내고 그것을 하자고 하면 그대로 따라야지 그것에 대해서 이유를 대면서 거부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 일반적이며, 명령이 내려졌을 때 신도들은 이유없이 순종하고, 또한 그렇게 운영되는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 예수님의 사역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의 사역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는 세상의 통치자들이 백성을 지배하고 권력으로 피지배자를 내리누르지만 그러나 너희들은 으뜸이 되고자하면 종이 되고 높아지려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나는 목회를 함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허락한 양떼들을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과 섬김으로 대하고 있는가, 아니면 호령과 명령으로 군림하고 있는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로 온 것이 아니며 많은 사람을 위해 나는 대속물로 주러 왔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 사실에 대해서 알고 있고 또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섬기려 하기 보다는 섬김을 받으려는 데 치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목사가 섬김의 기능을 장 발휘할 때 권위는 자연히 주어지게 됩니다.

참된 권위는 섬김의 기능을 수행함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스스로 만들어 군림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 말하기를 “꿩 잡는 것은 매다. 교회가 부흥되고 교인의 숫자가 많아지려면 언제 신자들을 섬기기만 해서 가능하겠는가? 그것은 상황에 부합되지 못하는 이론에 불과하다.” 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존재 양식은 섬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을 섬기는 우리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부흥하고 그 존재 양식에 맞추는 일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목회자의 권위는 맡은 바 섬김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솔직한 의미에서 목회자는 교회라는 조직사회에서 주인입니다. 목회자는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세워진 목회의 전문가입니다. 장로나 집사가 여러 가지 말로 반박해도 목회 전문가는 목회자입니다. 그런데 목회의 전문가인 목회자가 군림하지 않고 섬김으로 그들을 이끌어가고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아무리 지식이 풍부하고 재능이 뛰어난다고 해도 그가  부름받은 소명의 목적을  이탈할 때에는 그 권위는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목회자가 권세에 뜻이 있어서 정치인으로 변신했다고 할때 정치인으로 존경받고 권위를 인정받은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섬기는 목자로 부름받은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섬기는 목자로 부름받은 사람이 다른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돈에 욕심이 있어서 기업가로 변신하여 크게 성공했다 해도 성직자로서의 권위는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저의 한 친구는 신학을 공부하고 미국에 유학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공부를 다 마치지 못하고 세상으로 탈선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돈을 버는 길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집도 사고 좋은 차도 샀습니다.

여러 해 지난 후에 다시 처음의 소명의 길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소련을 들러 한국에 나왔기에 만났습니다. 그는 “당신 단에서 메시지를 전할 수 있소?” 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는 성령이 충만하여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 제가 홍콩에 회의차 가게 되어서 그에게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고서 강단을 맡기고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후 부목사님들이 보고를 하는데 무엇이라고 하느냐하면 그가 강단에 올라가자마자 처음 하는 말이 “한국에서 나만큼 목사로서 돈을 많이 번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라는 것이 그의 첫 번째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마디 하기를 “내가 여기에 와 보니까 미국 시민이 한국의 삼류 식당에서 일을 한다고 하는데 믿어지지 않는다.”라고 했답니다.

예배를 마치고 목사님들이 차를 대접하기 위해서 2층 사무실로 올라 갔습니다. 그런데 성도 중 독실한 신앙인은 아니지만 조그마한 사업을 하는 분이 화가 나서 2층에 따라올라와서는 그에게 대뜸 하는 말이 “당신이 목사요? 아니 목사가  나만큼 책을 많이 폈다거나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거나 교회를 많이 세웠다거나 하는 사람 나와 보라고 하면 이해가 되겠는데 나만큼 돈 많이 번 사람 나와 보라고요? 당신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소? 그리고 한국에서 나이 많이 들고 대학 교수를 하던분도 미국에 가면 청소도 하고 식당에서 일하기도 한다는데 왜 미국 사람이라고 해서 우이 한국의 삼류 식당에서 일할 수 없습니까? 당신 같은 사람은 목사 당장 그만두시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에 그가 단단히 혼이 나고 하는 말이, “이 교회는 성도들이 다 이렇게 비판적이냐?”라고 하면서 돌아갔는데 이분은 결국 목회의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목회자가 변신하여 다른 분야에서 출세해도 그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목회를 다 마치고 은퇴하는 날 매우 기뻤습니다. 성도들이 저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가 목사님에게 무슨 섭섭하게 해드린 일이 있습니까, 라고 해서 그것이 아니라고 말을 하기도 했는데, 저는 목회자로 일생을 일하다가 마지막 순간까지 시무를 끝마친 그것이 기뻤습니다. 목회자로서 외길로 걸어온 그것이 기쁨이었습니다.

한번 목회자가 된 다음에 변신하게 되면 권위를 잃습니다. 아무리 재간이 많아도 변신하면 권위를 상실합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정치인으로 사업가로 변신하여 나중에 가서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우리는 전통적인 권위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해서 현대사회와 교회를 규탄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먼저 종으로서의 자세를 다짐하고 종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며 섬김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야 존경받는 지도자가  됩니다. 이것이 도전받는 권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섬김의 자세가 없이는 신도들의 마음속에서 존경을 이끌어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그리고 그의 제자인 목회자들은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와 똑같이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만일 교회가 자신만을 위해서 존재할 때에는 가치도 생명력도 빛도 다 상실하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의 권위도 인정받지 못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물론 학식도 많이 갖추어야 하겠고 메시지도 훌륭하게 전파해야 하겠으나, 무엇보다도 모든 성도들에게서 권위있는 지도자로서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을 잃어버리면 다른 것을 다 갖추었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지난 1세기 동안 한국 교회는 이 세상에 대해서 참으로 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국민의 생활과 정신력의 고양 그리고 근대화의 촉진, 근대인의 병리성에의 대항, 공산주의 타도 등 참으로 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급속한 교회성장에 비해서 교회의 관심이 점점 식어졌다는 비판의 소리가 높습니다. 새 정부가 들어서고 개혁의 소리가 높을수록 부끄러운 점들이 많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교회가 3만이 넘고, 신도의 수는 천이백 명이나 되며, 가는 곳마다 십자가 천지인데 왜 날이 갈수록 부정 부패가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종교인으로 어떠한 책임을 느끼느냐는 질문에 할 말이 없습니다. 내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그렇게 만든 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양적으로도 팽창하여야 하겠지만 질적으로도 성장하여 목회자의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프린스턴의 교장이었던 존 메케이 박사는 “예수님은 지금도 역사의 최전선에서 성령을 통하여 활동하고 계시는데, 그의 몸인 오늘의 교회는 돌 예배당을 지키는 예배당지기가 되고 말았다.”라고 말하면서 오늘의 현대 교회를 비판하였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창문을 열어야 하며 교회의 지도자들은 세상의 모든 사건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비판을 가하고 해석하여 그것에 대하여 책임있는 처방을 내려야 합니다.

인도의 선교사인 스탠리 존스가 쓴 책에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인도의 어느 궁전 건물을 관람하였는데 그 집은 밖으로 내다볼 수 있는 창문은 한 군데도 없으며 그 집 전체는 유리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상하 좌우가 유리로 되어 있어 그 집에 들어가면 자기모습마 보이고 밖의 일들은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 내용을 기록하면서 스탠리 존스는 교회가 이 세상에 대하여 어떠한 책임을 가져야 할 것인가를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생활을 배우지 않고 실천하지 않는 크리스찬들은 바로 유리집 속에 사는 사람과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 있는 집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 창문으로 늘 밖을 내다보다가 누가 나의 힘을 필요로 하고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가를 발견하여 예수님처럼 가까이 다가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목회자의 권위가 인정되며 자동적으로 교회의 권위 또한 인정되는 것입니다, 그 교회는 목회자 이상을 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생활을 통하여 목회자의 권위는 반드시 보존되어야 합니다.


2. 목회자의 진실성

목회자의 권위를 보존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목회자의 진실성입니다. 이것은 교역자들에게 주어지 과제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역자들은 거짓말을 많이 합니다. 책임을 질 수 없는 말을 많이 합니다. 진실성은 목회자에 대한 신뢰의 표준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해도 그 목사님의 말씀은 거짓이 아닌 참이라고 인정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의 진리 자체에 대해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경의를 표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존경심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몇 해 전에 숙명여대 부활절 예배에 강사로 초빙되어 간 적이 있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간부 학생 12명과 함께 커피를 마시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때 저는 그 학생들에게서 충격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목사님, 우리는 전부 목사의 딸이고 장로의 딸들입니다. 교회에서 성가대도 하고 교사로도 봉사합니다. 그런데 죄송합니다만, 빠르냐 늦느냐 하는 시간의 문제가 남아 있을 뿐 우리는 다 교회를 떠날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대단히 충격적인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너희들은 예수님의 교훈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우리가 목사의 딸이고 장로의 딸이니까 하는 수 없이 성가대에 앉아 노래하고 어린 생명도 가르치고 하지만 강단에서 전해지는 메시지가 전혀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느끼고 있고, 생각하고 있는 문제와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에 대해 반항심을 보이거나 아니면 수긍하는 반응을 일으키거나 해야 하는데 전혀 그것이 되어지지 않으며 그럴 바에야 이 귀한 시간에 교육영화 한 편 보는 것이 더 유익하지 않느냐,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아가씨들이 이야기한 내용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가슴을 쳐도 슬퍼할 줄 모르는 세상을 나무랄 것이 아니라, 피리를 부는 나에게 무슨 이상이 없는가를 겸손히 반성해야 될 것입니다. 아무리 피리 부는 소리가 아름다운 멜로디를 낸다고 해도 피리 부는 사람 자신이 관중들의 눈에 거슬리는 모양을 보여줄 때 그 연주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는 순수한 인간성 그 자체를 은폐하지 말고 인간 자체로 살아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저도 옛날 전도사 때에는 발랄했었는데 목사 안수를 받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많이 달라졌습니다. “나”라는 인간은 그대로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인간으로서 주님의 제자입니다.그러므로 인간성을 어떠한 장식품 속에, 성직이라는 법어 속에 숨기고 스스로를 인간 이상의 자리에 올려 놓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 이상의 자리가 아닌데 자꾸만 인간 이상의 자리에 자신을 올려놓으려 하면 그는 존경을 받을 수 없습니다.

거짓된 것으로 자신을 숨겨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의 생명은 진실성에 있습니다. 물론 목회룰 할 때에 어떤 때에는 정치적인 수완도 있어야 하고 방법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기본적으로 진실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학문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목회를 해보니 사실이 그렇습니다. 내가 진실하지 못할 때 누군가 찾아와서 목사님은 진실하지 못하다고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반응은 곧 돌아서 옵니다. 이것은 바로 느낄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실해야 생각도 표현도 행동도 진실합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같이 말합니다. “내가 이러한 사람이 되고 저러한 사람이 되겠다고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진실해져야 한다.“ 이것이 그가 주장하는 실존 철학의 근거입니다.

20여 년 전에 양성 나환자촌에 가서 집회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계신 목사님께서 저에게 그곳에 와서 집회를 해주기를 부탁했습니다. 저는 나환자가 있는 곳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도 있었지만 한번 가보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허락했습니다.

그곳에 가서 집회를 시작하기 전에 그곳 목사님은 식사 후에 저에게, 내가 하는 말을 그대로 순종해야 한다고 하며 그렇게 하기 싫으면 그대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용인즉, 강단에 올라가서 설교하고 들어간 그대로 뒷문으로 마치고 바로 나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밑에 내려가서 위로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 그들은 생각하기를 또 하나의 위선자가 왔구나,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겁나기도 하는 상황인지라 말한 그대로 잘 지켰습니다. 그런데 나환자들은 나와 마주보고 올 때에, 바라볼 내 쪽에서 불어가면 냄새가 나지 않지만 만일 바람이 내 쪽으로 불어오면 그들이 피하여 갑니다. 참으로 지혜롭고 정직한 모습이었습니다.

5일간의 집회를 마치고 난 다음, 이제 짐을 싸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는데 이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작년 이맘때에 어떤 분이 와서 집회를 했는데 저와 똑같은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나환자의 생리를 이야기하고 그대로 해줄 것을 약속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강단에 올라가서는 몇 마디 말씀을 하고는 밑에 내려가서 안수 기도를 한다고 야단을 하고는 집으로 돌아와서는 문둥병이 옮지 않았나 걱정이 되어 약물로 닦곤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3일을 하면서 집회 마지막 날이 되었는데 그는 설교 도중에, “나는 우리집에 거지가 오면 쌀 한 톨 주거나 돈 한푼 주어 보내지 않고 반드시 내 안방에 데리고 와서 나하고 겸상을 하여 먹고 기도하고 보냅니다.” 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나 환자들은 그를 위선자라고 생각했는데 통곡을 하면서 이렇게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어디 있느냐며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실로 만족할 만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난 후 1년쯤 지나서 이들은 양성환자이기 때문에 둘씩 깡통을 들고 여기저기 다니다가 우연히 이분의 동네에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곳에 갔는데 우리에게 은혜를 끼치고 갔던 그분이 사는 동네라는 것을 한 사람이 생각해 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에게 약속하기를, 절대로 우리는 들어오라고 해도 들어가서 폐를 끼치지 말고 그저 인사만 하고 가자고 했습니다.

드디어 그 집에 이르러 벨을 눌렀습니다. 그가 차라리 집에 있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는데 마침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와서 거지 문둥이 두 사람의 인사에 문을 꽝 닫으면서 재수없게 아침부터 거지 문둥이들이 괴롭힌다고 욕을 하면서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 두 사람은 그분이 이렇게 할 분이 아닌데 무엇인가 잘못되었을 것이라며 다시 문패를 보았습니다. 이 두 사람은 가면서 이 사실에 대해서 정대로 발설하지 말자며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렇습니까? 가서 한마디 하자마자 모든 것이 퍼져 나갔습니다.

이것은 단적으로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사람의 허물을 들추어 내자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나도 그렇게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가 일생을 목회자로 살아가면서 참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일을 하려면 적어도 진실해야 합니다.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 같은데 이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논문은 책을 몇 권 읽고 쓸 수 있지만 진실성이라는 것은 영성 훈련이 잘 되고 그리스도를 닮지 않고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 없이는 우리의 성공은 보장될 수 없습니다.

요즈음은 사회니 국가니 세계니 하는 전체라는 용어가 유행하여 개체의 진실성이 다 망각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대중 속에 숨어서 몰래 행동하다가 무슨 수가 날 듯하면 나가서 자기가 했다고 하고, 또 자기에게 무슨 손해가 날 듯하면 뒷문으로 살짝 새버립니다. 이것이 요령있는 현대인의 처세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도자에게 진실의 꽃은 영원히 피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의 십자가를 지고 주의 뒤를 따르지 않고 아무렇게나 말하고 아무렇게나 행동한다면 어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네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진실하고 깨끗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목회는 진실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다른 재주는 부족해도 진실성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진실성은 목회자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수완과 방법으로 목회에 성공하는 예도 있지만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면 결국 실패하고 열매를 거두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목회자를 만나면 숨이 막히는 것 같다느니, 사나운 시어머니 앞에 선 것 같다느니 하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목회자가 되면 젊은 사람이라도 젊은 늙은이가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권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신학교에 있을 때 제천에 있는 후배가 목회하는 교회에 가서 집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졸업한 전도사들이 낮 성경공부 시간에 많이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낮 공부가 끝나고 제가 쉬는 방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작년에 졸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음성도 변했고, 태도도 변했고, 모든 행동이 변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문간에 들어오면서부터 이상하게 굴더니 “정 목사 왔나! 이번에 정 목사 수고하는 구먼.” 하는 것입니다. 어이가 없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못난 교수지만 4년이나 가르쳤는데 이놈이 들어오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가 나서 다들 돌아간 다음에 그를 불러서 연유를 물었더니 무릎을 꿇고는 용서해 달라고 하면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강원도 농촌에 갔는데 젊은 사람이 가니까 상대를 안 해줍니다. 어떻게라도 농촌사람들과 상대를 해야만 대화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한번은 나이 많은 목사님을 찾아가 상담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노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오늘부터 음성을 바꾸고 수염을 기른 다음 웬만한 사람과는 상대하지도 말고 면장이 오더라도 말도 좀 놓고 하면 권위를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듣고는 그럴 듯하여 그대로 따라 했다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이해는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바탕이 그렇게 되면 훌륭한 목회자가 될 수 없습니다. 목회자는 모름지기 목사 이전에 좋은 신자가 되어야 하며, 또한 신자 이전에 좋은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3. 목회자의 주체의식

목회자의 권위와 지도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세상과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세상 안에 있고 세상을 위해서 있다고 하면서 세상과 타협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역설적인 이야기 입니까? 그러나 바울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본받지 말라는 것은 변천하는 세상 것에 동화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똑같이 먹고 입고 살면서도 그들에게 동화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된 교회란 사실상 ‘싸우는 교회(militant church)'입니다. 만약 교회가 세상이 하자는 대로 따라한다면 그것은 이미 교회가 세상과 싸움을 그치고 세상풍조를 마구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생명을 잃고 무기력해지며 타락하고 맙니다.

성직자라고 해도 이 세상을 떠나서는 하루도 생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직자는 이 세상풍조에 동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 흉내를 내서는 안 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나를 증명할 카드를 내놓으라고 할 때에 여러분은 무슨 카드를 내놓겠습니까? 세상에서와 같이 자신을 증명할 카드를 내놓으라 할 때에 운전면허증을 내놓고 주민등록증을 내놓겠습니까? 세상과 똑같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직자가 주체성을 잃어버리면 결국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되고 맙니다. 이 세상은 종교지도자에 대해서 자기를 본받고 따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서 세상에 완전히 동화된 다음에는 성직자도 별것 아니구나, 하고 차버립니다.

제가 뼈저리게 경험한 예화를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저는 1972년에 방송 윤리 위원이었습니다. 그때 방송윤리는 법의 규제 없이 자유스러운 때였습니다. 모니터들이 잡아낸 것 중에서 종교계를 모독한 것이 있으면 종교계 사람들과 가서 그들을 책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회의를 끝내고 조선호텔 앞에 미조리라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식당은 낮에는 대중식당으로서 식사를 팔았는데 저녁땐 달랐습니다. 저녁식사를 하는데 10여 명 중에 크리스찬은 저 혼자뿐이었습니다.

우리가 이층에 올라갔는데 완전히 달랐습니다. 홀이 하나 있는데 어디서 왔는지 아름다운 미인 10여 명이 나와서는 위원들 옆에 하나씩 앉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는데 먼저 술을 마시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며 나는 목사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목사라도 현대 감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방송위원이 되어가지고 술 한잔 못 먹으면 되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에 신자는 없지만 신자에게는 술마시지 말라고 해놓고서는 내가 술마시면 되겠느냐고 하면서 사이다 아니면 콜라를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술을 입에 대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30분 후에 자기들도 모르게 만취가 되는 것입니다.그리고는 자기네들끼리 이야기하기를, “암, 그래야지. 성직자라는 자가 좀 다른 데가 있어야지. 작년 이맘때 여기에서 세미나를  할 때 어느 목사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술주정을 하기도 했는데 그게 무슨 목사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 만약 제가 아무도 없는데 현대 감각을 찾는다면서 술 한잔 받아 마셨더라면 어쩔 뻔하였습니까?

그때 저는 깊이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소금이다.’ 말한 것이 무슨 말이냐.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 아니냐.” 그래서 그후부터는 젊은 목사를 만나면 이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목회자들이 자기네들에게 동화되기를 바라면서 동화된 다음에는 차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적인 요구에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무엇보다도 떳떳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군대에 가면 기독장교회가 있는데 거기에는 참으로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는 크리스찬이다, 라고 보고하는 사람은 몇 천 명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 나머지가 밝히지 않는 이유는 밝히면 시끄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식사할 때든지 기도하게 될 그때에서야 기독교인임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배는 산꼭대기에 앉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바다 위에 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배 밑창에 구멍이 나면 물이 들어와서 배가 가라앉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아 헌신하는 성직자가 되었으나 잘 다스리지 않아 배 밑창에 구멍이 나서 물이 들어오게 된다면 낭패입니다. 평생을 바쳐서 일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신하여 행해야 되겠습니다.

어떤 실천신학자는 말하기를, 교회를 섬기다가 물질 문제로 교역자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면 그 교회를 떠나야 하며 이성 문제로 문제가 커지면 목회를 그만두는 것이 양심적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함부로 자유에 방임해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가 세상과 타협하지 말아야 하는 또다른 이유는 세상과 하나님은 겸해서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설교하면서 스스로 두 주인을 섬기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나님만을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주인도 섬기고 있습니다.

물리학에 ‘불가입성의 법칙’이 있습니다. 즉 한 공간을 같은 시간에 두 물체가 점령할 수 없다는 이론입니다. 예를들어, 병 속에 물을 넣으면 물이 들어가기 전에 병 속에 있던 모든 공기가 빠져나오는 원리입니다. 즉 병 속에 물과 공기가 한꺼번에 동시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헌신한 사람들은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비록 가난하고 괴롭고 어려워도 외길을 가야 합니다. 그것만이 사는 길입니다.

이 세상과 타협해서는 안 될 또 다른 이유는 세상도 그 속에 있는 정욕도 다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시국을 보게 되면 그것이 더욱 확실해집니다. 사도 요한도 바울도 똑같이 말씀 하였습니다. 세상의 행적은 지나가 버리고 보이는 것은 잠깐이라고 했습니다. 개인의 행적도 역사의 흔적도 문명의 흔적도 권세의 흔적도 영광의 자랑도 사상도 이데올로기도 다 지나갑니다.

우리는 이렇게 세계 질서가 재편되고 역사가 바뀌고 변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나가는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역자들이 솔선수범하여 우리가 먼저 앞 장서야 합니다.


4. 겸손한 배움의 자세

우리 목회자가 권위를 유지하는 또 다른 태도는 겸손한 배움의 자세입니다, 배우는 데 인색할 필요는 없습니다. 목회자는 배우는 데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배우는 자를 가리켜 학생이라고 합니다. 중 고 대학생만을 가리켜 학생이라고 합니까? 사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인생을 평생 학생으로 살아야 됩니다.

이 세상은 학교와 같습니다. 나면서 입학하고 죽으면서 졸업합니다. 세상 사람도 그렇게 하는데 정신계를 지도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배우는 데 겸손하지 않고 게으르면 세상에서 뒤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로 목회자들은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아는 것이 힘입니다. 지식이 인생의 무기입니다. 산다는 것은 힘이요. 지식은 인생의 무기라고 했습니다.

목회자는 평생을 배워야 합니다. 격변하는 세상에서 공부하지 않으면 우리는 사회적 적응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새로운 지식. 기술.이론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데 이러한 지식의 폭발 속에 사는 우리가 배우지 않고서 어떻게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목회자가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세계에서 한국교회의 목회자처럼 교회의 성장에 전력을 바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한 목회자는 다른 나라에 없습니다. 우리나라 뿐입니다. 실로 좋은 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전력을 쏟다 보니까 뒤에 가서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배워야 할 시기에 배우지 못하고 머릿속에 채워야 할 지식이 텅비게 됨으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20년마다 지식의 양이 배로 증가합니다. 10년만 지나면 현재의 지식은 낡은 지식이 되고 맙니다. 새 시대에 창조적으로 적응하려면 우리는 배우고 연구해야 합니다. 목회자가 배우기를 게을리하면  ‘조로증(早老症)’에 걸리고 맙니다. 일찍 늙어 버립니다.

목회자가 부단히 새 지식을 흡수하지 못하면 우물우물하는 시간에 목회적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정열, 시간을 다 교회성장에 바치다보니 일의 분량은 많아지고 시간적 여유는 감소되고 서재와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어 머리는 비게 되고, 가슴은 냉랭하게 차가워져 결국 목회적 힘을 상실하게 됩니다.

목회는 기쁜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소명감으로 매일매일 즐겁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구비되지 않고 노력하여 얻어지지 못하면 억지로 하게 됩니다.

억지로 하는 목회는 참으로 힘이 듭니다. 목회자가 가진 자산이 있어서 넉넉하게 살기를 합니까? 억지로 하는 목회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렇게 될 때 목회자는 자신의 주변 정리에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은혜의 감격도 잃어버리게 되고 영감이나 사상적인 내용도 없는 설교만을 반복하고 케케묵은 사고와 생활의 때를 벗지 못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폐물이 되고맙니다. 그러면 나는 보수다, 정통이다 하면서 이것을 보신책으로 내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의 부족을 은폐하려 합니다. 현재 자기의 위치 보존에 수단을 가리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목회자의 본연의 자세가 아닙니다.

이러한 방편으로 방언의 은사를 내세우고 신유의 은사를 내세우고 금식도 내세우고 예언도 내세우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은사들은 참으로 좋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편으로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것들은 자기방어의 수단은 될지 모르나 지속적인 목회의 정도는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 교회는 이혼 소동이 벌어지에 됩니다. 교회의 이혼을 여러분은 잘 알 것입니다. 교회의 나누어짐입니다. 신부는 세상에 가서 날로날로 젊어지는데 신랑만 일방적으로 늙어가면 가정의 평안이 깨어질것이 아니겠습니까? 가정의 행복이 깨어집니다.

신부들은 국회의원이나 사회적 요직에서 주도적이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데 자기 교회 목사는 구태의연한 태도로 발전 없이 머물러 있다면, 그 안에 참된 관계는 깨어지게 되고 급기야는 나누어지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큰 문제는 나갈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헤어질 수 없다. 다 나가도 나는 나갈수 없다. 나와 교회당만 있으면 된다, 라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5. 신명을 바치는 목회

우리는 특별한 뜻을 가지고 나를 붙잡으신 주님 한 분 이외에 어떤 것에도 붙잡혀서는 안 됩니다. 주님만을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다. 신명을 바쳐서 한 가지 일에 책임을 지는 목회를 해야 합니다.

“코카콜라가 어떻게 해서 세계 시장을 점령했습니까?” 하는 질문에 코카콜라 사장은 “내 혈관 속에는 피가 돌지 않고 코카콜라가 돌고 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만큼 그가 회사를 일으키는 데 정력을 쏟고 마음을 다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목회할 때 목회하는 교회와 주님만을 위해서 우리의 생애 전체를 바쳐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 붙잡힌 이후에 바보스러울 정도로 다른 일에는 무관심했고 철저하게 다른 일과 자신을 차단시켰습니다. 그는 한 가지의 목표, 주님께서 제시한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환경도 초월하고 자신도 초월하고 생사를 초월해서 주님만을 만족하게 했습니다.

이처럼 신명을 다 바쳐서 목회한다면 반드시 효과가 있다고 봅니다. 이 방법을 써서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써 보고 우리가 목회하는 동네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과학적으로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목회를 해야 합니다.

저는 공주에서 처음 목회를 시작하였는데 양반의 규례를 철저히 지키는 동네인지라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읍사무소를 찾아가서 주지 않겠다는 것을 사정해서 그곳의 모든 인구 분포와 상황, 그리고 중요 건물 등 모든 것을 조사했습니다.

결국에 얻은 것이 있었습니다. 음력 초하루에 저는 양반의 풍습 그대로를 고수하는 동네의 우두머리쯤 되어 보이는 분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어느 교회에 새로 부임해온 전도사인데 찾아뵙지 못하다가 명일이 되어서야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하고는 깍듯이 절을 했습니다.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저 인사만 하고 왔습니다.

2주일 후에 공주 읍네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내용인즉, 신사자리에 있는 조그마한 교회의 전도사인지 누구인지 하는 젊은이가 싹수가 있더라, 우리는 못 나가지만 우리 애들은 보내도 괜찮겠더라,는 소문이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중․고등학생들을 교회에 불러다 무슨 일을 해도 그들은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지혜도 필요합니다. 자기에게 부여된 목장에서 그곳에 있는 동안에는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무엇인가를 만들어 놓아야만 후에 당신이 어느 곳에 가서 최선의 목회를 했으니 여기 와도 좋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가는 현장이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엉망으로 해놓으면 그것이 계속해서 따라다니게 됩니다. 우리는 한 가지 일에 신명을 다해야 합니다.


Ⅳ.결론: 투철한 목회철학

목회자는 분명한 목회철학을 가져야 합니다. 모회자의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주체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첫째, 절대로 좌우로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누가 칭찬해주거나 아천하거나 또한 누가 나를 나무란다고 해서 비굴해져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는 뚜렷이 목회자로서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제 길을 가야 합니다.

둘째, 조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현대인들이 왜 그렇게 조급한지 모르겠습니다. 소위 요즈음의 성공주의라는 것은 세속주의 개념입니다. 동양 최대의 교회를 만든다, 세계제일의 교회를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날마다 최선의 노력을 해서 되어지면 그때에 가서 빛을 보는 것이지, 자꾸 선전하는 것은 좋지 못합니다. 이것은 물량주의입니다. 그리고 내가 다 하겠다는 것은 욕심입니다. 역사에는 단절이 없습니다. 역사는 강물처럼 유유히 흘러갑니다. 거기에 가라지도 자라고 알곡도 자라서 함께 갑니다. 세상에 단절은 없습니다. 목회자는 조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조화있는 목회를 철학으로 가져야 합니다.

사상적으로도 교회 안에는 보수와 진보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역사에 대한 조명도 되고 또한 미래지향적인 발전도 있습니다. 선교를 구조적으로 볼 때에도 모이고 흩어지는 조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양과 질적인 조화도 필요합니다.

넷째, 포용력있는 인간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제거하는 것은 인간관계입니다. 교회에서 교리를 가지고 싸워서 문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의 목회자와 신자 사이의 인간관계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목회자는 이유를 불문하고 포용력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리 나이가 많은 장로님이라도 내 양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목자가 양과 맞서서 싸우겠습니까? 싸울 수 없습니다. 자부심이 필요합니다. 내 양들과 나는 절대로 싸우지 않는다, 양들을 돌아볼 책임이 나에게 있다, 라고 하는 이것이 바로 포용력입니다.

다섯째, 긍정적인 사고와 진취적인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안 된다거나 못한다는 말을 없애고 반드시 된다고 하는 미래지향적인 목회를 할 때에 신령한 것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을 개발하는 데도 참으로 도움이 됩니다.

여섯째, 민주적으로 행정을 해야 합니다.

민주적으로 행정할 때에는 결정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고 집행 기능이 약해지기 때문에 신속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답답해집니다. 그러나 당회를 통과하고 다른 기관을 언제 통과하느냐 하여 그대로 밀고나가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답답하게 진행된다하더라도 민주적이어야 합니다.

계획을 세우고 제안과 의결 사이에 시간적인 여유를 언제나 두시기바랍니다. 그래서 당회가있는 교회는 만장일치제가 좋습니다. 반대가 있으면 조금 있다가 하자고 해서 반대하는 사람이 하자고 앞장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좋게 됩니다.

민주적인 행정은 강요 없이 성도들의 자발적인 참여 의식을 기를 수있기 때문에 좋고, 또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체가 되어도 민주적으로 키운 교회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성도들 모두가 맡아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맡아 하면 그 사람이 없어지고 그 리더십이 없어지면 그때는 와르르 무너지고 맙니다. 목회는 목회자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므로 민주적으로 해야 합니다.

일곱째, 권위주의는 버려야 하지만 권위는 생명처럼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목회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권위있는 목회자가 되자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유는 목회자가 권위를 잃게 되면 그 시간부터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목회자는 모든 성도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잃게 됩니다.

냉정히 말해서 우리 목회자는 가시적인 구속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목회자를 괴롭히더라도 그를 잡아서 유치장에 가두거나 체벌을 가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어떠한 구속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구속력을 가질 수 있습니까? 높은 인격과 진실성을 바탕으로 한 권위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목회자에게 권위가 필요합니다. 만일 목회자가 권위를 잃어 버리면 천사의 방언을 해도, 기사와 이적을 행해도, 은사가 있어도 오래 가지를 못합니다.

권위를 상실하게 되면 결국 자기의 주변 정리에 대한 능력마저 상실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다른 것이 조금 부족해도 섬김과 진실의 정신으로 권위를 반드시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 권위있는 목회자가 되어서 성도들에게 존경받고 자연스러운 지도력을 발휘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승리하시는 목회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예수중심 JESUS CENTERED
글쓴이 : 동순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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