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우리의 생명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요6:63,7:39,10:10,11:25,26, 요한일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교회 예배당 앞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요한복음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은 우리의 생명이다. 그리스도는 말씀이기에 생명이다. 그리스도는 영으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기에 생명이다. 곧 그리스도의 영이 생명이다. 또 그리스도는 사랑이기에 생명이다. 그 사랑은 영원하기에 영생이다.
그리스도의 영(성령)은 오시어 말씀으로 우리를 십자가의 사랑 가운데 인도하신다. 그런데도 우리 안에 남아있는 죄의 본성은 이 생명보다 더 선악을 보게 하고 옳고 그름을 붙잡게 한다. 아무리 옳아도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으면 내적 평강은 없다.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어떻게 말씀하시고 느끼게 하시는가? 그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늘 겉 사람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악과 옳고 그름의 율법 속에 갇히어 그리스도의 생명을 놓치기 쉽다. 그래서 늘 사람과 세상을 볼 때에도 선악과 옳고 그름의 잣대로만 생각하고 평가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은 선악을 옳고 그름을 초월한다. 곧 율법을 초월한다.
변화산에서 베드로는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를 만났다(마태복음 17장). 모세는 율법의 대표요,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이다. 감격하여 베드로는 '여기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해 또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한다. 그 때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모세와 엘리야가 아니다. 저의 말 곧 예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의 말씀만이 생명이 된다. 율법과 옳고 그름을 초월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생명이다. 생기는 그 사랑을 영으로 전하신다. 우리를 영으로 감싸 안으신다. 율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구원을 사랑으로 이루신 분이 그리스도이시다. 우린 모두 율법으로 보면 다 죽은 자들이다. 율법 안에서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곧 십자가 사건이다. 십자가 앞에서 우린 다시 살아났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가진 죄의 본성들은 부인되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특징은 진리요. 사랑이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생기를 받을 수 없다(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 비유). 이 사랑의 생기를 받은 것이 구원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의 특징은 사랑으로 나타난다. 그 사랑은 자신을 부정하는 사랑이다.
우린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율법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행하려고 한다.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양----그러나 하나님은 생각은 그것이 아니다. 율법과 선악을 뛰어넘는 사랑이다. 곧 그리스도의 생명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이다. 진리 가운데 있는 존재다. 십자가의 도를 깨닫게 된 사람이다. 아직도 율법에 매여 있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왼쪽 빰을 때리면 오른쪽 빰을 또 대 주라고 한다. 그것은 왼쪽 빰을 맞아도 그를 보복하지 않고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는 자만이 오른쪽 빰도 대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율법으로 본다면 남의 빰을 때리는 것은 잘못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자면 오른쪽 빰을 대줄 수 없다.
위치만 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이야기하는데 이런 예를 든다. 어떤 농부가 논을 가지고 있는데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자신의 논에다 대어 놓는다. 그런데 그 논 밑에 다른 사람의 논이 있다. 밤에 물을 가득 논에 대주고 집에 가면 밑에 있는 논을 가진 농부가 와서 구멍을 내어 자기 논으로 물이 들어오게 한다. 그래서 오후에 가보면 자기 논은 언제나 텅텅 비어 있었다. 아래 논에는 물이 가득 차 있는데----그래도 참았다. 내가 그리스도인인데---참아야지----그런데 내적인 평강이 없다. 이 그리스도인은 물을 빼앗김에도 그것이 옳고 그름을 따지자면 자신이 옳음에도 또한 참아주는 것도 선한 것인데도 마음에 평안이 없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평안을 주지 않는다. 왜 그럴까? 내가 이렇게 참아주는데----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은 더 이상을 요구하셨다. 그것은 무엇인가?
어느날 농부는 밤에 자기 논에 물을 대기 전에 먼저 아래 논부터 물을 대고 그리고 자신의 논에 물을 대었다. 그랬더니 마음에 평강이 왔다. 그 다음 날도 그랬다. 3일이 못되어 아래 논의 농부가 찾아왔다. '미안합니다. 이렇게 까지 생각해 주시니---당신이 믿는 예수를 저도 믿어 볼랍니다' 이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우리가 선악을 옳고 그름을 구별하여 선과 옳음을 택했어도 만족하지 않으신다. 그것을 뛰어넘는 사랑의 생명가운데 걸어가길 원하신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에덴에서 하나님은 선악과는 따 먹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생명나무는 언제든지 얼마든지 따 먹으라고 하셨다. 선악과를 따먹고 생명나무로 나가는 길이 막혔다.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생명나무로 나가는 길이 열렸다고 한다. 그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분이 생명이기 때문이다.그 분만이 살 길이요. 진리요,생기이시다.
오늘의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옳고 그름을 뛰어 넘어야 한다. 그 정도로 만족하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답답해 하신다. 평안이 없다. 왜? 그리스도의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뛰어넘은 것은 그 수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율법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다. 옳고 그름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마땅히 옳고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수준을 하나님은 원하신다.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사랑을 절대화해서는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하나님이 절대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 없이도 사랑만 하면 그것이 예수를 믿는 것과 같다라고 한다든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예수 없이 사랑을 절대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논리로 부처도 자비가 있으니 하나님의 아들이요, 마호멧트도 하나님의 아들이요. 공자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안된다. 그 안에 구원이 있다고 하면 성경과 하나님을 너무도 모르는 것이다.
누가 그리스도인인가?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가?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가? 그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사람은 늘 그리스도와 교제 속에 있다. 그 때만이 생명의 생기를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이 그리스도를 찬양할 수 있다. 그 분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 2006년 9월 12일 새벽기도를 마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