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의 로마서 서문
마르틴 루터의 로마서 서문 (존 웨슬레가 올더스케이트에서 이 글을 읽는 소리를 듣고 회심한 것임)
이 서문은 진실로 신약에서 가장 중요한 문헌으로서 복음을 가장 순수하게 표현하고 있는
책이다. 이 서신은 그리스도인이 시간을 들여서 한 단어 한 단어를 마음 속에 새겨둘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날마다 묵상할 가치도 있다. 이 서신은 영혼의 일용할 양식이며 아무리 자주 읽거나 많이 연구한다해도 결코 지나칠 수 없다. 당신이 이 서신을 더 많이 탐구하면 할수록 이 서신은 보다 더 귀하게 되며 그 향기가 더 좋아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신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서 이 서문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서신을 가장 좋은 방식으로 이해 할 수 있게 할 안내의 글이 되도록 할 것이다.
당신은 비록 법률을 마음으로부터 순종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명령하고 있는 것을 겉으로 행함으로써 지킨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내면의 확신들을 따라 판단하신다. 하나님의 율법은 바로 당신의 마음 속에서 성취되어야 합니다. 시편116:11은 모든 사람들이 다 거짓말쟁이라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아무도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겉보기에 우리가 많은 미덕들을 행하고 영예로운 삶을 살고 있는 듯이 보일지라도 죄가 들어오고 하나님의 진노가 불러일으켜진다.
그러므로 로마서2장에서 바울은 유대인들 모두를 죄인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율법을 지키는 자들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말하지만 그가 말하려는 요지는 아무도 율법을 “행위”를 통하여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7장에서 바울이 율법을 영적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율법이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라면 우리의 행위는 그 요구를 충족시켜야 할 것이기 때문에 영적이다. 하지만 율법이 영적이기 때문에 당신이 행하는 모든 것이 당신의 내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다면 아무도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율법이 명하는 것을 행하는 것과 율법을 성취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생각에 익숙해져야 한다. 사람이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와 힘으로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율법에 의해 요구된 행위들을 행하는 것이다.
성령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집니다. 마찬가지로 믿음 자체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 복음을 통해서만 온다.
우리는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며 율법을 성취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 얻어진 영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영은 우리에게 율법이 목표하고있는 행복과 자유를 준다. 그리고 이것은 선행이 진실로 믿음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울이 율법의 행위를 정죄한 후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성취한다고 말하고 있는 3장31절의 의미이다.
성경에서 ‘죄’라는 단어는 우리의 육체적 행위에 행해진 외적 행위 이상의 것들을 의미한다. 그것은 행위와 관련된 모든 상황들을 의미한다. 특히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작용하는 충동들 , 또한 이것은 “행함”이라는 단일한 용어가 사람이 완전히 굴복하여 죄로 떨어지는 경우를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적으로 아무것도 행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여전히 몸과 영혼의 완전한 파멸에 떨어져 있을 수 있다.
특히 성경은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보며 모든 죄의 뿌리이자 근원인 즉,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의 불신앙을 바라본다. 믿음만이 우리에게 명백하게 선한 행위들을 행하고자 하는 영과 소원을 주듯이 불신앙은 죄의 유일한 원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불신앙을 따로 지적하여 그것을 죄라고 불렀다. 요한복음16장에서 그리스도는 영이 와서“ 죄에 대하여 세상을 심판할 것인데.....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말한다.
은혜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선택에 의해 우리를 향하여 지니시는 인자 또는 호의이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꺼히 그리스도를 주고 우리 위에 성령과 하나님의 축복을 부어주신다고 할 때 은혜와 은사는 서로 다르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은사와 영을 날마다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할지라도 오히려 그것들은 부족하다.
왜냐하면 바울이 로마서 7장14-23과 갈라디아서5장17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옛 욕망들과 죄악들이 여전히 우리 속에 아른거리며 영에 대항하여 싸우기 때문이다.
믿음은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에 상응하는 체험을 갖고 있지 않은 한 한낱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며 더 나은 삶을 가져오지도 못한다. 하지만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일으키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우리를 변화시키며,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난다.-- 요한복음1장13절 믿음은 옛 아담을 죽이고 우리를 마음과 생각과 우리의 모든 힘에 있어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믿음은 성령이 동반된다. 오, 믿음에 이르게 되면 그것은 얼마나 생생하고 창조적이고 적극적이고 강력한 것인지, 믿음은 내내 좋은 것 외에 다른 것을 행할 수가 없다.
믿음은 결코 행해야할 선행이 어디 있느냐고 묻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질문이 던져지기 전에 선행을 이미 행하고 계속해서 선행을 행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활동적이 되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살아있고 흔들림없는 신뢰이자 신앙인데 그것이 너무나 확고하기 때문에 사람은 믿음을 인하여 천번이라도 죽을 수 있다. 이런 유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 이런 유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를 기쁘고 활기차게 만들며 하나님 및 모든 인류와의 관계에서 열심을 내도록 만든다. 이것이 성령이 믿음을 통하여 역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어디에서 무엇에 내몰려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쁘게 모든 사람들에게 선행을 하고 모든 사람을 섬기며 자기에게 그러한 은혜를 보여 주었던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을 위하여 온갖 종류의 곤경을 겪고자 한다.
“육”이라는 용어는 사고와 사실에 있어서 몸과 현세의 삶에 살아가며 수고하는 사람에게 적용된다. “영”이라는 용어는 영과 내세의 삶에 봉사하며 살아가며 수고하는 사람에게 적용된다.
복음을 설교하는 자의 첫 번째 의무는 하나님의 율법을 선포하고 죄의 본질을 기술하는 것이다. 영으로부터 나오지 않거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결과로서 경험되지 않는 모든 것은 죄악된 것이다. 설교자의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의 모습과 그들의 통탄스러운 상태를 보여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겸손히 도움을 간청하게 만들어야 한다.
1장에서는 당시 몇몇 중대한 죄들과 불의들을 정죄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이교도들의 죄악들이었고 여전히 지금도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동떨어져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의 불경건함과 악함으로 인하여 하늘로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고, 날마다 인정하지만 은혜로부터 떨어진 인간의 본성은 그 자체가 너무나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거나 예배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본성은 눈이 멀어서 끊임없이 악으로 떨어진다. 그 결과 거짓된 우상들을 섬기는 것에 더하여 불미스러운 죄들과 온갖 종류의 악을 범하게 된다.
2장에서 바울은 이러한 벌들을 확장에서 겉으로 보기에 경건해 보이지만 은밀하게 죄들을 범하는 사람들에게 적용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고, 또한 그러한 사람들은 위선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쁨과 사랑없이 살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음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미워하고, 모든 위선자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은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한다. 그들은 시기, 증오, 교만, 온갖 종류의 부도덕으로 가득 차 있지만 스스로를 흠없는 것으로 여긴다. 마23:28 이들은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멸시하는 사람들로서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다. 그러므로 성 바울은 율법의 참된 설교자로서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단언한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자신의 본성이나 터무니없는 공상에 따라 살아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내릴 것이라고 선언한다.그는 그들을 완악하며 회개치 않는 자들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3장에서는 둘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이라고 한다. 더욱이 비록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율법의 요구 사항들을 성취함을 통하여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율법은 단지 죄의 본질을 보여 주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후에 그는 경건하고 거룩하게 되는 올바른 방식에 관한 저자 자신의 가르침을 정교하게 제시한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며 아무도 하나님에 의해 시인을 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아무런 공로없이 올 수 있을 따름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를 통하여 우리를 위하여 구원을 얻었다. 우리를 위하여 그 분은 하나님의 ‘속죄소’가 되었고,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과거에 범했던 모든 죄들을 사하신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은 믿음을 매개로 하여 수여하는 자신의 의만이 우리의 유일한 살길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복음이 설교될 때 이 의를 나타내신다. 그러나 율법과 선지자는 이미 그 복음을 증언하였었다. 그러므로 믿음은 율법에 따라 행해진 행위들을 폐기하고 그 행위들에게 돌려지는 존중을 부인하지만 율법을 지지한다.
4장에서 바울은 믿음이 행위와는 상관없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것을 듣고서 그렇다면 선행을 할 필요가 과연 있는 것이냐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아브라함의 할례와 마찬가지로 그 선행들은 단지 그의 의가 그의 믿음 안에 담겨져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외적인 표지일 분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선행을 단순히 그리고 전적으로 외적인 표지라고 이해하여야 한다. 선행들은 믿음으로부터 나오며, 좋은 열매와 마찬가지로 사람 자체는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 마음에서 의롭다는 것을 입증한다.
5장에서 바울은 믿음이 가져오는 열매 또는 행위에 도달한다. 그러한 것들은 평안, 기쁨,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이에 더하여 슬픔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확신, 용기, 신뢰, 소망이다. 믿음이 자리를 잡고 있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넘쳐흐르는 선의로 인하여 이런 유의 모든 것들이 수반된다.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기도 속에서 중보기도할 수 있기 전에는 물론이고 우리가 여전히 원수되었을 때조차도 죽음을 겪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행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도출해서는 안되겠지만 믿음은 행위와는 상관없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고 주장한다.
율법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더욱 필요하게 만들고 우리의 본성을 구할 은혜에 대한 필요성을 증대시킨다.
6장에서 바울은 믿음의 특별한 기능을 논한다. 육에 대항하여 싸우는 영의 싸움으로써 우리의 칭의 후에도 살아남아 있는 죄와 정욕들을 마침내 철처하게 죽이게 된다. 그는 믿음은 우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느슨해져서 나태와 자기 확신에 빠져 있게 되면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킬 수 없다고 가르친다. 죄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믿음으로 인하여 죄와의 싸움은 우리를 정죄로 이끌지는 않는다.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하여 우리의 몸을 길들이고 몸의 정욕을 죽이며 그 지체들을 통제하는 일을 그것들이 정욕이 아니라 영에 순종할 때까지 계속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하나가 되고 우리의 세례의 의미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자기 훈련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세례는 또한 죄의 죽음과 은혜의 새로운 삶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최종적인 목표는 우리가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몸으로 부활하여 영원히 사는 것이다.
7장에서 바울은 죄와 율법의 본질에 관하여 폭넓게 설명해 나가면서 오직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는 실제로 살아나고 강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옛 자기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될 때 율법에 대하여 더 적대적이 된다. 옛 자기의 본성은 죄악된 것이며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 자기에게 율법은 죽음과 모든 죽음의 고통을 의미한다. 이것은 율법이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악한 본성이 선함, 율법에 요구하는 선함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생각나게 하고 죄들을 사용하여 우리를 죽이며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진노를 받기 쉽게 만든다고 단언한다. 우리가 율법을 정면으로 만날 대 이 모든 것을 우리의 양심은 경험을 통해 철처하게 배운다.
육과 영이 우리의 마음 속에서 서로 다투는지를 설명한다. 그는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내재하는 죄를 죽여야 하는지를 적절하게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의 예로 든다. 육은 영에 대항하여 싸우며 사납게 날뛰고 자기 자신의 길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영은 육에 대항하여 싸우며 자기 자신의 길을 고집한다.
우리는 완전히 영적으로 될 때까지 우리 자신과 싸운다.
8장에서 바울은 이러한 싸움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면서 육은 그들을 정죄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또는 그는 육과 영의 본질을 보여주고 영이 우리에게 자신의 성령을 주시는 그리스도로부터 온다는 것을 설명한다. 이것은 우리를 영적으로 만들며 육에 제한을 가하며 우리에게 죄가 우리 안에서 아무리 격렬하게 날뛴다고 하여도 우리는 영에 순종하고 죄를 죽이고자 하는 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시켜 준다. 그러나 우리가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와 고난만큼 육을 길들이는데 효과적인 것도 없기 때문에, 그는 고난 속에 있는 우리에게 영과 사랑과 모든 피조물의 지지를 확신시켜줌으로써 우리를 위로한다. 특히 영은 우리 안에서 탄식할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도 육과 죄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우리의 갈망을 요구한다.
9,10,11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를 다룬다. 이 섭리에 의해서 누가 믿음을 갖게 되고 갖게 되지 않는지, 누가 죄를 정복하고 누가 그렇게 할 수 없는지가 먼저 결정되었다.
당신의 죄를 깨닫고 그 분의 은혜를 아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집중하라. 다음으로1-8장에서 논의되고 잇는 죄의 문제와 씨름하라. 그런 다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수난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8장에 이르렀을 때 당신은 9-1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섭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방식을 배우게 될 것이고, 섭리가 주는 확신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수난, 십자가, 죽음의 무게를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섭리의 문제에 부딪쳤을 때 우리 자신이 상처를 입거나 하나님에게 은밀하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아담을 완전히 죽여야만 우리가 아무런 해도 받지 않고 이 교리를 짊어지고 이 독한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는 이유이다.
12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참되게 섬기는 방법에 관하여 말한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제사장이며 그들이 드리는 희생제물은 율법에 규정되어 있는 돈이나 가축이 아니라 그들의 정욕을 죽인 후의 그들 자신임을 보여준다. 그런 후에 영의 훈육 아래서의 그리스도의 외적인 행실을 기술한다. 어떻게 그들은 친구, 대적, 동료에게 가르치고 설교하고 규율하고 섬기고 주고 고난받고 사랑하고 살아가고 사랑하고 행해야 하는지. 이러한 것들은 이미 말한 대로 믿음이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인이라면 의당해야 하는 행위들이다.
이 서신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
율법, 복음, 죄, 형벌, 은혜, 믿음, 의, 그리스도, 하나님, 선행, 사랑, 소망, 십자가의 의미를 가능한 최대한대로 풍부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천지 전국 신학원 주소 (0) | 2008.03.08 |
---|---|
[스크랩] 신현욱 신천지 교육장 간증 (0) | 2008.03.08 |
[스크랩] 한국교회 부흥하는 교회 목회자 설교 정보 나눔터 (0) | 2007.10.20 |
어린이주일 설교 (0) | 2007.05.05 |
[스크랩] 영어 용어 사전 (0) | 2007.04.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