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기다리는가? 시편70:1-5
구약의
시편은 가장 엄선된 단어를 통해서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하나님에게 고백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 우리가 소중하게 여겨야할 말씀입니다. 물론 다른
성서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시편은 시(詩)라는 고유한 특색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요즘도 소설보다는 시 읽기가 훨씬 어렵다는
사실과 비슷합니다. 물론 여기서 어렵다는 말은 매우 모호한 표현이기는 합니다. 시 읽기가 어려운 게 아니라 그걸 읽어낼만한 삶의 깊이가 없다는
말이 맞겠지요. 어떤 점에서 시 읽기는 삶 읽기와 격을 같이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문제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하이덱거가 훨더린의 시에
대해서 해설한 책을 읽어보십시오.). 그렇지만 좋은 시를 이해했을 때는 소설이나 수필에 비해서 훨씬 많은 감동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어쨌든지
오늘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 어느 시인이 쓴 시를 우리에게 열려지는 것만큼 들여다 볼 생각입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라는 말로 이 시를 시작합니다. 시편에는 이런 형식의 기도와 호소가
흔합니다. 69편의 시도 역시 그렇게 호소하고 있으며, 약간 형식을 달리 하지만 여러 곳에 이런 도움의 기도가 등장합니다.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이 사람의 처지가 매우 어렵다는 말인데, 그의 처지가 어떠했는지 우리가 정확하게는 알 수는 없습니다만, 다음과 같은 2절 말씀을
통해서 대충 그 분위기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1) 내 영혼을 찾는 자: 이 시인의 가장 진실하고 가장 깊은 정신적 세계를 위협하고
있던 사람이 주변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저 물질적인 손해를 끼치거나 말다툼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궁극적 존재 근거인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는 그 어떤 사람이나 사건이나 사상이 그를 둘러 싸고 있었습니다.
2)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 자기가 파멸되는 것을
기뻐하는 자가 자기 주변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이런 게 바로 인간 세상이기도
합니다.
3) 아하, 아하, 하는 자: 약간 표현을 달리한 것입니다만 이 시인이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사람들은
앞의 사람들과 같은 종류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옆에서 남의 불행을 그럴듯한 말로 합리화 하고 단정해버립니다. 그러면 그렇지, 자기가 별 수
있나!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그렇게 되었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 놓여 있던 이 시인은 하나님을 향해서 "나를
건지소서. 나를 도우소서."라는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별로 이런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다. 실제로
우리 에게는 이런 시편기자의 위기나 불안이 없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오히려 친구들이 많을 수 있습니다. 즐거운 일이 넘쳐날 수도 있습니다. 온통
우리의 주변이 먹고 마시고 노는, 즐거운 일들이 깔려 있는 마당에 "나를 건지소서"라고 기도할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기껏해야 장사가 잘
안 된다거나 자식들이 말썽을 피운다거나, 사랑의 배신을 당했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어떤 절대적인 것을 필요로 하지는 않습니다. 흡사 왕의 초청을
받았지만 소를 사거나 밭을 사거나 결혼 문제 때문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처럼(눅14장) 말입니다.
우리가 오늘 그 어떤 구체적인
시련과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감사해야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기도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그런 조건들의 이면에 놓여 있는 더 근본적인 궁핍과 불안과 무상성을, 그런 위기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냥 모르고 살 뿐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내일 죽을지 모르니까 먹고 마시며 즐겁게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사도 바울도 그런 징후를 2천년 전에 보았습니다(고전15:32). 왜 그렇게 살까요?
우리는 오늘의 이런 복지
사회, 그런 국가, 공부, 직장, 가정생활과 같은 일들이 잘되기만 하면 만사가 형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설교자들도 기껏해야 복지 향상이라는
눈높이에 서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지만, 이런 요소들이 바로 우리의 원수가 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찾는 자는
누구입니까?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르게 믿지 못하고 단지 피조적인 것을 의지하게 만드는 세력이 무엇입니까? 잘 먹고 잘 살자는
환상이, "부자 되세요."라는 유혹이 우리로 하여금 "나를 건지소서"라는 기도를 드리지 못하게 하는 악한 힘이 아닐까요?
정말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나를 건지소서. 나를 도우소서."라는 기도를 드리는 일이며, 그런 절박한 정신을 갖는 것입니다. 그게 그냥은 되지
않습니다. 절박한 사람만이 하나님에게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의 삶에 숨어 들어온 무감각과 무의미를 눈여겨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에게 자기의 영혼을 찾는 자가,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가,
아하, 하는 자가 무안을 당하며 물러가게 해 달라도 기도합니다(2후). 아마 자신이 견딜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 시련을 극복할 수 있도록
악한 세력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겠지요. 이것은 당연한 기도입니다. 그 누가 자기의 시련을 달게 받으려고 할 것이며, 그것을 물리쳐 달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으며, 당연히 그래야만 합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위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누가, 또는 무엇이 우리의 영혼을 찾는 자인지 구별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데에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매일 소꿉놀이를 하면서 정작
필요한 가족과의 대화나 독서를 게을리 하는 어린 아이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면서 가능한대로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우월한 위치에 서는 것만을 목표로 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것 자체가 우리의 원수는 아닐까요? 사실
종교생활은 우리에게서 제거해야할 악한 세력이 무엇인지 아주 예민하게 통찰하고 구별할 수 있는 영적 혜안의 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사는 것은 그 반대라는 게 비극입니다. 영적인 세계가 무뎌지고 일상성에만 매달려 사는 것 말입니다. 우리의 가장
내면적인 세계를 무뎌지게 만드는 요소가 무언인지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그렇게 견디기 힘든
상황에 놓여 있었지만 그 어려움을 제거하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고 더 근본적으로 "주를 인하여 기뻐한다"는 사실에 마음을 두었습니다(4).
도대체가 지금 온갖 어려움과 원수들로 인해서 정신 차릴 수 없는 상태인데, 기뻐한다는 말이 타당한 합니까? 이 시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 사람은 인생의 핵심을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의 삶의 핵심인지
정수를 이해하고 있다는 말이다. 자기 주변에 많은 문제들과 원수들이 진을 치고 있었지만 이런 현안에만 매달려 있는 게 아니라 시야를 다른 곳으로
돌렸습니다. 기쁨의 근원을 찾았습니다. 주님으로 인해서 기뻐하는 데에 인생의 해답이,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열쇠가 있다고 말입니다.
인간의 삶에는 언제 어디서도 문제가 없을 수 없으며, 또한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더라도 또 다시 힘든 문제들이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고 그의 뜻을 확실하게 깨달을 수만 있다면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신비입니다. 이런 기쁨을 아는 사람만이 시련을 진정으로 극복해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생명의 신비와
능력을 안다는 말인데, 우리는 지금 대개 그것을 놓치고 살아갑니다. 그냥 무언가를 무작정 할 뿐이지 무엇 때문에 하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즉
삶 자체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무엇을 전공할 것인가, 어떤 집을 살 것인가, 자식들 교육은 어떻게 시킬 것인가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늙고 죽겠지요. 예컨대 자녀교육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평생동안 자식 교육에만 온갖 정성과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살게 할 것인가, 어떻게 삶 자체를 생각하면서 살게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금 곁길로 나가는
말이지만, 독일의 경우에 어린이들과 청소년의 교육문제는 국가에서 완전히 책임을 집니다. 제가 경험한바로는 자식 교육 때문에 고민하는 독일
부모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아이의 능력에 따라서 국가에서 모든 것을 떠맡습니다. 물론 부모들이 세금을 많이 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생사를 걸듯 자식 교육에 매달리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사회 체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냥 사는 것과 삶 자체를
생각하며 사는 것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습니다. 돈 벌고 학교 다니고 취미 생활하는 것은 삶의 수단이고 과정일 뿐이고 생명은 그런 과정
안에 깃들어 있는 그 무엇입니다. 그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은 돈을 적게 벌어도 행복할 수 있고, 반대로 많이 벌어도 불행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돈은 수단에 불과하니까 말입니다. 심지어는 돈보다 더 중요한 인간의 육체도 역시 그렇습니다. 장애가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만으로는 불행하지는 않습니다. 그 형편을 받아들이고 삶 자체에 집중할 수 있으면 그는 얼마든지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장자는 그런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 가난해도 좋고, 장애자가 되거나 중병에 걸려도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그런 것,
혹은 삶의 좋은 조건들이 우리의 인생을 결정하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절대조건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 분 말고는 이 세상에 광대한 분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자세를 가질 때만,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늘 우리 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시련과 고난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의
기도는 이렇게 끝납니다. "여호와여, 지체치 마소서."(5). 얼마나 간절한 기도인가요? 얼마나 신앙적인 기도인가요? 이 시편 기자는 그저
자기의 힘든 인생을 활짝 펼칠 날만 기다리는 마음으로 원수를 물리쳐 달라고 기도한 것은 아닙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그는 그것보다 기쁨에 대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광대함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제 지체치 말라고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기도는
구약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사실상 신약의 기도로 이어지는 셈입니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16:22). 그 날을 기다리는 신앙적인
기도입니다.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런 심정으로 구약을 읽습니다. 이 땅에서의 복지 국가를 최종 목표로 삼는 게 아니라
그것과 전혀 다른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런 자세로 기도를 드리며, 성서를 읽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기다림이 아니고서는
그 어디에서도 참된 구원이 임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정용섭
목사설교
(설교비평가가 볼 때 우리 설교는 얼마나 많은 지적사항이 있을까? 때로는 겁나고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소신있게 나를 사용하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서서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해 본다. 이 분의 설교는 비판받을 것이 없는가? 사람의 잣대로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 아멘이 된다. 바울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복되도다.)
죄로부터의 구원(?)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요즘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마음이 뭉클한 장면을 경험했다.
그 목사님은 설교 막바지에
거의 울먹이면서 설교했다.
급기야 통성 기도시간에는 대성통곡은 아니더라도
거의 울음바다를 연상시키는 기도에 몰입하셨다.
설교
중간에 스스로 감동에 젖으면
조성모 버전으로 복음 찬송을 부르셨다.
그런 장면을 접할 때마다 내용을 둘째 치고
마음속에서
무언가 찡한 게 느껴졌다.
어떻게 저런 절절한 마음이 생길 수 있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감정의 몰입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 목사님이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말이다.
그는 우리가 길을 잃은 양처럼 헤매다가
예수님을
만난 그 사건을 기억하면
어찌 흐느끼지 않을 수 있느냐는 식으로
청중들에게 접근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솟아나는 경지를
내가 어떻게 따라갈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도저히 죽었다 깨어나는 일이 있어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받아들일 뿐이지
눈물은 나지 않는다.
내 정서가 그만큼 삭막한 건지,
더 근본적으로는 믿음이 없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옛날 일들이 생각한다.
청소년 시절 교회에서 성찬식을 나눌 때마다
눈물을 바가지로 흘리는 분들이 많았다.
눈물은 나지 않더라도 징징 우는 소리로 기도를 올려야 했다.
수양회에 참석해서도
많은 청년들이 그냥 울었다.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울기도 했겠지만
그 나이에는 모든 게 감상적이기 때문에
자기감정에 치우쳐서 우는 경우가 많았다.
슬픈 찬송을 배경 음악으로 깔고
우수어린 목소리로 청중의 죄를 지적하면
울리 않은 청년들이 별로 없었다.
이 문제는
좀 심각하다.
죄를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릴 수 있단 말인가?
그건 그렇다 치고,
이렇게
눈물 흘리는 신앙을 유도하기 위해서
목사들이 신자들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태도는 참으로 위험하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죄책감과 그것의 해소 사이에서
기독교 영성이 자리를
잡는다는 건 별로 건강한 삶의 자세가 아닐 뿐만 아니라
별로 기독교 신앙과도 상관이 없다.
성서는 기본적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할 뿐이지
그 죄의식에 사로잡히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더 중요한 점은 성서가 말하는 죄는
구체적인 것을 의미하지
막연한 죄의식은 결코 아니다.
“너는 죄인이야!” 같은 말은 성서적인 주장이 아니다.
“과부와 고아를 당신이 멸시했다.”는 말은 성서의 주장과 같다.
자기에게 책임이 있는 잘못을 인정하고 시정하는 게
중요하지
막연하게 자신이 죄인이라고 눈물을 흘리는 건 무의미하다.
이런 죄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일수록
실제적으로는 매우
무책임하게 산다.
사회 구조적인 죄에 대해서는 모른 척하고,
생태학적 죄에 대해서도 무감각하다.
단지 자신의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습관적으로 눈물을 흘릴 뿐이다.
물론 눈물을 흘리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는 말은
아니고,
일반적으로 그런 경향이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뿐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이게 본질적인 대목인데,
예수님은
그 어떤 사람을 향해서도
“너는 죄인이야.”라거나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안 돼.”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복음서를 완벽하게 검토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힘들지만
내가 이해하고 있는 예수님이라고 한다면
어느
누구에게도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단지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처럼
자신들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죄인들을
낮추어본 사람들을 향해서
‘회칠한 무덤’ 같다는 말씀을 하셨을 뿐이다.
예수님은 죄를 짓지 않는 인간을 원하시는 게 아니라
그것을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현실의 인간을 원하신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과 달리 죄에 대해서 많은 설교를 했다.
그렇지만
그가 설교한 죄 문제도
요즘 설교자들처럼 죄의식을 자극한 게 아니라
매우 심층적인 실존적 죄의 차원이다.
예수님은 현장에
간음하다 끌려온 여인을 향해서도
회개하라고 말씀하신 게 아니라
자신도 정죄하지 않을 테니,
다음부터 그런 일을 하지 말라고
타이르셨을 뿐이다.
예수님은 결코 사람들의 죄책감을 자극하지 않으셨는데도 불구하고
오늘의 설교자들이 신자들을 그런 방식으로 공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중세기 교리사,
또는 청교도들의 신앙 형태,
그 당시의 인간론 등을 포괄적으로
고찰해야만 한다.
여기서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으니까 접어두고,
다만 역사적 교회가 일시적으로 죄와 구원을 직결시켰다는 사실만
짚자.
물론 바울의 로마서를 비롯해서
인간의 죄와 구원을 연결해서 해명하고 있는 신약성서가 있지만
그 문제도 우리는 좀 더
넓게 다루어야 한다.
성서를 비롯해서 기독교 교리는
영원불변의,
또는 초월적인 진리라기보다는
그 시대의 구체적인 삶
안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 시대와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새롭게 해석할 수 있어야만 한다.
즉 영육이원론이 지배하던 시대의 구원론과
줄기세포가 언급되는 이 시대의 구원론이 동일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다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까지
변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의아스럽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말이 그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건 내가 변명하지 않아도
알 만한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오늘은 더 이상 감상적인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전혀 없다기보다는 성숙한 사람 중에서는 없다.
자기의 잘못을 자기가 책임을 질뿐이지
막연한 죄책감에
대해서는 무관하게 살아간다.
조금 더 근본적인 문제를 언급한다면
이제 성숙한 현대인들은 더 이상 원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이 문제를 더 강조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그 원죄라는 걸 성서가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가 기독교 신앙의 절대불변의 진리처럼 각인되어 있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와 구원이
이 원죄와 연결되기 때문에
그런 교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지만
우리는 이런 문제를 여전히 새로운 차원에서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책임을 지며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자꾸 글의 흐름이 확산되는 것 같아서 이제 줄여야겠다.
예수님이 “너는 죄인이야.
회개해.”라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닦달하지 않은 이유는
그런 방식으로는 인간이 새로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더 궁극적으로는
인간은 아무리 회개해도 여전히 죄를 짓고 사는 존재들이다.
죄인이며 의인이고, 의인이며 죄인이다.
두 실존을 그대로 부둥켜안고
살아갈 뿐이다.
결코 완전하게 죄와 관계없이 살아갈 수 없는 인간에게
죄책감을 자극하는 것은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로 그게 해결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
사실 그게 복음이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이미 예수님을 통해서 해결된 것이다.
그런데 왜 설교자들은 청중들의 죄책감을 자극하는가?
군사 독재자를 향해서 예언자적 목소리를
외치든지,
이 천민 자본주의의 죄를 지적하든지,
교육의 불평등이 갖고 있는 원천적 죄성을 파헤치든지 해야지
왜 막연하게 “너는
죄인이야”라는 방식으로 접근하는가?
이건 복음이 아니라 상품이다.
청중의 죄를 공격하는 설교자 중에서
인간의 구체적인 죄를
사회과학적인 차원에서
풀어낸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죄가 무엇인지 분석할 자신이 없으면
아예 입을 다물고 있는 게 훨씬
낫다.
설교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청중들을 풀어주라는 것이다.
본인이 잘 알지도 못하는 성서 지식에 근거해서,
또는
실체가 아니라 변죽을 울리는 방식으로만 겨우 따라가는 교리에 근거해서
청중들의 영혼을 병들게 하지 말고,
좀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게 하나님을 돕는 거라는 사실을
요즘 나는 절감하고 있다.
“나는 그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롬 1:16a)
도대체 바울은 ‘복음’을,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무엇으로 생각하기에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고 진술할까?
그의 진술은 많은 사람들이 이 복음을 부끄러워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바울 자신도 역시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에게 예수 사건은 미련하거나 꺼림직한 것이었다.
생각해보라.
하나님이 한 인간의 삶을 통해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신다는 주장이 가당키나 하나?
인류 구원이 얼마나 진지하게 무거운 과업인데
단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해결된다고 하니
사람들이 그런 가르침을 부끄러워했다는 건 이해가 간다.
모세의 이름을 통해서 유대인들에게 전승되기 시작한 율법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에 합당한 것을 요구하는 원리였다.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들은 최선을 다 기울였다.
그들은 먹는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이웃관계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한 것은 모두 해보았다.
가나안 족들과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성전 종교를 화려하게 발전시켰다.
그런 모든 노력들이 민중들에게 무거운 짐으로 작용할 뿐이었다.
오죽 했으면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모두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하고 말씀하였겠는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은
인간이 스스로 노력해서 성취하려는 모든 종교적 업적을
근본적으로 해체하는 것이다.
즉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만 가능한 사건이라는 뜻이다.
정작 내가 짚어보려는 핵심은
모든 율법의 행위와 목표를 근본적으로 해체한 십자가의 복음을
오늘의 교회가 오히려 해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와 그의 사건과 그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필요한 게 없다는 이 복음을
오늘의 교회가 총체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교회는 지금 청중들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한다.
구원받기 위해서 율법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유대교처럼
오늘의 교회가 ‘사명’이라는 명분으로 청중들을 닦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의무가 얼마나 많은지,
얼마나 세부적인지 내가 여기서 일일이 거론하지 않겠다.
모이기를 힘쓰라는 말씀에 기대서 얼마나 자주 모여야 하는지,
헌금 종류는 왜 그리 많은지,
그 이외에도 교회가 요구하는 수준에 맞추어 신앙생활을 하려면
자기의 프라이버시나 사회 공적인 업무를 대폭 축소해야만 한다.
부흥하는 교회의 목회자일수록
청중들을 이런 방향으로 몰아가는 데 일가견이 있다.
그런 분들의 설교를 듣고 있는 신자들은 늘 좌불안석이다.
자기들이 무언가 잘못한 게 많은 것처럼 자책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복음적인 목회’란 무엇일까?
교회 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청중들을
교회의 일에서 좀 풀어주는 게 복음적 목회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건 청중들만을 위한 게 아니라
목회자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고 했다.
하나님 앞에서 단지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 받는다는 사실에
자신의 모든 존재를 걸어두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다시 그런 복음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신앙생활하면 무언가 부족한 것처럼 느끼기 시작했다.
복음을 다시 율법(주일성수나 십일조등)로 옭아메자는 말인가?
물론 그런 분들의 마음을 모를 것은 없다.
그들은 구원받기는 했지만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화되기 위해서
매 순간 최선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성화의 삶은 분명히
종교적인 의미에 한정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칭의와 대칭되는 것도 아니고
구원받은 사람의 당연한 삶의 귀결일 뿐이다.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진술의 의미를
우리의 일상과 연결해서 생각해보자.
복음과 대칭되는 율법이 인간의 자기 성취라고 한다면
교육, 돈벌이, 출세, 명예 같은 것에 삶의 근거를 두는 건
모두 율법적인 삶이다.
개인적인 성공이든 교회적인 성공이든 마찬가지다.
이에 반해서 그런 인간의 성취를 내버려두고
자신의 ‘존재’에 천착하는 삶이 곧 복음적인 삶이다.
스스로 자기를 계시하는 존재인 하나님과의 관계에
모든 삶의 근거를 놓는 삶은
자기를 성취하는 삶보다 오히려 어려울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를 성취하는 데서만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복음적인 삶은 율법적인 삶보다 훨씬 힘든 길이다.
그러나 비록 외면적으로 화려한 것은 없지만
진리와 존재에 천착하는 사람은 내면적인 자유를 누릴 것이며
그 어디에서 의존하지 않는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상과 마찬가지로
복음은 모든 종교적인 짐으로부터 자유로운 신앙의 세계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우리에게 명백하게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 스스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사셨다.
물론 예수님이 종교적인 의식 자체를 일부러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청중들을 그것으로부터 해방시키신 것이다.
그런데 왜 오늘의 교회는 다시 청중을 율법으로 몰아가는가?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는가?
그들은 아마 복음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봉사하고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건 자기모순이다.
복음을 위해서 율법적으로 산다는 게 말이 되는가?
신약성서가 그런 헌신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문제까지 오늘 논의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 같다.
바울의 유럽 선교를 모범으로 삼아 우리도 세계 선교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제법 많을 것이다.
율법시대와 은혜시대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
여러 각도에서 깊이 생각해야 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복음을 초기 기독교가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했는가 하는 점도
오늘 우리는 늘 비판적으로 성찰해야만 한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겠다는 바울의 진술은
단지 전도한다는 차원에 머무는 게 아니라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율법적 삶으로부터
은총의 삶으로 전환하겠다는 의미이다.
오늘의 교회와 신자들이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도
실제로는 복음을 철저하게 부끄러워하는 행태를 보이고
율법을 준수하는 종교생활로 그 업적을 내세우고 있으니,
딱한 일이다. 바울의 복음 (정용섭 목사의 글)
ㅡ예수 그리스도의 향기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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