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적이지 않은 '궁극적 관심'
-곽선희 목사의 설교집 '궁극적 관심'을 비평한다-
지성적 설교의
전형
곽선희 목사님(이하 '곽 목사')이 열 두 번째로 펴낸 설교집의 제목 <궁극적
관심>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폴 틸리히 신학의 핵심 개념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곽 목사가 폴 틸리히를 염두에 두고 이런 제목을 선택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으며, 더구나 곽 목사 자신이 폴 틸리히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 설교집에
실린 설교의 전반적인 기조를 놓고 볼 때 상당한 유사성이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국의 지성적 기독교인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친 폴 틸리히
신학은 우리나라에서도 그에 못지 않은 힘을 발휘했는데, 그 신학의 특징은 줄여서 말한다면 지성적이라는 점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을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 또는 '궁극적 토대', 그리고 기독교 신앙을 '새로운 존재'(new being)로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기독교 지성인들의 지적 만족감을 채워준 것이다. 물론 곽 목사 자신은 지성이나 이성보다는 신앙을 본질적인 가치로 강조하고 있지만 그의 접근하는
설교 방식이 기본적으로는 지성적이라는 점에서 틸리히의 신학적 경향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유사성을 간단히
정리해보자.
우선 곽 목사의 설교에도 폴 틸리히 신학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실존에 대한 깊은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대중적인 설교를 하는 설교자로서는 드물게 곽 목사는 기복적인 차원이나 주술적인, 또는 단순한 도덕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한
인간의 종교적 실존에 대한 질문을 꾸준하게 전개하고 있다. <궁극적 관심>에 실린 26편의
설교가 거의 이런 인간의 종교적 실존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있는데, 이는 곧 곽 목사의 인식론적 깊이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 가지 부족한 것'이라는 설교와 '소돔과 고모라의 최후'라는 설교에서 각각 곽 목사는 기독교인의 실존과 신앙의 문제를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여러분, 영생의 문제는 행함의 문제라기보다는 존재의 문제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to do'의
문제가 아니라 'to be'의 문제입니다. 'becoming'의 문제가 아니고 'being'의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69쪽).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된 자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된 자가
아니라 되어가고 있는 자라는 말입니다. 독일어로 하면 게보르덴 자인(geworden-sein)이 아니라 베르덴
자인(werden-sein)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죄에 계속 머무르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113쪽).
다른 설교자들은 도덕적인 타락을 직접 공격하지만 곽 목사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적 깊이에서 논의를 전개하기 때문에 지성적 청중들로부터 동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방식의 설교는 많은 설교자들이 배워야 할 중요한
부분이다. 대충 좋은 게 좋다는 식이라거나, 아니면 성서 말씀을 일방적으로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설교가 아니라 성서와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할 인간의 실존에 천착하는 설교는 삶의 실존적 차원을 인식하고,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현대 지성인들에게 아주 효과적이다. '소망교회'가
한국에서 가장 전형적인 지성적 교회로서 자리매김 된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다.
폴 틸리히 신학의 특징은 '문화'를 신학의 중요한
매개로 삼는다는 데 있는데, 곽 목사의 설교도 역시 문화에 대한 이해가 비교적 적극적이다. 내가 아직 소망교회에 가본 적이 없어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들리는 말로는 예배당이 음악회 연주장으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음향 효과가 뛰어나다고 하는데 이런 점도 곽 목사의 문화에 대한 감수성이
확인될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물론 문화는 예술적 품위를 지닌 교회당이나 파이프 오르겐 같은 어떤 가시적 형태만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오히려 인간
세계와 역사 전체를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기독교가 성속 이원론적인 시각으로 이 세상을 부정하는 듯한 전통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설교자들도 늘
청교도적 원리주의자들처럼 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매도하는 경우가 많은데, 곽 목사의 설교는 이 세상과 역사를 현실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한다. 세상과
문화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되 그 안에서 작동하는 마성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세상은 세상일뿐이고 그 안에서 사는 개인
기독교인의 신앙적 실존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은 라인홀드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에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생각되는데, 틸리히와 니버
신학이 곽 목사의 신앙적 체계 안에서 독특하게 자리를 잡은 것 같다. 문화의 악한 요소를 보고 있지만 그 문화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 곽 목사의
신앙적 패러다임을 '추수 때까지 두라'는 설교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여러분, 언제나 밝은 면을 봅시다. 가라지만
생각하다가 아예 가라지 속에 묻히지 말고, 알곡을 봅시다. 선을 보호하시는 하나님 마음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세상을 보든지 교회를 보든지, 자기
자신을 보든지 이웃을 보든지, 언제나 장점을 극대화하고 선을 보장하는 바로 거기에 문제의 해결이 있습니다. 악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시기도 방법도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그러나 지금 의인에게 고난이 있는 것은 그 고난 속에서 선을 성장케 하시는 역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208).
또 하나의 유사성은 복음 전달의 수단에 있다. 틸리히가 문화의 신학자로서 기독교 복음을 현대
지성인들에게 변증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 것처럼 곽 목사의 설교도 이런 변증적 요소가 강하다. 물론 보는 사람에 따라서 설교자는 늘 그렇게
변증적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 것 아니냐, 하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겠지만 여기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자신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내뱉어버리고,
청중들로 하여금 무조건 따라오게 하는 설교 방식이 있는 반면에 곽 목사처럼 현대인의 심리적, 실존적 차원을 깊이 있게 헤아리면서 그들을 설득하는
방식이 있다. 설득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이해시킨다는 뜻이며, 이해시키기 위해서 설교자는 독백에 머물지 않고 '대화' 해야만 한다. 곽 목사만큼
이런 설득과 대화에 토대를 두고 설교하는 설교자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복음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설득시키기 위해서 대화의 방식을 선택한다는
것은 목사가 일방적으로 자기 생각을 늘어놓은 방식이 주류로 자리를 잡은 한국 교회 강단에서는 흔치 않다. 청중들이 조건반사 식으로 화답하는
'아멘' 현상을 자신의 설교가 먹히는 것으로 착각하지 않고 진정한 대화를 실제로 소통시키려면 우선 설교의 주제를 충분히 소화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들어야 할 청중의 눈높이를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런 부분은 겉으로 확연하게 드러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에
해당되는 곽 목사의 설교 본문을 구체적으로 잡아내기는 약간 어렵다. 그렇지만 이런 부분을 약간이라도 전달하기 위해서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라는
설교에서 한 부분을 인용하겠다.
선행하고 칭찬받는 것과 칭찬받기 위해 선행하는 것은 문제가 전혀 다릅니다. 완전히
정반대의 결과가 됩니다. 이제는 보상받기 위해서 선행합니다. 축복을 받기 위해서 선행합니다. 내 선행에 비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너무 작고
인색하다, 사람들이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다 해서 무의식중에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선행을 가장하게 되고,
피아르(PR)하게 되고, 위선자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행복하기 위해 힘쓰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서 인정받고자 애씁니다.
(137).
그 이외에도 곽 목사의 설교에는 뛰어난 점이 많다. 어떤 목사들은 설교하면서 습관적으로, 또는 별로 할
말이 없거나 청중들의 반응이 시원치 않다고 판단될 때 '할렐루야!'나 "... 하기를 축원합니다!"를 자주 외치는데, 곽 목사는 그런 구질구질한
표현을 일절 하지 않는다. 설교 현장에서는 어떤지 확인해보지 않았지만 설교집에는 없다. 우리나라의 설교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이런 상투성을 벗어버려야 한다. 예화 사용에서도 곽 목사는 비교적 세련되었다. 입만 열었다 하면 미국 이야기만 하는 목사도 있고, 신문의
시사나 사건 사고, 또는 거의 현실성이 없는 허황한, 흡사 '믿거나 말거나' 수준의 이야깃거리를 사용하는 목사들이 많지만, 곽 목사는
철학에서부터 인문학 전반에 걸친, 그러면서도 매우 신앙적인 예화를 적절하게 사용했다. 이런 전반적인 요소는 곽 목사의 설교가 지성인들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가는 능력이다.
곽 목사의 설교가 지성적 기독교인들에게 각광받을만한 요소를 골고루 갖고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설교의 한계는 매우 분명하다. 곽 목사가 노골적으로 교회 성장 이데올로기를 부추기거나 기독교 신앙을 기복적으로 만들거나
주술화하는 설교자와 질적으로 다른 설교를 하는 것 같지만 겉모양만 그럴 뿐이지 실질은 '거기서 거기'라는 말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그가
지성적인 포즈를 취한 채 전하고 있는 '궁극적 관심'이 전혀 궁극적이지 않은 이유를 그의 설교에서 짚어봄으로써 한국교회 강단에 버젓이 주인
행세하는 '존재의 가벼움'을 반성해보고자 한다. 이런 비평이 한국 교회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정도로 훌륭하게 목회 활동을 마쳤으며, 비교적
지성적인 설교로 후학들에게 모범이 되신 곽 목사에게 조금이라도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무늬만 궁극적인
설교
그의 설교가 실제로는 궁극적이지 못하면서도 궁극적인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사실의 구체적 증거를 그의 설교에서 확인하기 전에
우선 궁극적이지 못하다는 말을 하나의 비유로 설명하자. 여기 두 어린이가 있다고 하자. 한 아이는 가정 교육을 바르게 받지 못한 말썽꾸러기인
반면에, 다른 아이는 그야말로 누구에게나 칭찬을 듣는 '모범생'이다. 이 두 아이가 괴테의 연극 '파우스트'를 함께 보았다. 말썽꾸러기는 그
연극이 너무 지루해서 하품을 하고, 옆의 친구와 장난이나 치고 화장실을 들락거렸지만, 모범생 어린이는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꼼짝하지 않고 매우
진지하게 그 연극을 잘 보았다. 우리는 연극 관람에 모범을 보인 이 아이가 장난꾸러기보다 파우스트를 훨씬 잘 이해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록 관람 자세에 차이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 두 어린이에게는 기본적으로 '궁극적인 것'을 인식할만한 정신 세계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설교자들의 설교를 듣거나 읽을 때마다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언어가 선포되지만 그 내용이 전혀 궁극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무늬만 궁극적이지 실질은 가벼움의 극치이다. 그들의 말이 경솔하다거나 진지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 그 설교의
언어를 구사하는 분들에게서 궁극적인 세계를 경험하고 인식했다는 증거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궁극적인 것, 또는 절대적인 것은 바로 신앙의
세계이고, 곧 하나님의 세계인데, 그런 세계가 이상스레 설교자의 손에서 조작되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이에 대한 반증이다. 그게 극단적인 형태로는
'약장사'의 너스레로 나타나고, 어느 정도 자기 성찰이 이루어질 경우에는 '종교학 강사'의 현학적 담론으로 나타날 뿐이다. 성서의 세계가
설교자의 손에 의해서 조작된다는 말은 설교자가 자신의 작은 주관적 경험으로 하나님과 이 세계를 너무나 손쉽게 재단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북한의
공산주의를 직접 경험한 곽 목사는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관에 빠져서 세계 역사를 편파적으로 해석하고, 그것에 근거해서 설교가 전혀
궁극적이지 않은 결과를 빚게 된다. '해방의 노래'라는 설교의 한 부분을 읽어보자.
결국은 지식의 문제요, 지식의
문제는 교육의 문제요, 교육의 문제는 사상의 문제입니다. 어두움 가운데에는 풍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온 세계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
어디를 가든지 사회주의 국가는 지긋지긋하리만큼 못삽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아마 이만큼 못살겠지 하는 그것보다 훨씬 더 못합니다. 그렇게 못살
수가 없어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못삽니다. 왜 못 사느냐고요? 사회주의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사회주의를 '거지주의'라고도
풍자합니다. 그 주의가 사람을 변질시켰습니다. 일을 해도 육체 노동만 고무했지 정신 노동에 대해서는 가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탐구하고
연구하지 않으니 무슨 발전이 있겠습니까? (130).
<궁극적
관심>이라는 설교집이 출판된 1991년은 사회주의 몰락이라는 세계사적 사건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던 곽 목사로서 약간 '오버'할 수도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사회주의를 이렇게 평가한다는 것은 역사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얄팍한지에 대한 증거이다. 혹은 그분이 알기는 알지만 해방 이후 북한의 공산당이 아버지를 죽이고 땅을 몰수한 경험 때문에 객관적인
판단력이 흐려진 탓인지도 모른다. 곽 목사는 위에서 인용한 언급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런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여행에서 겪은 여행담을
이렇게 진술한다. 곽 목사가 아는 사람이 자동차를 후진시키다가 아이를 치어 죽이는 일이 일어났다. 아이의 어머니를 찾아서 용서를 구하고 보상을
하겠다고 하자, 그 아이 어머니가 그 애 말고도 자식 많은데 뭘 그러시느냐고, 괜찮다고, 그냥 가시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에 대한 곽
목사의 코멘트는 다음과 같다. "여러분, 왜 이렇게 가난하고 왜 이렇게 비참해졌겠습니까?"(131). 그리고 이어서 동남아시아의 경제적, 정신적
기아 상태는 신앙의 문제, 종교의 문제라는 것이다. 종교가 잘못되면 사상이 잘못되고, 사상이 잘못되면 교육이 잘못되고, 교육이 잘못되면 인간이
잘못된다면서,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하시는 것은 마침내 물질에까지도 풍부하고 여유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상적으로 잘못되고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될 때에 가난에 빠지고 만다는 것입니다."(131,132)라고 강조하고 있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도대체 이 분이
신비로운 방식으로 이 세계 역사를 이끌어 가는 하나님을 전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솜털보다 가벼운 자기의 세계관을 사람들에게 설득시키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곽 목사의 설교가 무늬만 궁극적이지 실제로는 전혀 궁극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자기 아이를 죽인
외국인 여행객과 멱살잡이를 하면서 한밑천 뜯어내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인 어느 가난한 동남아 여인을 보고 왜 그렇게 정신적으로
비참해졌는가, 하고 핀잔을 주거나 연민을 느낀다는 게 말이 될까? 그들의 그 숙명주의적 태도가 오랜 세월 영국과 미국 등과 같은 제국주의로부터
당한 상처에 의한 결과는 아닐까? 그렇다면 그런 제국의 대열에 끼어보려고 비굴하게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반성할 일이지 종교와 사상이 잘못되어서
그렇게 불쌍하게 살아간다고 낮추어 볼 일인가? 물론 곽 목사가 굳이 이런 극단적인 예를 드는 이유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살아야
한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남의 불행을 딛고 자신의 행복을 확인하려는 것은 상식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성서의
신앙에서도 역시 크게 잘못된 일이다. 이런 일은 이집트에서 4백 여 년 동안 외국인 노동자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을 이집트 사람들이 조롱하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
지난 총선에 즈음해서 일부 교회의 목사들이 친북 세력에게 표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로 설교를 했다고 한다.
물론 그 친북 세력은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정치 세력인 열린우리당 후보들이었다. 인터넷 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새문안 교회가 대표적인 것 같은데,
모르긴 해도 그 말많은 서울 강남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교회 중에서도 이런 논조의 설교가 많았을 것이다. 우리 남한의 설교자들 중에는 북한
집단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본 사람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기독교에 비판적인 세력을 무조건 매도한다는 것은,
더구나 아무런 논리적 정당성도 없이 매도한다는 것은 그런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우리에게 평화와 정의와 해방의 역사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자신들의
알량한 가치관과 경험으로 주무르는 태도이다. 이런 것이 일종의 종교적 제국주의인데, 위에서 인용한 곽 목사의 설교를 읽으면서 나는 그런 섬뜩함을
느꼈다.
한국을 대표할만한 지성적 설교자인 곽 목사의 역사 인식이 이런 한계를 드러내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프린스턴 신학석사,
풀러신학교 선교학 박사 학위가 있고, 여러 신학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했으며, '궁극적 관심'이라는 설교집이 출판된 당시에 이미 소망교회를 개척한
지 9년 만에 출석교인 일만 명 교회로 성장시킨 곽 목사에게는 그 어디에도 한계를 드러낼만한 구석이 없다. 인간 삶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궁극적인
관심을 설파하는 분이 우리가 모두 해명해내기 힘든 복잡한 역학관계에서 발생한 제삼세계의 빈곤을 그렇게 간단히 제국주의적 잣대로 처리해버리는
이유를 나는 아직 모르겠다. 내 눈이 사시(斜視)인지, 아니면 그분의 궁극적 관심이라는 게 단지 무늬에 불과한 것인지.
일반화의 함정
이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다루기 위해서 오늘 나는 곽 목사의 설교 중에서 앞에서
차례대로 두 편만 언급하려고 한다. 첫 번째 설교는 '궁극적 관심'(마 6:25-34)이다. 이 설교를 제호로 삼았다는 것은 곽 목사가 이 첫
설교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나는 비교적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읽었다. 곽 목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런 문제들은 궁극적인 게 아니니까 염려하지 말고 궁극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살아야 한다는 점을 설교했다. 주로 중산층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소망교회 신자들은 이 설교를 듣고 이 세상에 대한 관심으로 분산되었던 자신들의 삶을 다시 교회 중심으로, 신앙
중심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을지 모른다. 소망교회 신자들이 이런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는다면 내가 더 이상 시비를 걸
필요가 없겠지만 곽 목사 본인도 모르는 중에 기독교 신앙의 일반화에 빠져들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인들이 거의
'엽기적'으로 의식주 문제에 매달리고 있다는 그 현상을 적절하게 분석하면서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곽 목사의 주장은
아주 당연한 것이지만,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설교가 그런 단계에서 멈춤으로써 예수님이 드러내고자 하는 어떤 세계가 닫히고 말았다. 바로
이 점이 모든 설교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대로 일반화의 함정이다. 예컨대 회개하고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충성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
악한 세상을 선으로 이겨야 한다 등등, 이런 일반적인 주장이 옳은 말이기는 하지만, 설교가 그런 일반론적 해석의 자리에서 더 심화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결국 죽는다. "설교하고 있네!"라는 표현이 바로 그런 사태를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곽 목사가 의식주 문제에
치중하는 현대인의 삶을 아무리 적나라하게 파헤친다고 하더라도 그 설교를 듣는 현대인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자신들이 늘 들었던 뻔한
설교를 약간 재미있게, 또는 약간 더 세련되게 들은 것말고는 아무런 감동이 없다는 말이다.
어떤 분들 중에는 그거 무슨 말이냐,
소망교회 신자들만이 아니라 한국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곽 목사의 설교에 은혜를 받고 있는데, 라고 반론을 제기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건 나도
인정한다. 기독교 신앙을 최소한 그런 상식적인 차원에서라도 풀어내는 설교자들이 흔하지 않기 때문에 설교자로서 곽 목사가 한국 교회에 끼친 공헌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은혜를 받는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설교는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진리는 종말론적인 성격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실명(實名)으로
비평하는 게 썩 마음 내키는 일은 아니지만 문제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말하는 은혜라는 게 무엇인지 그 정체를 우리가 질문해야 한다는
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곽 목사의 설교에서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대충 성속 이원론의 구도 속에서
받아들이면서 약간 세련되게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분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곽 목사의 설교에는 인간의 의식주 문제가 포함된 이 세상의 삶이
부정되고 막연한 '저 세상'이 강조되고 있으니까 말이다. '궁극적 관심'은 아래와 같이 끝난다.
무너지는 세상을
그리워하지 말 것입니다. 세워지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을 두고, 가까워지는 하나님 나라에 우리 마음과 생각을 모을 것입니다.
무너지는 장막집을 제쳐두고 하나님께서 세워주시는 영원한 집을 생각합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우리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3).
곽 목사의 설교를 변호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위의 구절이 이 땅의 삶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궁극적인 관심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 관심'을 모두 읽어본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 설교가 세속의 활동과 거룩한 활동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함으로써 결국 교회를 중심으로 한 거룩한 일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곽 목사 자신이 이원론적인 생각에 묶여 있는 분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설교가 이원론적으로 흘러가게 된
이유는 바로 설교의 일반화에 숨겨 있는 함정이다. 생각해 보라. 사람이 죽을 것이며, 인간의 역사도 간단히 해체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것은 시골 장바닥에 좌판을 깔아놓고 과일을 파는 아주머니들이나 막노동꾼들도 뻔하게 아는 사실이다. 이런 일반론적 시각을 단지 성서를
준거로 삼아 전달하는 게 설교라고 한다면 우리와 대학의 인생론 강사와의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이런 일반론적 설교
행위로 인해서 우리 한국교회 강단이 처하게 된 위기는 성서 해석학의 실종이라는 것이다. 제우스의 사자인 '헤르메스'에 연원하고 있는 해석학은
신의 계시를 인간의 언어로 해석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끊임없이 일반론적 시각을 극복해나가는 행위이다. 만약 설교가 하나님의 계시인 성서를 인간의
언어로 해석하는 행위라고 한다면 그 계시가 은폐의 방식으로 담고 있는 세계의 깊이로 들어가야 하는데, 우리의 설교 현장에서는 최소한 시인들이
언어를 통해서 존재의 세계를 풀어내는 것과 같은 창조적 노력도 찾아볼 수 없다. 곽 목사의 설교에서 보듯이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 즉 무너지는
장막집은 제쳐두고 영원한 집을 생각해야 한다는 원칙만 반복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한국교회의 강단은 진리를 향한 치열성은 사라지고 '입담'만
무성하게 되었다.
변죽만 울리는 설교
일반론에 떨어진 성서해석의 문제는 '궁극적 관심'이라는 설교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궁극적인 것의 실체가 모호하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가 관심을 기울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궁극적인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먹고 마시고 입을 것들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곽 목사는 하나님이라고 대답한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야 먹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주셔야 입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주셔야 영광도 행복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18).
너무나 지당한 말씀이다. 이 사실을 몰라서 교회에 나와 설교를 듣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 원칙론에서
한발자국도 앞으로 내디딜 줄 모르는 이런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 왜 그는 말씀과 계시의 변죽만 울림으로써 헬무트 틸리케가
지적했듯이 기독교 신앙을 '가현설'(docetism)적으로 만드는가? 곽 목사의 이 설교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 한계를 안고 있다. 궁극적인 것이
왜 의식주 문제와 다른 지평인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는 것이 하나이고, 더 나아가서 그가 말하는 궁극적인 것에 대한, 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해명이 모호하다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물론 나는 곽 목사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대충 이해할 수는 있다. 공연히 세상의 욕망에 시달리지
말고 하나님을 잘 믿어야 구원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문제도 다 해결될 수 있다는 말이다. 원칙적으로는 옳지만 이런 상태에서는
기독교 신앙의 추상성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곽 목사가 관심을 두지 말라고 간곡하게 권고하고 있는 의식주 문제는 우리에게 필요
없는 게 아니라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이 실제로 살아가신 모습도 바리새인들이 볼 때는 먹고 마시기를 즐겨하는 것 같았다는 보도를 보면
예수님이 결코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역시 떡과 하나님의 말씀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의 변증법적 관계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이런 문제를 염려하지 말라고 했지
곽 목사가 말하듯 "제쳐 두라"고 말씀하지는 않았다. 물론 곽 목사도 먹고 마시는 문제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기보다는 영원한
집을 강조하다보니까 그런 식으로 표현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은 아직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와 궁극
이후인 이 세상과의 변증법적 관계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래서 결국 그는 이 문제를 아주 가볍게 '말재주'로 처리하고
만다. 궁극적인 것이 곧 3F(three F)라는 것이다.
첫째 F는 믿음(Faith)입니다. 염려를 이기는 길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믿음뿐이라는 것입니다. (중략).
둘째 F는 아버지(Father)입니다. 모름지기 아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언제든지 아버지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셋째 F는 무엇이 먼저인가(the
First)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먼저요, 이웃이 먼저요, 나는 나중입니다. 이 순서가 분명해야 합니다. (23).
아, 설교의 허무함이여! 사람들이 쓸데없는 것을 염려한다는 사실을 매우 진지한 어조로 분석한 것에 비해서 이 결론
부분은 너무 빈약하다. 이것을 용두사미라고 하나?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진지한 자세로
접근해야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별로 상관없는 영어 단어를 통해서 자신의 설교에 멋을 내는 것으로 이 우주론적 역사의 무게를 살짝 벗어나고 있다.
이렇게 '뻔할 뻔 자!'를 읊조리는 것을 설교라고 한다면 '신학'과 성서해석은 무용지물이다. 기독교적인 구호만으로 설교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곽 목사가 궁극적 관심의 핵심이라 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얼렁뚱땅 지나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세계를 모르는가? 알지만 청중이 무식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것이 나에게는 불가사의다.
신파조의
신앙
소위 '사랑 예찬'이라고 일컬어지는 바울의 편지(고전 12:31-13:3)를 본문으로 선포된 '가장 큰 은사'라는 곽 목사의
설교에서도 우리는 그렇듯 궁극적인 경험을 할 수 없다. 가장 궁극적인 문제를 다루면서도 전혀 궁극적이지 않은 이 모순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우선 '가장 큰 은사'를 따라가 보자. 곽 목사의 설교가 늘 그렇듯이 이 세상의 방식으로는 인간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점을
부각시킴으로써 사랑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논리를 내세운다. 인간의 욕망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인간을 파괴하는
에로스와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창조적으로 작용하는 아가페를 그렇게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곽 목사의 인문학적 소양이 그런
정도이기도 하고, 이 설교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그러나 그가 설교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그 아가페적인 참사랑을 오해하고
있다면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온전한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출발하여 자기
희생을 방편으로 삼고, 그리고 창조적으로 역사 합니다. 이것이 참사랑입니다. 본문은 사랑은 '은사'라고 말합니다. 헬라어로 '카리스마' -
신령한 선물이라고 합니다(30).
곽 목사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여러 은사를 열거한 다음에 "여러분은 더
큰 은총의 선물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겠습니다.(12:31)"라고 하니까 가장 좋은 길이 곧
은사로서의 사랑이라는 뜻이라고 착각한 것 같다. 바울은 사랑을 은사라고 말한 적이 없다. 신약성서의 다른 본문은 내가 확인하지 못했지만 일단
여기 고린도전서 12,13장에서는 확실하다. 바울은 12장에서 하나님의 선물인 은사의 원리에 대해서 소상히 밝힌 다음, 13장에서 그런 은사와는
질적으로 다른 '가장 좋은 길'로서 사랑을 제시할 뿐이지 사랑을 은사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만약 사랑이 방언, 가르침, 설교, 봉사 같은
여러 은사 중에서 가장 큰 것에 불과하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 4:8)라는 명제는 틀렸다. 은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로써
우리가 최대한 가꾸고 확장시켜야할 대상이지만 사랑은 그런 인간학적 범주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존재론이다. 이럴 경우에만 곽 목사가 인용한 "믿음도
기적도 사랑이 없으면 무가치합니다. 희생도 봉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는 바울의 말은 옳다. 하나님 자체인 사랑을 겨우 은사로
격하시키는 잘못은 곽 목사에게만 일어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 문제를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겠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태를 나름대로 세밀하게 분석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것에 대한 대책이 지나치게 일방적이면서 동시에 '나이브'하다는 점만은 다시
지적해야겠다. 그는 '가장 큰 은사'라는 설교를 이렇게 끝맺는다.
이 세상은 험한 세상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경 쓰지 맙시다. 문제는 나요, 나의 사랑이 문제입니다. 사랑이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사랑의 은사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큰 일은 못해도, 이렇다할 업적, 이렇다할 성공은 없다 하더라도,
내 마음에 불붙는 사랑 - 이것만은 온전하여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앞에 사랑으로 응답하고, 그 큰사랑으로 오늘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거기에 나의 인간됨이 있고, 그것이 성도의 소재(所在)이며, 거기에 믿는 사람이 가는 영광의 길이 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35).
내가 이 자리에서 이렇게 설교의 한 토막만 뚝 자를 경우에 왜곡될 염려가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곽 목사의 설교가 왜 궁극적이지 않고 변죽만 울리는가에 대한 대답만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앞의 설교
'궁극적 관심'도 궁극적인 데 관심을 기울이라고 열을 내면서도 정작 궁극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흐지부지 넘어간 것처럼, 여기서도 '사랑의
은사'를 받아야 한다는 말로 이 문제를 너무나 가볍게 처리하고 말았다. 각각의 단어나 문장은 옳지만, 그것이 전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명확하게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험한 세상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랑의 은사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그야말로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이런 주장은
어쩐지 '이수일과 심순애' 같은 창극의 신파조 대사와 똑같지 않은가?
계몽 같은 미몽
바로 이러한
감상주의적 가벼움이 곽 목사를 비롯한 대개의 명망 있는 설교자들이 안고 있는 태생적 한계이다. 이들은 인간 삶에 개입되어 있는 우주론적 무게를
살짝 건드리는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수박겉핥기 식으로 넘어감으로써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그럴듯한 모양만 갖추고 있을 뿐이지 실제로는 역사 앞에서
매우 무책임하게 살아가도록 부추기고 있다. 이런 가벼움의 현상은 두 방향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기독교 신앙을 기복적 욕망과 일치시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지성과 교양의 욕구에 상응하는 것이다. 여기서 곽 목사의 설교는 두 번째 방향과 맞아떨어진다. <궁극적 관심>에 실린 26편의 설교가 모두 이런 식이다. 이런 설교가 현대의 지성적 기독교인들에게
상당한 호응을 얻는 이유는 당연히 지성적 욕망에 만족을 주면서 동시에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책임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군사
독재가 나쁘다고 말하면서도 세상은 원래 그런 거니까 하나님을 잘 믿고 기도 많이 하면 된다는 식으로 사회와 역사를 변혁해내야 할 그 책임감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물질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그런 악한 세상에 대한 관심을 거둬들임으로써 경제정의를 위한 투쟁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도록 면책시켜준다.
기독교 신앙이 가벼움을 지양한다는 명분으로 종교적 엄숙주의에 빠지거나 사회 혁명의 투쟁에 매번
앞장서야만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런 실제적인 실천의 문제는 자신들이 직면해 있는 상황에서 선택하고 결단해야 할 부분이고, 기독교 신앙은
그렇게 제자도를 실천할 수 있는 영적 시각을 여는 단계까지 언급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영적 시각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삶과 역사의
무게(십자가)를 벗어버리는 계기로 작용한다면 그것은 자칫 민중의 '아편'으로 작용하게 될지 모르겠다.
이런
점에서 곽 목사의 설교는 지성적인 것처럼 보일 뿐이지 실제로는 전혀 지성적이지 않다. 지성으로 위장한 허위의식의 음모이다. 기독교 신자들을
계몽(啓蒙)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미몽(迷夢)에 빠지게 할 뿐이다. 곽 목사의 설교를 아무리 찬찬히 살펴보아도 참된 '앎'(知)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간혹 독일어와 영어를 사용하거나 교부와 종교개혁자, 또는 몇몇 전문학자들을 거론하기는 하지만 너무나 상식적인
수준에서 다루어질 뿐만 아니라 자신의 필요에 따라 왜곡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컨대 마르크시즘과 에로스에 대한 그의 비판을 보라. 인류의 전체
역사를 담아내고 있는 이런 개념을 한 두 마디로 재단한다는 것은 본인의 지적 통찰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말해준다. 내가 교회 강단과 대학 강의실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비판을 하는 건 아니다. 아무리 설교의 선포적 기능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인문학적 소양이 어느 정도 준비된
사람이라면 이런 문제들을 그렇게 일방적으로 재단하지 않고 오히려 존재의 신비에 마음을 열어놓는 자세로 접근할
것이다.
끝으로 곽 목사의 설교를 바둑과 비교해서 혹독하게 비평한다면, 잔기술에 밝지만 깊은 도(道)를 모르는
동네바둑과 같다. 바둑의 세계는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없는 한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동네바둑에 머물러 있는 사람의 눈에는 프로 기사인
조훈현이나 이창호의 바둑이 들어오지 않는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궁극적인 관심을 가르치는 곽 목사의 설교에서 '궁극적인 것'을 전혀
읽지 못하고, 다만 곽 목사 개인의 세련된, 그러나 가벼운 인생관, 또는 감상적인 종교적 수사만 읽었을
뿐이다.
정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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