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스크랩] 통일 문제에 대한 한국 교회의 과제

이아기 2006. 9. 4. 10:49
 

통일 문제에 대한 한국 교회의 과제

박 종 화 교수

(한신대)


I. 통일문제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


첫째, 전제하는 말


 이 글은 ‘한국 기독교의 입장에서’라는 단서를 붙여 분단과 통일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서술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민족의 분단 현실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하고 민족의 통일염원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한다는 당위론에서 출발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당위적 귀결을 향한 주체적 결단과 실천은 분단을 넘어 통일을 지향하는 우리 민족공동체의 실천적 삶의 과제입니다. 그것이 민족의 정의롭고 평화로운 생존과 번영을 위한 전제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국의 기독교’는 분명히 이러한 민족공동체의 일원임을 확인하며 동시에 분단 극복과 통일 성취라는 이중적 과업을 실천하는 과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권리와 책임을 자인합니다. 민족공동체는 민족의 동질성을 전제로 하기에 단일 공동체이지만 이 공동체의 구성원은 직능과 계층, 그리고 사회적 역할에 있어서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의 기독교라는 하나의 구성체가 보는 분단과 통일의 문제점 역시 이러한 다양성 속의 일치를 배경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 기독교라는 구성체의 한계와 대표성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 기독교가 여타의 구성원과의 공생관계에서 대외적으로 보면 하나의 동일집단적 성격을 지니지만 대내적으로는 자체의 조직과 신조 내지는 역사적 전통이 너무도 다양하여 동일한 민족적 과제인 분단 극복과 통일 성취를 보는 시각과 해결방안을 하나의 공통분모로 묶기가 힘들다는 점 때문입니다. 특히 기독교 신자 개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집단 대표성을 물을 때, 그리고 그에 따른 공식적 입장과 정책 방안을 논할 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 한국 기독교라 할 때는 구체적으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를 지칭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분단과 통일이라는 문제를 보는 입장과 실천적 과제에 대한 천명에 있어서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논의하고 공식으로 채택한 것을 바탕으로 삼습니다. 경우에 따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구성하고 있는 6개 개신교 교단이 각기 공식적으로 채택한 통일에 관한 문서와 입장을 보충자료로 삼을 것입니다.

 물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나 그 회원 교단들이 공식적으로 채택한 문서나 선언은 일종의 합의사항입니다. 일단 합의된 공식견해는 수많은 개체교회가 교인들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천되고 반성되고 수렴된, 말하자면 삶으로 확인된 공동체적 합의를 창출하기 위한 전단계적 조치임을 전제로 합니다.


둘째, 통일논의의 전개 과정과 지향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분단 극복과 통일 성취를 신앙 고백적 결단과 당면한 설교적 과제로 공식 채택한 것은 1982년 자체 내에 ‘통일문제연구원 운영위원회’를 상설기구로 조직하고 통일문제를 적극적이고 체계적으로 접근해가기로 결정한 것이 그 시초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통일문제에 대한 전진적 연구나 정책수립이 거의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공개적인 통일논의 자체가 일종의 금기사항으로 위압당하고 있었음은 물론 정책협의회 모임 자체도 정부 당국의 방해와 탄압으로 햇빛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회원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도 1983년 총회에서 ‘통일문제연구위원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했고, 그 이듬해 총회에서는 각 도별 노회에도 똑같은 위원회를 상설위원회로 설치키로 결정한 바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통일문제에 대한 국민 차원 내지는 민간 차원에서의 자발적 연구와 논의가 정부당국의 위압 속에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통일논의가 정부당국의 전유물인 양 금기사항으로 강요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통일이 당국의 정권 안보 내지는 정권 연장 수단으로 악용된 현실 때문이었습니다.

 ‘민족적 주체성’이란 시각에서 보면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었으나 통일논의의 금기를 깨고 민간 차원에서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통일 대책을 수립키로 하고 추진한 계기가 된 것이 바로 도잔소(東山莊) 회의였습니다. 1984년 10월 29일~11월 2일 일본의 도잔소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국제문제위원회가 주관한 “동북아시아 평화와 정의에 관한 협의회(Consultation on Peace and Justice in North-East Asia)”1)가 열렸습니다. 이 협의회는 1983년 캐나다 벤쿠버에서 열렸던 세계교회협의회 제6차 총회가 결의한 평화와 정의 문제에 관한 교회의 적극적 공헌을 실천하는 후속조치로 모인 것이지만 그것이 한국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요청과 발의에 의한 것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북아시아의 상황도 함께 논의되었지만 주요 의제는 한반도의 분단과 통일의 열망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국내가 아닌 국외의 장소를 빌었으나 한국 기독교의 통일에 관한 신앙 고백적 선교적 결단과 책임을 국제회의를 통한 결의로 천명하는 계기가 된 셈입니다. 한국 측에서 상황보고와 함께 ‘한반도 분단현실’ 및 ‘민중신학의 관점에서 본 통일문제’라는 발제를 통해 한국 기독교의 입장이 제기되었습니다.

 이 협의회는 국내 개최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한국 기독교가 국제대회를 플랫폼으로 하여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것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통일문제 접근의 최초의 공식적인 출발로 보아야 합니다. 필자도 동협의회의 참석자로서 이 점을 개인적인 고백으로 확인하는 바입니다.

  도잔소협의회가 제시한 통일문제 접근과 기독교의 활동방향을 위해 5일간의 협의 끝에 채택한 공동결의문을 간략히 서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2)

 도잔소협의회의 공동결의문은 분단 극복과 통일 성취의 과제를 70년대에 벌인 인권운동, 민주화운동과 맥을 같이하는, 평화와 정의를 실현하는 실천과제로 정리하고 먼저 여섯 가지의 공헌 가능한 과제를 설정했습니다.

 첫째는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분단된 이산가족끼리의 접촉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하며, 이를 위해 필요한 국제기구(예 : 세계교회협의회, 국제적십자사, 유엔, 비동맹국들)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통일논의에 국민 모두의 주체적인 참여의 권리가 보장되도록 한국 교회가 앞장서야 하며 이를 위해 국제협력기관의 지원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 일환으로 도잔소협의회와 같은 성격의 국제회의가 한국에서 개최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셋째로 한반도라는 상황의 특수성과 그에 따른 기독교의 행동반경이 제한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여 주변 동북아국가들은 물론 사회주의 국가의 교회들이 체험한 바를 참고로 삼을 수 있는 방안을 강구토록 하자는 것입니다.

 넷째로 남북한 상호간의 뿌리 깊은 오도된 적대관 및 적대관계 극복이 시급하며 이를 위해서는 상투적인 편견과 강요된 적대관 및 선도적 반제국주의론의 과장과 무기화된 반공주의라는 장애를 극복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다섯째로 평화정착을 위한 통일논의의 활성화를 위해 그동안 주도적 참여에서 소외되고 손쉽게 착취의 대상이 되어 온 청년층과 여성층의 광범한 참여를 고취시켜야 한다는 점입니다.

 여섯째로 한반도를 중심한 동북아시아의 긴장과 적대관계를 가장 첨예화시키고 있는 군비경쟁에 제동을 걸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한반도를 겨냥하여 배치된 모든 핵무기의 철거를 위한 운동에 구체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상의 몇 가지 과제를 전제로 하면서 그 준비단계로 취할 수 있는 방안들을 합의했습니다. 여기에는 남북한 당사자간에 상호간의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상황에 관한 정보의 두절 내지는 정보교환의 방해가 우선적으로 극복되어야 하고, 남한의 경우도 그렇지만 특히 북한 사회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정보를 교환할 필요성이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그 구체적인 조치로 세계교회협의회가 아시아기독교협의회와 협력하여 한국 교회와 연대를 맺고 있는 각국의 교회들이 북한을 직접 방문하거나 또는 기타의 방법을 통해서 북한 당국 및 북한 교회와의 접촉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을 제안했습니다.

 도잔소협의회희 결의에 따른 노력들이 몇 가지 형태로 가시화되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세계교회협의회 실무대표단이 1985년 11월 북한을 공식적으로 방문하고 그 결과를 서울에서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북한에는 남한의 경우와는 달리 현재 가정예배 형식의 교회가 평양에 30~40개 정도가 있고, 조선기독교연맹은 3년간의 신학교육 과정을 통하여 그동안 20여 명을 목사를 배출했으며, 찬송과 성경을 출판해 쓰고 있고, 전국적으로 현재 천주교 신자가 약 8백여 명, 그리고 개신교 신자가 1만여 명 가량이라는 조선기독교연맹 당국의 진술을 정보로 보고한 바 있습니다.3)

 이와 함께 특기할 일은 세계교회협의회가 알선하여 남북한 교회 대표자들의 만남이 이루어진 점입니다. 1986년 9월 2일 ~ 5일 스위스 글리온에서 북한 조선기독교연맹의 통역관을 포함한 5명의 대표단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및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회원 교단들과 미국 장로교회, 미국교회협의회, 독일 교회 등의 상호협의회 대표단이 함께 첫 비공식 접촉을 갖고 양 분단 교회 상호간의 통일 성취를 위한 기독교적 공헌에 합의하고, 성만찬 예식을 통한 서로간의 결의를 다진 점입니다. 4)

 그 외에도 도잔소협의회 정신에 따라 두 차례에 걸친 미국교회협의회의 북한 방문과 그 보고, 일본기독교협의회의 북한 방문과 그 보고, 그리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및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회원 교단들과 미국 장로교회, 미국교회협의회, 독일 교회 등과의 상호협의회를 통해 한반도 통일문제에 관한 공동선언이 계속해서 나왔습니다. (이것들에 관한 내용이 「한국 교회 통일문제 주요자료집」에 항목 별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약술한 과정은 한반도의 통일문제에 관한 한국 기독교의 노력이 주로 국제관계를 통해 진척되어 왔음을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한 공개적 통일논의 분위기의 성숙과 함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주체적으로 국내에서의 통일논의를 어떻게 진행시키고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통일문제 접근의 방향과 내용은 다음에서 논의하겠지만 특기할 만한 과정을 간략하게 언급해야 하겠습니다. 먼저 도잔소협의회 이후 최초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회(1985.2.)는 ‘한국 교회 평화통일 선언’을 공식으로 채택했고 1985년과 1986년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주관의 통일문제협의회를 2차에 걸쳐 주최했으며5) 그 기간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거쳐 일차로 민족 분단의 실상을 담은 연구자료를 개교회의 협의회 및 교육자료로 출간했고6) 연이어 1986년과 1987년 9월의 총회 때마다 ‘평화통일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총회선언으로 채택한 바 있습니다.7)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87년 8월, 제 3차 한반도 통일문제 협의회를 개최하고8) 한국 교회의 통일문제 선언서를 작성키로 결정한 바 있습니다. 그 작업을 위해 같은 해 11월과 1988년 1월 두 차례에 걸친 협의회를 통해 통일문제연구원이 초안한 선언서 내용을 검토하는 기회를 가졌으며 최종적으로 마무리한 문안이 1988년 2월 29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회 결의에 따라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회 선언’으로 공식 채택 되었습니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가 만든 최초의 공식 선언으로 평가될 성질의 것입니다. 이와 함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도잔소협의회의 후속협의회를 1988년 4월 25~29일 인천에서 ‘세계 기독교 한반도 평화협의회’로 개최하기로 하였습니다.

 도잔소협의회가 국제협의회를 통한 한반도 통일문제의 공개적 토론의 시효였다면 인천협의회는 한국 기독교가 통일문제를 주체적으로 논의하여 그것을 세계 기독교의 공동관심사 및 선교적 과제로 채택케 한다는 의미가 부여될 것입니다.

  

 셋째, 통일논의의 신학적, 기독교적 입장


 한국 기독교가 통일문제를 놓고 취한 기본 입장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9) 하나는 남북한 당사자간의 합의 서명된 ‘7․4남북공동성명’에 나타난 (1)민족자주의 원칙, (2)평화의 원칙, (3)사상,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한 민족적 대단결의 원칙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 하나는 여기에 기독교로서 두 가지 원칙을 추가한 것입니다.

 첫째로 통일은 민족이나 국가의 공동 선과 이익을 실현하는 것일 뿐 아니라 국가와 민족도 인간의 자유와 복지의 보장을 위해 있고 이념과 체제도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도주의적인 배려와 조치가 최우선이어야 하며 어떤 이유로도 그것이 유보될 수 없다는 인도주의적 원칙입니다.

 둘째는 통일논의에 민족구성원 전체의 민주적 참여의 보장, 특히 분단체제에서 가장 고통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수이면서도 의사결정과정에 항상 소외당해 온 민중의 참여를 우선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민중의 참여우선 원칙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처럼 한국 기독교의 민족통일을 향한 입장은 자주, 평화, 민족적 대단결, 인도주의, 민중 우선이라는 5개 원칙을 바탕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러한 원칙은 기독교의 신앙 고백적 내지는 신학적 입장에서 보면 평화의 정의라는 대원칙의 구조적 받침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존재 이유가 바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평화의 도구화에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평화의 내용은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는 새 하늘과 새땅”(계21:1~3)의 실현이며,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평화와 정의와 기쁩”(롬14:17)이 충만한 하나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한반도의 경우 이러한 포괄적인 하나님의 약속된 평화를 파괴하고 저해하는 요인이 바로 민족분단이라는 비극이며,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를 성취하는 길이 바로 민족통일이라는 신앙 고백적 확신이 통일문제를 보는 기독교의 기본 입장입니다.

 평화를 통일과 접목시킨다고 해서 평화를 평화적 통일이라는 식의, 통일을 위한 방법론으로 삼는 것만이 아닙니다. 평화는 통일의 방법인 동시에 통일의 목표라고 봅니다. 그것은 민족통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위한 통일이어야 하느냐라는 기본문제가 제기되기 때문입니다. 민족분단이 현실적으로 민족공동체의 안녕과 번영 곧 평화라는 삶의 구조를 근원적으로 짓밟고 깨뜨리는 원인이기에 분단 극복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며 동시에 그것은 통일 성취를 통한 평화의 정착과 직접 연관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평화 곧 정치적인 민주화와 자유, 그리고 사회적 경제적인 정의의 실현이 분단 극복과 통일 성취의 초석이고 통일의 궁극적인 목표가 민주화, 자유, 정의가 실현되는 평화라는 것입니다. 이런 각도에서 성서가 말하는 평화는 반드시 정의를 내용으로 또는 전제로 하는 평화인 것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춘다”(시85:10~11)라는 말이나 “정의의 열매가 곧 평화”(사32:17)라는 말이 바로 이것을 뜻합니다.

 한국 기독교는 이런 점에서 민족통일이 바로 정의가 깃든 평화, 곧 정의로운 평화를 한반도에 실현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합니다. 앞서 제기한 5원칙 가운데 인도주의 원칙과 민중 참여 우선의 원칙이 담고 있는 내용도 바로 그것입니다. 국가와 민족 또는 이념과 체제가 인간, 곧 민족공동체라는 집단적 인간의 자유와 복지, 그리고 정의로운 삶의 보장을 위해 있는 것이므로 그 반대의 구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민족구성원 전체의 민주적 참여라 해도 그것은 구체적으로 다수의 민중과 가장 고난받는 민중의 실질적인 참여가 전제되어야 비로소 민족구성원 전체의 참여가 현실적으로 인정될 수 있습니다. 이런 뜻에서 기독교의 민중지향적 파당성은 배타적이 아니라 포괄적 적극성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특히 분단현실의 극복이 통일 성취의 전제조건이라면 분단현실에서 이득을 보는 기득권층과는 반대로, 손해를 보며 고난을 당하는 민중의 삶이 분단 극복과 통일 성취의 핵심적 요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곧 한국 기독교 일각에서 점고되고 있는 민중신학적 관점을 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공식으로 채택하고 있는가를 설명하는 요소입니다.


 넷째, 구체적 실천방안과 제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채택한 통일선언은 먼저 통일운동의 한 주체로서 기독교가 취해야 할 전제를 분단현실에 동참한 과오를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죄책고백’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것은 외세의 강압과 자기 이해에 의한, 그리고 민족 내의 분단세력에 의한 비극적 민족 분단을 기독교가 직접 간접으로 동조하고 지원하면서 분단에 안주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정당화 해준 과오를 고백해야 한다는 자기 반성입니다. 이것은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서만이 아니라 분단현실에 몸담고 있는 평화의 도구로서의 기독교 공동체로서 취해야 할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죄책고백, 다시 말해서 죄책고백적 행동을 대회적 측면과 대내적 측면에서 구체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통일선언의 내용을 중심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10)

 첫째, 대외적으로 남북한 정부에 대한 한국 교회의 전의사항은 다섯 가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 분단으로 인한 상처의 치유를 위하여 이산가족들의 자유로운 만남과 왕래 및 이주를 보장하고 친척, 친지들의 일시적 과오로 인한 후손들의 정치적, 법적 부당한 대우의 철폐가 선행되어야 한다.

 (2) 국민적 참여의 보장을 위하여 정부 당국의 정보 및 통일논의 독점을 포기하고 민간 차원의 통일논의 자유화 보장과 언론의 활성화 및 양심에 따른 비판의 자유 허용이 선행되어야 한다.

 (3) 민족적 대단결을 위하여 남북한 상호간의 적대감과 공격적 비방과 욕설의 중단, 상호간의 자유로운 교류, 통신, 방문의 장, 학술과 문화 및 스포츠의 자유로운 교류, 남북한간의 경제 교류 심화를 실시하도록 한다.

 (4) 남북한 긴장완화와 평화증진을 위하여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해야 한다. 평화협정 체결 후 남북한 상호간의 신뢰회복이 확인되고 한반도 전역에 평화와 안정이 국제적으로 보장되었을 때 주한 미군의 철수와 주한 유엔군 사령부의 해체가 이루어져야 하며, 한반도를 겨냥한, 그리고 배치된 핵무기를 철수해야 한다.

 (5) 민족 자주성을 위하여 외세의 간섭 없는 남북한 상호간의 통일노력과 동시에 민족공동체의 이익에 배치되고 분단 고정화에 기여하는 일체의 대외조약과 협약을 수정 내지는 폐기해야 한다.

 둘째, 대내적으로 한국 기독교가 스스로 담당할 과제는 다음 다섯 가지로 요약됩니다.11)

 (1) 민족분단 50주년이 되는 1995년을 통일을 축하할 수 있는 ‘해방과 희년의 해’로 선포하고 연차적, 단계적 구현 방안을 마련한다.

 (2) 희년을 향한 단계적 통일운동에 있어서 먼저 분열된 교회의 일치를 성취시키며 교회의 권위주의적, 비민주적 내적 구조를 민주적 개방체제로 갱신하며, 사회정의 실현이라는 예언자적 사명을 심화시킨다.

 (3) 평화교육과 화해교육을 위한 자료와 교과 과정을 교회교육훈련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출간하고 실천하도록 한다.

 (4) 화해의 실천을 위하여 매년 남북한 교회가 공동으로 ‘평화와 통일을 위한 주일’을 설정하고 지키며 이를 위한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기도문’을 남북한 교회 공동으로 작성한다.

 (5) 평화․통일을 향한 남북한 교회 상호간의 교류와 협력은 물론 우리와 뜻을 함께하는 세계 각국의 형제 교회들과 평화와 통일을 향한 연대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가도록한다.

 이상의 간략한 과제 설명을 통해서 한국 기독교가 취하고 있는 민족통일에 대한 입장과 실천해야 할 과제를 엿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앞서 처음에 제기한 대로 기독교의 통일선언을 통한 입장 발표는 결단과 결단적 행동을 위한 합의사항입니다. 아직은 구체적 실천을 통해 경험된 합의적 삶은 아닙니다. 물론 통일문제의 인식과 실천과제가 더욱 보강 내지는 확대 심화될 필요가 있음을 전제로 하더라도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 한국 기독교가 받고 있는 평화․통일에의 신앙고백적, 선교적 사명은 이제 기독교 자체의 삶의 방향과 존재 이유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되리라 믿습니다.


 <각주>


1) 도잔소협의회에서 논의되고 채택된 선언과 자료는 WCC/CCIA(편), Peace and Justice in North-East Asia. Prospects for Peaceful Resolution of Conflicts (WCC/CCIA,1985.1)로 출간되었다. 이 자료집의 결의문 부분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통일문제연구원(편) 『한국 교회 통일문제 주요자료집』(1984.10-1987.5)7-11면에 번역되어 나와 있다.

2) 위의 자료집 Peace and Justice in North-East Asia, pp. 8-15와 『한국교회 통일문제 주요자료집』pp. 7-11 에 실려 있다. 중요한 것은 본 공동결의문의 3/4 가량이 한반도의 분단 극복과 통일 성취 곧 세계의 평화, 정의실천에 초석이 되는 내용으로 할애되고 있다는 점이다.

3) 「WCC북한방문 보고」(1985.11.11-19)는 『한국 교회 통일문제 주요자료집』, 18-21쪽에 실려있다.

4) Glion회의의 만남과 내용은 WCC 월간지인 One World(No. 120, 1986 Nov) pp. 3-7에 특집으로 실려있고 동시에 『한국 교회 통일문제 주요자료집』, 39-43쪽에 내용만 번역되어 있다.

5) 『한국 교회 통일문제 주요자료집』, 12-13쪽 참조.

6) 같은 책, 14-17쪽, 31-38쪽 참조.

7) 한국 기독교장로회/평화, 통일문제 연구위원회(편) 『분단의 원인과 민족공동체의 상실』, 평화․통일자료Ⅰ(1986)

8) “평화․통일에 대한 우리의 입장”1:한국기독교장로회 「회보」 1986/11,31쪽 “평화․통일에 대한 우리의 입장”2:1987/11, 22쪽.

9)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통일문제연구원(편) 「제3회 한반도 통일문제협의회-보고서), 1987.

10)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 (1988.2), 11-13쪽 참조.

11) 같은 선언서 13-23쪽 참조.


 Ⅱ. 남북교류와 선교의 과제


 ‘남북교류와 선교의 과제’라는 테마는 기본적으로 남북간의 교류가 가시화된다는 전제 하에서 민간 차원의, 특히 기독교의 역할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본 발제는 기독교만이 해야 하는 또는 할 수 있는 특유의 역할이 무엇이냐의 관점보다는, 민족통일이라는 민족의 삶 전반에 걸쳐 이루어져야 하는 공동의 과제를 놓고 기독교가 함께 할 수 있는 생산적 공헌이 무엇이며 또 어떤 원칙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제시해 보려고 합니다.

 특히 선교적 과제라고 할 때 그것을 단순히 대 북한 선교정책 또는 북한 복음화를 위한 남한 교회의 과제로 축소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통일이 어차피 남북한 쌍방의 쌍무 과제이지 남북한 어느 일방의 일방통행식 과제가 아닌 이상, 기독교의 선교과제 역시 남북한 기독교의 쌍무 과제라는 측면에서 신앙적․신학적 공감대 형성의 기반과 구체적 과제들을 제시해 보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발제는 남한 교회의 입장이라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앞으로 북한 기독교화의 교류가 진전되어 공동의 선교과제를 합의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런 전제 하에서 교류와 선교는 분리될 수 없는 통일의 과정이요 내용이라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남북교류의 기본전제는 분단민족 그리고 분단교회 쌍방의 ‘화해공동체’형성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 인간과 인간의 세계와 화해하신 사건은 인간의 죄로 인해 생겨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적대관계를 허물고, 죄로부터 해방시켜 자유를 누리는 새 생명으로 인도하신 사건입니다. 이러한 화해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구원의 교류가 이루어지며, 하나님이 하시는 선교의 힘이 바로 화해되지 못한 인간과 세계를 구원하시는 화해의 일인 것입니다.

 오늘날 한반도의 상황에서 화해공동체가 가져야 할 화해는 두 가지 측면, 즉 소극적 측면과 적극적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소극적 의미의 화해는 분단된 민족 상호간에 누적되고 고질화된 ‘적대관계’의 극복과 청산입니다. 적대적 용어, 적대적 사고, 적대적 군사대치, 적대적 도발행위 등이 극복의 대상입니다. 적대 관계의 해소는 먼저 적대 관계를 정당화시키고 또는 침묵으로 수용하면서 살아온 죄책에 대한 고백과 고백적 행동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예컨대, 북한의 남조선 무력적화통일 전략 속에 표현된 적대의식과 남한의 교조적 반공주의 속에 내포된 적대의식의 삶을 청산하는 과제가 그것입니다.

 적극적 의미의 화해는 적대적 이질성을 극복하면서 동시에 동반자적 동질성을 생산적으로 만들어가는 공동의 노력입니다. 적대적 이질성이 억압과 속박의 구조를 만들었다면, 동반자적 이질성은 분단 구조의 구조악에서 ‘해방된 자유’를 구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남북한의 민주화, 자유화가 갖는 통일지향적 의미입니다. 화해공동체는 이런 뜻에서 해방공동체, ‘자유인의 공동체’로 구현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화해의 양면성은 비단 남북 분단 민족 상호간에만 국한될 수 없습니다. 적대관계를 강요한, 말하자면 분단을 강요한 강대국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이들 국가의 교회들로 하여금 죄책고백적 행동에 동참하도록 해야 합니다. 동시에 해방과 자유를 심는 한반도의 화해공동체 형성에 혼신하여 참여토록 선교적 과제를 이들과 공유하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양면의 대외적 과제가 곧 남북한 교회가 촉진해야 할 에큐메니컬(ecumenical) 연대성의 구체적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화해공동체를 출발로 삼는 선교적 과제는 그 내용이 ‘평화공동체’ 형성임을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화해의 사역을 선교적 사명으로 부여받은 한반도의 기독교는 척결해야 할 적대관계의 장벽 또는 억압과 속박의 장벽이 ‘분단 구조’의 양면 장벽임을 직시해야 합니다. 적어도 보안은 남북한 쌍방의 사회악의 근원입니다. 일종의 사회구조적 ‘원조’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구조악인 분단을 고착화 내지는 정당화하는 이념․체제․제도․삶의 방식 등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과 저항이 바로 선교적 과제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언자적 선교사명을 수행하는 기독교는 필연적으로 비판적 저항의 공동체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곧 화해를 저해하는 근본적인 악의 구조에 대한 화해의 선교가 빚어내는 ‘귀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판적 저항은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습니다. 해방된 자유를 창조적으로 구현하려는 민족 구원을 목표로 할 때 취해지는 과정입니다. 해방시키는 자유가 보장되는 이념이나 체제 또는 제도의 내용이나 정책적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것은 기독교적 선교가 떠맡을 수 있는 고유의 영역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그러한 대안적 노력에 참여하면서 기독교는 그것이 원칙적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샬롬’의 선포와 실현임을 밝혀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샬롬은 억압과 압제로부터 해방시키며 착취와 불의에서 해방시키는 평화입니다. 곧 그것은 ‘자유와 정의가 깃든 평화’라고 요약하여 정의할 수 있습니다. 사회구조적으로 말하면 정치적, 사상적 자유와 사회적, 경제적 정의가 기본적으로 보장되는 평화인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통일이 아니라 자유와 정의를 기저로 하는 평화 구조의 실현의 매개물로서의 통일이어야 합니다. 이런 평화 구조가 결여된 통일은 또다시 하나의 억압과 불의라는 반평화적 상황이 벌어지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뜻에서 KNCC의 통일 선언에 자유와 정의와 안전이 전제되는 인도주의 원칙을 포함시켜 놓은 것은 매우 타당한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셋째, 화해와 평화를 추구하는 통일선교의 주역인 남북한 기독교는 ‘상호간의 사실상의 인정’을 선언해야 합니다.


 남북한 쌍방이 통일 국가 및 통일민족공동체를 제도적으로 확립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중간단계적 공존, 곧 ‘평화공존체제’가 필수적이라 생각됩니다. 이 점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남한이 말하는 한민족 공동체 형성방안과 북한이 말하는 연방제 통일 방안에 부분적으로 합치되고 있습니다. 결국 남북교류는 실제로 이런 중간단계적 상호 인정 내지는 평화공존체제의 출범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호 인정이 없는 교류는 진정한 교류일 수 없으며, 단지 일방적 합병이나 정복을 호도하는 거짓 술책일 수 밖에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상호간의 상이한 체제․사상․제도․정부․사회구조를 상이한 대로 인정하는 전제 하에서만 교류와 협력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남북한 기독교의 경우 실체의 신앙적․신학적 정통성이나 신실성 여부에 대한 판단과는 별도로 현실적으로 서로 다른 여건과 체제 속에서 상이한 기독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남한의 ‘KNCC’와 북한의 ‘조선기독교연맹’이 그동안 수차례의 접촉과 교류를 간접적인 방법으로나마 수행한 데에는 이러한 상이한 실체대로의 상호 인정이라는 평화공존적 자세가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북한 교회의 형태를 동구라파 교회의 성격을 닮은 ‘사회주의 속의 교회’로 규정해도 무방하리라고 봅니다. 그것은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 또는 주체사상적 체제 속에 몸담고 있는 실체로서의 교회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북한을 포함한 공산권 교회와의 교류와 협력을 다지는 데 있어서 자유 세계 교회들 중에서 신앙적 순수성을 내세워 소위 ‘지하교회’와의 접촉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음도 사실입니다. 북한의 지상교회 형태인 ‘연맹’에 소속되지 않은 지하교회와 선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류는 ‘다양성 속의 일치’라는 측면에서 일리가 있습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북한의 지하교회가 어떤 형태로 존속하며 실체가 어떤 것인지는 개별적 단위말고는 확인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북한 체제나 사회 내에서 가시적 사회구성체를 형성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남한의 공교회가 공식적으로 파트너로 삼는 데 현실적인 문제가 있으리라고 보여집니다.

 남북한 쌍방의 기독교의 상황적 실체를 그것대로 인정한다고 할 때 그것은 그 실체를 변화불가의 절대가치로 삼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무리 진실된 교회라 해도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표징으로서 부분적이며 임시적일 뿐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화신일 수는 없습니다. 곧 북한의 교회-지상교회든 지하교회든-는 물론 남한의 교회도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도구로서 항상 ‘자기비판적’이며 변혁을 전제로 하는, 개방성을 전제로 삼아야 합니다. 이것은 비단 교회 형태만이 아니라 남북한의 체제․이념․제도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한반도 현실에 있어서 남북한 기독교 모두 현실적으로 극복되어야 할 적대적 분단 상황에 자기를 동일화시킨 역사적 실체를 표출하고 있다는 한계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며, 통일 선교라는 미래지향적 과제를 놓고 보면 자기 변혁적 개방성은 필연적인 귀결입니다.


넷째, 남북한 기독교 교류가 쌍방의 사실적 실체 인정을 출발로 할 때 각기의 선교적 사명은 ‘자주적 선교’의 형태를 띠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역사적 실체가 상이하다는 말은 곧 그 기독교의 선교 과제에 있어서 형태가 상이할 수 있다는 말과 통합니다. 오늘날 남한의 교회가 ‘북한 선교’ 내지는 ‘북한 복음화’를 위해 준비하고 노력하는 것도 갸륵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분단된 현실을 정당화하고 남한식 역사적 상황에 틀에 짜인 기독교의 모습을 북한에 이식한다는 발상이 전제되는 한,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시도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북한 교회로부터의 자발적 요청이나 또는 상호간의 동반자적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닐 경우는 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의 소견으로는 남한 교회와 북한 교회가 신앙고백과 신학에 있어서 형태의 다양성을 전제한다 하더라도 성서적 진실성과 그에 따른 선교적 성실성을 함께 모색할 수 있도록 하는 공동광장을 마련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한 선교협력 방안이라 생각됩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남북한 교회가 함께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구체적 기독교 연합 운동의 활성화를 제시하고 싶습니다. 예컨대 WCC라는 세계 기독교연합체에 함께 참여하여 세계 속의 다양한 신앙고백의 모습과 다양성 속의 일치를 훈련할 수 있고 상호간의 협력과 연대를 다지는 공동광장의 활성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공동광장을 공유하는 가운데서 침해받지 않는 상호간의 주체성을 생산적으로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남북한 기독교의 연결을 매개하는 세계 여러 나라 교회의 협력을 다기화함으로써 혼란에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을 예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북한 기독교 상호간의 ‘신뢰성 구축’을 제도적으로 담보하는 구조가 마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뜻에서 남북한 기독교의 선교협력 관계는 ‘에큐메니컬 연대성’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지혜를 키워나가는 데서 국제적 교회와 선교를 공고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섯째, 통일선교를 공동의 과제로 삼는 남북 기독교는 세계적 지평을 지니면서도 진실된 ‘민족교회’로서의 자기 위상을 공유해야 하며, 민족교회는 동시에 ‘민중 우선의 민족교회’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민족은 국수주의 내지는 폐쇄적 민족주의를 견지한 민족이 아닙니다. 기독교 복음은 인종과 언어, 민족의 차이를 넘어서는 보편적 진리의 복음이지만, 그 보편적 진리가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경험되는 현장은 바로 우리 한반도의 경우 분단 민족의 삶의 현실입니다. 분단 민족은 화해되지 못한 분열된 하나님의 백성이고, 통일 민족은 화해되고 하나 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런 뜻에서 민족교회는 분단의 상처를 위로하고 통일의 기쁨을 맛보게 하는 민족공동체적 교회이어야 합니다. 이런 교회는 여타의 다양한 민족교회들과의 상호 인정과 교류와 협력을 전제로 하는 개방된 민족교회입니다. 이런 점에서 히틀러 나치 하의 독일 민족주의 교회와는 전혀 성격이 달리합니다. 여기서 남북한 쌍방이 분단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추구하는 ‘민족 자주’가 개방적 자주로서 지켜져야 하며, 민족교회의 형태도 ‘민족자주의 교회’로써 공동기반이 형성되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민족교회의 구성원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민족구성원 모두의 교회입니다. 다만 불의한 분단 구조에서 희생을 당하며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민중’의 정당한, 민주적 참여가 보장된 민족교회이어야 합니다. 분단의 비극이라는 상황에서 볼 때 우리 분단 민족은 분명히 국제적으로 보면 민중적 위상입니다. 민중적 위상에서의 해방된 자유가 통일로 연결될 대 민족 자주의 꽃이 피어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민족 자주와 민중 해방은 -오늘날의 경직된 이념도식적 판단을 제외시키면-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민중 해방이 포함되지 않는 민족 자주는 실제로 기득권층만의 자주라는, 또다른 불의의 분단 구조로 귀결될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만민을 구원하시는 복음을 먼저 가난한 자에게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도 바로 이런 뜻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바로 민족 자주의 교회와 민중 해방의 교회가 결합된 민족교회로서의 공감대가 통일선교의 과제로서 제시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섯째, 몇 가지 선교 실천 과제


 남북한 기독교 교류와 선교과제 수행을 위해 KNCC가 제안하고 북한 조선기독교도연맹이 수용한 ‘통일희년’을 위한 연차별 계획과 실천 방안이 모색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1) 이미 WCC 회원 교회들이 함께 지키기로 작정한 8.15 직전 주일의 ‘평화․통일 주일’ 행사를 북한의 기독교는 물론 남한의 교회 전체가 합의하고 지키는 일을 시도해 보는 일입니다. 이것은 적어도 남북 통일의 문제를 예배와 기도와 찬양으로 시작하는, 지극히 신앙적인 출발이라는 점에서 남한의 갈라진 교회들간의 일치는 물론 남북 기독교의 일치, 그리고 세계교회들간의 일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고 여겨집니다.

 (2) 평화통일 주일을 위해 남북 교회간, 세계 교회간 합의 작성된 ‘공동기도문’의 활용을 적극 권장하고 싶습니다. 이와 함께 남북한 및 남한 교회들이 서로 합의하는 ‘공동찬송가’와 ‘공동번역성서’의 발간을 시도함이 좋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3) 교회 교육에 있어서 심화축적된 분단 교육을 극복하는 통일 교육적 교재와 교육자료가 속히 나와야 합니다. 곧 통일 지향의 ‘평화교육’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하며, 남한에서는 반공주의와 신앙을 동일시하는 듯한 과오를 청산하고, 북한에서는 아직도 포기되지 않은 남조선 적화통일 노선과 신앙이 동일시되는 과오를 청산해야 합니다.

 (4) 남북한 기독교의 상호교류는 현재 WCC를 매개로 진행되고 있는 ‘KNCC-기독교도연맹’의 쌍무관계가 가시적으로 확대 심화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집니다. 동시에 교류 파트너의 공유를 위해 남한 교회 자체 내의 상호협력체 구성을 서두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협력체 구성과 함께 북한 교회들과의 자매결연 관계를 추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매결연 관계는 교회 단위가 아니라 지역 단위별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불식되어야 할 교파주의의 이식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지역 단위의 초교파적인 일치의 표현으로 실천될 성질의 것이라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형식은 앞으로 점차 뿌리내릴 ‘지방자치’와도 걸맞는 교회일치운동의 한 모델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5) 남북교류 문제와 남북한의 현실은 적대적 군사대결이라는 군사 안보의 차원을 중시해야 하는 현실입니다. 이 경우 남북한 기독교는 지금까지처럼 힘의 우위 확보를 전제로 하는 군비경쟁을 통한 일방적 군사안보체제나 사고를 불식하고 남북한 모두를 위한 ‘공동안보체제’ 형성을 촉구하는 운동을 전개해야 합니다. 공동안보체제의 문제는 비단 현재의 적대적 보안 구조의 연성화는 물론 동반자적 관계 성립에도 관건이지만, 통일 이후의 건전한 민족 안보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예컨대 KNCC가 제의하고 있는 한반도의 비핵지대화 운동, 평화협정체결을 통한 평화구조의 제도적 장치 마련, 쌍방의 군축을 전제로 하는 주한미군의 철수, 군축과 동시에 평화산업에로의 투자 전환 등의 요구가 바로 원칙적 측면에서 평화 지향의 공동안보를 위한 노력임을 엿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러한 공동 안보 추구는 한반도의 샬롬화를 위한, 가장 어려우나 가장 기초적인 최소공배수적 공감대이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Ⅲ. 통일 이후의 교회와 한반도 선교, 그리고 세계 선교


 첫째, 통일 전․후의 인식


 우리가 추구하는 통일은 민족통일이고 그것은 분단으로 인해서 깨진 민족통일체가 통일되는 민족공동체의 회복입니다. 물론 통일이 가져다 줄 민족공동체의 회복은 성격상 분단 이전의 민족공동체로의 환원일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민족은 분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민족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공동체적 생명체로 살아가는 한 분단 시절에도 나름대로 분단 시절의 삶을 무효화시키거나 지워버린 채 분단 이전의 상태로는 환원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론적으로도 성립되지 않으며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통일로 맞는 민족공동체는 적대적 관계가 화해된 관계로 변화하고, 화해 과정을 통해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지향하여 남․북 쌍방의 공동체적 삶에 대한 인식과 삶의 방식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남과 북이 쌍방의 발전적 해체 과정을 거쳐 하나의 통일국가와 통일정부를 구성한다 해도 그것은 민족공동체적 삶의 외형적 구조가 완료된 것을 뿐 내면적 삶까지 하나로 귀일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정치적으로 통일된 국가를 성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 공동체적 삶의 내실화를 위해 내부의 갈등과 인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통일독일의 경우에서 그 실상을 분명히 엿볼 수 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통일국가 또는 통일정부 수립 이전이라도 민족공동체적 결합이 부분적으로라도 성취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두 체제 내지는 두 국가로의 외형적 분단에도 불구하고 쌍방간에 ‘민족 내적 관계’로 곧, 상당부분 적대관계를 청산한 화해된 관계로 살아가는 방식이 그것입니다. 비록 세계적 냉전구조가 퇴조하지 않은 상황이면서도 상호 인정과 공존으로 살아간 통일독일 이전의 동서독 관계가 부분적으로나마 이를 입증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여기서 화해된 공존이라는 틀을 일차적 통일로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공존과 상호 인정의 명시적, 공개적 합의의 틀이 마련되어야 민족공동체적 교류와 협력이 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이 단계에서 상호 인정과 평화 공존의 제도적 정착을 위한 정치적 사회 조건들이 어떤 것이냐 하는 문제는 또 다른 차원의 토론이기에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우리가 말하는 ‘선교’의 입장에서 보면 통일국가 형성 이전이라 하더라도 상호 공존과 보류가 보장되는 시점이 곧 통일 이후의 선교가 가능한 시점이라 파악됩니다. 말하자면 선교가 통일의 시작이라는 말입니다. 그 이전의 단계에서는 실질적 의미에서 선교가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적대적 대결 속에서 선교란 -실제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기껏해야 남의 북에 대한 또는 북의 남에 대한, 일방적 정복주의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에 남북한 내부에서 벌이는 절대적 이데올로기의 심화에 직접, 간접으로 공헌하는 반선교적 결과만 낳고 맙니다.

 진정한 의미의 선교는 실제로 남북한의 교회가 그 형태의 다양성 내지 성격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선교도구적 주체임을 상호 인정한 바탕 위에서 선교협력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둘째, ‘한반도 선교’의 가능한 조건들


 (1) 통일 이후의 선교는 ‘북한 선교’가 아니라 ‘한반도 선교’이어야 합니다.

 북한 선교 내지 북한 전도는 선교에 있어서의 쌍방성을 무시하거나 도외시한 일종의 정복주의의 발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은 발상 자체에 있어서도 문제지만, 현실적으로도 그런 식의 선교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특히 선교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선교의 형식도 중요합니다.

 분단으로 인한 적대관계가 화해된 동반자 관계로 탈바꿈하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한반도 선교’라는 상호 존중과 인정의 구조가 수립되어야 합니다. 남한 교회가 양적 성장과 물량적 부와 신학적 수준에서 북한 교회와 비교하여 월등한 것임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이 점이 바로 통일 이후를 대비하는 남한 교회의 성실하면서도 진정한 선교 태도입니다. 북한 교회가 현실적으로 ‘연약한’ 단계의 교회임을 인정하는 데 인색함이 있어서도 안 되지만, 남한 교회 스스로 수량적인 상대적 우위 때문에 자신을 절대화 내지 자만화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위선입니다. 완전한 교회는 있을 수 없으며 이제 만들어져 가는 과정에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스스로 개혁하는 교회’의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합니다.

 (2) 통일 이후의 선교는 남북한 교회가 공동으로 공개적인 ‘죄책 고백’을 선언하는 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또는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남북한 교회는 실제로 분단체제를 옹호 내지는 정당화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도 분단체제가 냉전시대의 유물인 적대관계를 띠면서 남북교류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화해의 복음에 역행하는 엄청난 죄를 범해왔습니다. 절대적 이념, 절대체제를 신앙과 신학의 양면에서 복종해온 결과는 화해를 향한 통일선교에 앞장서야 할 남북한 교회의 반선교적 작태를 단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실례로 적대관계의 배후에는 남한의 입장에서 보면 북한 공산당 치하의 엄청난 기독교 핍박과 탄압, 그리고 6.25전쟁 때의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경험적 현실이 있습니다. 그리고 입장을 바꾸어 북한의 입장에서는 남북이 전쟁중 서로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과 한국군이 북진하면서 저지른 무차별 폭격과 파괴 행위로 인해 - 심지어 심리적으로 안전하다 하여 피신한 교회까지도 - 동족상잔의 비극이 가슴속에 사무쳐 있는 현실도 적대관계의 심층적 단면입니다. 남과 북에 흩어져 있는 이산가족의 한이 바로 이 모든 신앙 외적인 요인들로 빚어진 비극의 희생물입니다. 따라서 한반도 선교는 먼저 쌍방이 서로간에 의도하지 않았던 엄청난 한과 상처를 치유하는, 그리고 화해하는 죄책 고백적 선언과 행동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3) 통일 이후의 선교는 교파 단위별 또는 선교단체 단위별 각계각층이 아닌 통합 조정된 방식이어야 하며, 북한땅에 세워질 교회의 성격도 교파 교회가 아닌 연합 교회의 형태이어야 합니다.

 북한 교회의 현실은 남한 교회의 상황과 성격을 달리합니다. 북한땅에 실존한다고 보는 소위 ‘지하교인’ 또는 집단화된 ‘지하교회’의 문제는 공적인 선교의 차원에서 볼 때 고려의 대상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선교를 위한 접촉과 교류 과정에서 그것이 양성화되면 그것은 이미 지하교인도 지하교회도 아니게 됩니다. 현재 공적 기구의 성격을 띠고 있는 조선기독교도 연맹이 필시 선교 협력의 파트너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은 이 연맹의 성격과 구성요인에 대한 논란과는 별도로 현존하는 사실입니다. 공개화된 교회기구로서의 북한 교회는 또 교파성을 전혀 띠고 있지도 않습니다. 이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조선기독교도연맹은 지금까지 7차에 걸친 만남과 교류를 통하여 교파교회적 성격도 기구화도 전혀 고려할 수 없고 또 그럴 필요성이 전혀 없다는 점이 확인되었습니다.

 결국 북한땅에서의 선교에 남한 교회가 어떤 형식이든 공헌할 수 있고 또 공헌해야 한다는 점이 분명한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선교에 있어서 범교파적 통합 선교가 아닌 교파별 경쟁선교에 익숙한 남한 교회가 자신의 그런 선교 형태를 북한에 이식하고 확대 적용하려는 의도는 처음부터 포기해야 합니다. 오히려 북한에 세워질 일종의 ‘연합교회’를 위해 범교파적으로 합의된 선교 전략을 지금부터 강구해야 합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통일 이후의 한반도 전체에 적용될 수 있는 선교를 위한 교회 일치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곧 남한 교회의 교파적 분리를 극복하는 연합교회적 일치를 남한 교회들 스스로 준비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현재 교파교회적 분열구조를 지역 단위별 연합교회로 탈바꿈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결국 선교의 문제는 지역 사회에 봉사하는 선교공동체적 결속의 문제와 직결되고 또 앞으로 성취될 지방자치 시대에도 부응하는 방안이 될 것입니다. 선교 현장으로서의 ‘지역’ 내지는 ‘지방’에 따른 일치의 모색입니다. 지역 단위별 일치는 통일 이후에 있어서 남한은 물론 북한의 현실에도 적용 가능한 방법일 것입니다. 

 (4) 통일 이후의 한반도 선교를 위한 남북 교회간의 공동목표와 지향점을 합의해야 합니다. 이 합의점은 ‘평화선교’에서 분명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선교의 문제에 있어서 개인 전도 내지 개인 구령의 문제는 토론의 필요가 없는 당위적 문제입니다. 문제는 개개인의 회심과 중생 경험으로 신자를 가리는 결과는 남북이 같을 수 있으나 그것으로 곧 남북간의 다양한 체제나 이념을 자동적으로 극복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성실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 정치이념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시에 북한의 경우 인민민주주의 선봉자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북관계에 있어서 기독교 선교가 민족 화해와 민족 구원에 가시적으로 협력하고 공헌하는 방법은 역시 개인 구령 이후에도 상존할 수 있는 집단적 공개적 차원의 화해된 공존을 어떻게 이루어내느냐의 문제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체제나 이념 문제의 통합이나 합일점 이전에 또는 그 이후에도 기독교 정신으로 보아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 곧 하나님의 약속인 샬롬을 이룬다는 근본적인 목표에 합의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럴 경우 샬롬 선교의 목표달성을 위해 상호 인정과 공존의 정치 이념적 틀인 이데올로기와 체제를 샬롬을 위한 도구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평화실현의 도구로서의 공존체제는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정당화하거나 절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샬롬을 중심한 내적, 외적 갱신과 변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런 뜻에서 평화선교는 성격상 이데올로기 비판적 기능을 동시에 내포할 수밖에 없다고 여겨집니다. 여기에서 평화선교가 기존 분단체제 속에 담겨진 안보, 정치, 경제, 체제 문제 등에 비판적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본 입장과 합의점에 도달하면 남북한 교회 상호간의 신학 교류, 강단 교류 및 교회 개척을 위한 경제협력 등의 문제는 부수적으로 어렵지 않게 해결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셋째, 세계선교를 위한 역할의 문제


 (1) 통일 이후의 한반도 교회는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선교협력 관계에 유념해야 합니다. 곧 동구라파 교회들과의 상관성에 대한 이해입니다. 특히 소련을 비롯한 ‘동방정교회들’과의 교류와 협력이 중요한 관건입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세계 교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프로테스탄트 교회들 상호간의 관계에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동방정교회와의 교류 협력에도 폭과 깊이의 확대․심화의 차원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시에 정치 체제로 보면 이들 교회들의 현 실체인 ‘사회주의 속의 교회’와의 교류․협력이라는 데에 또 다른 차원이 고려된다는 점입니다. 이 두 가지 측면이 남북 교회 상호간의 관계에서도 고려되고 구현되어야 할 사항입니다.

 (2) 한국 교회가 하나의 성장한 자주적 교회로서의 피선교지 교회를 넘어 선교하는 교회로 탈바꿈하면서, 특히 제 3세계 교회들과의 선교 협력의 문제가 시급히 토론되고 그에 대한 선교 정책이 세워져야 합니다.

 실제로 현재 제3세계에 파송된 한국 선교사가 600여명에 이를 정도로 이미 확대된 것이 사실입니다. 짧은 역사지만 이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반성이 뒤따라야 합니다. 말하자면 그동안 제3세계 교회들이 제1세계 교회들에게 퍼부었던 식민주의적 또는 제국주의적 선교 형태를 오늘날에는 한국 교회가 실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심각한 지적에 대해 반성과 수정이 뒤따라야 합니다.

 이와 결부시켜 선교대상권 교회의 자주적 주체적 역량을 최대한 존중하는 선교 정책, 그 교회에 대한 올바른 상황 인식, 그리고 파송될 선교사들의 자질 훈련, 재정적 선교 협력의 합리적 운용, 그리고 교파주의적 내지는 선교 단체의 개별적 약진을 담는 분열된 선교가 아닌 토착교회와 연합적 성격을 띠는 통합선교전략과 정책수립의 문제 등이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 예수중심 JESUS CENTERED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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