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이와 남는 이를 위한 목회적
배려
김 호 식 목사
(예닮교회)
Ⅰ. 서 론
죽는 이와 남는 이를 위한 목회적 배려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누어드린 인쇄물을 보면 “죽음을 둘러싼 목회 상담적 배려는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분야이다. 만일 종교가 사회에서 역할을 상실하는 날이 온다고 가정하더라도 마지막까지 남은 종교의 역할은 죽음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 한국에서 사람이 죽으면 기독교, 불교, 유교 중 어느 한 종교의 의식을 통하여 매장하게 되지 아무 의식도 없이 묻을 수는 없다. 어떻게 보면 목회자를 가장 필요로 하는 일이 인간의 죽음과 관련된 일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미나의 마지막 시간에 인생의 마지막인 죽음에 대해서 강의한다고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 것입니다. 우리들은 대단히 많은 죽음을 보아 왔고 또 많은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목사들은 죽을 때 아주 의연하고 꿋꿋하게 죽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삶은 죽음의 연속입니다. 우리 목사들은 평소에 죽음 앞에서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죽으면 대단히 고요하고 평화롭고 거룩합니다.
Ⅱ. 본 론
제가 몇 해 전에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목사님들을 모아 놓고 강의했던 적이 있는데 그 제목이 ‘죽음학’이었습니다. 의사 측에서는 장기려 박사님과 김명호 박사님이 나와서 강의를 했습니다.
연세대학 명예 교수이신 김명호 박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자기는 하루에 목사님들보다도 훨씬 더 많은 시체를 본다는 것입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주검을 보는데 그 모습을 보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금방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죽음이 예고되어 차차 죽은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순간적으로 ‘끽’하는 순간에 몇 명이 함께 죽었다고 하더라도 시체를 보면 크리스찬과 넌크리스찬이 금방 표가 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평소에 그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 주검의 얼굴에 다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개 목사 죽었는데 얼굴이 흉하더라’라는 소문이 나면 안될테니까 우리가 죽었을 때 엷은 미소를 지으며 죽을 수 있도록 평소에 웃는 모습도 훈련을 많이 해두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엘리자베스(Elisabeth Kὕbler-Ross)는 시카고의 정신과 의사인데 암이나 간경화 등 죽을 병을 선고받고 차차 죽어가는 환자 2백 명을 면접하여 기분과 느낌 등을 물어 책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과 죽는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염이라고 하는 분이 번역해서 「인간의 죽음」이라는 제목을 붙여 그것을 분도출판서에서 펴냈습니다.
첫 번째 “당신은 암입니다”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예? 암이라고요?”라고 하며 어떤 사람은 털썩 주저앉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드러눕기도 하는 그런 큰 변화가 옵니다. 사람은 다섯 단계를 거쳐서 죽음을 받아들이며 점점 죽어갑니다.
1. 죽음의 다섯 단계
첫째, 부정(denial)의 단계
불치의 병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으면 첫 번째로 나타나는 반응은 그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환자도 ‘내가 암이 아닐걸.’ 그렇게 생각하고 가족도 암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내가 간경화라고? 술도 안 마시는데! 그럴 리가 없어.” “왜 내가 소화도 잘 되는데 위암이라고 그래?” 그래서 이 병원 저 병원을 찾아다닙니다. 먼저 의사의 진단이 잘못되지 않았는가 생각하고 ‘닥터 쇼핑(Dr. shopping)’을 합니다. 물건 사러 다니듯이 여기저기 병원을 다닌다고 하여 닥터 쇼핑이라고 합니다. ‘다른 환자의 자료와 자신의 것이 바뀐 게 아닐까, 혹시 촬영한 것이 바뀐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떤 환자는 병이 없는 것처럼 말합니다. 목사가 가서 “어제보다 좀 어떠세요?” 목사가 보기에는 어제보다 훨씬 더 나빠졌는데도 “예 목사님, 많이 좋아졌습니다”라고 합니다. 그것은 목사를 위로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자기가 너무너무 살고 싶고 자기의 병을 부인하고 싶어서 나오는 심리적인 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 의사나 목사는 진실한 이야기를 어떻게 납득시키느냐 하는 것이 퍽 고민이 됩니다.
둘째, 분노(anger)의 단계
“왜 하필 내가 죽어? 나보다 더 나쁜 놈도 잘만 사는데 하나님은 너무 불공평하셔. 왜 많은 사람 중에 내가 하필 죽어야 하나?” 그렇게 화를 냅니다. 의료인과 목회자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환자가 화를 냅니다. 짜증을 냅니다. 혼자 내버려두면 병상 시트를 깨끗이 갈아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고 “이 망할 놈의 병원!”이라고 욕하며 의사를 욕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이라고 목사를 욕합니다.
“목사님, 지난번 심방하신 후 일주일 만에 오셨습니다.”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왜 자주 안 오십니까?’ 그런 뜻이죠. 또 친구에게 문병 안 온다고 ‘친구도 다 나쁜 놈들이야. 쓸데없는 놈들이야. 그 놈들 내게 돈 빌리러 올 때는 웃고 찾아오더니 내가 이렇게 죽을 병 걸리니가 찾아오지도 않는군’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갑니다. 그런데 의사나 친구나 목사나 남에게 욕하는 것은 그래도 참을 수 있는데 제일 어려운 것이 배우자입니다. 특히 직장을 가진 분이 있다고 가정을 합시다. “돈이 제일이야? 남편이 죽어가는데 돈이 제일이야? 내 옆에 있으라고, 1초도 내 곁을 떠나지 말고 내 곁에 있어.” 그렇게 마구 욕을 합니다. 검사물을 채취하러 오는 간호사에게도 화를 냅니다. “병도 고칠 줄 모르는 게 왜 자꾸 남의 피를 뽑아 가?” 그렇게 야단을 칩니다.
성공한 사람, 돈 있는 사람, 지위 높은 사람, 만사를 자기 손으로 주무르던 사람일수록 분노가 큽니다. 그리고 믿음 있는 사람, 수양된 사람,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은 이 분노의 단계를 지나지 않고 세 번째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죽는 것을 보면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죽는 것을 보면 그분이 평소에 어떤 세계관, 인생관, 어떤 믿음으로 살았는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치과 의사들은 사람들의 이빨만 보면 이 사람의 히스토리(history)를 다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 돈이 많은 척하지만 어렸을 때 굉장히 가난했구나’ 하는 사실을 다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또 산부인과 의사들은 여자를 들여다 보기만 해도 그 사람이 얼마나 난잡하게 살았는가, 깨끗하게 살았는가 하는 히스토리를 다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목사는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이 평소에 믿음이 있었는지 가짜로 교회 직분을 감당했는지를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일수록 ‘죽음의 평등’, 즉 ‘고통의 민주주의’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영향력 있고 독재적 성격의 소유자일수록 화를 내고 하나님께 불평을 말하며 저주를 말합니다. 이럴 때는 화를 내고 소리지르게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화를 무마시키려고 목사가 가서 변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휴 장로님, 아시잖아요. 지금 봄심방중 아니에요? 너무너무 심방이 바빠서 제가 늦게 왔습니다.” 이렇게 변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자기 속에서 분노가 터지는 것이지 꼭 목사가 미워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화내는 것은 하나님께 화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이니까 하나님의 대리자인 목사님을 보고 화내는 것뿐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권사님이 그러시면 되겠어요?”라든지 이런식의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방어적 태도로 대응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셋째, 협상( bargaining)의 단계
이 기간은 매우 짧습니다. 마치 아이들이 처음에는 떼를 쓰다가 나중에는 애걸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죽음을 어찌 하든지 연기해 볼 작정으로 타협안을 내어놓습니다. 보상의 수단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란 것입니다. “병만 나으면 목사님, 제가 교회에 잘 나가겠습니다. 세례 받겠습니다.” 이것이 신앙 가지고 타협하는 것입니다. 또 “목사님, 내가 병만 나으면 세상일 다 그만두고 목사님과 함께 복음만 위해서 봉사하겠습니다”라고 합니다.
또 다음에는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님, 제 병만 나으면 제 재산 그거 다 정리해서 교회당을 지어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비양심적인 목회자는 이때 한몫 잡습니다. 타협은 대개 하나님과 합니다. 목회자는 이때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상대가 되는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이렇게 죽음을 앞두고 자기의 재산을 교회에 헌금한 것을 가지고 교육관을 지어서 소위 기념관을 만듭니다. 예를 들면 ‘장공 기념도서관’, ‘장공 기념유치원’, ‘장공 기념관’ 등 이런 식으로 메모리어 홀을 만들어 둡니다. 그것은 전부 다 죽으면서 헌금한 것으로 지었습니다.
때로는 살려는 의욕이 강할 때 의학적인 한계보다도 생명이 더 연장되는 수가 있습니다. 정신력이 강하고, 투지력이 강한 사람은 이때 오래 버팁니다. 의사는 비합리적인 생각이라고 말하더라도 목회자는 그저 아무 말하지 않고 다음 단계로 가는 정상적인 코스로 알고 상담자 역할을 제대로 해야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가 한번 여쭈어 보겠습니다. 지금 부인과 아이 셋 있는 남자가 암으로 죽습니다. 돈이 꽤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목사님께 죽기 전에 이런 약속을 합니다. “목사님, 제 재산을 다 털면 한 5억 가량 됩니다. 제가 5억 전체를 교회에 헌금하겠습니다. 목사님, 저를 위해서 병 낫게 기도 좀 해주십시오.” 그러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실제로 이런 상황을 당하면 참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아직 어리므로 공부를 시켜야 되는데 어떻게 다 내놓는다고 받을 수가 있나요? 그렇다고 사실 그분에게 돈을 받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그렇다면 그분이 마음 편하게 죽겠는가, 온 재산을 바치고 자기는 그대신 하나님께 칭찬받는다는 기쁨을 가지고 그 사람이 죽는 것이 그 사람에 대한 목회적 배려인가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비양심적인 목사나 “내시오” 그러지, 어떻게 그걸 내라고 하겠습니까? 실제로 당해 보면 대단히 어렵습니다.
한 20년 전의 일입니다. 제가 희랍에 갔을 때 바울 사도가 전도를 하면서 다닌 세계전도 코스를 따라서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항구에 들렀는데 항구 옆에 아주 높은 절벽이 있었습니다. 그 절벽은 뾰족하게 튀어 나와서 멀리서도 보이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절벽 위에 교회를 열 개도 넘게 지어 놓았습니다. 다닥다닥 붙여서 말입니다. 그래서 안내자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저기에 주민도 없는데 저 높은 곳에 왜 그렇게 교회가 많습니까?” 그랬더니 안내자의 대답이 “저것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서 선장이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 저를 이 풍랑에서 살려 주십시오. 그럼 내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제 재산 전 다 들여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교회를 하나 지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바치겠습니다”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 약속한 사람 중에 많은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는데 어쩌다가 정말 살아난 사람은 하나님께 약속한 것이 효험을 봐서 살아난 줄 알고 거기다 자기 재산을 다 바쳐서 교회를 짓기 때문에 주민이 있든 없든 무조건 저기다 짓겠다고 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열 몇 개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유명한 장로님이 암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안수기도 잘하시는 목사님께 가서 말씀들였더니 5억을 헌금하면 기도를 해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약금으로 5천만 원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받았는데 너무 늦게 받았는지 죽었습니다. 그 장로님의 아들들이 그 안수기도 하시는 목사님께 가서 돈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들아, 헌금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하는 것 아닌가, 하나님께 한 헌금을 되돌려 받는 녀석들이 어디 있어?” 그래서 입도 못 떼고 돌아왔답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모든 언약은 일종의 죄의식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여보, 내년 생일에는 내가 당신 다이아몬드 반지 하나 사줄게. 목회하느라고 너무 여유가 없어서 그동안 마음은 있었지만 사주지 못했어.” 그 말의 뒷면은 내가 가난한 전도사로 결혼할 때 돈이 없어서 당신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주지 못했다고 하는 죄의식이 마음 밑바닥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넷째, 우울(depression)의 단계
우울의 단계는 반동적 우울과 준비적 우울로 나뉘어집니다. 반동적 우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망스러워서 우울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옆에서 우스개소리를 해도 웃지 않습니다. 우울해지는 밑바닥에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과거나 현재 손실과 관계된 우울입니다.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인생무상을 느끼고 돈을 번다고 아웅다웅하고 눈이 벌겋게 뛰어다니던 것이 다 소용없다고 생각됩니다. 아이들은 태어날 때 백이면 백 주먹을 꼭 쥐고 태어납니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많이 움켜쥐겠다는 결의에 찬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죽으면 백다 손을 편하게 펴고 죽습니다. 여러분, 죽을 때 손을 꽉 쥐고 죽는 사람 보셨습니까? 다 펴고 죽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아무리 잡아봐야 헛것이더라는 깨달음으로 공수래 공수거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때는 종교적으로 아주 중요합니다. 신앙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준비적 우울이라고 하는 것은 미래의 상실에서 오는 우울입니다. 자신이 죽은 후의 가족을 걱정하고 때로는 병원 비용을 걱정하여 병원에서 퇴원하자고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목회자는 이때 세상의 아름다움이나 신나는 이야기를 들려줄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의 신나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환자가 가족을 잘 돌봐달라고 부탁할 때는 이렇게 말해야 됩니다. “가족 걱정은 하지 마시고 자기 몸 나을 생각만 하십시오.” 그렇게 말하든지 “암, 그렇지요. 제가 특별히 김집사님과 아이들을 잘 돌봐주고 위해서 기도해 주겠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목회자로서 대단히 능숙한 단계라고 보아집니다. 이 단계의 환자는 말수가 적어집니다. 그리고 눈짓 손짓으로 말을 하게 됩니다. 이때 급속도로 영적 성장을 합니다. 이때의 일주간은 수십 년의 영적 성장보다 더 많은 영적 성장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기 전 며칠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때 영적 성장은 30년 예수 믿은 것보다 급진적으로 영적 성장을 할 수가 있습니다. 너무 많은 방문객이 있으면 영적 성장이나 명상하는 데 지장을 받을 수가 있으니까 형편을 봐서 ‘면회 사절’을 써 붙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때 목사는 가족에게 준비 단계임을 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때는 전도의 절호의 찬스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본인은 준비가 되어가고 있는데 가족이 준비가 안 되면 가족은 병실 밖에 나가서 울고, 데굴데굴 구르고, 또 목사를 붙들고 울고, 난리가 납니다. 그러므로 가족에게 말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 죽음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도만 하면 거의 100% 전도가 됩니다. 아무리 완강한 사람도, 아무리 기독교를 반대하던 사람도 금방 예수를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맞는 매에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제일 가벼운 매가 물질의 매입니다. 물질의 매는 와당탕 손해를 봅니다. 빚집니다. 사업이 망합니다. 큰 손해를 봅니다. 그것보다도 더 무거운 매가 두 번째 매인데 그것은 가족의 매, 피붙이의 매입니다. 부부가 매일 이혼하려고 싸우는 것, 그것은 돈을 손해보는 것보다 더 가슴이 아픕니다. 또 아들이 오토바이 타고 가다가 와당탕 사고가 나서 다리와 팔이 부러져 병신이 됩니다. 가슴 아픈 일입니다. 딸이 가출해서 3일 동안 전화도 안 하고 어디에 있는지, 어떤 놈에게 잡혀 있는지, 어떤 놈하고 눈이 맞아서 갔는지 부모에게 전화 한 통 없이 3일을 지냅니다. 이때 부모는 완전히 정신을 잃게 됩니다.
그 다음에 제일 마지막 매는 욥기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본인이 맞는 매입니다. 본인이 맞는 매가 제일 무거운 매입니다. 욥기에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헐고 종기가 났지만 이제 우리는 무슨 간암이다, 위암이다, 직장암이다, 그런 소리를 듣게 됩니다. 마지막 매를 맞으면 진짜 회개하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에 깨닫는 것은 ‘아, 내게 왜 이렇게 고난이 닥치는가? 의인이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늘 그것 때문에 고통, 고민이었는데 마지막 영적으로 눈 뜨고 나서 뭐라고 합니까? “전에는 내가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이제는 눈으로 봅니다.” 그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그게 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죽음의 단계에 갔을 때 전도하면 100% 전도됩니다.
제가 간암으로 죽어가는 환자를 만났습니다. 그분의 친구가 제가 목회하는 교회의 장로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매일 “향린교회 가자, 향린교회.” 그렇게 말했을 것 아닙니까? 그래도 이분은 절대로 교회에 나간 적이 없습니다. 친구 따라 교회에 나간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간암이 걸렸습니다. 죽게 되니 우리 교회 장로님께서 “목사님! 우리 친구 죽게 되었으니까 좀 만나주시죠, 지금은 전도하면 전도가 될 것 같습니다” 라고 하여서 제가 갔습니다. 가니까 이제 병색이 짙어서 헐떡거리고 곧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어, 선생님, 이제 살 길은 없고 돌아가실 것 같은데 죽는 것이 두렵습니까?”
“예, 무섭고 불안합니다.”
“그러면 돌아가실 때 두렵지 않는 방법도 있는데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어떻게 하면 무섭지 않을까요?”
“예수님 손 잡고 가면 되지요.”
그때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내게 고백을 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친구가 향린교회 나가자고 할 때 따라 나갈걸. 이제 와서 다 죽게 되어 예수 믿는다면 예수님이 뭐라고 하지 않으실까요?”
“뭐라고요?”
“이놈아, 성할 때는 가자고 해도 안 가더니 죽을 때 되니까 오는구나. 이 못된 놈아, 그러시지 않을까요?”
“아니오, 그러시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용서하십니다. 환영하십니다.” 그러면서 십자가 상에서 회개하고 구원받은 강도에 대한 성경 말씀을 읽어드리고 집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진짜 죽는다고 통지가 왔습니다. 이상합니다. 대개 간으로 죽는 사람은 간성 혼수가 와서 죽는데 이 사람은 간성 혼수가 오기 직전에 제게 당부했습니다. “이제는 진짜로 다 죽게 되었습니다. 나 예수 믿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저는 “예수를 받아들인다고 하는 표시로 내 손을 잡으시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제 손을 꼭 잡고 그렇게 간성 혼수로 들어갔다가 조금 있다가 죽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저하고 악수하셨다면 집에 가서 두 시간은 씻지 마십시오. 이 손은 작지만 얼마나 거룩한 손인지 아십니까?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자리에서 눈감겨 주었고, 어떤 사람은 제 손 잡고 숨을 거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손은 보통 손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한번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다섯째, 수용(acceptance)의 단계
이 단계는 쇠약, 쇠잔해지고 자주 자는 단계입니다. 신생아의 잠처럼 길어집니다. 퇴행의 잠과는 다른 긴 잠을 자게 됩니다. 환자에 따라서 문병을 싫어하는 환자도 있고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환자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항거하는 사람은 마지막까지 목사를 반기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족은 목사가 자주 와주기를 바라지만 환자 자신은 목사가 오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목사를 죽음의 사자로 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럴 때는 가족을 위해서는 가주어야 되지만 그 환자를 위해서는 가지 않아야 됩니다.
저는 끝까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갈 때 반기고 웃는 환자는 종교적으로 굉장히 성숙한 환자입니다. 여러분이 마지막 단계에 갔을 때 웃지 않는 환자가 있으면 이 사람은 아직도 마음속의 영적인 문을 열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환자가 신자인 경우 목회자는 되도록 임종의 자리에 있어주어야 합니다. 목회자에게 요구가 있을 때 하늘나라의 아름다움을 기록한 성구를 읽어주고 하늘나라의 화려한 장면을 가르쳐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가족이 수용단계에 가지 못하면 안달복달을 합니다.
자, 한번 생각해 봅시다. 곧 운명하겠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맨 처음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맥박 뛰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또 혈압을 재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숨쉬는 횟수가 줄어듭니다. 마지막으로는 팔과 다리가 축 처집니다. 또 마지막 죽을 때 땀이 무척 많이 납니다. 땀이 나는데 보통 나는 땀보다 조금 진한 땀같이 보입니다. 소금기가 많이 있는 땀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은 눈동자의 조리개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이미 항문도 열려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관절이 늘어지기 때문에 등뒤에 손을 대면 등이 휘어져 있어서 손이 들어갑니다. 남자는 고환이 바싹 오므라듭니다. 맥박이 점점 약해지다가 맥이 끊어지면 곧 심장이 서게 된다는 것을 우리가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런 단계는 반드시 1단계 다음에 2단계이고, 2단계 다음에 3단계……. 그런 순서대로 진행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또 한두 단계가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도 있고, 화냈다가 절망했다가 하는 사람도 있고, 또 앞으로 되돌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 받아들이는 듯하다가 갑자기 또 화를 내는 수도 있습니다. 이런 단계가 왔다갔다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아두셔야 합니다.
2. 목사가 알아야 할 네 가지
첫째, 죽어가는 사람은 목사 앞에서 퇴행합니다.
퇴행은 상대방을 무척 좋아하는 경우, 또는 무척 어려워하는 경우에도 일어나며 자신의 죄책이나 연약함을 인식할 때도 일어납니다. 이때 유능한 목사는 능숙하게 상대해야 합니다.
상대를 너무 좋아하면 상대방은 커 보이고 자신은 너무나 작아 보입니다. 상대방은 위대하게 보이고 자신은 비참하게 보입니다. 여러분, 헌신예배 설교를 부탁받아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목사님들이 자기 레파토리 가운데 제일 자신없는 것을 들고 가는 분은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자기가 생각해서 제일 괜찮다 하는 원고를 가지고 가서 설교를 합니다. 그러니까 회중들이 은혜를 받게 됩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 가운데서 막 사람을 헤치고 앞으로 나오면서 “목사님, 은혜받았습니다. 오늘 나는 설교에 너무너무 은혜를 받았습니다” 라고 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목사님을 너무너무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꼬리치는 개처럼, 아이들이 엄마 앞에서 아양부리듯이 그렇게 됩니다. 이것이 퇴행입니다. 퇴행이라는 것은 어린 단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자기의 죄가 너무 많다 싶든지 자기가 너무 연약하다고 생각될 때도 상대방 앞에서 퇴행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권사님 댁에 문병을 갑니다. 권사님은 70이 넘은 분입니다. 목사는 이제 겨우 마흔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들 같은 나이입니다. 그런데도 권사님은 “목사님, 여기가 너무 저려서 못살겠어요. 여기가 너무너무 아파요. 한 순간도 안 아픈 순간이 없어요.” 칠순이 되었더라도 그 젊은 목사 앞에서 퇴행하여 어린 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능숙하지 못한 목사는 “아휴, 권사님! 연세가 얼마신데 이렇게 어린 아이와 같은 모습을 하세요?”라고 합니다. 이런 목사는 목회의 ‘에이 비 씨’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상대방이 어린 아이가 될 때에는 내가 아빠가 되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빠가 딸을 주무르듯이 “권사님, 제가 여기 안마를 해드리면 곧 시원해집니다. 제가 해드릴게요”하고 자기 딸처럼 그 늙은 할머니를 쓰다듬고 뽀뽀도 해주고 끌어안아 주면 그 환자는 매우 행복해 합니다.
그러므로 서양에서는 우리가 온정주의(paternalism)라고 하는 것은 가부장적 느낌을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아빠 뻘이다, 그런 기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환자가 내 앞에서 퇴행할 때는 아빠가 되어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환자 앞에서만 아빠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때때로 아내 앞에서도 아빠가 되어야 합니다. 아내는 때때로 우리를 이기고 조정하지만 때로는 나에게 져주고 귀여운 딸처럼 품속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모든 남자는 두 딸을 키운다는 말이 맞습니다. 하나는 낳은 딸, 하나는 아내, 이렇게 두 딸을 키우는 것입니다. 페터널리즘이 환자 앞에서도 이렇게 필요한 것입니다.
둘째, 목사는 심판의 대리자입니다.
영원한 심판자 앞에 서기 전에 그 심판자의 지성의 대리자 앞에서 참회할 수가 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종유를 바르지 못하면 육신적으로는 죽어도 정신적으로는 죽지 못합니다. 카톨릭 신부가 죽은 사람 이마에 바르는 기름이 종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카톨릭 신부는 의사 왕진 가방처럼 그 종유 기름을 가방에 넣고 머리맡에 놓고 잡니다. 그래서 밤중에 누가 죽는다 해도 그걸 빨리 들고 가서 죽기 전에 이마에 발라줍니다. 이것은 좋은 뜻도 있지만 부작용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부가 와서 죽기 전에 종유를 발라주면 “어라, 신부가 나 죽으라고 저주하네”하고 기분 나빠 할 수도 있습니다.
셋째, 목사는 용서의 선언을 해주어야 합니다.
이때 영원한 심판주 앞에 서기 전에 지상의 대리자로서 목사 앞에서 참회할 때 여러분은 반드시 ‘용서의 선언’을 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장로님,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힘내세요, 힘내세요.” 이렇게 하면 이것은 목회자의 마음을 상대방의 마음속에 밀어 넣으며 투영하는, 투시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좋은 상담자가 되지 못합니다.
넷째, 자살에 관한 것
첫째,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강력한 요구를 가진 사람으로, 능동적인 자살입니다. 즉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강력한 요구를 가진 사람은 생명까지도 좌지우지하고 싶어서 “에라, 이럴 바에야 죽고 말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고통의 기간을 짧게 하고 비용을 절감하며 고생하는 가족을 위해서 자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을 피동적 자살이라고 합니다.
세 번째는 허무주의적 자살이며, 네 번째는 일종의 강한 자기애 때문에 하는 자살로 자기를 너무너무 사랑하며 자기의 추한 꼴을 남에게 보여주기 싫어하는 사람의 자살입니다. 가수, 배우, 탤런트, 목사 이 사람들은 다 자기애를 가진 직종의 사람들입니다. 목사가 얼마나 자기애를 가지고 있는 줄 아십니까? 자기가 설교를 제일 잘하려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애가 너무 없으면 강단에서 성장하는 목사가 되지 못합니다. 자기애가 어느 정도 있어야지 목회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애가 너무 과하면 세상을 모르고 제 잘난 맛에 사는 목사가 됩니다.
그래서 이 자기애가 심한 사람은 자기의 추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자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본의 「설국」을 써서 노벨 문학상을 받은 니나바따 야스나리라는 사람은 자기애적인 자살을 했습니다. 문학적인 자살입니다. 그리고 일본의 「금각사」라고 하는 소설을 썼던 니시나 유끼오도 역시 자기애적인 자살을 했습니다. 너무너무 자기를 사랑해서 추한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늙어갑니다. 그러면서 대머리가 되기도 하고 머리가 희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기애가 심한 사람은 늙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심하면 성형수술을 하고 젊어지려고 몸부림칩니다. 그러니까 늙는 것도 받아들일 줄 알고 그렇게 보통으로 사는 것이 자기애적인 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는 비결로 여겨집니다.
3. 상담자로서의 목회자
첫째,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이 사실 전달 여부입니다.
“환자에게 사실을 전하는 것이 좋으냐, 숨기는 것이 좋으냐”에 대해 독단적으로(dogmatic) 전해진 것은 없습니다. 깊이 생각하고 전례를 따져보아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적 경향은 알려주자는 의견으로 기울어집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알려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신은 죽습니다. 암입니다.” 이렇게 알려줍니다.
동양 사람들은 인정이 많아서 자꾸 숨깁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환자들도 의학적인 지식이 있어서 의사의 눈치를 보고 가족의 반응을 살피며 약의 처방이 달라지면 벌써 말은 안 해도 눈치채고 “내가 죽을 병이구나!”라고 금방 알아차립니다. 그러면 목사는 알려줄까 말까를 걱정 안 해도 됩니다.
그런데 환자는 참 이상합니다. 자기는 마음속으로 이미 알면서 목사에게 정직하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다 속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그 심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행여 목사의 입에서 죽을 병은 아니라는 말이 나올까 싶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제일 어려운 것은 “목사님, 제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요?”라는 물음입니다. 자기의 남은 날짜를 계산해 달라고 하는데 이것이 제일 어렵습니다.
“예, 의사가 그러는데 6개월 정도 산다고 그럽니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아휴, 목숨이야 하나님께 달려 있지요. 목사가 어떻게 압니까?” 그게 제일 명답입니다. “아, 목숨이야 하나님께 달려 있지요. 생명을 창조하신 분의 손에 있는 것이지요. 목사가 어떻게 압니까? 염려하지 마시고 기도하세요.” 이렇게 하는 것이 제일 무난합니다.
둘째, 상담자는 죽음에 대변하는 담력이 있어야 합니다.
환자에게 죽음이 가까워지면 의사나 목사는 둘 다 상담자입니다. 그러므로 선진국에서는 반드시 의사와 목사가 협동해서 환자들을 취급합니다. 죽어가는 사람으로서는 자기가 좋아하는 상담자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합니다.
그 다음에 현대는 패밀리 닥터(family doctor)가 있듯이 패밀리 패스터(family pastor) 제도가 요청됩니다. 패밀리 닥터란 우리 가족, 할아버지 때부터 손주까지 전체의 병을 다 보아주고 우리 가족의 내력과 모든 사정을 다 아는 의사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현대는 큰 교회 가서 얼굴 안 나타내고, 회중의 한 사람으로서 예배 드리고 훌쩍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우리 목사님이 우리 가족 형편을 다 알며 우리 가정의 사정 다 알며 우리 가정의 과거와 현재, 미래도 아시는 그런 목사님을 원합니다. 즉, 패밀리 패스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자가 좋은 신앙생활을 하려면 세 가지가 있어야 된다고 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내 교회’입니다. 내 교회가 꼭 있어야 합니다. 이사가더라도 내 교회가 있으면 그리로 옵니다. 그 다음은 ‘내 목사님’입니다. 반드시 문제가 일어나면 그분한테 가서 이야기를 듣고 싶은 내 목사님, 평생 존경하는 목사님입니다. 그리고 ‘내 사명’입니다. 교회 안에서 ‘내 사명’을 찾지 못하는 신자가 없도록 목회를 잘해야 되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습니다.
ㄱ. 개인의 정신적인 성숙도
ㄴ. 죽음과 투쟁할 수 있는 능력
ㄷ. 종교, 나이, 경제력
ㄹ. 신체기관의 이상 유무
신체기관의 이상 유무, 즉 자기가 보는 앞에서 다리로부터 썩어 들어갑니다. 허벅지까지 썩었습니다. 눈앞에 보입니다. 배에 복수가 많이 차서 자기 생식기를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게 배가 튀어 나옵니다. 그런 사람은 눈에 드러난 신체적인 이상으로 죽음에 대한 반응이 나타납니다.
ㅁ. 환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의사나 목사의 태도
목사가 당황하면 죽는 사람도 당황하고 목사가 의연하면 죽는 사람도 안심하고 의연하게 죽습니다.
4. 임사체험
‘임사체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임’은 임한다는 뜻이고 ‘사’는 죽는다는 뜻입니다.
작년 8월, 콜럼비아 대학에서 임사체험에 대한 학술대회가 열렸습니다. 세계에서 내놓으라 하는 그런 유명한, 죽음을 연구하는 학자 3천 명이 모였습니다. 미국에는 임사체험을 했다고 주장하는 2백70여 명의 사람이 각종 간증과 문헌을 남기고 있습니다. 며칠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사람들입니다.
세계적으로 널리 있는 현상입니다. 여러분, 혹 일본방송 NHK를 지금부터 두 달 전에 보신 분이 있습니까? 임사체험이라고 하는 제목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일본 프로듀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경험을 가진 세계 곳곳의 사람들을 찾아가 인터뷰하고 그 사람의 얼굴을 내고 경험담을 엮어 방송으로 내보낸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대학자들, 대 철학가들, 아주 지성이 높은 사람들의 경험담이 많이 나왔습니다.
여기에 대한 반대론자가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무의식적으로 입력되었던 것이 의식의 세계가 정지되었을 때 환상으로 나타났다고 하는 주장입니다.
둘째로, 뇌생리 학자 중에는 측뇌엽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캐나다 학자 중 한 명이 주장했지만 그는 나중에 그것을 부인했습니다.
임사체험을 한 사람의 공통점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영이 몸에서 빠져나와 위에서 내려다 봅니다. 그래서 가족이 우는 것을 다 본다고 합니다.
둘째, 어두운 통로를 빠른 속도로 빠져나갑니다.
셋째, 환하고 따뜻하며 밝고 온화한 곳으로 갑니다.
이 세 가지가 임사체험 한 사람들의 공통된 체험담입니다. 그 다음의 이야기는 조금씩 다릅니다. 집을 보았다든지, 성전을 보았다든지,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았다든지……. 그것은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외과 의사는 자기가 죽는데 의사가 자기 몸을 수술하는 걸보고 위에서 소리를 쳤답니다. “야, 그렇게 수술하면 안 돼. 그렇게 수술하면 안 된다고.” 그렇게 아무리 소리쳐도 의사는 죽은 사람의 말을 못 알아듣고 저만 혼자서 지껄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살아나 자기를 수술한 의사가 들어오자마자 깨어나서 “당신 왜 수술을 그렇게 하느냐?”라고 막 따졌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자기는 마취제 맞고 눈감고 있었으면서 뭘 다 본 것처럼 말해?”라고 소리를 치더랍니다. “아니, 내가 다 보았단 말이야.” 그래서 서로 싸웁니다. 사실 그 옆에 입회하고 있었던 다른 의사, 간호사의 말을 듣고 보니까 이 죽었던 사람의 말이 진짜임이 드러났다는 경험들이 보도되었습니다.
그런데 죽어서 영혼이 쑥 빠져가지고 천당의 밝은 곳으로 가서 내려보고 있을 때 자신의 시체를 탁 눕혀놓고 큰아들과 둘째 아들, 큰며느리와 둘째 며느리가 재산을 서로 많이 가지려고 막 싸운다고 합시다. 그러면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 아들들이 싸울 필요 없도록 제게 그런 재산은 안 주셨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여러분, 가난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르죠? 가난하기 때문에 형제 우애가 있습니다. 목사님들, 재산 없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실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뚜렷한 결과가 있습니다. 그렇게 임사체험을 한 사람은 첫째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삶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버드대학 교수로 있던 어떤 사람은 교수 그만두고 전도사님으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셋째로는 남는 자에 대한 배려입니다. 갑자기 금슬이 유난히 좋아지는 부부는 한쪽이 죽습니다. 같이 살다가 부부가 갑자기 의가 좋아지면 갑자기 죽습니다. 왜냐하면 쥐가 죽을 때를 알고 개미도 죽을 때를 압니다. 그래서 쥐가 선박에 머물러 있다가 선박이 떠나려고 엔진 소동소리가 날 때 갑자기 쥐가 빨리 보트를 타고 육지로 내려오면 그 배는 반드시 항해 도중에 사고가 난다고 합니다. 그것은 동물도 죽음을 미리 예감하는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풍랑을 만나서 배가 난파되려고 할 때 선장은 제일 먼저 배 속에 있는 주방에 간다고 합니다. 주방에는 언제나 먹을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쥐 소리가 들리는가를 살핀다고 합니다. 쥐 소리가 들리면 “우리 배는 빠지지 않는다”고 기뻐하며 만약 쥐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선장은 그만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날에 날이 쨍쟁 쬐는데 개미가 갑자기 이사를 가면 틀림없이 얼마 후에 그곳에 홍수가 나서 개미가 다 떼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형편이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갑자기 누구를 만나 대접하고 전화 걸고 만나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면 얼마 안 있어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자신의 죽음을 모르고 죽는 순간까지 바람 피우다가 남의 배 위에서 복상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는 그렇지 않습니다.
또 반대로 죽기 전에 정을 떼는 사람도 있습니다. 갑자기 부인에게 화를 내며 “나가 죽어, 나는 집 나간다.” 그러며 막 욕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도 역시 죽으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자신이 살아오던 삶의 패턴에서 갑자기 뭔가 변화가 일어나면 그것은 얼마 후 죽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5. 남는 이를 위한 목회적 배려
장기 환자의 가족에 대한 배려를 해야 합니다. 교인 중에 대신 간호할 사람을 찾아 하루쯤 간호하게 하고 그 장기 환자 가족들을 봉고에 태워가지고 좋은 경치도 보고 즐길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루쯤 환자에 대해서 잊어버릴 수 있도록 즐겁게 만들어줄 필요가 목사에게 있습니다.
특히 배우자에 대한 배려가 최우선적이 되어야 합니다. 미망인인 경우 배고픈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대화, 둘째는 경제적인 수입, 셋째는 섹스, 넷째는 터치이며 다섯째는 자녀교육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배고픔입니다.
첫째, 대화의 부족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꾸 사람을 보내서 이야기하게 해야 됩니다. 자식들과 이야기하는 것과 나이가 같은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내용이 다릅니다. 그러니까 그 부인이 과부라면 교인 가운데 남편 잃은 사람이 심방 가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만일 남편이 펄펄하게 살아있는 사람이 가면 재미가 없습니다. 또한 목사도 자주 심방해야 되고 바빠서 못 할 때는 자주 전화해야 됩니다. 전화할 때 주의할 것은 내가 말을 많이 하지 않고 상대방이 많이 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둘째, 경제적인 수입입니다.
자립할 때까지 교회에서 도울 수 있으면 무슨 방법으로라든지 도와주어야 합니다.
셋째, 섹스에 대한 욕구
섹스에 대한 욕구는 교회나 목사가 도와줄 수 없습니다. 과부 된 교우를 자꾸자꾸 위로해 준다고 하다가 선을 넘은 사람이 있습니다. 심방을 자제하고 되도록 이면 전화로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넷째, 터치의 필요성
혼자 사는 사람, 혹은 외로운 사람, 실연당한 사람은 설 때도 어디에 기대고 섭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닿는 맛이 없으니까 인위적으로 터치합니다. 또 외롭지 않은 사람은 보통 똑바로 서 있습니다. 그런데 외로운 사람은 팔짱을 끼고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끌어안습니다. 그러면 손바닥에 닿는 기분이 나므로 반대로 역이용하면 됩니다. ‘목사도 날 이해하지 못하고 집사도 날 이해하지 못하여 나가라고 하니까 외롭구나. 아내도 날 이해 못해.’ 이때는 산에 가서 기도하면서 자기가 자기를 끌어안으면 많은 위로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이용하면 됩니다. 외로운 여인들은 앉아있되 의자에 앉을 때 다리를 탁 포개고 앉습니다. 다리를 포개고 있으면 접촉감이 있습니다. 남편이 옆에서 대주지 않으니까 자기가 자기 다리로 닿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다리를 흔든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흔들면 접촉감이 훨씬 많습니다. 사람이 그렇기 때문에 혼자 사시는 분과는 뚝 떨어져서 인사하면 안 됩니다. 손을 잡고 인사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등도 쓰다듬어 주고 만져주는 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남자가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모나 연세 드신 권사님께 부탁하면 됩니다. 교회 오면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고 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사람은 이렇게 다른 사람의 피부가 닿는 것을 자기도 모르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을 키울 때 쓰다듬어 주어야 합니다. 국민학교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쓰다듬어 줍니다. 이게 참 필요합니다.
여러분, 특별히 아이들이 대학에 떨어져서 자신감을 잃고 있을 때 멀리서 “야, 괜찮다. 재수하지 뭐.” 이러지 마시고 안아주면서 피부를 대고 “괜찮아, 재수하면 되지 뭐”라고 하시기 바랍니다. 이 아이는 훨씬 더 안정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퇴행의 마지막 과정이 어머니의 자궁 안이기 때문입니다. 자궁 안에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엄마의 피부와 아가의 피부가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피부와 피부가 닿을 때 안정감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피부와 피부가 닿을 때 사람은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모님하고 자꾸 손을 잡으세요. 어디 갈 때 “여보, 떨어져 가. 교인들이 봐.” 이렇게 하지 말고 손을 잡고 다니십시오. 잘 때 파자마입는 것, 그거 합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옷 없이 피부와 피부가 닿으면 피부 닿지 않은 사람보다 7년을 더 산답니다. 그러니까 부부도 자꾸 키스도 하고 손도 만지고 자꾸 쓰다듬어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편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남편 없는 사람은 목사 사모가, 또는 권사님들이 좀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고 최소한 악수라도 해야 합니다. 사람은 피부가 맞닿아야 정이 듭니다. 악수는 사람의 눈에 보이는 손 속에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누구에게 악수할 때 반드시 이 속에 하나님의 손이 숨어있다고 생각하고 정성껏, 정답게 악수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은 일생에 두 번 시인이 됩니다. 첫 번째는 젊어서 연인이 생겼을 때, 즉 누구를 사랑할 때 시를 쓰고, 두 번째는 늙어서 배우자를 잃을 때 시를 씁니다. 여러분, 모두 다 사모님보다 먼저 죽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남자의 최고의 행복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서 어머니의 젖 먹고 자라 아내를 안고 살다가 아내가 감겨주는 눈을 감고 아내보다 먼저 죽는 것, 이것이 남자의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참 재수가 좋은 것이지 나쁜 것인지 부인이 먼저 죽는 수가 있습니다. 부인이 먼저 죽으면 ‘아, 젊은 사모 새로 맞을 수가 있겠구나’ 싶어서 좋아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남자는 60세가 넘어서 상처를 당하면 견디지 못하고 2년 안에 죽어버립니다. 그 2년의 외로움을 잘 통과한 사람은 오래 살 수 있지만 그 홀로서기를 배우지 못한 사람은 죽어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을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빨리 장가를 보내주어야 합니다. 어머니 무덤에 흙이 마르기 전에 빨리 장가 보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지 남자는 죽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젊은 아이들은 그걸 모릅니다. 고생만 하다 죽은 엄마를 생각하면 억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새엄마 얻어서 행복하게 사세요.” 그 말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이때 목사가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너희들이 아버지를 장가 보내지 않으면 아버지는 2년 안에 죽는다. 그러니까 줄초상 치르지 않으려면 장가 보내드려.”
그래서 60이 넘어서 부인을 잃은 사람은 생명보험에 들려고 해도 받아 주지 않습니다. 그만큼 남자는 부인과 의가 좋으면 좋을수록 빨리 따라 죽습니다. 남자가 부인이 죽고 나이들어서 장가 안 가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안 가는 사람은 두 가지 경우입니다.
첫째는 성격이 편집광적이어서 전처에 대해서 굉장히 편집하므로 장가를 안 갑니다.
둘째는 너무 전부인에게 질리고 신물이 나서 안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빨리 장가 가는 사람일수록 먼저 부인하고 의가 좋았다는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님들, 혹 행여 재수 좋아서 두 번 장가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빨리 가십시오. 부끄러워 말고 가십시오. 그것이 당연한 일임을 성도들에게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장기려 박사님의 얼굴은 언제나 성령 받은 얼굴입니다. 환하고 빛이 반짝반짝 납니다. 이북에 두고 온 부인을 생각하며 장가 안 들고 40여 년을 혼자 사는데 얼굴이 막 성령을 체험한 사람처럼 반짝반빡 빛납니다. 그 나이에 그렇게 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열부 청살문 세워드릴 분입니다. 그런 분은 어쩌다가 실수로 한 분이 있는 것이지 누구나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자가 없으면 일순간도 못견딥니다. 그러므로 여자하고 같이 지내는 시간을 언제나 하나님 앞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사모는 죄가 많아서 사모가 됩니다. 보통 여자가 사모 되는 줄 아십니까? 오죽하면 목사의 똥은 개도 안 먹는다고 합니까? 그 개도 안 먹는 똥을 누는 그 남자를 데리고 사는 여자는 얼마나 피곤합니까? 그러니까 그 여자는 죄가 많은 여자입니다. 그러니까 나같이 목회 못하는 남자를 그래도 하늘처럼 여기니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러지 못한 분 있으면 오늘 여기서 회개하고 당장 돌아가서 사모님을 업어주고 쓰다듬어주고 뽀뽀도 하고 잘해주어야 됩니다. 어디 갈 때 핸드백도 들어주어야 합니다.
만 2년 동안 울고나면 홀로서기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옛날의 명랑함을 되찾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도 만 2주는 자꾸 쓰러지려고 합니다. 특히 혼자 되신 분들이 그렇습니다. 축도하면 혼자 되신 분은 축도 끝나기 전에 집에 갑니다. 왜냐하면 교인들 얼굴 보기 미안해서입니다. 인사 받기 싫어서입니다. 그만큼 혼자 된 여자들은 살기 어렵습니다. 처음부터 처녀로 혼자 늙는 분은 그래도 잘 사는데, 남편과 함께 살다가 혼자 되면 자꾸 쓰러지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늘 그 성도가 홀로서기를 배울 때까지 목사는 목회적인 배려를 잘해야 됩니다.
Ⅲ. 결 론
여러분, 호스피스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연세대학교에 있는 신촌 세브란스에 호스피스가 있습니다. 죽는 사람 잘 죽게 돌봐주는 제도입니다. 지금 큰 교회는 호스피스 제도를 행해야 합니다.
테레사 수녀가 마르질릉 지역을 향해서 기차를 타고 갈 때에 하나님께서 이 가난한 수녀를 불렀습니다. “테레사야, 네가 그 지역에 가면 그 지역의 수많은 가난한 거지와 문둥이들이 길가에서 살다가 길가에서 죽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너는 그리 가거든 그 사람들이 살았을 때 먹을 것을 주고 죽었을 때 무덤을 만들어 주어라. 죽을 장소를 만들어 주어라.” 그 때 테레사 수녀가 대답을 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돈도 없고 힘도 없는 일개 여자요, 수도하는 수녀입니다. 저에게 무슨 힘으로 그 일을 하라고 그러십니까?” 그렇게 대답한 것이 1946년입니다.
그러나 2년 후 1948년, 그녀는 수도원을 빠져 나옵니다. 수도원을 빠져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이 거룩한 일이 아님은 아니로되 가난한 사람 돌보는 것이 더 급한 일이다.” 그러면서 수도원을 떠나는 날 아침 다음과 같은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오늘 저녁을 어디서 먹어야 할지 모르고 떠납니다. 하나님, 저는 오늘 저녁 어디서 자야 할지 모릅니다. 하나님, 제가 입은 이 한 벌의 옷이 떨어지면 무슨 옷 입어야 될지 모르고 떠납니다. 하나님이 보내셨사오니 하나님 마음대로 하옵소서.” 그녀는 백여 곳에 고아원을 만들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죽을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 개신교도 큰 교회에서는 꼭 이 호스피스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큰 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중표 목사님께서 목회자 세미나를 처음 시작할 때에는 이렇게 많이 모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큰 꿈을 가지고 시작하니까 지금 이 방에 수도 없는 전국의 목사님이 가득 차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큰 꿈을 가지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남편을 잃은 부인의 시입니다.
하루는 뒷산에 산책 나갔더니 어디서 슬피 우는 소리 들리더라
가까이 가보니 한 노파가 슬피 울고 있는데 영감 죽은 제삿날이라 한다
영감 죽고 신세는 바뀌어 시골을 떠나 서울에 와 입주 가정부가 되었건만
어젯밤 제사를 드려야 하나 주인 아줌마 눈치 보느라고 드리지 못하고
오늘은 특별 휴가를 맡아 나와 아무도 없는 산속에 와서
차릴 음식이 없이 눈물로 제사를 드리고 있다고 하더라
처음에는 위로하느라고 이말 저말 하다가
나도 내 신세가 서러워 둘이 얼싸안고 실컷 울다가 내려왔다.
여러분, 남자는 나이 먹어도 아내가 없으면 이렇게 떠돌이 신세입니다.
이것은 고은이 쓴 시입니다. 고은은 파계승이었습니다. 지금은 아내를 얻고 가정이 안정되었지만 옛날에 절에서 나와서 떠돌이로 다닐 때 그런 시를 썼습니다.
또 76세가 된 할아버지가 아내를 잃고 쓴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침 6시가 되면 그이가 새벽기도 갔다가 오지 않는가 대문 있는 곳을 내다보게 된다 저녁이 되어 어두워지면 하루종일 심방하고 피곤한 몸 이끌고 지금쯤 집에 돌아오겠지, 내 마음은 거리를 헤매게 된다 손주의 이름을 부르는 내 목소리에는 그이의 목소리가 섞여있고, 그이가 읽다가 붉은 줄 치고 간 성경을 펴면 성경에서 그이의 얼굴이 떠오르는구나 아낙네들이 우중우중 서 있으면 행여 그 속에 서 있지 않나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된다 오, 주여, 저로 하여금 겸손한 믿음 주시어 내가 죽거든 하늘나라 가서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이를 꼭 만나보게 해주시옵소서
여러분 이런 시 안 쓰려면 사모님 잘 위하시기 바랍니다.
추사 김정희 씨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습니다.
저 세상에 가서는 당신과 나의 입장이 서로 뒤바뀌어
나는 먼저 죽고 당신은 천리 밖에 외롭게 살아남아
이 내 가슴 아픈 것을 당신으로 하여금 맛보게 해주고 싶소.
그렇게 가슴 아파 하지 말고 여러분, 사모님들 살아계실 때 잘 위하십시오. 그 여자들 죄 많아서 목사 부인 되었는데 잘 위해주고 천년 만년 오래오래 건강하시고 장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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