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수난시대가 도래하고 있는가?
<뉴스앤조이>의 설교비평에 부쳐
<뉴스앤조이>의 설교비평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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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장복 교수 ⓒ뉴스앤조이 김승범 |
설교가 직면한 새로운 무대
우리의 한국교회 강단에 설교의 전성기가 끝나고 수난의 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한 한 조짐을 여러 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 수난의 시기가 연단으로 이어지고 각성으로 새롭게 솟아오른다면 그것은 매우 바람직한 과정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이 수난이 설교의 권위를 위축시키고 설교자들이 나래를 자유롭게 펴지 못하는 판도를 가져온다면 설교는 침체상태를 면치 못할 것이고 종국에는 설교의 쇠퇴기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한국이 디지털 문화의 발전에 선두를 달리면서 우리의 설교사역에 심각한 문제점이 서서히 일기 시작한다. 특별히 인터넷을 통하여 활짝 열린 세상으로 변화가 오자 네티즌들이 그동안 존엄하게만 생각해오던 설교의 세계를 향한 발언대를 마음껏 형성하고 있다. 지금까지 목회자의 설교에 한 마디의 비판도 할 수 없었던 철문을 부순 듯 활기를 띠고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일반 시티즌들의 삶의 구조에서는 설교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시원스럽게 펼 수 없었다. 특별히 수직적 관계로 이어진 설교자와 회중의 관계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나 인터넷을 통한 네티즌들의 삶의 구조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네티즌들의 세계는 누구의 간섭이나 체면을 초월한다. 이 세계를 출입하는 사람들은 본대로 느낀 대로 표현하면서 사는 새로운 세상의 무대를 즐기고 있다.
이토록 네티즌들의 영역이 넓혀지면서 설교사역에 도움을 주는 긍정적인 측면도 없지 아니하다. 특별히 그들이 진솔하게 설교자들에게 주는 조언들은 매우 값지다. 때로는 회중들이 그 주일에 행한 자신의 설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반응을 설교자들은 신속하게 알게 된다. 다양한 반응을 보면서 설교의 발전을 위한 설교자들의 노력이 더 상승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설교를 위한 기탄 없는 의사표현은 설교가 새로운 시대에 진입하였음을 의미하고, 설교단이 그 동안 설교자의 독무대로 전성기를 누르던 시대가 종장을 맞는 듯하다.
최근에 일고 있는 설교의 평가들
최근에 사이버 공간을 통한 열린 광장에서 설교에 대한 평가들이 뜨겁게 열리고 있는 현실이다. 설교를 비판한 기고자의 글을 보고 자유롭게 실린 독자들의 의견들은 때로는 설교자의 인격에까지 상처를 입히는 표현들이 가득하다. 설교를 일반 강의와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한 듯한 평가들이 너무 많다. 때로는 자신들의 정치나 사고의 노선과 차이가 있을 때 펼치는 비난은 매우 민망할 때가 많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은 메시지가 쏟아 질 때 어떤 이는 분노에 가까운 몸부림을 친다.
이러한 현상은 사이버 세계에서만 일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교회의 현장에서도 설교에 대한 비판의 글을 인쇄하여 돌리면서 설교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원하는 대로 목적이 달성되어지지 않을 때 설교자의 사생활이나 인격에까지 심각한 상처를 입히는 글들을 익명으로 배부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필자는 설교의 이론과 실제를 가르치는 교수로서 설교의 이러한 현장에 일차적인 책임을 통감한다. 설교자 본인들이 당한 아픔에는 이르지 못할지라도 나름대로 아픈 가슴을 안고 옷깃을 여민다. 이 때마다 한국의 설교사역을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뜨거워진다. 그리고 날라 오는 돌팔매 앞에 서있는 설교자들을 부여안고 함께 고민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 이유는 설교자가 만에 하나 바른 설교를 하지 못하고서 당하는 현장이라면 그것은 그들을 바르고 철저하게 교육시키지 못한 신학교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교의 수난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을 안고 있는 필자는 용서를 비는 침묵을 지킴이 당연하리라 본다. 그러나 한국의 설교 미래를 위하여 침묵해서는 안될 한마디가 있다. 그것은 설교 비평가들이 설교자를 향하여 돌을 들기 전에 먼저 설교에 대한 다음의 몇 가지만은 알아달라는 특별한 청원이 있다.
설교를 비평하기 전에 알아야 할 항목들
설교는 분명히 인간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말임에 틀림이 없다. 설교자의 신앙과 지식이 설교 안에 실린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설교자의 느낌과 판단의 주관적 사고가 설교 안에서 작용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설교는 단순한 설교자의 지식을 발표하는 강의와는 전혀 다르다. 설교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그 본문으로 한다. 그리고 본문을 들려주는 것을 최우선의 임무다. 그 말씀을 선포하고, 회중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석하고, 그 말씀이 적용되어야 할 삶의 장을 찾아주는 것을 설교의 원칙으로 하고 있다. 특별히 설교의 장에는 강의에서 볼 수 없는 4가지의 기본 요소를 갖추고 있다.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가 있다. 둘째는, 하나님 말씀의 종으로 선택받아 선지동산에서의 철저한 훈련을 받은 설교자가 있다. 셋째는, 이 말씀을 들어야 하는 회중이 있다. 넷째는, 이상의 3대 요소를 총괄하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있다. 이러한 요소들 때문에 교회의 역사에는 설교를 성스러운 사역으로 인정하고 2천년의 역사를 지탱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스러운 설교사역이 설교인들에 의하여 지켜지지 못하고 회중에 의하여 바르게 이해되지 못했을 때 설교는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수난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수난은 설교자들로 하여금 설교에 대한 자신감과 의욕을 잃게 한다. 이러한 과정이 계속되면 설교단은 흔들리고 힘있는 말씀은 서서히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가 쇠퇴해지는 원인중의 가장 큰 요소이다.
문제는 회중들의 지적인 수준의 향상과 자기 주장을 거침없이 펴는 환경의 변화이다. 감사의 마음으로 겸허히 받아들여진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지성으로 거르고 취사선택하여 먹는 말씀이 되는데 있다.
이러한 문제는 한국교회의 문제만은 아니다. 1970년 초반의 미국교회가 바로 우리와 같은 문제에 직면한 적이 있었다. 클라이드 리드가 <설교의 위기>라는 책을 펴내면서 성공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가져오는 설교를 위해서는 교회마다 설교평가위원회와 같은 기구를 둘 것을 제창한 바 있었다.
자유민주주의가 지배한 그 나라에서 설교를 평가한다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고 또 그러한 평가를 설교자나 회중이 충분히 수용할 만한 수준의 사람들이었다. 평신도들과 목사들은 매우 좋은 제안이라고 환영하면서 많은 교회가 이러한 위원회를 조직하고 가동한 바 있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후에 거의 모든 교회가 이 위원회들을 해산시키고 말았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위원회에 참가한 위원들 스스로가 하나 둘 그 임무수행을 기피하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평가위원이 된 자신들에게 손상이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말씀의 종을 통하여 주신 메시지로 알고 모든 말씀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던 자세에 원치 않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평가 위원이 된 후에는 어떤 내용과 표현이 문제인가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찾아야 하기 때문에 전혀 말씀에 은혜를 받지 못하여 신앙생활에 큰 손실을 입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둘째로 이 위원회들이 사라진 이유가 설교자에게도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설교를 진솔하게 평가해 주는 위원회를 통하여 자신의 설교가 발전을 가져오리라는 확신을 하면서 적극 협조하고 그 평가위원회에 참석을 하면서 자신의 설교에 대한 분석과 비평에 귀를 기울였는데 얼마 안가서 설교할 때마다 그 위원들의 얼굴을 보면 그들이 감시자로 보여 시원스럽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늘 위축이 되어서 자유로운 설교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결국은 평신도들과 설교자 모두가 이러한 위원회가 도움이 되지 못함을 알고 중단하고 말았다.
여기서 필자는 설교의 평가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설교를 평가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다음의 몇 가지 항목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고 싶다.
먼저 설교를 토론의 대상으로 삼았을 때 수반하게 되는 부작용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70년대 초반의 미국교회들이 환영했던 '설교평가위원회'가 경험한 대로 설교자는 감시자들 앞에 놓고 설교를 한 듯한 착각에 빠지고, 회중은 은혜를 받겠다는 자세가 아니라 '오늘의 설교에서 무엇을 문제삼아 토론에 임할 것인가?' 에만 관심을 둔다면 그 설교현장은 성스럽지 못한 결과를 낳게 된다.
둘째는, 설교의 어느 한 부분에서 나타난 표현이나 내용을 가지고 그것이 마치 설교의 모두인 것처럼 비평하는 것은 무리이다. 설교자가 말씀의 의미를 좀더 정확하게 알려주기 위하여 사용한 설교의 자료는 때로는 적절하지 못할 때가 있다. 특별히 그것이 시국관이나 정치적인 노선에 관한 것이라면 회중은 예리한 반응을 보이고 거기에 대한 찬반의 반응을 바로 표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그 예화와 자료는 한 부분의 말씀을 설명하는데 필요한 것이지 그것이 설교의 전체가 아닐 경우가 대부분이다.
셋째는, 그 날의 설교가 자신의 생각과 이해와 상반된다고 해서 그 설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서와 지적인 바탕은 동감할 수 없으나, 내 옆의 다수의 사람들은 기쁨과 감사로 수용할 수 있는 경우가 많음을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지나친 자기중심이 때로는 교회 안에서 많은 문제를 유발시키는 사례가 흔히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넷째는, 설교는 하나의 주제로 등장하지만 설교자에게는 지난 설교와 앞으로 전개될 설교의 주제와 연관성을 맺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설교자는 단회적인 설교가 아니라 과거에 한 설교에 이어 필요한 주제를 설정하고 그 내용도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설교 다음에 어떤 설교를 해야 하는 것까지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단회적으로 설교를 듣고 예리한 평가를 한다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다섯째로, 한 설교자의 설교는 국내외의 모든 교회를 향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섬기고 있는 교회를 위하여 준비하고 외친 설교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자신이 섬긴 교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받고 준비하는데 심혈을 기울인 것이 설교자의 본분이다. 그래서 그 교회 밖의 사람들이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설교일지라도 해당교회에는 은혜가 가득한 설교로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끝으로, 설교는 지성의 기능보다는 신앙의 기능으로 들어야한다. 지성의 기능은 예리한 비판의 반응을 보이지만 신앙의 기능은 하나님이 내게 설교자를 통하여 들려주신 뜻이 무엇인지를 찾는 자세를 갖추게 한다. 그럴 때 하나님 말씀과의 만남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 성령님의 역사는 인간 지성을 의지하는 세계보다는 인간 이성으로 풀 수 없는 신앙의 세계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남을 알아야한다.
설교자와 회중이 함께해야 할 설교 사역
교회의 촛대가 영국에서 타오르던 시절 웨슬리와 휫필드의 설교는 미국까지 그 여진을 몰아 제 1차 대각성 부흥운동을 일으킬 정도로 황금기를 누렸다. 그들의 대를 이어 등장했던 스펄젼과 맥클래런과 같은 말씀 중심의 설교가들이 황혼기에 접어든 이후 영국교회는 설교의 위기를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대를 이을 설교가들의 등장이 현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포사이드(Forsyth)는 "교회는 설교와 함께 서고 설교와 함께 쓰러진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면서 설교의 부흥을 갈망한 적이 있다.
한국의 개신교는 지난 세기 동안 예전(Liturgy)보다는 설교를 통한 말씀 중심으로 교회를 일으키고 지탱하여 왔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미래도 설교사역이 매우 중요한 몫을 감당해야 함에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문제는 어떻게 보다 나은 설교사역을 지속적으로 이룩해 나가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오늘처럼 대형교회의 설교자들은 그 설교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작은 교회의 설교자는 보호의 대상이 되는 풍토는 그리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니다.
필자는 여기서 대형교회의 설교자들의 메시지를 표본으로 삼거나 그 말씀에 맹종해야 한다는 주장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만을 선포하고 해석하고 우리의 삶에 적용해 달라는 주문을 해야 한다. 문제는 방법론이다. 선포된 설교 내용을 자신의 사상과 시대관에 맞지 않는다고 조목조목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그 동안 성스럽게 생각해온 한국교회 설교사역에 너무 심한 상처를 몰고 온다. 그 상처가 잘못 치유되어 '설교의 임종 또는 몰락'을 가져온다면 안 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여기에 최선의 대안이 있다. 그것은 회중과 설교인이 함께 설교의 발전에 동참하는 일이다. 회중은 설교의 문제점이 발견되었을 경우 그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성령님의 도움을 청하고 정성껏 문제점들을 정리하여 면담을 하든지 아니면 편지나 이메일로 보내는 애정 어린 도움의 손길이 있어야 한다. 설교인들은 이러한 지적과 충고를 받아 들고 감사하면서 보다 진지한 설교의 준비에 임하여야 한다. 나의 설교를 비판한다는 불쾌감에 젖은 소심한 설교자가 아니라 먹기에 힘들다고 표현하는 양들의 표현을 아름답게 보아주는 설교자의 도량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아름다운 그림이 우리 한국교회 설교 현장에서 그려져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지난 한세기의 기록을 다시 세우면서 세계 교회의 촛대가 활활 타오르는 21세기를 누릴 수 있다. -뉴스엔 죠이-
(정장복 교수는 장신대에서 설교학을 가르치고 있다. 편집자 주.)
우리의 한국교회 강단에 설교의 전성기가 끝나고 수난의 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한 한 조짐을 여러 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 수난의 시기가 연단으로 이어지고 각성으로 새롭게 솟아오른다면 그것은 매우 바람직한 과정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이 수난이 설교의 권위를 위축시키고 설교자들이 나래를 자유롭게 펴지 못하는 판도를 가져온다면 설교는 침체상태를 면치 못할 것이고 종국에는 설교의 쇠퇴기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한국이 디지털 문화의 발전에 선두를 달리면서 우리의 설교사역에 심각한 문제점이 서서히 일기 시작한다. 특별히 인터넷을 통하여 활짝 열린 세상으로 변화가 오자 네티즌들이 그동안 존엄하게만 생각해오던 설교의 세계를 향한 발언대를 마음껏 형성하고 있다. 지금까지 목회자의 설교에 한 마디의 비판도 할 수 없었던 철문을 부순 듯 활기를 띠고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일반 시티즌들의 삶의 구조에서는 설교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시원스럽게 펼 수 없었다. 특별히 수직적 관계로 이어진 설교자와 회중의 관계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나 인터넷을 통한 네티즌들의 삶의 구조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네티즌들의 세계는 누구의 간섭이나 체면을 초월한다. 이 세계를 출입하는 사람들은 본대로 느낀 대로 표현하면서 사는 새로운 세상의 무대를 즐기고 있다.
이토록 네티즌들의 영역이 넓혀지면서 설교사역에 도움을 주는 긍정적인 측면도 없지 아니하다. 특별히 그들이 진솔하게 설교자들에게 주는 조언들은 매우 값지다. 때로는 회중들이 그 주일에 행한 자신의 설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반응을 설교자들은 신속하게 알게 된다. 다양한 반응을 보면서 설교의 발전을 위한 설교자들의 노력이 더 상승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설교를 위한 기탄 없는 의사표현은 설교가 새로운 시대에 진입하였음을 의미하고, 설교단이 그 동안 설교자의 독무대로 전성기를 누르던 시대가 종장을 맞는 듯하다.
최근에 일고 있는 설교의 평가들
최근에 사이버 공간을 통한 열린 광장에서 설교에 대한 평가들이 뜨겁게 열리고 있는 현실이다. 설교를 비판한 기고자의 글을 보고 자유롭게 실린 독자들의 의견들은 때로는 설교자의 인격에까지 상처를 입히는 표현들이 가득하다. 설교를 일반 강의와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한 듯한 평가들이 너무 많다. 때로는 자신들의 정치나 사고의 노선과 차이가 있을 때 펼치는 비난은 매우 민망할 때가 많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은 메시지가 쏟아 질 때 어떤 이는 분노에 가까운 몸부림을 친다.
이러한 현상은 사이버 세계에서만 일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교회의 현장에서도 설교에 대한 비판의 글을 인쇄하여 돌리면서 설교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원하는 대로 목적이 달성되어지지 않을 때 설교자의 사생활이나 인격에까지 심각한 상처를 입히는 글들을 익명으로 배부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필자는 설교의 이론과 실제를 가르치는 교수로서 설교의 이러한 현장에 일차적인 책임을 통감한다. 설교자 본인들이 당한 아픔에는 이르지 못할지라도 나름대로 아픈 가슴을 안고 옷깃을 여민다. 이 때마다 한국의 설교사역을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뜨거워진다. 그리고 날라 오는 돌팔매 앞에 서있는 설교자들을 부여안고 함께 고민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 이유는 설교자가 만에 하나 바른 설교를 하지 못하고서 당하는 현장이라면 그것은 그들을 바르고 철저하게 교육시키지 못한 신학교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교의 수난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을 안고 있는 필자는 용서를 비는 침묵을 지킴이 당연하리라 본다. 그러나 한국의 설교 미래를 위하여 침묵해서는 안될 한마디가 있다. 그것은 설교 비평가들이 설교자를 향하여 돌을 들기 전에 먼저 설교에 대한 다음의 몇 가지만은 알아달라는 특별한 청원이 있다.
설교를 비평하기 전에 알아야 할 항목들
설교는 분명히 인간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말임에 틀림이 없다. 설교자의 신앙과 지식이 설교 안에 실린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설교자의 느낌과 판단의 주관적 사고가 설교 안에서 작용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설교는 단순한 설교자의 지식을 발표하는 강의와는 전혀 다르다. 설교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그 본문으로 한다. 그리고 본문을 들려주는 것을 최우선의 임무다. 그 말씀을 선포하고, 회중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석하고, 그 말씀이 적용되어야 할 삶의 장을 찾아주는 것을 설교의 원칙으로 하고 있다. 특별히 설교의 장에는 강의에서 볼 수 없는 4가지의 기본 요소를 갖추고 있다.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가 있다. 둘째는, 하나님 말씀의 종으로 선택받아 선지동산에서의 철저한 훈련을 받은 설교자가 있다. 셋째는, 이 말씀을 들어야 하는 회중이 있다. 넷째는, 이상의 3대 요소를 총괄하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있다. 이러한 요소들 때문에 교회의 역사에는 설교를 성스러운 사역으로 인정하고 2천년의 역사를 지탱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스러운 설교사역이 설교인들에 의하여 지켜지지 못하고 회중에 의하여 바르게 이해되지 못했을 때 설교는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수난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수난은 설교자들로 하여금 설교에 대한 자신감과 의욕을 잃게 한다. 이러한 과정이 계속되면 설교단은 흔들리고 힘있는 말씀은 서서히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가 쇠퇴해지는 원인중의 가장 큰 요소이다.
문제는 회중들의 지적인 수준의 향상과 자기 주장을 거침없이 펴는 환경의 변화이다. 감사의 마음으로 겸허히 받아들여진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지성으로 거르고 취사선택하여 먹는 말씀이 되는데 있다.
이러한 문제는 한국교회의 문제만은 아니다. 1970년 초반의 미국교회가 바로 우리와 같은 문제에 직면한 적이 있었다. 클라이드 리드가 <설교의 위기>라는 책을 펴내면서 성공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가져오는 설교를 위해서는 교회마다 설교평가위원회와 같은 기구를 둘 것을 제창한 바 있었다.
자유민주주의가 지배한 그 나라에서 설교를 평가한다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고 또 그러한 평가를 설교자나 회중이 충분히 수용할 만한 수준의 사람들이었다. 평신도들과 목사들은 매우 좋은 제안이라고 환영하면서 많은 교회가 이러한 위원회를 조직하고 가동한 바 있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후에 거의 모든 교회가 이 위원회들을 해산시키고 말았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위원회에 참가한 위원들 스스로가 하나 둘 그 임무수행을 기피하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평가위원이 된 자신들에게 손상이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말씀의 종을 통하여 주신 메시지로 알고 모든 말씀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던 자세에 원치 않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평가 위원이 된 후에는 어떤 내용과 표현이 문제인가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찾아야 하기 때문에 전혀 말씀에 은혜를 받지 못하여 신앙생활에 큰 손실을 입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둘째로 이 위원회들이 사라진 이유가 설교자에게도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설교를 진솔하게 평가해 주는 위원회를 통하여 자신의 설교가 발전을 가져오리라는 확신을 하면서 적극 협조하고 그 평가위원회에 참석을 하면서 자신의 설교에 대한 분석과 비평에 귀를 기울였는데 얼마 안가서 설교할 때마다 그 위원들의 얼굴을 보면 그들이 감시자로 보여 시원스럽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늘 위축이 되어서 자유로운 설교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결국은 평신도들과 설교자 모두가 이러한 위원회가 도움이 되지 못함을 알고 중단하고 말았다.
여기서 필자는 설교의 평가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설교를 평가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다음의 몇 가지 항목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고 싶다.
먼저 설교를 토론의 대상으로 삼았을 때 수반하게 되는 부작용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70년대 초반의 미국교회들이 환영했던 '설교평가위원회'가 경험한 대로 설교자는 감시자들 앞에 놓고 설교를 한 듯한 착각에 빠지고, 회중은 은혜를 받겠다는 자세가 아니라 '오늘의 설교에서 무엇을 문제삼아 토론에 임할 것인가?' 에만 관심을 둔다면 그 설교현장은 성스럽지 못한 결과를 낳게 된다.
둘째는, 설교의 어느 한 부분에서 나타난 표현이나 내용을 가지고 그것이 마치 설교의 모두인 것처럼 비평하는 것은 무리이다. 설교자가 말씀의 의미를 좀더 정확하게 알려주기 위하여 사용한 설교의 자료는 때로는 적절하지 못할 때가 있다. 특별히 그것이 시국관이나 정치적인 노선에 관한 것이라면 회중은 예리한 반응을 보이고 거기에 대한 찬반의 반응을 바로 표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그 예화와 자료는 한 부분의 말씀을 설명하는데 필요한 것이지 그것이 설교의 전체가 아닐 경우가 대부분이다.
셋째는, 그 날의 설교가 자신의 생각과 이해와 상반된다고 해서 그 설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서와 지적인 바탕은 동감할 수 없으나, 내 옆의 다수의 사람들은 기쁨과 감사로 수용할 수 있는 경우가 많음을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지나친 자기중심이 때로는 교회 안에서 많은 문제를 유발시키는 사례가 흔히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넷째는, 설교는 하나의 주제로 등장하지만 설교자에게는 지난 설교와 앞으로 전개될 설교의 주제와 연관성을 맺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설교자는 단회적인 설교가 아니라 과거에 한 설교에 이어 필요한 주제를 설정하고 그 내용도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설교 다음에 어떤 설교를 해야 하는 것까지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단회적으로 설교를 듣고 예리한 평가를 한다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다섯째로, 한 설교자의 설교는 국내외의 모든 교회를 향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섬기고 있는 교회를 위하여 준비하고 외친 설교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자신이 섬긴 교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받고 준비하는데 심혈을 기울인 것이 설교자의 본분이다. 그래서 그 교회 밖의 사람들이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설교일지라도 해당교회에는 은혜가 가득한 설교로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끝으로, 설교는 지성의 기능보다는 신앙의 기능으로 들어야한다. 지성의 기능은 예리한 비판의 반응을 보이지만 신앙의 기능은 하나님이 내게 설교자를 통하여 들려주신 뜻이 무엇인지를 찾는 자세를 갖추게 한다. 그럴 때 하나님 말씀과의 만남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 성령님의 역사는 인간 지성을 의지하는 세계보다는 인간 이성으로 풀 수 없는 신앙의 세계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남을 알아야한다.
설교자와 회중이 함께해야 할 설교 사역
교회의 촛대가 영국에서 타오르던 시절 웨슬리와 휫필드의 설교는 미국까지 그 여진을 몰아 제 1차 대각성 부흥운동을 일으킬 정도로 황금기를 누렸다. 그들의 대를 이어 등장했던 스펄젼과 맥클래런과 같은 말씀 중심의 설교가들이 황혼기에 접어든 이후 영국교회는 설교의 위기를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대를 이을 설교가들의 등장이 현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포사이드(Forsyth)는 "교회는 설교와 함께 서고 설교와 함께 쓰러진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면서 설교의 부흥을 갈망한 적이 있다.
한국의 개신교는 지난 세기 동안 예전(Liturgy)보다는 설교를 통한 말씀 중심으로 교회를 일으키고 지탱하여 왔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미래도 설교사역이 매우 중요한 몫을 감당해야 함에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문제는 어떻게 보다 나은 설교사역을 지속적으로 이룩해 나가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오늘처럼 대형교회의 설교자들은 그 설교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작은 교회의 설교자는 보호의 대상이 되는 풍토는 그리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니다.
필자는 여기서 대형교회의 설교자들의 메시지를 표본으로 삼거나 그 말씀에 맹종해야 한다는 주장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만을 선포하고 해석하고 우리의 삶에 적용해 달라는 주문을 해야 한다. 문제는 방법론이다. 선포된 설교 내용을 자신의 사상과 시대관에 맞지 않는다고 조목조목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그 동안 성스럽게 생각해온 한국교회 설교사역에 너무 심한 상처를 몰고 온다. 그 상처가 잘못 치유되어 '설교의 임종 또는 몰락'을 가져온다면 안 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여기에 최선의 대안이 있다. 그것은 회중과 설교인이 함께 설교의 발전에 동참하는 일이다. 회중은 설교의 문제점이 발견되었을 경우 그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성령님의 도움을 청하고 정성껏 문제점들을 정리하여 면담을 하든지 아니면 편지나 이메일로 보내는 애정 어린 도움의 손길이 있어야 한다. 설교인들은 이러한 지적과 충고를 받아 들고 감사하면서 보다 진지한 설교의 준비에 임하여야 한다. 나의 설교를 비판한다는 불쾌감에 젖은 소심한 설교자가 아니라 먹기에 힘들다고 표현하는 양들의 표현을 아름답게 보아주는 설교자의 도량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아름다운 그림이 우리 한국교회 설교 현장에서 그려져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지난 한세기의 기록을 다시 세우면서 세계 교회의 촛대가 활활 타오르는 21세기를 누릴 수 있다. -뉴스엔 죠이-
(정장복 교수는 장신대에서 설교학을 가르치고 있다. 편집자 주.)
출처 : 예수중심 JESUS CENTERED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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