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스크랩]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

이아기 2006. 9. 4. 11:11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

(누가복음 22장 24-27절)

이 중표 목사

(한신목회 개발원 원장)


하나님의 은혜로 제7회 전국 목회자 세미나를 개최하게 된 것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는 매회 그때마다 주님의 감동하심으로 영감있는 주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금년은 주제를 “교회발전을 위한 지도력 개발”로 정했습니다. 성령님께서 감동하여 주셨습니다. 이번 세미나를 통하여 참석하신 목사님들은 위대한 지도자로서 영육간에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하늘이 세운 지도자”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하늘이 세운 지도자는 영적 지도자라고 할 수 있고, 또 교회 지도자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세우실 때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제자로 택하신 것은 지도자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고 3년동안 지도자로서의 훈련 기간을 가졌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영적인 지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문벌이나 학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분명 그 시대의 보통 사람에도 못 미치는 비천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에 길이 남는 지도자가 된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에게 가르침을 받으면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도자’와 ‘지배자’의 개념을 구별해야 합니다. 오늘 이 사회에는 남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라는 정권을 잡은 자, 회사의 기업가(사장), 기관장, 교단의 총회장 등입니다. 이들은 사회나 단체의 통솔자입니다. 정권을 잡아 권좌에 앉은 지배자들입니다.

지도자는 정신을 지배하는 자요,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 따르게 하는 자입니다.

지도자란 먼저 실천하는 자요, 먼저 섬기는 자요, 인도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도자와 지배자는 다릅니다. 지배자는 다른 사람을 넘어뜨리고, 죽이고, 싸워 이김으로써 자리를 얻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자요, 자기를 부정하고 다른 사람을 섬김으로 자리를 얻습니다. 지배자는 살아서 역사를 지배하고 지도자는 죽어서 역사를 움직입니다. 하나님은 ‘지도자’를 찾고 계십니다.

지배자의 자리를 다스리기 위하여 위에 군림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지도자의 위치는 인도하기 위하여 겸손하게 섬기는 위치입니다. 지배자는 통솔력을 갖추어야 하며, 지도자는 지도력을 가져야 합니다.

통솔력은 외적인 조직과 권위로 창출될 수 있으나 지도력은 인격적 감화로 이루어지는 내적이 영향력입니다.

지배자는 명령으로 순종을 강조하나 지도력은 감화로 순종하게 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지배자’가 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영광을 누리지만 지도자로 부름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나 지도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영광을 받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게게 지도자의 지침으로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사는 것이 지도자의 영성입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 때문에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지배자가 아니라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일생동안 일관된 자아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죽기까지 잠시도 떠나지 않는 생각,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는 메시아의식이었습니다. 이 자아의식이 일생동안 하나님의 아들로서 확신과 능력을 갖게 하였고 만나는 사람마다 큰 변화를 일으키게 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 28).

예수님은 일관되게 이 정신으로 사셨습니다.

제자들은 고난받는 메시아, 영원한 왕좌에 오르실 메시아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기에 영광의 자리를 탐내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 26-28).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달음으로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교회 지도자와 세상의 자도자는 의미가 다릅니다. 세상 지도자는 자기 철학과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지도자는 자기 사상이나 철학이 필요치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마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니 곧 그리스도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지도자로 삼고 따라야 합니다. 교회지도자는 자기를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인도하여 주는 일을 하는 자입니다.


Ⅰ. 지도자는 하나님이 보낸 자이다.

 먼저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는 소명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하나님이 세웁니다. 사람이 세우고 사람이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고 하나님이 버리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지도자로 세웠다는 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소명이라고 합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 29)

 예수님은 보내심을 받았기에 보내신 분의 뜻을 따르고 있다는 자아의식이 분명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자기를 보냈다는 말입니다. 또한 ‘섬기러 왔다’는 말은 일생동안 섬길 자를 찾으시는 종의 의식을 가지고 사셨음을 말합니다. 또한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는 말씀에서 자시 죽음과 희생으로 부활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을 의식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의식이 분명한 사람은 소명의식이 강하고 하나님의 사자로서 자기위치를 분명하게 인식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언자요, 부흥사 기질이 있는 사람입니다.

 섬기는 종의 의식을 가진 사람은 성자가 될 기질이 있는 사람입니다. 대속물의 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은 순교자가 될 기질이 있는 사람입니다. 부흥사는 당대에 세상을 휩쓰는 인기스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섬기는 종은 존경받는 성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순교자는 죽어서 영원히 감동을 주고 마음을 움직이는 역사의 지도자입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해하려 함이니라.”(요6:38~39)

 예수님은 지도자로서 분명한 자기확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각자 스스로 지도자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하늘이 세운 지도자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지도자입니다. 국민이 세운 지도자는 항상 국민의 뜻을 헤아립니다. 여론에 따라 일하는 방향을 세우고 추진합니다. 이런 것은 민주적인 지도 방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중심을 헤아려야 합니다. 무렵을 꿇고 겸손히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려야 합니다. 참으로 위대한 지도자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갈 1:1) 이라고 고백합니다.


소명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자기의 하는 일을 가장 소중하게 여깁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굶어도 좋다.’라고 생각하며 자기 일에 만족합니다. 이 일로 죽어도 영광으로 압니다.


둘째, 하는 일이 쉽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기르는 것이 어려운 줄 모르고 쉽게 기릅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힘듭니다. 목회는 쉬운 것입니다. 세우신 분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므로 쉽고 가볍습니다. 목자는 하는 일이 쉽고 삯군은 힘듭니다.


셋째, 하는 일이 즐겁습니다. 행복합니다. 이 일이상 더 큰 행복과 만족은 없다고 고백합니다. 일에서 최고의 보람을 느낍니다.

위대한 지도자란 영적인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다 총회장이 되거나 큰 교회 목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하나님의 지도자는 될 수가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어린 시절부터 자아의식이 강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소명의식이었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 여사는 어린 시절 웨슬레 형제들에게 분명한 소명의식을 심어 주었다고 합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너희를 위대하다 했느냐?” “하나님이 위대하다 하셨습니다.”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 “역사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소명 의식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깁니다. 자기 스스로를 이 역사의 핵으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소명 있는 사람은 무명의 어느 두메 산골 목자일지도 교회를 섬기는 자기를 하나님께서 지도자로 세웠다는 의식을 가지고 삽니다.

하늘이 세운 지도자 의식을 가지면 자기 위치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위대한 지도력을 갖기 위해서는 위대한 지도자로써 꿈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시지 않았습니다. 크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잘못한다고 지적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의혹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써 열망이 있었습니다. 자기 백성의 탄식과 고통을 덜어주는 지도자가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자기 백성과 애굽인이 싸우는 것을 보고 민족적 의분이 일어나 애굽일을 돌로 쳐죽였습니다. 자칭 지도자가 저지른 죄였습니다.

이 일로 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의 망명객이 됩니다. 40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호렙산에서 하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너를 애굽에 보내어 내 백성을 인도하여 내리라.”

모세가 하늘이 세운 지도자의 소명을 받은 이후에는 이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권능이 차고 넘쳤습니다. 자기 백성이 원망하고 돌을 들어 쳐죽이려고 해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보내신 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보내신 분을 알고 보내심을 받은 줄 아는 지도자는 시시한 것 때문에 싸우지 않습니다. 생각이 다르며 목적이 다릅니다.

목사님들도 자신을 역사의 한 핵으로 인정하기 바랍니다. 핵은 작은 입자지만 불이 들어가면 폭탄이 되어 버립니다. 이와 같이 자기 존재가 비록 미약할지라도 핵이라는 의식 속에 하늘이 감동하는 성령의 불이 들어가면 폭탄처럼 전 인류의 가슴을 깨트리는 놀라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하늘이 세운 지도자에게는 놀라운 지도력이 나타납니다.


Ⅱ. 지도자는 섬기는 종으로 보낸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섬기는 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는 자기가 헤야할 일을 알아야 합니다. 지도자가 자기 할 일을 모르면 방황하게 됩니다. 지도자는 지도자로서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지배자는 자기 뜻을 성취하기 위해 일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는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본을 보이는 지도자로서 섬기는 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님계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제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주의 나라가 임할 때에 야고보와 요한이 좌우편에 앉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다른 제자들이 분을 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곁에 부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는 대로 민족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마구 내려누르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까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하고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위대한 지도자는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가치관의 일대 혁명입니다. 이는 세상을 뒤집어 놓은 가치관이요, 역사상 가장 큰 혁명입니다. 인간이 으뜸이 되고자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지도자는 으뜸이 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는 위대해지고자 하는 꿈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남을 섬기기 위해 으뜸이 되고, 섬기는 일로 위대해 지라고 하셨습니다. 남을 지배하는 것은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목사는 성공하기 위해 부름받은 자가 아니요 위대해 지도록 세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섬기는 자로 세웠고, 섬기는 일로 위대한 지도자가 되게 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위대한 종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역사에는 지배적 소수와 창조적 소수가 있는데 지배적 소수가 있을 때 역사는 퇴보하였고, 창조적 소수가 역사를 발전시켰다.”

한국 교회의 발전은 목사님들의 의식속에 섬기는 자로서의 일관된 생각이 지배하고 있을 때 일어납니다. 우리는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통솔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교회를 조직적으로 운영하는 행정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섬기는 마음이 없으면 지도자는 될 수 없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는 섬기는 종의 마음을 가진 목회자요 지도자를 절실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마다 교인을 통솔하는 당회장이 있습니다. 노회장도 많고, 총회장도 많습니다. 그 자리에 앉으려고 세오 싸우고, 분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섬기는 종의 자리는 항상 비어 있습니다.

주님 좌우편에 앉기를 원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좌우편은 섬기는 자만이 앉을 자리이다.”

목사는 교인들을 섬김의 대상으로 보아야 합니다. 목회자의 전 사역은 섬김의 사역입니다. 설교는 말씀으로 섬기는 사역입니다. 심방도 섬기는 사역입니다. 섬김의 의식을 상실하면 지배자가 됩니다.

위대한 지도자는 섬기는 대상의 범위가 넓고 깊은 사람입니다. 섬김의 범위가 넓다는 것은 섬김의 대상이 제한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섬김에는 높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듯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섬김의 길이가 길어야 합니다. 목회 초년에는 섬김으로 시작하고 나중에는 섬김을 받으려 하면 안됩니다. 철저하게 종의 심정으로 섬겨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존경받는 지도자는 섬기는 마음으로 살아간 사람입니다. 슈바이쳐 박사는 위대한 지도자로 존경받습니다. 그것은 자기 생명을 가난하고, 병들고, 억압받는 자를 위하여 바쳤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그의 지도력은 우리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이 민족의 지도자로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가 민족을 섬기는 심정으로 평생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정신과 섬기는 삶에서 우러나오는 영향력이 그리스도가 가르쳐주는 지도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Ⅲ. 지도자는 하나님이 죽이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셨고 하나님이 죽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죽음에 대하여 잘 알 고 있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대속물로 주려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지도력을 십자가에서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원한 지도자로 받들고 따르는 것은 그가 우리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주의 영광중에 우리를 좌우편에 앚게 하소서”라고 했는데 제자들이 구하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영과을 십자가로 보았고 자기 죽음에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죽음을 앞두고 “인자의 영광을 얻을때가 왔도다”(요 12: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위대한 지도자는 자기 죽음에서 영과을 봅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어디로 갔습니까? 제자들은 기도하려 다녔고, 전도하러 따라다녔습니다. 섬기며 봉사하러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더 이상 따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셨고, 더 이상 따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가야 합니까?

지배자는 많은 사람을 죽이면서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자기를 죽이고 많은 사람을 살리며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분명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예수님은 따르는 길은 자기죽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자만이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지도자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지배자는 살아서 지배하나 순교자는 죽어서 지배합니다.

청년 사울은 스데반을 쳐죽일 때 동조했던 사람입니다. 증인들의 옷을 들고서서 스데반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순교의 영성이 사울을 사로잡았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스데반은 사도 바울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하늘은 위대한 지도자로 삼기 위해 예정된 사람을 죽입니다. 이승만 박사와 링컨을 비교해보면 시대가 다르긴 하나 둘 다 유능한 정치인입니다. 그러나 둘의 죽음은 다릅니다. 링컨의 죽음은 위대하였고 이승만의 죽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링컨은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이승만은 죽을 준비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링컨은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는 뇨예들의 해방을 위한 대속물이 되어 미국의 지도자로서 길이 좀경을 받고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오래오래 산 것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이승만이 미리 죽었다면 우리의 위대한 국부로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래오래 살아서 고목 되어 죽었기에 그도 불행이요, 우리민족에게도 불행이었습니다.

이준열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느니 것은 무엇을 죽는다 하며, 산다는 것은 무엇을 산다 하는가. 죽어도 죽지 아니함이 있고,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으니 그릇 살면 죽음만 같지 못하고 잘 죽으면 도리어 영생한다. 살고 죽는 것이 나에게 있으니 모름지기 죽고 삶을 힘써 알지어다”

살고 죽는 것이 하늘에 달려있기에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십자가에서 자기 죽음을 체험해야겠습니다.

목수는 나무가 늙어 고목이 되기 전에 나무를 잘라서 기둥을 씁니다. 순교는 예수님이 짓긴 십자가를 나도 지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는 자기 죽음을 의미합니다. 지배자는 다른 사람을 죽이고 다스리는 자요, 지도자는 자기가 죽음으로 다스리는 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분명합니다. 자기 죽음으로 따라야 합니다. 주님의 좌우편은 죽음으로써 앉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의 지도자는 누구입니까? 총회장입니까? 부흥사입니까? 큰 교회 목사입니까? 자칭 교계 지도자들입니까? 주님의 음성을 들어봅시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쫒을 것이니라.”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지도자들이 누구입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죽은 자들입니다.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순교자들입니다. 주기철, 손양원 목사는 한국 교회의 지도자입니다. 이들은 죽었으나 지금도 살아서 우리를 지도하고 있으며, 따라오라고 합니다.

순교자는 분명한 신앙 철학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나는 죽는다.”라는 것입니다. 섬기는 정신을 초월하는 자세입니다. 지도자는 따르는 자를 살리며 지도력은 따르는 자를 살려주는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도력은 따르는 자들을 살리는 능력이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양들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선한 목자는 죽음으로 양을 살립니다. 순교자의 영성은 자기 죽음으로 상대를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다른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이것이 대속의 정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부활을 위한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영성이 나를 살렸기에 내가 죽음으로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지도자로 순교자로 세우기 위해 부르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교회 지도자로 세우기 위해 다순교의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놀라운 일은, 사랑하는 제자들도 자기 십자가를 지게 한 것입니다. 다 순교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민족과 한국 교회의 지도자로 여러분을 세우셨습니다.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 성령은 감동을 주십니다.

“나는 죽어야 한다. 나는 죽어야 한다. 내가 죽어야 한다.”

당회장의 권세로 교인들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로 권세있는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로 능력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지도력은 아닙니다. 지도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기 죽음으로 받아들이고 순교자의 영성으로 자신을 세우는 것입니다.

장로는 교회의 지도자입니다. 저는 장로들을 모아놓고 공부하는 시간에 묻습니다.

“장로는 왜 하려고 하십니까?”

“목사님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나 도와주려고 하지 마시오. 나는 하늘이 도와서 목회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고 은혜나 받으시오. 인생은 한번 태어나서 사는 것인데 날 도우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오. 고귀한 인생들이여, 먼저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하오. 당신들이나 잘 사시오.”

“내가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입니까?”

“은혜를 받으시오.”

“목사님, 목사님의 말씀으로 날마다 은혜 충만합니다.”

“이제 좀 다른 은혜를 받아야 하오. 별세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장로는 목회 장로와 치리 장로가 있습니다. ‘치리’는 교인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대개 헌법으로 치리 합니다. 그리고 행정으로 합니다. 그러나 이 원리만으로는 치리가 안됩니다.

예수님은 어디서 치리 하십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우리를 치리하고 계십니다.

최고의 치리는 당회가 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로 하는 것입니다. 당회하지 말고 십자가 회의를 하는 것이 최고의 치리회입니다.

“교회 장로는 죽으라고 새운 것이오. 그래야 자기도 살고 목사도 살리는 것이오.”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인자는 섬기는 종으로 왔고 대속물로 죽으러 왔다.”

예수님은 죽으러 왔는데 왜 오늘날 주의 종들은 그 인자를 따르지 않고 있습니까? 누구를 따르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최후의 심판대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고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냈다 하지만 도무지 내가 모르겠다. 이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거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불법을 행한 자들이 누구입니까? 섬기고 죽은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은 자들입니다. 목회자의 최대의 영광은 순교자가 되는데 있습니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고백할 수 있는 최고의 신앙 행위가 순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신 대속의 사건을 자기 몸으로 증언하는 것이 순교자의 신앙입니다.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가면 강재구 소령의 동상이 있습니다. 강재구 소령은 월남 파병을 위해 부하들을 훈련시키는 도중 한 사병의 수류탄이 오발되자 몸으로 그것을 덮쳐 죽음으로 많은 부하들을 살렸습니다. 강재구는 군인들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군인들은 현재 그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많은 군인들이 수많은 별을 달려고 뛰어다니지만 그들은 지도자로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독재자는 살아서 지배하고 순교자는 죽어서 지배합니다.

예수님의 친히 이런 영성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에서 자신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하시고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사랑하면 이를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자는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죽음으로 인류를 구원해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도자의 영성입니다. 지도자는 자기를 부정하고 죽음으로 많은 사람을 살립니다. 목사는 자기 교인들을 살리기 위하여 죽음을 선언해야 합니다. 자기가 죽음으로 교인들의 제물이 될 때 진정한 지도자로서의 지도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출처 : 예수중심 JESUS CENTERED
글쓴이 : 동순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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