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의 성장원리와 현대교회의 적용
성 기 호 교 수
(성결대학교 총장)
서 론
우리가 살펴 볼 내용은 초대교회의 성장 원리와 이것을 어떻게 현대 교회에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성장이라 할 때 보통의 개념은 양적 성장인 외적 발전만을 성장으로 보기 쉽습니다. 그래서 어떤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든지 교회의 외적 성장을 이루기 위해 다른 교회가 성장하고 있다는 소리만 들으면 그 교회가 하는 것을 모방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남이 하는 것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그리고 성장에 온 힘을 기울이다가 교회에서 많은 사업을 벌이기 쉽습니다. 흔히 어린아이를 위한 유아원이나 양로원, 노인대학 등 교회의 사업을 많이 벌이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한 성장의 주안점을 숫자적인 개념에 맞추기 때문에 한국 교회가 바로 발전하기보다는 오히려 병들어 가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어떤 학자는 이러한 부정적인 현상을 B자로 시작하는 말 5가지로 나누어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Building입니다. 교회를 시작하고 나서 성전 대지를 구입하는 것이 목적이고, 땅을 구입하고 나서는 누구보다도 큰 교회를 짓겠다는 등의 건물을 짓는 일에 따라 목회의 성공 여부가 판가름난다는 생각입니다.
둘째는 Baptism입니다. 얼마나 많이 세례를 주어서 신자를 확보하고 있느냐입니다. 우리 교회 세례교인이 몇만 명이다 라는 식의 숫자적인 개념으로 교회의 성장을 판가름하려고 생각하기 때문에 숫자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아집니다.
셋째는 Burial place(매장지)입니다. 우리 교회는 묘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천막으로 시작하든지 전세로 시작하든지 첫 단계가 교회 짓는 것이고, 다음 단계가 교회 묘지를 구입하는 것입니다. 물론 목적은 좋습니다. 우리가 살아서 같은 교회에서 예배드리듯이 죽은 다음에도 같은 장소에 묻혀 있다가 예수님 오시는 날 같이 부활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참으로 좋은 일이지만 이렇게 외형적인 면에 관심을 기울이다 보니 경쟁심을 갖게 되고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넷째는 Bus입니다. 교회를 가려고 주일날 나가보면 신자들을 기다리고 서 있는 대형버스를 발견합니다. 멀리 사는 사람이 돈을 내고 시간을 들여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데 집 앞에 버스가 기다리고 있으면 타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은 마치 고기를 잡을 때 저인망 어선으로 바다를 휩쓰는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가까운 교회에 나가도록 하면 될텐데 큰 교회가 곳곳에 버스를 보내서 새끼고기까지 잡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영락교회는 있던 버스를 모두 팔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론 필요할 경우도 있겠지만 교회를 세우고 나면 적어도 봉고차라도 하나 가지고 신자들을 데리고 오고 차량에 교회 이름을 써서 운행하며 선전을 하는 것도 외적인 과시의 일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는 Budget(예산)입니다. 자기 교회의 예산이 얼마냐가 교회 성장의 표준입니다. “작년에 교회의 헌금이 얼마였는데, 내년에는 얼마다, 그런데 우리가 세운 예산보다 더 많이 들어왔다.” 라고 하면서 교회의 예산이 목회 성공의 표준인 것처럼 오해를 하고, 그 다음에 목회가 얼마나 성공했느냐는 그의 사례비가 얼마나 되느냐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친구들을 만나면 자기는 금년에 사례비를 얼마 책정했다고 말하면서 비슷한 교회인데 자기가 덜 받으면 무엇인지 내가 목회를 잘못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심지했습니다. 자기 교회에 돌아가서 말하기를 “이웃 교회는 우리와 비슷한 규모인데 500만원 사례비를 책정했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300만원밖에 못 했으니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나에게 500만원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장로님들의 체면이 서지 않습니다. 다른 교회가 500만원 세웠으니 우리 교회는 700만원 세우세요. 내가 400만원 헌금하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실지로 300만원 받으면서 외형적으로는 700만원으로 올려놓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병폐들이 왜 생기느냐하면 교회 성장을 Budget(예산)이 얼마나 되느냐로 판가름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성장은 이것과는 별개인데 얼마나 받느냐를 교회성장과 성공의 표로 생각하여 신경을 쓴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성장 유형을 볼 때 교회성장 학자인 맥가브란은 교회성장에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생물학적인 성장입니다. 자연히 자라 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주일학교 학생을 모아서 교회를 시작했는데 몇 년이 지난 후 이들이 자라서 장년이 되어 교회의 일꾼이 되는 성장입니다. 시간이 감에 따라서 자연히 오게 되는 성장입니다.
두 번째는 전입에 의한 성장입니다. 이사를 왔기 때문에 자기 본 교회는 주일 낮 예배만 나가고 수요일, 저녁예배는 이웃에 있는 교회로 나갑니다. 그러다 점점 주일 낮에도 집 근처 교회로 나가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한 사람 명단이 여러 곳에 등록되어 있는 결과가 됩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의 신자들을 모두 모아보면 전 국민의 수보다 많다고 이야기합니다. 등록이 이중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내가 목회를 한다 하더라도 우리 교회에 나오다가 이사를 한 교우가 있을 경우에 그가 간혹 나오기는 하므로 이름을 빼버린다는 것이 목사로서 마음에 걸립니다. 나중에 그 사람이 왔을 때 자기 이름이 없고 구역 편성도 되어 있지 않으면 목사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숫자를 늘리기 위해서 이름을 넣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 사람에게 낙심을 주기 않기 위해서 이름을 빼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서 한 사람이 여러 군데에 등록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이처럼 전입에 의하여 신자들이 생기는데 이는 교회재정이나 목사개인으로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이곳에 나가는 것이나 다른 곳에 나가는 것이나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회심에 의한 교회 성장입니다. 맥가브란 교수는 이 회심에 의한 교회발전이 진정한 교회 발전이라고 말합니다. 계속해서 전도하여 새로운 신자들을 만들고 예수를 믿지 않던 사람이 나와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세례를 받고 제직도 되는 회심에 의한 성장이 가장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없이 교회성장을 추구합니다. 그렇다면 맨처음 교회가 세워졌을 때에, 가장 교회가 발전할 그때에 교회 성장의 모델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문예부흥이라는 것도 고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라틴어, 히브리어, 헬라어 등 고전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어나면서 고전을 다시 읽고 문학적 발전, 예술의 발전, 문화의 발전이 일어난 것이 문예부흥입니다. 이러한 운동의 한 흐름으로 “성경으로 돌아가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종교개혁입니다.
과학은 진보해야 합니다. 옛날에는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오늘날 과학은 10년에 한번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가 다르게 급속히 발전하기 때문에 변화를 따라 잡을 수 없을 만큼 되었습니다. 과학은 이처럼 끊임없이 발전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뒤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행전적인 초대교회의 모습을 살펴보고 어떻게 초대교회가 발전해갔는가를 찾아 그 발자취를 따라 간다고 한다면 올바른 교회 성장을 원리대로 성경대로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본 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증거하시기 시작한 후에 세 제자를 선택했습니다. 언제나 중요한 일이 있을 경우에는 이 세 제자와 동행하셨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기 위하여 회당장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에도, 변화산상에 올라가실 때에도, 십자가 사건을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세 제자만 데리시고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세 제자를 가까이 두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 제자를 비롯해 열두 사도, 70문도, 그리고 교회가 탄생할 때에는 120명의 초대교회 신자로 발전했고 오순절 성령 충만의 사건 이후 베드로의 설교로 3천 명, 5천 명의 세례 교인이 증가하게 되어 사도행전 21장 20절에 가서는 수만 명의 신자가 생겨났습니다.
이처럼 교회가 점점 발전해 나가고 있는데 진정한 교회성장이란 수적인 발전 외에 두 가지를 더 갖추어야 진정한 교회성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수적인 성장과 더불어 질적인 성장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신자들의 믿음과 봉사와 삶이 성장해 가는 것이 질적인 변화입니다. 교인들이 숫자적으로 성장해 가는 것뿐만 아니라 그 안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점점 장성해 가는 모습이 올바른 교회성장입니다.
둘째, 조직이 바로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조직적으로 발전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보면 120명의 신자로 초대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3천 명, 5천 명이 되어 이제는 열두 명의 사도들로서는 수많은 신자들을 관리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6장 3~4절에 가면 교회 내에 분쟁이 생기고 불평이 생기고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이때에 베드로가 사도들과 함께 하는 말이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구제하는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조직화되고 분업화되어 갑니다. 다시 말해서 100명이 모이는 교회와 1,000명이 모이는 교회의 조직이 똑같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가 조직적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상과 같이 교회가 수적으로 성장하고, 질적으로 성장하고, 조직적으로 발전해야 올바른 교회의 성장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이 사도행전 2장 41~42절에 나타나고 있는데 그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말씀 중심의 교회
전해진 말씀은 회개의 복음이었습니다(행 2:38).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의 첫 시작 때에 전파하였던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는 회개의 복음이었고, 예수님 보다 6개월 먼저 난 세례 요한도 똑같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훈련시키시고 내어보낼 때에도 “너희는 가면서 외치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라는 똑같은 말씀이었습니다. 회개의 복음은 어두움의 자녀들인 진노의 자녀들을 빛으로 나아오게 하는 그리고 생명으로 나아오게 하는 중요한 분수령이 됩니다.
복음의 중심이신 예수님은 주와 그리스도가 되십니다.(행 2:26, 요5:39, 고전 15:1~4).
복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초대교회의 설교내용을 분석해 보면 예수, 마리아의 아들 예수 그분은 인간이시며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이시요,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그리스도시요,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즉 예수가 주님이시요, 그리스도라는 것이 메시지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든지 선교할 때든지 십자가 예수가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 없는 설교, 예수가 없는 복음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말씀은 생명이십니다(요 6:63).
루터의 신학을 말씀의 신학이라 부릅니다. 루터는 성경 해석 원리에 있어서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그 성경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복음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복음적인 설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있다는 십자가의 신학이 루터의 신학입니다. 중세에는 주로 의식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예배는 ‘보는 예배’였습니다. 예를 들면 신부가 떡을 들고 이것은 내 몸이니 하고 말하면 신자들은 라틴어는 모르지만 눈으로 보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헌금을 드릴 때에도 헌금통을 십자가 앞에서 몇 번씩 올렸다 내렸다 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제물을 받으셨구나 하고 느낄 수 있도록 눈에 보이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말씀을 중심으로 하였습니다. 천주교에는 제단이 앞에 있는데 반하여 루터는 말씀을 전하는 강단을 중심에 두었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집이 교회다(mundhaus, speech house)라고 했습니다.
루터의 말씀 중심의 신학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말로 되어진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창세기에 “빛이 있으라” 하시며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는 “기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시든, 직접 말씀하시든 입으로 전해진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보니 잘 못될 수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기록하라 하셔서 외쳐진 말씀이 문자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원래 하나님 말씀의 형태는 입으로 전해진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입으로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이 신자들에게 전해질 때에는 역시 입으로 전해져야 한다고 하여 설교를 중요한 사역으로 루터는 인식했습니다. 루터는 신학교 교수가 되어 말씀을 깊이 연구하기도 했지만 설교하는 일에 주력했습니다. 교회가 성장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 시간이 가장 중요한 시간인 줄 알아서 가장 많은 시간을 거기에 투자하고 마치 유언하는 자세로 내가 마지막 말과 마지막 설교를 이 시간에 한다고 하면 사랑하는 신자들에게 무엇을 전할 것이냐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도하는 가운데 준비하고 목숨을 내건 선포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이 말씀 속에서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고 교회의 성장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곧 생명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생명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일 뿐만 아니라 살아 있습니다. 말씀이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이 말씀이 죽은 자를 살리게 됩니다.
에스겔 37장 7~9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살겠느냐 물으시고 뼈들을 향하여 대언하니 뼈들이 모아져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게 됩니다. 9절에서는 다시 생기를 명하여 거기 들어가게 하라 하여 말씀을 좇아 대언했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서 살아 일어서서 극히 큰 군대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생명이 있기 때문에 말씀이 이르는 곳에 해골과 같이 죽어 있던 사람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이 증거되는 곳에 새 생명의 역사가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 보면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거듭나는 것은 새로 태어나는 것이요, 죽은 사람이 다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힘써서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살아 있는 말씀 자체가 역사합니다. 말씀이 운동력이 있어서 역사합니다. 성령께서 새로이 태어나게 하시기 때문에 신자들의 마음속에 믿음이 생기고 생명이 충만해지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생명을 주려 함이고 이미 생명이 있는 자에게 더 풍성한 생명을 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교회 성장의 가장 큰 비결은 말씀 중심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것뿐만 아니라 신자들이 이 말씀을 스스로 읽도록 교육시키는 일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신자들에게 새벽기도회에 나와서 기도를 마친 다음에 반드시 목사님과 함께 1시간 동안 성경을 읽고 가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집에 가면 잠을 자기도 하고, 전화를 하기도 하고 쓸데없이 빼앗기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기도회를 마친 다음에 의무적으로 1시간씩 성경을 읽고 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 분은 장로를 세우려면 성경을 30독해야만 장로로 세우는 분입니다. 성경이 없이, 말씀이 없이 생명이 있다고 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자들로 하여금 성경을 많이 읽도록 하고 성경 말씀을 잘 준비하여 전해야 합니다. 설교를 마친 다음에는 기도로, 말씀의 결실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내면서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 3:6)라고 하였습니다.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 자라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아무리 잘 준비해도 항상 부족을 느끼고, 설교를 전하고 난 다음에는 늘 아쉬운 마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를 끝마친 다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말씀을 전했사오니 이 말씀이 옥토에 뿌려진 말씀이 되게 하시고 성령의 이른 비, 늦은 비를 내려 주소서. 이 말씀으로 30배, 60배, 100배의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라고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도 심부름꾼에 불과합니다. 씨를 뿌리는 심부름꾼입니다. 자라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하고 난 다음에 신자들이 말씀 충만한 신자가 되도록 기도하고 교육할 책임이 목사에게 있습니다.
말씀 충만은 곧 성령 충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3~24절에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말씀 충만한 곳이 하나님의 거처가 됩니다. 우리 마음에 말씀이 충만하다면 복 있는 사람이 됩니다. 신자들 마음에 말씀이 충만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리라고 했습니다. 말씀 충만은 성령 충만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암송하고, 묵상할 수 있는 신자를 세우는 것이 초대교회의 일이었고 그것이 초대교회가 부흥하게 된 가장 큰 요인이었습니다. 오늘도 말씀의 중요성을 다시 감안하면서 말씀을 연구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전무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2. 제자 삼는 교회
말씀으로 거듭난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교육하는 일이 초대교회가 행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제자 삼는 일이며 이것은 곧 예수님의 유언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내가 분부한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초대교회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칠 뿐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제자되게 하는 일을 했습니다.
신자들이 예수 믿고 세례를 받는 일은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에게 가지가 접붙임을 받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기쁨이 한 순간 있었다고 할지라도 이 기쁨이 영속되기 위해서는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과 연결되는 접붙임 받는 행위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세례를 받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세례를 받은 이들이 스스로 주님을 닮고 주님의 뒤를 따라갈 수 있도록 가르치는 일이 필요합니다.
로스앤젤레스 지역에 있는 가난한 유대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는 어느 목사의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유대인 빈민가를 ‘게토’라고 하는데 그는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영접한 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영접하고 교회에 와서는 기쁨으로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그러던 사람들이 몇 주일 보이지 않아서 알아보면 도둑질 하다가 감옥에 들어가고 길거리에서 남자를 유혹하다 붙잡혀서 감옥에 들어가 있습니다. 찾아가 보니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참으로 기가 막힌 일입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나는 목회자로서 자격이 없다.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기쁨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확인했는데도 곧 돌아가서 다시 도둑질하고, 다시 창녀가 되어 감옥에 가는데 도대체 나는 목사될 자격이 없다.’라고 생각하고 목회를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이 목사는 자기를 불러 목사를 삼으신 하나님께 마지막 신고하기 위해 기도원에 가서 “하나님, 사람을 잘못 부르신 것 같습니다.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기도하는 중에 “제자 삼으라.”라는 말씀이 떠오르게 된 것입니다. “가르치는 것만 아니라 제자를 삼으라.”라는 말씀을 듣고 이 사람이「Making Disciples(제자삼기)」라는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데 설교를 하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들이 제자가 되도록 가르쳐 말씀을 지키게 해야만,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의 풍성함을 받고 점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자들을 잘 교육해야 하는데 세례를 줄 때에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진정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은, 생명이 있는 사람인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군대에서 세례 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군대에서 세례를 줄 때 3,000명 세례를 준다고 상부에 보고하고 후방에 있는 목사님들을 모셔다가 세례식을 거행하는데 세례 받기로 한 3,000명 가운데 휴가를 간 사람도 있고, 외출을 나간 사람도 있습니다. 전부 집합해 보니 몇십 명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각 부대에 연락해서 “사역병 집합”이라고 해서 선착순으로 30명을 데리고 왔는데 이들은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왔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들이 영문도 모르고 세례를 받는데 의미없이 행해지는 것입니다. 세례를 주므로 구원받는다고 한다면 자는 사람에게 세례를 주어도 의미가 있을까요? 그러나 세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천주교에서는 이런 의미의 세례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 중생’이라는 것으로, 세례를 받지 못하면 중생을 못 받은 것으로 알기 때문에 천주교에서는, 아주 위험할 때에는 옆에 있는 사람이 신부가 아니더라도 영세를 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이 없을 때에는 침이라도 뱉어서 주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세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무 관련도 없는 사역병을 집합하여 세례를 준 다음에 세례받은 증명서를 준다면 그래도 내가 세례를 받았는데 하는 부담이 들어 예수님을 믿을지도 모르나, 세례는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고백하는 자에게만 주어야 합니다.
세례의 방법에는 논의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습니다. 물을 적시든지 물을 붓든지 물에 담그든지 어떤 것이 세례의 고유한 형식이라고 할 수 없어도 세례를 받는 사람이 “이제는 옛날의 내가 죽었다. 나는 물속에 장사되었고,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었다.”라는 사실을 분명히 느낄 수 있도록 철저하게 세례를 주어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세례를 주는 것이 아니라 진정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인가 확인하고 세례를 베풀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미국에 유학을 갔는데 그 신학교의 미군인 친구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거듭난 크리스찬입니까?” 이 질문을 받은 목사님이 나는 안수받은 목사라고 대답했는데도 그래도 당신은 거듭난 기독교인이냐고 재차 물었다고 합니다.
목사라고 다 거듭났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도 “내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선지자 노릇을 했습니다. 많은 표적을 행했습니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귀신을 쫓는 일은 아무나 할수 없습니다. 이적은 아무나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날에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나를 떠나 바깥 어두운 데 쫓겨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고 하신 것을 보면 목사라고 해서 다 거듭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자들이 진정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받은 신자인지, 거듭난 신자인지를 확인하고 세례를 준 후에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세례는 자신을 부인하고 온전히 헌신을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13절에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서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온전한 헌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는 내 안에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살아계신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이러한 고백과 결단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올바른 제자가 될 것입니다.
제자된 신자는 다시 제자 삼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제자 삼고 선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 2절에 보면 바울 사도께서 빋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라고 부탁했습니다. 여기에는 믿음의 사람 4대가 나옵니다. 바울, 디모데, 충성된 사람, 또 다른 사람으로 이어집니다. 계속해서 신자들로 하여금 제자 삼는 운동을 해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함으로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서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게 하고 신자들로 변화되게 해야 교회는 성장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에 보면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을 고치셨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3대 사명입니다. 교육, 선교, 사회사업이 교회가 해야 할 3대 사명입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또한 사도행전의 안디옥 교회도 처음부터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사람도 보내고, 물질도 보내고, 기도로 후원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생기면 그때부터 선교해야 합니다. 선교하는 교회가 자랍니다. 대부분 생각하기를 앞으로 우리 교회가 어느 만큼 수준이 되고 신자가 모이고 예산이 넉넉해지면 하겠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고 교회가 생기면 처음부터해야 할 일이 선교입니다. 그러한 교회가 성장합니다. 남에게 도움을 받는 교회가 있을지 모르지만 내 나름대로 남을 도와야 합니다.
에스더서에 부림절이 나옵니다. 유대인들을 멸절하기로 정해진 날이 오히려 유대인들의 원수를 갚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부림절에는 어려운 사람에게 선물을 주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사람들이라도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찾아서 선물을 주는 날이 부림절입니다.
내가 남에게서 받기도 하지만 내가 도와야 할, 나보다 어려운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남에게서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과 교회를 돕는 일을 하여야만 성장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선교하는 교회가 생명 있는 교회요, 자라는 교회입니다.
3. 교제하는 교회
교회가 이단에게 성도를 빼앗기는 이유는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소외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요, 친밀한 교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지체들 중에서 더 약한 지체를 보살피고 돌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지식의 유무, 재산의 유무, 지위 고하를 따져서 신자들을 대우한다면 성도들은 상처를 입습니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격지심과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데 그것을 교회에서 확인했을 때에는 떠나가 버립니다.
30년 전, 60년대에 권신찬 씨가 극동방송을 통해서 구원파의 교리를 전달할 때 저는 학생회를 지도하던 전도사였는데 우리 교회에 아주 가난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 집의 아이들은 참으로 똑똑하였는데도 중학교밖에 다니지를 못 했습니다. 그리고 그 부모가 산 동네에 사니 아들은 헌금도 제대로 못 하고 옷차림도 제대로 같추지 못하니까 교회에 나오면 늘 부담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방송을 들어보니 우리들 모두 형제라고 하며 교회 안에 계급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주장하니까 이 청년이 권신찬 씨가 하는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담임 목사님과 함께 신당동에 있는 권신찬 씨가 하는 교회에 가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형제자매라고 부르며 헌금도 강조하지 않고 집사, 장로 등 교회의 직분도 없으며 한 사람을 귀중히 여겨 친교하고 사랑을 베풀고, 일감을 맡기어 소속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사랑의 교제가 있고 관심이 있었으며 유무상통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교회가 성장 위주로 치중하다보니 교회 성장에 기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하여는 점점 소홀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람들을 이단에게 빼앗길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날마다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였습니다. 날마다 모여 떡을 떼고 친밀히 교제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누가 나오지 않아도 잘 모릅니다. 구역장도 모르고 목사도 모릅니다. 몇 주일 가서야 눈에 보이지 않아 알아보니 여러 날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했다는 것입니다. 전화도 안 해주고, 찾아와 기도도 안 해주니 생각하기를 자기가 교회에 기여한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리라 생각하게 되고 누구 하나 자기가 빠진 것에 관심을 기울여 주지 않음으로써 입은 상처가 쉽게 치유되지 않는 것입니다.
99마리의 양이 있어도 한 마리가 빠지면 눈여겨 볼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양을 이끌어 내시고 이름을 부른 다음 앞서 가면 따라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목양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은 신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돌보아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였고 한 마음이 되는 교회였습니다.(행 2: 46; 빌 2:5)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어느 교회의 목사님이 부목사를 초빙하는 광고를 냈는데 많은 분들이 왔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이 부목사를 면접하는 자리에서 “당신은 어떤 자세로 일하겠습니다?”라고 물었습니다. 그때에 부목사 후보들이 많은 말들을 했지만 “나는 목사님의 뜻을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한 사람을 뽑았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은, 자기의 말을 듣지 않고 부목사 마음대로 신자들에게 가르친다면 교회의 통일을 이룩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담임목사가 하나님의 뜻에 바로 서있다면 다른 교회의 중직들과 온 교회는 목사님의 뜻에 따라가는 것이 원칙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하나가 되는 데 있어서 가정이 가장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듯 담임목사님을 중심으로 하나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교회를 통일되게 이끌어 가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되 담임 목사가 앞장서서 이끌어가고 하나되는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의 교제는 예수님이 머리이기 때문에 결코 나누어져서는 안됩니다. 몸은 하나지만 우리의 지체가 각각 다른 것처럼, 교회도 그 안에 각종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통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에베소서는 교회의 통일에 관하여 기록한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 감옥에서 62년경 이 서신을 기록할 때에 로마는 자기보다 약한 나라를 침략하여 속국으로 삼고 유대교는 기독교와 반목하고 있고, 헬라인들은 다른 민족들을 야만이라고 하여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바울 사도가 편지를 써보내면서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고 전에는 멀리 있었다.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그 막힌 담을 허시고 둘로 하나를 이루셨다.”라고 일치를 강조합니다. 에베소서 4장 1절이 에베소서 전체를 해석하는 열쇠가 되는데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2절에는 통일을 위한 조건 네 가지를 제시하는데 겸손과 온유, 오래참음,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함입니다. 나를 낮추고 겸손하게 행할 때에 교회가 발전합니다. 자기를 죽일수록 주님이 나타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나는 쇠하여야 하겠고 그는 흥하여야 하겠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신부를 취하는 이는 신랑이나 나는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의 기쁨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마음의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신자들에게 존경도 받고 싶고, 사랑도 받아 예수님은 잠깐 뒤로 물러나게 하고 내가 최고라고 하는 칭찬을 받기를 원할 때 내가 잘해서 성공하고 칭찬받는 줄 착각할 수 있겠지만 자기를 잘 죽이는 사람일수록 그에게서 주님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내가 날마다 죽는다고 했으며 예수님께서도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일이 교회에 있어야 하겠지만 목사가 앞장서서 자기가 성도 위에 군림하려고 하고 존경을 받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목사 스스로 종의 자리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대로 봉사의 자리에서 봉사하고 헌신하며 종노릇 할 때에 그곳에 하나님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하실 것입니다.
4. 기도하는 교회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 성령의 능력이 있는 교회가 성장합니다. 사도행전 1장 14절에서 교회의 시작을 보면, 기도할 때 시작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전혀 기도에 힘쓰게 될 때에 성령이 임재하시어 교회가 이루어졌습니다.
교회는 능력과 기적의 원천입니다. 마태복음 17장 21절에는 아무 구절도 씌어 있지 않지만 난외의 어떤 사본에 의하면 ‘금식과 기도’ 이외에는 이러한 능력이 나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파송을 받았을 때 분명히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는데 귀신에 사로잡힌 아이의 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셔서 고쳐 주시고 난 후 조용히 계실 때에 제자들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금식과 기도 외에는 이러한 유가 나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는 능력과 기적을 일으키는 원천이 됩니다. 깊은 기도를 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교회가 힘있는 교회로 성장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6장 4절에 사도들이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라고 말했던 것과 같이 기도와 말씀 이 두 가지는 마치 천국을 향해 가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습니다. 말씀이 강하고 기도만 있어도 문제가 있고, 말씀이 없고 기도만 있으면 신비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말씀만 앞장세우다 보면 자유주의 내지는 인본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 이 두 가지가 조화 있게 발전하는 교회가 힘있는 교회이며 성장하는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목회자만 기도할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고 기도하도록 해야 합니다. 저는 기도를 잘 못하는 분들을 위해서 구역예배를 드린 후 짝기도를 하는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오늘 들은 말씀을 위해 기도하고, 상대방을 위해 기도하고, 교회와 구역을 위해 기도하도록 했습니다. 처음에는 반발이 있었지만 계속 훈련하는 과정에서 기도하는 훈련이 되고 기도하는 입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기도의 모범을 배워서 기도한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께 기도의 모범을 가르쳐 주기를 간청할 때 기도를 배워서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서 능력있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게 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늘의 창고를 여는 열쇠와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받지 못하는 이유는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 론
말씀이 충만한 교회, 선교하는 교회, 한 마음으로 교제하는 교회, 기도하는 교회가 성장하는 교회입니다. 바울 사도가 아덴에서 설교한 내용이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데 아덴에서 설교할 때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설교를 했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철학 그리고 아라투스라는 시인의 시 등 문학과 철학을 동원하여 설교했지만 성과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달리신 십자가 이외는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말합니다.
십자가 중심의 메시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복음을 전할 때 바울 사도의 선교는 성공했고 교회들이 성장한 것같이 초대교회의 성장의 원리를 살펴보고 오늘 우리 교회에도 이러한 원리를 적용해서 말씀 중심의 교회, 십자가 중심의 교회로 성장하여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쓰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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