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맥과 해석의 원리
권 성 수 교 수
(총신대)
서 론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개인 영혼의 자양분을 섭취하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양떼에게 기름진 꼴을 공급하기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목회자는 강단에서나 사석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늘 성경을 다루고 있습니다. 말씀 사역을 할 때마다 나름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목회자는 실제적인 성경해석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제대로 된 해석을 하고 있느냐입니다. 운동에 있어서도 기본기가 중요합니다. 기본기가 제대로 갖추어질 때에 지속적인 기록 경신을 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서해석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신학자는 평생 자신이 하는 신학작업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질문을 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어느 분야에서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실제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은 급변하는 현대에 필수적인 질문인데, 이것은 ‘상황의 법칙’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강단에서의 성경해석에 관해서도 이런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합니다.1)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고인 연못물처럼 탁하게 정체되지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의식하며 사는 사람은 흐르는 시냇물처럼 참신하게 전진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성경해석이 ‘제대로 하는’ 성경해석입니까? 성경해석의 기본원리는 무엇입니까?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목회자는 매주 몇 번씩 알게 모르게 성경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목회자는 매주 성경해석을 하고 있는데 기본자세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수십 년을 해도 급하면 자기의 것이 나와서 정상적인 해석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기본적인 것을 살펴보면서 매주 설교를 통하여 하고 있는 성경해석에서 제가 제시하는 내용 중 어떠한 것이 제대로 안 되고 있는지, 설교를 할 때 이루어지지 않는 내용이 어떤 부분인지, 성경의 맥과 해석의 원리라는 내용으로 말씀을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본 론
요즈음 미래에 대한 책들이 많이 출간되고 있습니다. 이 미래에 대한 책들을 읽어보면 아주 유명한 대기업의 회장이나 사장들도 요즈음에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매순간 한다고 합니다. 순간 순간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질문을 해야 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일 년 전에 했던 것을 그대로 반복 활용해서는 지금 현재의 상황에 적용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엄청나게 성장하던 기업이 몇 년 내로 한꺼번에 무너져 버리는 사례가 외국에서 많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상황은 급속하게 바뀌고 있는데 그 바뀌는 상황에 대해서 자신이 적응을 하지 못해서 도태되어 버리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입인들도 제대로 성공하기 위해서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매 번 질문한다고 합니다.
신학자도 옛날에 하던 방식대로 그대로 가르치면서 아무런 생각 없이 의식 없이 가르쳐서는 이 시대의 신학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대가 급격하게 바뀌고 있기 때문에 신학자도 매순간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마찬가지고 목회자들도 매순간마다 매주일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제대로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렇지 못한 것인가?” 질문을 해야 합니다. 특별히 설교자로서 성경해석을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어떤 분이 이야기한 대로 기업 중에서도 뜨는 기업(sunrise)이 있고 지는 기업(sunset)이 있다고 말하는데 요즈음 목회자들을 간접적으로 살펴볼 때에 어떤 목회는 굉장히 떠오르는 목회가 있는 반면에 어떤 목회는 지는 목회가 있습니다. 왜 한쪽은 뜨는 목회를 하고 있는데 다른 쪽은 지는 목회를 하고 있습니까?
성경해석을 다루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분들의 설교를 분석해보면 성경해석을 제대로 하면 떠오르는 목회를 하지만 성경해석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지는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해왔던 옛날의 것을 반복해서 하면서도 타성에 젖어 그것이 가장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것으로 착각하면서 목회를 하면, 지는 목회를 하면서도 자신이 지는 목회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면 목회자가 성경해석을 어떻게 바로 해서 뜨는 목회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질문을 놓고 성경을 살펴보면 성경에는 몇 가지의 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삶의 맥(脈)
성경을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은 성경이 어떤 책인가 하는 질문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본질이 어떠하면 성경의 해석도 그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무엇보다 먼저 삶의 책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양한 인간 저자들의 삶을 유기적으로 사용하셔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 정확하면서도 적절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성경이 삶의 책이라는 것은 창세기 1장에 만물 창조가 인간 삶의 배경으로 나오고 바로 인간 창조와 인간 타락, 그리고 타락 후의 인간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 제시와 인간들의 반응, 이렇게 이어지고 있음을 보아도 금방 드러나게 됩니다.
이처럼 성경은 삶의 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겠지만 강단에 올라가기 전에 내가 준비한 설교의 원고를 읽어 보면 이러한 생각이 듭니다. ‘이 원고를 가지고 어떻게 역사를 일으킬 수 있겠느나? 집어치워라.’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들어오게 하는 것은 사단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다음과 같은 다짐을 합니다. ‘내가 전하는 것이 내 말이라면 사단이 하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전하는 것이 내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반드시 역사를 일으킬 것이다. 두고보라.’
이렇게 다짐하면서 나는 이사야 55장 10~11절의 말씀을 암송하곤 합니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면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는 말씀을 그대로 믿습니다.
특별히 사단으로부터 도전이 올 때면 더 도전적으로 “네 말이 맞는지 성경에 나오는 이 말씀이 맞는지 두고보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가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내 말을 전하면 역사가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전하면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어느 집회에 가서 강의를 하고 나서 그 강의에 대해 어떤 반응이 있었는지에 대하여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이 그 강의 테이프를 듣고서 그 강의에 대한 반응을 보여 줄 때가 있어서 조금씩 느끼곤 하는데 한번은 제가 빌립보서 강의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가정생활에서 너무나 갈등을 많이 겪고 이제는 살아갈 힘을 잃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사회적인 지위가 높고 가진 것도 많은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살아갈 힘이 없어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테이프를 계속해서 듣는 동안 자기도 모르게 속에서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져 힘을 얻었다는 고백을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통하여 제가 전하는 말씀이 내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생명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한 번은 “요단에 들어서라”는 제목의 설교를 한 적이 있는데 40년 이상 교회를 왔다갔다한 남자 신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단에 들어서라”는 설교를 듣는 가운데 이분에게 들려진 말씀은 왔다갔다 하지 말고 뜨겁게 신앙생활하라는 것으로 듣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어 그날부터 그 성도의 신앙생활의 내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라는 확신이 우리 속에 불과 같이 일어나야만 뜨는 목회를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외치고 부르짖어도 교인들의 마음이 강팍하고 저들의 심령이 언제 바뀔지에 대한 의문이 아무리 들어도, 말씀을 들고 강단에 설 때마다 이 말씀이 내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시골에서 풍로를 가지고 불을 붙일 때에 처음에는 불이 잘 붙지 않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풍로로 불을 지피면 나중에는 활활 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 속에 풍로로 잘 지핀 불처럼 활활 타오르게 되면 사람들은 불구경을 하기 위하여 몰려올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는 불붙은 가슴을 통하여 전하는 신학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불을 토하면 사람들은 불 구경을 하러 올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에 불이 붙어 있으면 사람들은 반드시 불 구경을 하기 위하여 몰려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라는 삶의 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이 생명은 인간들이 조작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쇼와 같이 조작해 내면 당시에는 능력이 임하는 것 같고, 흥분하는 것처럼 보이나 여기에 공통된 특징이 있는데 거기에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격의 변화가 없습니다. 마치 아편을 맞을 당시에 고통이 사라지는 것과 같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기 때문에 말씀을 바로 전하면 성령의 은사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조작하여 나타나는 것들은 사실이 아니고 거짓된 것이기에 지속적인 변화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라는 사실이 맨 처음 우리에게 확인되어야 할 내용입니다.
이 생명의 말씀인 성경은 삶의 진공상태에 주어진 추상적인 계시가 아니라, 삶의 역동상태에 주어진 구체적인 계시입니다. 따라서 성경해석은 삶을 떠나서 이루어질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됩니다. 대개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하나님께서 계시 보따리를 만들어 하늘에서 내려주면 그것을 단순하게 받아 전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푸른 하늘에서 떨어지는 계시 보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100% 영감된 것이고 100% 정확한 말씀이지만 인간이 살고 있는 개인적인 삶과 민족적인 삶, 그리고 세계적인 삶의 고통당하는 현장 속에 떨어진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은 생활의 책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저는 신학교에 다니면서 전도사 시절에 여러 종류의 고통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고통을 당할 때에 이겨낼 힘이 없었습니다. 기도를 할 때에 하나님께서 힘을 주셔서 이겨낼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고통은 계속됩니다. 그럴 때면 엄청난 괴로움과 갈등으로 좌절하게 됩니다.
이때에 저를 살려준 말씀은 시편 18편 29절입니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이말씀이 나를 살렸습니다. 갈등을 겪을 때마다 이 말씀을 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공상태에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생활의 현장에 주어졌기 때문에 생활의 현장에서 갈등을 겪는 사람이 그 말씀에 부딪히면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생활의 현장에 주어진 말씀이라는 것을 창세기부터 살펴보면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 오경이 나오고 다음으로 역사서가 나옵니다. 그런데 역사서를 고찰해 보면 후기에 나온 역사서가 앞에 나온 모세 오경을 민족의 삶 속에서 다시 현실화 시키는 작업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그 후에 나온 역사의 현장 속에 어떻게 뚫고 들어가 그들을 치료하고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역사서입니다.
시편을 살펴볼 때에, 이 시편도 이미 전에 나온 계시를 가지고 그것이 개인의 삶 속에 들어가 고백되어지고 해석되어지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누명을 쓰고 고소를 당하여 법적으로 고통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3개월 동안 경찰서에 불려다니며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때의 작은 경험이지만 고통을 당하면서 시편의 말씀을 읽었는데 나의 마음에 가장 의미있게 다가오는 말씀은 “하나님이여, 나의 원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였습니다. 이 말씀은 평소에는 그렇게 부딪히던 말씀이 아니었는데 나의 삶 속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통을 당하니까 그 말씀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언서를 살펴볼 때에도 예언서에 이미 주어져 있던 말씀이 그 후대에 개인의 삶과 민족의 삶 속에서 어떻게 현실화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예언서를 보면 전기 계시에 따라 민족과 개인이 평가되고 질책되고 격리되는 과정이 드러나 있습니다.
후기 계시가 전기 계시를 현실화하면서 유기적으로 진전한다는 것은 비단 구약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약성경도 이전 계시인 구약이 메시아와 메시아 공동체의 삶 속에서 현실화되면서 진전하는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서는 이미 나와 있던 계시가 더 진전되는 방식으로 현실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과 예표가 메시아의 삶에서 성취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도래했던 하나님의 나라가 사도행전에서는 복음서의 내용이 교회라는 확대된 공동체 속에서 확장되면서 현실화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서신들과 기타 서신들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역사적 말씀들과 사건들이 교회 혹은 개인 속에서 어떻게 현실화되는가를 보여줍니다. 바울 서신들은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신학적으로는 물론 현실적으로 깊이 해석하는 내용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메시아 중심의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고(복음서), 확장되고(사도행전) 해석된(서신) 상태에서 어떻게 완성되는가를 삶의 현장 속에서 재해석하는 책입니다.2)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삶의 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매번 성경을 해석할 때마다 삶의 맥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 점이 현대 해석학에 ‘지평의 융합(Horizontverschmelzung, fusion of horizons)’3)이라는 용어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지평의 융합’이란 두 지평이 녹여서 하나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성경의 지평과 현대의 지평(해석자의 지평)을 녹여서 하나되게 만드는 것이 설교요 성경해석입니다. 성경도 본래 주어질 때 진공상태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삶의 현장에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오늘 삶의 현장에 살고 있는 사람이 삶의 현장에 주어진 생명의 책, 생활의 책을 오늘의 현장 속으로 옮겨가지고 성경의 지평과 현대의 지평을 하나로 할 때 성경 해석이 바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말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성경의 지평과 현대인의 삶의 지평, 이 두 지평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두 지평을 어떻게 융합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 필생의 과제로 뇌리에 새겨져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전기 계시와 후기 계시가 지평의 융합의 성격으로 되어 유기적 진전을 보이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지평과 오늘의 지평의 융합이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지만 실제적으로 이것이 결여되어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보수주의 성향의 목회자일수록 성경의 지평만 있고 오늘의 지평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유주의 성향의 목회자일수록 오늘의 지평만 있고 성경의 지평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수성향의 목회자는 설교 시간에 성경만 얘기하고 강단에서 내려옵니다. 그러면 이것을 듣는 청중들은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So what?)”라고 반문하면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목회자의 설교가 거룩하기는 하지만 은하 세계의 별을 잡는 얘기로 들릴 뿐 현실적 적용을 못하는 것입니다. 청중은 이 죄악 세상에서 뒹굴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삶의 현장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 삶의 지침을 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반면에 진보성향의 목회자는 설교 시간에 신문사설 식의 내용을 얘기하고 성경 본문은 맹장 정도로 달아 놓습니다. 그러면 듣는 사람들은 그래도 일 주일에 한 번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왔는데, 세상 얘기만 듣고 가니 “또 그 얘기야?(That again?)”하면서 예배당을 떠납니다. ‘또 그 얘기’를 들으려면 차라리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신문을 읽으면 될 것인데, 왜 교회까지 나와야 하는가 하는 갈등이 생깁니다.
보수성향의 목회자는 성경의 지평에 매여 오늘의 지평을 놓치고, 진보성향의 목회자는 오늘의 지평에 취해 성경의 지평을 무시하기 때문에 극단을 이루어 교인들은 양자 모두에 갈등을 느끼는 것입니다. 대개 현대의 지평만을 가지고 설교를 할 경우에 인텔리 계층의 사람들이 목회자의 설교를 대단히 유식한 내용의 설교로 판단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가운데 진짜 주님의 백성들이 앉아 있기 때문에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 말씀 속에 주님의 음성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갈등을 많이 겪게 됩니다.
또한 성경의 지평만 가지고 설교하는 경우에 청중들이 굉장한 은혜를 받는 것 같은데도 교인들은 수십 년 설교를 들어도 생활이 변하지 않고 교회에만 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지평의 융합이 아니라, 한 지평의 고정, 여기에서 성경해석의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극단을 극복해야 합니다. 성경의 지평과 현대의 지평을 연결시켜서 하나가 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해석입니다. 특히 두 지평을 연결시킬 때에 예화를 통하여 연결시키는 것보다는 어떻게 들어보면 세상 이야기 같은데 다른 각도에서 들어보면 천국 이야기이고 어떻게 들으면 천국 이야기 같은데 다른 각도에서 들어보면 세상 이야기 같은 연결이 바람직합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의 말은 생활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어려워지며 생활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말이 쉬워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공부를 많이 하시고 박사학위를 받은 분들이 목회를 할 경우 목회를 잘 못하고 교인들이 은혜를 받지 못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메시지가 박사학위 논문처럼 되어 버리기 때문에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박사학위 논문처럼 되어서는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 설교가 추상적으로 개념을 정리해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생활을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에서 생활에 연결될 수 있도록 생활의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이것을 잘하는 분들이 부흥사들입니다. 부흥사들은 이처럼 구수한 말들을 너무나 잘 구사하기 때문에 그들의 설교에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제가 필라델피아에서 공부할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 교회에서는 부흥회를 잘 인도하시는 분이 집회를 하시고, 같은 기간에 다른 한 교회에서는 말씀 중심으로 인도하시는 분이 집회를 하시는데 말씀 중심으로 하는 집회에 모인 교인수는 70명 정도였고 구수하게 말씀을 전하는 집회에는 700명이 모였습니다.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일이었습니다. 왜 저쪽에는 참으로 말씀이 좋은 것 같은데 사람들이 모이지 않고 이쪽에는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일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생활로부터 떠나 있는 메시지는 사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공중에 떠 있는 메시지는 땅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요즈음 역동적인 목회자의 설교는 대개 본인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두 지평을 연결시키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런 교회의 교인들은 성경의 진리가 삶의 현장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배우고 익히기 때문에 매주 목회자의 설교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오늘의 지평으로 성경의 지평을 융화시킬 것이 아니라, 성경의 지평으로 오늘의 지평을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두 지평을 융합시켜야 합니다.4)
예수님의 비유설교는 청중의 삶 속에서 청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사용해서 청중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뒤집어 바로잡는 성격을 띤 설교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삶을 가장 잘 조화시키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5)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설교의 틀은 비유의 설교였는데 이것이 설교의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성경해석은 오늘의 지평을 성경의 지평으로 변혁시키는 의미에서 두 지평의 융합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사용하신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중에는 오늘의 지평으로 성경의 지평을 변질시키는 방식의 융합을 하는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성경을 해석한다고 하나, 실상은 현대 철학이나 현대 정신으로 성경에 들어가서 성경의 옷을 입는 현대식 가치관을 작품으로 내어 놓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한 신학으로는 절대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현대의 사상으로 성경을 변질시키는 것은 융합이 아닙니다. 그러한 융합이 현대인들에게 매력을 줄지 모르나 그것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전달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두 지평의 융합이란 성경의 지평을 가지고 현대의 지평을 변혁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을 가지고 현대의 삶을 갈고 뒤집어 엎는 작업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성경의 지평으로 현대의 지평을 변혁시키는 방법으로 두 지평을 융합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신명기 5장 10절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설교할 때 단순히,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했으니 그렇게 될 줄 아시기 바랍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면 교인들에게는 감동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생활과 연결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에 생활과 연결시키는 메시지를 구성한다면 다음과 같이 할 수 있습니다.
어떤 학자가 쥬크 가문과 조나단 에드워드 가문을 연구했다고 합니다. 연구결과 쥬크 가문의 후손 1,200명 중에 직업 거지가 310명이고, 범죄로 패가망신한 사람이 440명이며 습관적인 절도범이 60명이고 죄수가 130명이며 부도덕한 사람은 55명, 그리고 밥을 먹고 살 정도의 장사하는 사람이 12명인데 그중에 10명은 그 장사하는 방법을 감옥에서 배웠고 살인자가 6명이 배출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반하여 현재 프린스턴 대학의 전신인 뉴저지 칼리지의 초대학장이었던 조나단 에드워드 가문을 연구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가문에서는 총장 14명이 배출되었고, 교수가 100명, 목사 선교사가 100명, 변호사가 100명, 판사가 30명, 의사가 60명, 작가가 60명이 배출되었습니다. 쥬크 가와 에드워드 가문이 이렇게 다릅니다. 쥬크 가문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고, 에드워드 가문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쥬크 가는 하나님을 몰랐지만 에드워드 가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지키는 가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최소한 3~4대까지는 내다 보아야 합니다. 우리 후손이 4대까지 내려갔을 때 우리 후손 가운데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돌리는 인물이 많이 나오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이렇게 접근했을 때 목이 터지도록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금방 설득이 되어집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경의 지평과 삶의 지평을 융합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해석할 때에는 먼저 삶의 맥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성경의 지평으로 현대의 지평을 변혁시키는 방식의 ‘지평의 유합’을 이루기 위해서 보수 성향의 목회자는 오늘의 현실을 파악하는 데 시간과 정력을 기울이고, 진보성향의 목회자는 성경 진리를 파악하는 데 시간과 정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보수 성향의 목회자는 교인들의 삶의 자리를 이해하고 그 자리에 성경을 적용시키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하고, 진보성향의 목회자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전자는 오늘의 베스트셀러들을 읽어야 하고, 후자는 만년 베스트셀러를 읽어야 합니다. 양자는 성경과 오늘을 녹여서 하나로 만드는 작업에 평생을 바쳐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2. 글의 맥6)
성경은 이상과 같이 삶의 현장과 직결된 책일 뿐 아니라 인간의 글로 된 책입니다. 성경은 천국성어로 된 책이 아니라 사람들이 통속적으로 사용하는 인간 언어로 된 책입니다. 성경이 인간의 언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의 언어가 어떤 것인지 분석하고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글의 맥을 잘 잡아야 합니다. ‘글의 맥’이란 ‘문맥’입니다.
성경은 생명의 책이고 생활의 책이지만 이것은 글을 통하여 씌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글의 흐름이 있습니다. 인간의 언어로 된 성경은 문법도 있고, 동시에 율법, 역사, 시, 잠언, 예언, 복음, 서신, 묵시 등의 문학적인 장르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성경해석학과 문학과의 접촉점이 있습니다. 현대 해석학에서는 이 부분이 장르 분석으로 개발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천국은 어떤 나라인가?”라는 제목으로 예수님의 비유를 책으로 출간했는데 예수님의 비유를 해석할 때에 비유하는 장르를 모르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어거스틴이 누가복음 10장 25~37절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해석할 때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천성을 가리키고, 여리고는 인간의 필멸성을 가리키며,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간 어떤 사람은 천성에서 필멸로 타락한 아담을 가리킨다. 강도들은 마귀와 그 부하를 가리키고, 강도들이 그 사람의 옷을 벗겼다는 것은 불멸성을 제거했다는 뜻이고, 때렸다는 것은 죄를 짓도록 했다는 뜻이고, 거반 죽은 상태로 버렸다는 것은 육신은 살았으나 영적으로 죽었다는 뜻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구약의 제사 제도와 제사장을 가리키고, 사마리아인은 보호자로서 주님 자신을 가리킨다. 상처를 싸매어 준 것은 죄를 억제한 것이고, 기름은 소망의 위로이고, 포도주는 열심히 일하라는 권면이고, 짐승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몸이고, 짐승에 탄 것은 성육신을 믿는 것이고, 주막은 교회이고, ‘돌아올 때’는 주님의 재림이고, 두 데나리온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혹은 금생의 약속과 내세의 약속이고, 주막 주인은 바울 사도이고, ‘부비가 더 든다’는 것은 바울이 독신을 권면한 것이나, 남에게 짐이 되지 않게 스스로 노동한 것을 가리킨다.
어거스틴은 초대교회의 신학사상을 종합하여 중세교회의 신학체계를 세울 정도의 위대한 신학자였는데 어거스틴의 비유해석의 내용을 보면 우리가 웃어 넘길 정도의 해석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어거스틴이 비유해석을 했을 때 이 설교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어거스틴이 비유를 풍유(諷諭)식으로 해석했던 것은 비유라는 장르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체적으로 비유는 천국의 진리를 이 세상의 것들을 통하여 설명하는데 천국의 진리와 이 세상의 것 사이에 비교점이 한 개 내지 두 개 정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의 경우에 있어서는 천국의 진리와 세상의 진리 사이에서 비교점을 수십 개 찾아낸 것입니다. 그래서 풍유로 해석하는 실수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식의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장르를 바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다음은 성경이 문법적이며 문학적으로 이루어진 책이기 때문에 문법적, 문학적 해석이 필요합니다. 목회자를 위한 성경해석의 기본 과제를 다루는 이 글에서는 이런 문제들을 전문적으로 다룰 수는 없고, 가장 기초적인 문맥 문제만 간단하게 거론할 것입니다.
문맥에서는 ‘근접문맥’과 ‘원접문맥’이 있습니다. 근접문맥은 다루고자 하는 본문 바로 앞뒤의 문맥이고, 원접문맥은 좀더 넓혀서 본문이 들어 있는 장이나 책(마태복음, 에베소서 등)이나 본문 저자의 문집(바울서신, 요한 문헌 등)이나 신약이나 신·구약 전체에 이르는 문맥입니다.
근접문맥 파악에 있어서 목회자가 유의할 점은 단어 연구와 관련된 것입니다. 가령, 마태복음 14장 30절에 베드로가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했는데 여기서 구원이라는 단어에 소명, 중생, 회심, 칭의, 성화, 견인, 영화 등의 조직 신학적 구원론 전체를 부여한다면 이것은 부당축의(illegitimate totality transfer)가7) 됩니다. 자기 재물 아닌 것을 긁어모은 것이 부정축재라면 본문 문맥 속에서 본래의 의미가 아닌 것을 긁어 모아 그 단어에 덮어 씌우는 것은 부당축의입니다.
마태복음 14장 30절 문맥에서 ‘구원’은 조직신학적 구원론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물에 빠져가는 베드로를 건져내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물에서 건져낸다’는 1평방센티미터 정도의 문맥적 의미에 63빌딩을 구축하는 실수를 범하면 안 됩니다.
목회자가 단어 연구와 관련해서 실수하기 쉬운 또 다른 점은 어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성경 본문에 어떤 단어가 나오면 당장 그 어원을 따져서 그 의미가 마치 그 단어의 ‘본래적’ 의미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가령 ‘nice(좋은)’라는 영어 단어가 나올 경우 그 라틴어 어원 ‘nescius(무식한)’를 찾아서 “여러분, 여기 ‘nice’는 본래 ‘무식한’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단어의 합당한 의미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곤란합니다.8)
단어는 본질상 역사의 흐름에 따라 그 의미가 변화됩니다. 따라서 단어의 의미를 파악할 때 중요한 것은 그 단어가 어원상 어떻게 사용되었고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의 변천과정을 거쳤느냐 하는 통시적(通時的, diachronic)분석이 아니라, 그것이 그 당시에 그 문맥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느냐 하는 공시적(共時的, synchronic) 분석인 것입니다. 단어의 의미를 앞 뒤 글의 흐름 속에서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문 전체의 의미를 원접문맥에서 파악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가령, 창세기 39장 1~6절의 “보디발 가정의 요셉”을 다룰때에 최소한 창세기 39장을 여러 번 읽을 뿐 아니라, 창세기 37장에서 50장까지 요셉과 관련된 부분을 여러 번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설교준비를 하면, 이번의 설교 내용을 다음번에 뒤집어야 하는 경우가 생기고 심한 경우는 부지불식 간에 이단 설교를 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3. 역사의 맥9)
성경은 삶의 책이고 글로 된 책일 뿐 아니라, 당시의 역사 속에 주어진 책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등 족장의 역사, 모세의 역사, 다윗, 솔로몬, 히스기야 등 왕들의 역사, 유다와 이스라엘의 역사,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 로마 식민 정권 치하의 역사, 요한 당시 소아시아의 역사등... 성경은 이렇게 역사 속에서 주어진 책이기 때문에 당시의 역사를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이 말은 성경을 해석하는 ‘나’와 성경의 ‘당시’ 사이에 시·공적인 거리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내가 느낌으로 파악한 것이 곧 성경의 의미인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성경과 나 사이에 거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성경을 마음대로 영해(spiritualizing)하고, 도덕화(moralizing), 심리화(psychologizing), 현대화(modernizing)하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역사의 맥을 찾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설교에서 역사의 맥이 서 있는지를 짚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성서에 나타난 사건이 일어난 당시로 돌아가서 해석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2장 1절 이하에 동방으로부터 점성술사들이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에 당황한 헤롯과 온 유대 백성들이 소동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헤롯이 2살 이하의 영아를 죽이는 사건이 나옵니다.
이 본문을 그냥 해석하면 별로 의미가 없지만 그 당시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서 해석을 하면 엄청난 의미가 들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헤롯 대제는 에돔 족속 출신이었고 국민의 절반 정도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헤롯 대제는 늘 마음에 자기는 순수한 야곱 족속이 아니라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 콤플렉스를 해소하기 위하여 그는 마리안 가문의 공주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안 가문의 공주와 결혼하고 난 다음에는 자기가 정권을 읽을 것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너무너무 괴로워 미칠 것 같은 지경에 이르는데 이 불안감 때문에 대제사장이 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의 귀를 자르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대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서 권력을 차지할 리더의 기질이 있는 사람들을 차례로 청부살인을 했습니다. 이 청부살인을 할 때, 그를 죽이고 난 다음에 그 사람의 장례식에는 헤롯 대제가 맨 앞에 가서 엉엉 울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그가 죽였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헤롯은 여러 여인과 결혼해서 아이들을 많이 낳았습니다. 이 아이들이 서로 권력을 잡기 위하여 정권 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마지막 단계에 가서는 자기가 가장 총애하던 아들조차도 처형해 버리고 맙니다.
피의 숙청을 끊임없이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발버둥치고 있을 때 동방으로부터 점성술사들이 별을 보고 왔는데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느냐고 말하니 가뜩이나 불안해서 사람들을 죽이던 사람이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살이하의 아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입니다.
그 당시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살펴보면 마태복음 2장 1절 이하의 말씀을 아주 실감있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상황을 살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 본문을 예리한 각도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해석할 때 그 당시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 당시로 돌아가서 그 본문을 보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신약이면 신·구약 중간사와 신약의 역사와 문화, 구약이면 구약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성경의 배경이 되는 역사와 문화를 읽어서 성경을 기준으로 볼 때 ‘외부인(etic)’의 시각으로 가 아니라 ‘내부인(emic)’의 시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훈련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하는 것인데, 구약 성경의 내용과 바벨론 신화의 내용이 표면상 유사하기만 하면 구약 성경의 그 부분이 바벨론 신화에서 왔다고 하는 식의 사고방식은 경계해야 합니다. 신약 성경의 내용과 헬라 영지주의 신화가 유사하다고 해서 신약의 그 부분이 영지주의 신화에서 왔다고 하는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표면상의 유사성은 실제상의 유사성과 거리가 멀수 있습니다. 어떠한 세계관과 가치관에서 그런 표현이 나왔는가 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표면상 유사한 것을 가지고 성경 내용이 거기서 왔다고 하는 것은 ‘언어 병행광증(verbal parallelomania)’이라 말합니다.10) 범바벨론 주의나 범헬라주의는 성경 자체의 의미를 무시한 태도입니다. 성경 자체의 흐름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맥을 살펴볼 때 주의할 점은 ‘병행광증’입니다.
어디까지나 그 당시의 역사는 성경을 밝히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야지 당시의 역사를 기준으로 해서 성경을 비판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해석에 배경사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재 구성한 성경 배경사를 기준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이 아니고, 성경배경사는 어디까지나 성경 내용을 기준으로 하여 참조하라는 것입니다.
4. 성경의 맥11)
성경은 삶의 맥과 글의 맥과 역사의 맥으로 된 책일 뿐 아니라, 전체가 하나의 신학적 맥을 형성하고 있는 책입니다. 성경의 원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미래와 현재를 동시에 보시고 기획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1,600여 년에 걸쳐 40여 명의 저자에 의하여 집필된 성경은 실상 하나님의 ‘웅장한 설계’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이런 얘기를 하시고 저기서 다른 얘기를 하시는 분이 아니라, 본질상 자충성(自衝性)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신·구약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통일된 뜻을 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해석할 때에 성경 전체의 맥을 찾아내야 하는데 이것을 신학적 해석이라고 말합니다.
신·구약 성경이 하나의 총제적 맥을 형성하고 있으므로, 한 본문의 해석은 성경 전체의 시각 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런 작업의 기초는 본문 해석에 있어서 병행구를 찾아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관주성경과 병행성구사전(concordance)이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관주성경이나 성구사전을 사용할 때에도 위에서 역사의 맥을 거론할 때와 마찬가지로 표면상의 병행을 실제상의 병행으로 속단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성경을 사랑하고 항상 성경을 손에서 떼어놓지 않는 목회자일수록 성구사전식 기계적 설교를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본문을 읽어 놓고 본문 속의 동사나 명사 하나를 잡아서 그 단어와 병행되는 성구들을 수십 개 늘어 놓으면서 가장 충실한 성경해석을 했다는 식의 자기도취적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사실은 본문 전체의 내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구절들을 열거하는 30분 설교를 듣고 나면, 교인들의 머릿속에는 성구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는 인상만 남기게 되고, 많이 먹은 것 같으나 아무것도 섭취하지 못한 것같은 느낌만 남게 됩니다. 그러므로 병행구절을 찾을 책을는 표면상의 병행구절이 실제상의 병행구절인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앞. 뒤의 문맥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종교개혁의 표어 중의 하나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입니다. 이는 “성경은 성경의 해석자다.(Scriptura Scriptretae interpreter.)”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은 성경해석에 다른 책이 필요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목회자들 중에 이 말을 반지성주의로 오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성경 한 권만 들고 평생사는 것이 가장 경건한 목회자이고 ‘세상 공부’하는 사람은 세속화된 목회자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런 오해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은 글의 맥과 역사의 맥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언어학, 문학, 역사학, 문화학 등을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계 전체는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하나님의 창조물 전체는 하나님의 구상에 의한 것이므로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든 학문은 바로만 하면 다 하나님의 뜻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일반 학문이 성경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성경해석에 일반학문을 이용하는 것은 ‘오직 성경’의 원리에 배치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직 성경’을 주장한 종교개혁자들은 위대한 학자들이었고 전기한 문법적, 역사적 해석을 성경해석의 원리로 제시한 자들이었습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푼다는 말이 반지성주의를 조장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성경을 성경 전체 면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면에서도 입증이 가능합니다. 성경의 특정 본문을 성경 전체의 시각으로 풀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를 파악하는 지성적인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바로 구약신학과 신약신학, 즉 성경신학의 과제입니다. 한 본문을 성경 전체로 푼다는 것이 신학해석이라는 것은 이점과 관련된 것입니다.
성경은 글로 된 책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연구해야 합니다. 풍부하게 설교하려면 많은 책을 읽어야 합니다.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 본문을 철저하게 연구하고 연구된 본문을 생활과 연결하여 적용시킬 때에 풍성한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생활 속에 연결시켜야 합니다.
또한 성경을 성경으로 푼다는 것은 성경전체가 하나의 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전체적인 맥을 잡아야 합니다. 성경을 전체의 맥속에서 푸는 방법으로 성경 전체를 통독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많이 읽어야 합니다. 많이 읽으면 학문적으로 정리되지 않지만 자기 속에는 정리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전체를 통독하는 것과 더불어 신·구약관련 신학책을 연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신학작업을 많이 하면 건전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습니다.
5. 성령의 맥12)
성경은 삶의 맥, 글의 맥, 역사의 맥, 성경 전체의 맥과 관련하여 해석되어야 할 뿐 아니라, 성령의 맥에 따라 해석되어야 할 책입니다. 성경은 성령, 하나님의 숨결(God-breathed)이 들어 있는 책이기 때문입니다.(딤후 3:16; 벧후 1:21) 성경은 성령의 책이며 하나님의 창조적 숨결이 들어간 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적 숨결을 불어 넣으시는 성령의 역사에 맞아 떨어져야 성경이 바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맥’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언급한 삶의 맥, 글의 맥, 역사의 맥, 성경 전체의 맥은 뒤에 나오는 성령의 맥이 없다면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유명한 철학자나 해석학자들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성경해석은 그들의 전유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에는 아무리 머리가 비상한 사람도 중생하지 않으면 성경을 볼 때에 눈뜬 봉사와 같습니다(요 3:3, 고전 2:6~16). 성경은 성령의 책이기 때문에 성령이 충만한 자가 성경을 바로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중생은 성경해석의 필수적인 기본조건입니다.
그러면 ‘중생한 자’는 자동적으로 성경해석을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중생한 자들이라도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사람이 성경을 바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갈 5:16~26) 중생한 자들 속에도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 간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중생한 자라도 육체의 충동적 소욕을 따라가면 육체의 열매를 맺습니다. 중생한 자가 성령의 소욕에 따라 살 때에 성령의 열매를 밎습니다. 인격과 삶에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는 사람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성경을 바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성령에 다이얼이 맞추어져 있지 않으면 그 설교는 생명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이얼을 성령에 맞추어 놓으면 문법적으로 맞지 않고 어눌해 보이는 거친 설교라도 그 설교가 사람을 살려 놓습니다. 성령의 창조적 숨결이 들어가면 사람을 살려 놓을 수 있습니다.
성경이 단순히 신학작업이 아니라 해석자의 삶과 직결되는 것은 바로 이점에서입니다. 주일 강단은 설교자의 주간 생활에 대한 심판입니다. 30분, 한편의 설교는 설교자가 살아온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목회자의 삶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향하여 얼마나 성숙하였느냐 하는 것이 그의 강단설교에 반영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설교는 삶입니다. 성경해석은 해석자의 삶과 정비례하여 성숙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말씀을 전하면 다이얼이 잘 맞추어진 상태에서 말씀이 선포되기 때문에 교인들의 심령이 성령의 다이얼에 맞습니다. 성령의 다이얼에 맞으면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고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성경해석은 성령에 얼마나 민감하게 순종하는가에 의해 좌우됩니다. 해석자가 엎드려 하나님에게 절대 의존하는 인생을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저자 성령께서 성경에 접근하여 해석자 인간이 해석할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해석은 성령에 의해 해석되는 작업입니다. 성경으로 인간을 해석하는 역사가 성령의 한 역사입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한 자가 성경해석을 바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성령 충만해질 수 있을까요? 이것은 성령론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이지만 여기서는 성경해석과 관련해서 한 가지만 지적하고자 합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의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와 유사한 문맥으로 골로새서 3장 16절에는 “그리스도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로 되어 있습니다. 성령 충만과 말씀 충만이 기능상 동일하다는 점이 여기에 드러나 있습니다.
성경해석적 관점에서 성령 충만의 한 측면은 말씀 충만입니다. 말씀의 주인공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말씀이 충만하면 ‘그리스도의 영’, ‘다른 보혜사’, ‘다른 예수(another Jesus)’ 이신 성령으로 충만해집니다. 말씀 충만 운운하면서 다른 사람의 설교를 물어뜯고 늘어지듯 비판하는 사람은 말씀 충만한 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말씀 충만하면 말씀의 주인공 그리스도로 충만해지는 것이 당연한데 말씀 충만하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향기는 전혀 풍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성령론(요 14~16장)에 보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회상시키시고 그것으로 책망하시고 격려하시고 지도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볼 때 성령 충만=그리스도 충만=말씀 충만의 공식이 가능해집니다. 이 세 가지는 각각을 재는 시금석입니다. 성령 충만의 여부는 그리스도 충만, 말씀 충만의 여부로 판가름납니다. 말씀 충만 여부는 성령 충만, 그리스도 충만의 여부로 판가름납니다. 그리스도의 충만 여부는 말씀 충만, 성령 충만 여부로 판가름납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 중심의 말씀 충만이 성령 충만의 비결이고, 이런 성령 충만이 말씀 해석의 비결입니다. 말씀 충만이 성령 충만의 비결이고 성령 충만이 말씀 해석의 비결이므로, 해석자는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 묵상하고 기도하며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여기에 순환성(circularity)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느 논리치고 순환논리 아닌 것이 있습니까? 어차피 인간과 만물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상호 연결되어 있으니, 이것과 저것이 순환성을 가질 수밖에 없고 모든 것이 망(network)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순환성인가, 아니면 인간 자아의 조성을 드러내는 순환성인가 하는데 있을 뿐입니다.
결 론
성경은 삶의 역동상태에서 글의 흐름, 역사의 현장, 총체적 시각에 따라 성령의 창조적 숨결이 들어있는 책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성경의 본질에 걸맞게 삶의 맥(생맥), 글의 맥(문맥), 역사의 맥(사맥), 성경의 맥(경맥), 성령의 맥(영맥)에 따라 해석되어야 합니다. 맥(context)을 바로 잡는 것이 ‘오석(誤釋)의 바벨탑(Babel of Interpretations)’을 무너뜨리는 길입니다.
■註 ----------------------------------------------------------------
1) John Naisbitt, MEGATRENDS; TEN NEW DIRECTIONS TRANSFORMING OUR LIVES(New York: Warner Books, 1984). p.89 ‘우리가 지금 실제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은 급변하는 현대에 필수적이 질문인데, 이것은 ‘상황의 법칙’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목회자는 강단에서의 성경해석에 관해서도 이런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한다.
2) 필자의 “종말과 영성” 제3부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신약성경을 조감한 내용이다.
3) 이것은 H. G. Gadamer의 용어인데, 필자는 Anthony Thiselton, THE TWO HORIZONS: NEW TESTAMENT HERMENEUTICS AND PHILOSOPHICAL DESCRIPTION WITH SPECIAL, REFERENCE TO HEIDEGGER, BULTMANN, GADAMER, AND WITTGENSTEIN(필자에 의해 “두 지평”으로 번역 출판됨. Grand Rapids: Eerdmans 1980), pp. xix. 307에서 인용했다.
4) 성경의 지평(text)과 해석의 지평(context)간의 융합적인 과정에 해석자가 자기의 전제를 가지고 성경을 해석할 때 성경에 의해 해석되는 해석학적 순환(hermeneutical circle)이 필수적으로 개입되는 것은 사실이다. 요즈음에는 ‘해석학적 순환’은 본문의 우선권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폐쇄적 모델이라고 하여 ‘해석학적 나선(hermeneutical spiral)’ 모델을 제시하는 학자들이 많다. ‘해석학적 나선’은 텍스트와 콘텍스트 간에 왔다 갔다 하면서도 결코 참된 의미에 이르지 못하는 폐쇄적 체계가 아니라,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융합과정에서 본문의 의도된 의미에로 상향적으로 접근해 가는 개방적 체계이다. Grand R. Osborne. THE HERMENEUTICAL SPIRAL: A COMPREHENSIVE INTRODUCTION TO BIBLICAL INTERPRETATION (Downers Grove: Inter Varisity, 1991), p.6
5) 필자의 “천국은 어떤 나라인가? -예수님의 비유강해”(서울: 횃불출판사 1992)참조
6) 필자의 “성경해석학 1”(서울: 총신대학출판부, 1991) pp.30~33, 220~282: Grand R. Osborne, pp. 19~126 참조. 문법적 해석만을 단권으로 다른 책은 Peter Cotterrel and Max Turner, LINGUISTICS AND BIBLICAL INTERPRETATION (Downers Grove: Inter Varsity, 1989)이다.
7) James Barr, THE SEMANTICS OF BIBLICAL LANGUAGE (Oxford University Press, 1961, 1978) p. 218
8) James Barr, THE SEMANTICS OF BIBLICAL LANGUAGE (Oxfore University Press, 1961, 1978) p. 108.
9) 필자의 “성경해석학 1” pp. 33~37을 보라. 문화와 성경해석을 다룬 단권으로는 W. J. Larkin, CULTURE AND BIBLICAL HERMENEUTICS (Grand Rapids: Baker, 1988)이 있다.
10) 이것은 D.A. Carson이 지적한 내용이다.(Osborne, p.73)
11) 필자의 “성경해석학” pp. 37~40을 보라.
12) 필자의 “성경해석학” pp. 40~43을 보라.
13) Eliot E. Johnson, EXPOSITIORY HERMENEUTICS: AN INTROUDUCTION (Zondervan: Academy, 1990),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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