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말씀훈련
오 성 춘 교 수
(장신대)
말씀에는 세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이 세가지 차원과 설교, 우리의 삶이 어떻게 연관되어질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세 가지 차원의 첫째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오한복음 1장 1절과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십자가의 보혈로써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고,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주시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둘째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신·구약 성경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에서 자세하게 보는 대로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씌어진 것으로 우리가 여러 가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지혜로 충만케 되고,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데 가장 기본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기록된 하나님 말씀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구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구양성경은 오실 예수님을 증거하고, 신약선경은 오신 예수님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중심은 성육신 하신, 말씀이신 에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셋째는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를 의미합니다. 개혁전통 또는 종교개혁 시대 이후의 우리 개신교 전통은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 설교가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선포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세 가지의 내용을 집중적으로 고찰해 보면서 말씀 훈련에 대한 체계를 세워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라는 것이 모든 설교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설교의 구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설교의 구도라고 말 할 수 있느냐 하면 모든 설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되지 아니하는 어떠한 설교도 설교라 할 수 없습니다. 즉 케리그마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라고 하면 성경은 설교의 기초가 됩니다. 설교의 시작을 성경에서 시작하여 본론과 결론에 이르는 동안 설교는 언제든지 말씀에 근거되어져야 합니다. 서론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되어져야 하고, 본론도 말씀에 근거 되어져야 하고, 결론도 하나님 말씀에 근거되어져서 설교가 선포되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설교는 세상을 향하여 선포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말씀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어떠한 분으로 믿습니까? 그것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비유적으로 말씀해 줍니다. “예수님은 참 빛이시다.” 어두운 세상 가운데 오셔서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참 빛이 예수님이심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서 우리는 분명하게 예수님에 관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세상은 어두움입니다. 빛이 어두움 가운데 오게 될 때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이 가득하게 됩니다. 생명이 가득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2장에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이 오십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 어두움은 포도주가 모자라는 것입니다. 이 포도주가 모자란다는 것은 그 혼인식이 불행에 싸여 있다는 것이요, 불안과 근심과 어려움 그리고 책임전가 등 여러 가지 문제가 가득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잔치를 생각하면 기쁨, 춤, 즐거움 등을 기억할 수 있지만 포도주가 모자라면서부터 바꾸어지기 시작합니다. 얼굴이 어두어지고, 불평과 분쟁의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이 들어오시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주심으로 어두움의 가정을 기쁨의 가정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거의 모든 가정은 어두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지난 주에 신문마다 가정과 관련된 끔찍한 사건들이 보도되었습니다. 문제는 거기에 관련된 사람 거의 전부가 기독교인이며 교회의 중직을 맡고 있는 사람들과 그 가정들이라는 것입니다. 끔찍한 사건들이 가정들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사건을 두고 성경은 포도주가 모자라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포도주가 모자라고 있고, 용서의 포도주가 모자라고 있고, 가정의 화목의 포도주가 모자라고 있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첫 번째 하신 일은 가정의 회복입니다. 가정 가운데 빛이 들어오게 하시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빛을 드러냄으로 기쁨과 감격의 잔치 자리가 되도록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기쁨과 감격으로 시작되었던 잔치 자리에 포도주가 모자라게 되자 슬픔과 분노와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으로써 이전보다 더 좋은 기쁨과 감격으로 넘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가정, 어느 목사님, 어느 교회가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절망이나 부정적인 생각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두움이 아무리 강해도 빛이 들어오면 어두움은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교역하고 있는 교회에 속한 가정들은 어떤 포도주가 모자라서 싸움이 생기고, 폭력이 생기고, 문제가 생기고, 결별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불법이 생겨났는지 모르나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 가정에 말씀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하게 되면 분명히 그 가정은 달라지게 될 것으로 저는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인 동시에 우리 목회의 방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있는 목회자는 그 눈빛이 빛나고 항상 긍정적으로 기대를 갖고 예수님이 이곳에서 무엇을 만들어 낼 것인가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건도 가정의 문제와 관련되어 일어나는 내용입니다. 여기에는 가정의 문제가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혼의 어두움입니다. 이혼으로 말미암아 상처입은 여인, 죄를 지은 여인이 나옵니다. 자기 자신에게 상처입고, 이웃과의 관계가 끊어져 버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버린 더 짙은 어두움 가운데 떨어져 버린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그녀를 찾아오심으로 그녀는 감격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찾게 되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놀라운 여인으로 바뀌어지고, 예수님은 이일이 얼마나 기뻤던지 제자들이 떡을 가지고 왔을 때에 떡을 잡수시지 않으시고 그 여인이 전도하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즐거워하였습니다. 제자들이 떡을 잡수시도록 권유할 때 제자들에게 나는 이미 배부르다고 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떡을 먹지 않으셔도 배부른 영적인 만족을 여인의 모습에서 찾으시는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바로 어두움 가운데 있던 사마리아 여인이 빛이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새로운 인간으로 탈바꿈하는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음의 사건은 아들이 질병으로 고생할 때에 아버지가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걸어와서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내용입니다.
이때의 어두움은 질병입니다. 성경은 질병을 어두움으로 봅니다. 질병이 있는 곳에 빛이신 예수님이 역사합니다. 예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질병이 있는 자들이 예수님 앞에 나오면 나음을 입었습니다. 성경에서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와 각색 병든 자를 예수님 앞에 데리고 나왔을 때에 예수님이 거절했거나 고침받지 못한 사람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질병은 어두움이고 예수님은 건강의 빛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시는 곳에 질병은 물러가고 건강이 채워지게 됩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의 사건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돌로 맞아 죽어야 할 죄를 지은 여자입니다. 죄의 어두움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여인을 예수님 앞에 끌고 나올 때에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하나는 정죄요 다음은 죽음이었습니다. 바로 이 사건에는 정죄와 죽음의 어두움이 있습니다. 이 어두움 가운데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십니다. 예수님은 영생의 빛이었고, 생명을 살리는 빛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정죄받기 위하여 왔다가 용서받고 돌아갔고, 죽으러 왔다가 살아서 돌아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참 빛이시요, 세상은 어두움입니다. 여러분은 각기 다른 어두움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어두움이 어떤 어두움인지 모릅니다. 그것은 죄악의 어두움일 수도 있고, 습관의 어두움일 수도 있으며, 세상의 어두움, 폭력의 어두움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어두움이 어떠한 어두움이든지 그 어두움을 분명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빛이시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빛이신 예수님께서 이 어두움 가운데 오시면 무슨 역사를 이루시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우리 교회에, 가정에, 우리 민족 위에 어떠한 역사를 이룰 수 있을까를 분명하게 볼 수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여러분 가운데서 빛의 역사를 시작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로 보는 훈련을 받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이 지난주 설교하신 내용을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슨 설교를 했습니까? “우리는 사랑해야 됩니다.” “우리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해야 됩니다.” “우리는 가정을 잘 다스려야 됩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 됩니다.” 주어가 전부 ‘나’입니다. 설교의 중심이 ‘나’라는 말입니다. 설교의 중심이 예수그리스도가 되어 있지 않으며, 생각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 있지 아니하고, 말씀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말씀을 읽어도 예수님 중심으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명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설교를 한다고 가정할 때 어떻게 설교를 하십니까? 대부분의 경우가 이렇게 설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금은 귀중한 것입니다. 소금은 썩는 것을 방지합니다. 소금은 맛을 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귀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썩어져가는 것을 방지할 책임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소금이 녹으면서 맛을 내듯이 우리도 소금과 같이 녹아야 합니다.”
이것을 설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설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이 없고, 성경도 없습니다.
같은 본문을 가지고 재구성해 봅니다. 우선 첫째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할 때에 context를 분석하면 예수님께서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소금이라고 했느냐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1~2절에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라고 말씀하시며 팔복을 말씀하시고 두 번째 말씀하신 것이 이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산 위에 올라 가셨을 때에 산 위까지 따라온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서 산 위까지 올라가고,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서 골방까지 가고,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서 새벽을 깨우고,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서 밤을 새우고 주야로 묵상하는 말씀의 사람을 바로 예수님께서 소금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소금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소금이 되겠다고 해서 소금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상황(context)에서는 예수님이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말씀의 내용입니다. 헬라어를 연구해 보면 헬라어 비동사는 인칭 주어를 쓰지 않아도 인칭주어가 있는 것으로 됩니다. 그러므로 “나는...입니다”라고 하지 않아도 “입니다”라는 말만 쓰면 그곳에 1인칭 단수, 1인칭 복수, 2인칭 단수, 복수 등 주어가 따라 나옵니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에는 인칭주어를 씁니다. 인칭주어를 쓰면 “바로 내가” “바로 그가” “바로 우리가”라고 강조하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라고 할 때에 주어가 붙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바로 이곳에서 말씀을 듣는 사람이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는 것은 문맥상으로 “내가 너를 세상의 소금으로 만들어 세운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소금으로 만들어야 우리는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소금이 되기 위해서 세상으로 나가거나 소금이 되기 위해서 내가 어떤 지식을 쌓거나 기술을 쌓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예수님이 나를 소금으로 만들어 주어야 소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소금의 기능입니다. 소금은 자기 자신을 녹이면서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합니다. 진정한 소금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생명과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면서 자신을 완전히 녹이신 예수님이 소금이십니다. 그러므로 소금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소금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 위에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소금이 된다는 것은 옷을 버리는 것이요,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요, 자신의 미래를 버리고 모든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소금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는 성경 말씀대로 이것을 고백하고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소금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예수님의 말씀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은 갈릴리 어부이며, 세리요, 창기입니다. 문제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문제많고 형편없는 사람들을 바꾸어서 당시에 온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대사도로 만들었고 성경의 주역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을 따라서 고난에 참여했고 십자가를 졌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그분의 뒤를 따르는 자가 소금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 가운데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서 이곳에 모인 우리들을 주님께서는 소금으로 만들어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분이 오늘 우리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이처럼 모든 설교,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에서 문제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해석하면서 너무 일방적으로 한쪽 면만 강조하는 점입니다. 그것이 씻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발을 씻는 예수님, 죄를 씻는 예수님 등의 측면을 너무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그릇이 많은데 이 그릇들은 씻겨 정결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보화를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씻는 것만 강조하면 문제입니다. 그릇을 씻는 것은 담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를 씻어 주시고 정결케 하시고, 구원하신 목적은 그릇인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담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 기쁨과 감격을 가득 담아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씻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씻는 것만 강조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우리가 언제까지 그리스도의 초보에 머물러 있어야 하느냐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성숙은 채우는 것입니다. 이 채우는 것에 대해서는 요한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풍성한 삶을 약속하신 하나님
첫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녀의 권세를 주셨습니다.(요1:12)
신약성경은 언제든지 채우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오심이 먼저는 씻는 것에 있지만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씻는 것보다는 채우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인간이 예수님으로 채우게 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것을 상속받는 것에도 의미가 있지만 하나님 자녀의 생명을 공유하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는 엄청난 축복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이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입니다. ‘교회’란 말은 헬라어 뜻에 의하면 ‘주님께 속한 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주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권능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영생)을 나누어 주십니다.(요3:16)
본문에는 기독교의 중대한 세 가지의 질문이 나옵니다. 첫째는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습니까? 두 번째는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까? 세 번째는 왜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됩니까? 그런데 질문에 대한 대답은 똑같이 하나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피조물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생을 주신다고 할 때에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영생은 하나님만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옵니다. 이때에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죄를 미워하고 더러움을 꾸짖는 정의의 생명, 사랑의 생명, 능력의 생명, 생수의 생명이 우리의 삶에서 역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오심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채우심이요, 이 생명이 우리와 교회에 끊임없이 공급됨을 의미합니다.
셋째, 우리에게 영원한 샘물을 주어서 우리 속에 솟아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요4:14)
영생의 샘물이 끊임없이 솟아나는 사람, 끊임없이 생수가 솟아나는 사람이 예수님의 원하시는 사람입니다.
넷째, 하나님은 우리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7:38)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우리 속에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게 됩니다.
다섯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요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라는 이 말씀은 구약성경의 핵심 단어인 ‘샬롬’이라는 단어를 반영하는 말씀입니다. ‘샬롬’은 평강, 평화, 평안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 단어의 뜻은 ‘차서 넘친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목적은 우리로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우리에게 오실 때 빛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삶을 차고 넘치는 풍성한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볼 때 그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발견해야 합니다.
2. 말씀훈련은 경건 훈련 가운데 하나
말씀훈련의 두 가지 접근 방법
성경 말씀을 훈련하는 접근 방법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말씀훈련을 통하여 정보를 발견하고 지식을 습득하고 진리를 깨달으려고 하는 지식훈련(information)이요, 다른 하나는 말씀훈련을 통하여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 속에 넘치게 하여,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키는(transformed)데 중점을 둔 생명훈련입니다.
전자의 방법은 성경에 대한 지식을 많이 습득하여 성경을 바로 알고, 성경의 교훈과 진리를 바로 배워 그 진리와 교훈을 순종하여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지식훈련의 목적은 성경에 대한 새로운 지식 습득과 정보를 발견하고 새로운 진리를 깨닫는 데 있습니다.
후자는 성경말씀 앞에 ‘나’를 세우고 성경말씀이 ‘나’를 깨우치고 변화시키게 하는 접근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전자의 방법은 ‘나’가 주체가 되어 성경을 나의 삶 속에 채워 나가는 방법이요, 후자는 ‘성경’이 주체가 되어 나의 삶을 깨뜨리고 변화시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지식중심훈련과 생명중심훈련의 조화
앞에서 언급한 지식훈련과 생명훈련은 우리의 신앙과 삶에 다 필요한 접근 방법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과 삶의 규범이 되고 틀이 될 수 있는 진리의 말씀이 없이는 참다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지식과 정보 습득의 방법은 우리에게 삶의 기초가 될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아 알게 하며, 우리가 순종하여 살아야 할 삶의 규범과 원칙들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성경말씀을 조직적으로 배우고 차례로 읽으며, 성경구절을 암송하며, 성경의 주요한 주제들과 제목들을 연구하여 성경의 진리들을 습득하는 것은 우리의 삶의 규범과 틀을 준비하고 길을 인도할 진리의 빛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식과 정보 습득의 방법으로 성경말씀을 훈련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과 행실과 신앙은 그 뿌리를 잃고 흔들리게 됩니다.
인격 변화에 중점을 두는 말씀훈련의 방법은 우리의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세우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의 권능과 생명력을 받아서 넘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이 방법은 우리의 신앙과 삶을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며, 우리 가운데 임재하셔서 우리를 돌보시고 인도하시며, 사명을 감당케 하시는 하나님과의 생명의 교제를 나누게 하십니다. 지식과 정보습득의 방법이 삶의 뿌리와 틀과 규범을 제공해 주는 반면에 인격 변화의 방법은 우리의 삶에 감격과 기쁨과 생명력을 주어 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 양자는 상호 배제의 접근방법이 아니라 상호보완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말씀 훈련을 실천할 때에 이 양자의 조화에 관심을 가지고 실천해야 합니다.
어느 한 방법만의 선호는 우리 기독교인의 삶의 어느 한 측면을 잃어 버리게 합니다.
지식 훈련과 생명훈련의 기능
(1) 지식훈련의 기능
첫 번째는 삶의 목표, 방향 그리고 삶의 의미와 가치 등을 알려 줍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올바른 길을 말씀을 통해서 가르쳐 줍니다. 즉 성경은 삶의 구체적인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해 줍니다. 세 번째는 우리 신앙에 흔들림이 없는 기초를 제공해 줍니다.
(2) 생명훈련의 기능
첫 번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과 힘을 공급해 줍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의식을 확장시키고 넓은 마음을 가지게 해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십니다.
지식훈련과 생명훈련의 비교
(1) 지식훈련(information)의 방법은 양적인 훈련에 치중하나 인격 변화에 중점을 두는 생명훈련(transformation)의 방법은 양적 판단을 삼가고 질적인 훈련에 초점을 맞춥니다.
지식훈련은 양적인 기준과 계획을 세우고 규칙적인 훈련을 쌓습니다. 1년 동안 신,구약 성경 통독하기, 하루에 성경 한 장씩 읽기, 한달 동안에 성경 한 권씩 공부하기, 교회에서 실시하는 조직적인 성경 공부 훈련 등등 양적인 계획을 먼저 세우고 그 계획에 따라 지정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힘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생명훈련은 양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성경말씀의 한 단어나 한 구절일지라도 그 말씀이 나에게 의미를 주는 동안에는 거기에 멈춥니다. 본회퍼는 가끔 한 주일 내내 한구절을 묵상하며 그 말씀이 주는 의미를 깨닫고 즐거워했다고 했습니다. 예컨대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빌4:5)라는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이 마음에 와 닿으면,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그 말씀이 나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며 듣고 그 동안에는 그 말씀에 머물러 그 말씀과 함께 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음성을 들으며 살고자 합니다. 이처럼 말씀의 생명훈련은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하며 그 말씀이 나에게 의미를 제공하는 동안 그 말씀에 머뭅니다.
(2) 지식훈련(information)은 성경말씀을 훈련하되 순서에 따라 읽습니다. 말씀의 지식훈련은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성경을 차례로 읽어가며, 요한계시록 끝까지 읽으면서 거기에 기록된 내용을 파악하고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생명훈련은 성경말씀의 한 단어와 한 구절을 읽을지라도 그 말씀의 깊이에 숨겨진 의미에까지 파고 들어가고자 하며, 그 말씀 나의 심령 깊숙이 파고 들어가 나의 심령과 골수를 찔러 쪼갤 수 있도록 말씀을 묵상하며, 깊이 음미합니다.
(3) 지식훈련은 성경에 정통하려고 훈련하나 생명훈련은 성경이 나를 지도하게 하려고 말씀 앞에 서는 훈련을 합니다. 지식 훈련의 특징은 성경을 통달하여 그 말씀에 정통하려고 학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훈련은 성경을 공부하되 본문을 비평하고 주석적인 방법을 사용하며, 그 말씀이 가르치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발견하며 전문적으로 성경을 배운 사람들로부터 조직적으로 성경을 배웁니다.
그러나 생명훈련은 그 말씀이 들려주시는 음성이 무엇인지를 들으려고 우리의 마음을 기울이며, 그 말씀에 순종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깨닫는 것이 아니고 성경말씀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말씀 앞에 헌신합니다. 그러므로 생명훈련은 ‘하나님이시여 이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나를 지도하시고 인도하옵소서.’ 하는 기도를 드리면서 말씀을 읽습니다. 즉, 우리는 그 말씀의 종으로 자처하여 말씀의 지도를 받고자 우리 자신을 말씀 앞에 드리는 훈련이 곧 생명 훈련입니다.
(4) 지식훈련은 성경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의 이야기로 그 말씀을 읽으며, 그 사건과 이야기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생명훈련은 그 이야기를 우리의 이야기로, 그 사건을 우리의 사건으로 읽고자 합니다. 예컨대 야곱의 사건과 이야기를 지식훈련을 따라 읽는다면, 우리는 야곱의 성격, 야곱의 간교한 수단, 야곱의 실패,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 등을 파악하고 이해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야곱의 간교함과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은혜를 입고 있다는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를 우리에게 적용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생명훈련을 따라 읽는다면 우리는 야곱의 성경 속에서 나의 굽은 성격을 보며, 야곱의 간교함 가운데서 우리 자신의 간교한 모습을 발견하며, 돌베개를 베고 자고 있는 야곱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절망 가운데 쓰러져 고통당하는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읽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경말씀이 나의 말씀으로 바꾸어지고, 성경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고, 성경의 사건이 나의 사건이 되도록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은 바로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5) 지식훈련은 성경을 나의 통제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생명훈련은 성경이 나를 지배하기를 원합니다. 지식훈련은 우리가 성경을 분석하고 연구하며 그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발견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생명훈련은 내가 성경을 연구하는 자세를 포기하고 ‘성경’이 주체가 되게 하며 ‘나’는 목적어가 되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주어가 되고 내가 목적어가 되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나’를 지배하고, ‘나’를 인도하게 합니다.
(6) 지식훈련은 분석적이고 비평적인 접근방법으로 성경을 읽습니다. 그러나 생명훈련은 겸손하게 성경말씀 앞에 나를 열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으로 나의 열린 마음을 채워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생명 훈련을 따르는 자는 성경을 읽으면서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찾아 오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며, 그분이 찾아오셔서 그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도 있도록 언제든지 우리의 마음을 열고 기다리는 자세로 성경을 읽습니다.
(7) 지식훈련의 접근방법은 성경을 대할 때에, 이 말씀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질문에 대답을 제공하며, 우리가 풀어야만 하는 어떠한 난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할 수 있는 진리의 책이라고 생각하고 이 성경을 읽고 연구하며 인생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고 합낟.
그러나 생명훈련은 하나님의 말씀의 신비 속에 나를 열어 놓고 말씀의 신비에 대한 해답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말씀 자체를 들으며 그 말씀에 접촉하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말씀의 신비와 접할 때 비록 우리의 인생의 문제에 대한 어떤 해답니 없을지라고, 인간은 성장하며 새로운 도약을 경험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두 가지 접근 방법의 특징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기술할 수 있습니다.
지식훈련 |
생명훈련 |
① 양에 치중한다 ② 순서를 따라 읽는다 ③ 성경을 통달하려 한다 ④ 객관적 진리를 추구한다 ⑤ 성경을 나의 통제의 대상으로 삼는다 ⑥ 분석적, 비판적인 접근 방법을 사용한다 ⑦성경으로 인생의 문제에 대답하게 한다 |
① 양적 판단을 삼가한다 ② 성경의 깊이에 파고 든다 ③ 성경의 지도를 받으려 한다 ④ 성경을 나의 이야기로 읽는다 ⑤ 성경이 나를 읽고 나를 깨뜨리게 한다 ⑥ 겸손하게 나를 성경말씀 앞에 드린다 ⑦ 성경의 신비로 나를 채우게 하려고 나 를 열어 놓는다 |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법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하며”(딤후 3:15)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는” (딤 3:17)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말씀을 읽을 때에 다른 어떤 교훈집이나 윤리 교과서나 지헤서를 읽듯이 읽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묵상하면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한다면, 우리는 다음의 네 가지 요소들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생략하거나 빼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첫째,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으십시오.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 가운데서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도움을 받아 성경 저자들의 신앙 수준까지 우리의 신앙이 올라가지 못한다면, 이 성경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처럼 말씀 앞에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성경말씀을 통하여 들려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받아야 합니다. 한 구절, 한 구절, 한 사건, 한 사건을 읽어 가는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이 말씀으로 나를 깨우치소서.” “이 말씀으로 나를 새롭게 고치소서.” 또는 “성경말씀을 읽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등의 기도를 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둘째, 성령의 음성에 민감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을 때에 성령께서는 성경과 나 사이에 역사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성경말씀을 읽는 동안에 그 말씀으로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에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기다려야 합니다.
셋째, 기록하면서 읽으십시오.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가 성경을 읽는 동안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을 읽어가는 동안 성령께서 들려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기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을 우리의 영의 양식으로 삼아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그 말씀을 읽는 동안에 성령께서 들려 주시는 음성을 기록하여야 합니다.
넷째, 말씀을 읽고 기도하십시오.
성경말씀을 읽고 나서 그 말씀으로 기도문을 만들어서 기도하는 훈련을 쌓고 말씀과 기도를 분리시키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84년에 미국에 가서 척 스미스 목사를 만났습니다. 그 분을 만나서 이야기하는데 자기는 목회에 실패한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실패했느냐면 설교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그랬다고 합니다. 일주일 동안 설교를 준비하는데 설교 준비하다가 스트레스를 받고 고민하면서 목회를 즐거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답답함과 무거운 마음으로 목회를 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교인들이 은혜를 받겠습니까? 그래서 자기는 목회자로서 부름받은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여 한때 목회를 포기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할 일이 없게 되자, 이제까지는 목회를 하느라고 성경을 읽지 못했기에 성경을 자세히 읽기로 결심한 후에 창세기부터 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은혜가 되는 말씀에 밑줄을 긋고 묵상하고 마음에 감동이 되는 말씀은 쓰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서 느끼게 된 것은 성경 말씀이 이처럼 달고 오묘한 말씀인데 그것을 모르고 목회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좋은 말씀을 혼자서만 알고 있을 것이 아니라 나누자고 생각하여 사모님하고 아는 사람 몇을 불러서 성경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해에 40명이 모이고 이들이 마음을 합하여 교회를 시작하자고 하여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8년이 지난 후 교인의 숫자가 2만 8천 명이 되었습니다.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 방식은 일 주일 동안 계속해서 성경을 읽으면서 쓰고 묵상한 것을 묶어서 설교한다고 합니다. 그는 교회를 세운 이후 성경 전체를 16번 읽고 설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녁예배에는 고린도전서, 로마서 등 한 성경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심도 있게 설교한다고 합니다. 이것 뿐만이 아니라 이 교회의 청년들이 이런 방법에 은혜를 받아서 성경을 읽고 또 읽고 하여 말씀을 가지고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교회를 개척했는데 지난 18년 동안 360개의 교회를 개척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 청년들이 개척한 교회 가운데는 대부분이 500명이 넘는 교회들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목회에 실패했던 사람이 이처럼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왜 실패합니까? 그것은 말씀 가운데서 찾으려 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무엇인가를 가져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우리 가운데 다가올 때에 이 말씀이 우리에게 지식을 주고 생명을 줍니다. 우리는 설교를 하는데 교인들이 잘 듣는 것 같지 않으면 두려운 마음이 생깁니다. “내가 설교를 못 하기 때문에 저들이 괴로워하는구나. 설교를 못하기에 저들에게 은혜가 없겠구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설교자가 말씀에만 근거해서 설교를 하면 교인들은 영양분을 공급받게 됩니다. 우리가 식사를 하는데 맛이 없어도 먹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으로부터 영양을 공급받습니다. 맛있는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한다고 해서 더 건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맛있는 식당의 음식이 조미료를 많이 넣었기 때문에 건강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음식의 맛이 건강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음식에 들어 있는 영양분이 어떤 것이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맛이 있으면 사람들이 많이 몰립니다. 맛이 없으면 파리를 날립니다. 그러나 그것이 건강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돈만 많이 벌 뿐이고 힘만 더 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에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고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예배에 말씀이 중심이 되어 있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사람의 수와 관계없이 그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되고 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들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분들은 계속해서 맛있게 만드시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을 모방하기 위하여 설교집을 베끼고 예화를 인용할 것이 아니라 말씀을 읽으며,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을 채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 심령과 골수를 쪼개기에 영혼을 새롭게 하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사역이 아름답게 이루어지도록 할 것입니다. 말씀이 가득 채워져야 합니다. 말씀이 가득히 채워진 자에게 주님께서 오셔서 새로운 기적을 이루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저의 어머니 이야기를 하면서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지금도 제주도 시골에서 사시면서 농사를 짓고 계십니다. 연세는 81세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젊은 목사님이 부임해 오셔서 성경을 읽으라고 강조했습니다. 그 말씀에 따라 저의 어머님이 나도 금년에 신, 구약 성경을 1독 하겠다고 다짐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어머니는 65세에 예수를 믿었으며 66세쯤 되어서 찬송가를 부르시면서 한글을 배우셨으며 70세에 겨우 한글을 완전히 깨우치셨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드시니 눈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돋보기 안경을 쓰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는데 참으로 어렵게 봅니다. 그런데 그 노인이 성경을 읽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가끔 제주도에 내려가서 보면 돋보기 안경 너머로 성경을 읽고 계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성경을 다 읽어야 하는데 아직도 많이 남았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그 해에 성경을 다 읽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어머니 성경을 읽으면서 이해가 됩니까?” 어머니가 대답하시기를 “그래도 아는 것도 있더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읽는 것은, 작정하고 성경을 읽는 가운데 자신의 아픈 머리가 조금 괜찮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것들이 다 응답이 되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평소에는 몰랐는데 말씀을 읽는 가운데 아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성경을 읽고 계십니다.
말씀을 강조하면 말씀 속에 주님이 오셔서 성도들이 새롭게 변화되고 교회도 새롭게 되며 자신도 새롭게 됩니다. 그리하여 한국 교회에, 나아가서 전 세계를 향하여 그리스도의 사역을 능력있게 감당하는 힘있는 교역자들이 될 줄로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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